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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시106: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할렐루야 - 본 시편은 그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으므로 소위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리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 곧 111-113편, 117편, 135편, 146-150편들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하겠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렘 33:10, 11), 그외의 여러 곳에서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예배 의식적 문구이다(107:1; 118:1; 136:1;수 3:11 등). 한편, 대상 16:34이 본 구절을 인용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타당성은 희박하다.
그는 선하시며 - '선하시며'의 원어는 '토브'(*)인데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하나님이 정하신 실제적, 도덕적 혹은 신앙적 기준에 일치하는 대상에게 적용된다(Hempel). 뿐만 아니라 총체적 의미의 하나님의 품성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관심과 관여를 암시한다.
성 경: [시106: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뉘 능히...전파하며(*, 미예말렐) - 직역하며 '누가...을 말하겠는가?'이다. 이 수사학적 의문은 아무도 여호와를 적절히 찬양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동일한 의문법이 창 21:7; 욥 8:2; 33:3 등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것을 여호와께 대한 찬양을 아무도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역으로 그만큼 하나님은 큰 찬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의 암시로 해석해야 한다.
능하신 사적(*, 게부로트) - 단수형은 '게부라'(*)로서 여호와의 능력(21:13; 54:1; 65:6) 혹은 인간이나(잠 8:14) 짐승들(147:10; 욥39:19)의 힘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하나님의 강한 역사, 특히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의미한다(20:6; 71:16; 145:4, 12; 150:2).
영예 - 하나님이 가시화하신 그래서 인간들의 찬양이 요구되는 그의 모든 영광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6: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공의를 지키는 자들(*, 쉬므레이 미쉬파트) - 문자적인 의미는 '정의(공정)를 수호하는 자'이다. 말하자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본받아 범사에 공의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자들을 가리킨다(15:2). 여호와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공의를 지키도록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15:1-5; 99:4; 사 11:3-5; 33:15-17, VanGemeren).
복이 있도다(*, 아쉬레) - 이것은 주로 한 인간이나 단체의 바른 행실을 치하할 때, 혹은 그것을 장려할 목적으로 권고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그 사용 목적이 다르다. 기자는 의로움의 치하나 단순한 권고를 위하여 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선하심이 구체적으로 현시(顯示)되었음을 먼저 인정한 후(1, 2절), 그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백성들이 누릴 특권을 구하기에(4절 이하) 앞서 그 같은 특권을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은 선민(選民)으로서 올바른 행위를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역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본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6: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 이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공동체를 위하여 행하셨던 역사를 목도한 경험을 묵상하고 참행복과 평안은 참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기자가 외치는 일종의 경건한 절규이다. '권고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visit, KJV). 이는 곧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임재를 바라는 말인 것이다. 한편, 본절과 5절은 아주 독특하게 '테카'(*)라는 동일 접미사로 끝나고 있다.
성 경: [시106: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면 자신도 택하신 자가 누리는 동일한 은총과 행복을 소유하고 기뻐하겠다는 뜻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행복과 형통을 사모하는 마음은 참경건한 자만이 갖는 특성이다.
주의 나라(*, 고예카) - 원형은 '고이'(*)이다. 복수형인'고임'(*)으로 쓰이면 대체로 '이방 나라들'을 뜻하는 본 용어는, 단수형으로 사용되면 때때로 이스라엘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있다. '고이'가 이스라엘 혹은 유다에 적용되면 그 경우에는 반드시 그 민족의 죄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Oesterley),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단적인 예로서, 출 19:6 그리고 본절 같은 경우, '고이'는 이스라엘의 죄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레히트할렐임 나할라테카) - 이는 '당신의 기업으로 자랑하게 하소서'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고 구원 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광에 자신도 참예할 수 있다는것이다. 여기서 '기업'으로 번역된 '나할라테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말하자면 기자는 다른 영예, 영광, 구별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영예, 영광, 구별됨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부귀, 영화 따위의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광'을 기자는 갈망하고 있다.
성 경: [시106: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 여기서 '열조'란 '애굽에서 살던 조상들'(7절)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던 조상들'까지도 의미한다(34-36절). 그러나 넓게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 기자는 자기와 동(同)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 조상들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범죄하여'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 나타나는 세 동사를 비롯한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왕상 8:47의 솔로몬의 기도의 일부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여기서 '지었나이다'로 번역된 '히르솨누'(*)가 대체로 후대 문서, 즉 포로 후 시대 문서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포로 후 시대로 본다.
성 경: [시106: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아보테누 베미츠라임)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뒤에 나오는 문장과 별도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문상 '베미츠라임' 뒤에 아래 위로 내려쳐진 선이 있는데 이 선 앞에 있는 단어는 뒤에 이어지는 문장 전체에 영향력을 미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미츠라임'(*)은 본절 문장 전체와 연관이 있다. 말하자면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한 것뿐 아니라 많은 인자를 그 조상들이 기억 못한 것은 '베미츠라임'(*) 곧 애굽에서의 일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사'는 애굽에서 일어났었던 하나님의 기사를 말하는데 그 기사의 발생으로 인한 충격 및 감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 감격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마음에서 곧 사라져버렸다. 그 감격은 그들이 홍해 바닷가에 섰을 때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터뜨렸다(출 14:10-13). 이것은 기자가 고백하는 첫번째 죄악의 내용이다.
성 경: [시106: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자기 이름을 위하여 - 이는 '자기 품성에 걸맞게' 혹은 '그의 명성(평판)을 위하여'(for his name's sake, KJV, RSV, 25:11; 31:3; 사 48:9; 렘 14:7)로 번역할 수도 있다. 출 14:18은 하나님이 쫓아오는 바로 군병들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신 것은 애굽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함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에 자신의 엄위로우심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성 경: [시106: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홍해를 꾸짖으시니 - 여기 '꾸짖으시니'(*, 이그아르)는 잘못된 짓을한 사람에게 화내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가로막았던 홍해를 하나님이 가르신 사실을 마치 말귀를 알아듣는 대상에게 호통치시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광야를 지남 같게 - 여기서 '광야'(*, 미드바르)는 모래로 된 황무지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여기서는 풀이 가득한 초지를 암시한다.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바는 목자가 길이 잘 나있는 목초지로 그의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홍해를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이다(나 1:4).
성 경: [시106:1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구속하셨고(*, 가알) - 상반절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동사로 '야솨'(*)가 쓰였지만, 하반절에서는 이처럼 '가알'이 쓰이고 있다. '야솨'는 일반적인 의미의 구원 사역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반면 '가알'은 일반적으로 피의 복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에 사용된다. 즉, 어떤 대가가 지불되는 구원 사역을 뜻할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애굽 군사들의 피값(수장된 것을 가리킴)으로 이스라엘을 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구원했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본 용어가 사용되었다.
성 경: [시106:1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 기자는 여기서 바로의 군대가 철저히 잔멸당한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주도적이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부가시킴과 아울러 본절의 전후에서 언급되는 바 이스라엘의 완악성과 불순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Alexander).
성 경: [시106:1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저희가...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 분명히 출 14:31; 15:1에 대한 언급이다."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기서 이스라엘이 드러낸 신앙과 그들이 부른 노래는 뿌리깊은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온 찬양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구원의 섭리에 따라 어떤 이적적 현상이 초래되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이슬과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어떤 설교가는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다 : '이스라엘의 찬양과 이스라엘의 범죄 사이는 오십 보 백 보이다'(Spurgeon). 이스라엘의 신앙과 찬양에 대한 이러한 판단의 진실성은 문맥이 증명한다.
성 경: [시106:1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미하루 솨크후마아사) -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은 서둘렀다. 그들은 그의 행사들을 잊었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과 홍해에서 경험하였던 여호와의 기적적 구원 사역을 너무 빨리 망각하였던 것을 고발하는 말이다. 이와같이 패역된 망각은 음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터져 나왔던 그들의 불평 기사를 통해 처음 나타난다(출 15:22-24; 17:2,3). 본절로부터 33절까지에는 광야에서 저질렀던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고백이 실려있다.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인내의 연습을 도모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반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목겨하고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식대로 그의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것을 기다리고 신뢰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망각의 병폐, 인내하지 못함에 대해 신명기 기자도 이미 암시한 바 있다(신 4:9, 23; 6:12; 9:7).
성 경: [시106:1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욕심을 크게 발하며(*, 이트아우 타아와) - 직역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욕망을 품었고'이다. 이는 만나를 먹은 후에 이스라엘이 다른 종류의 음식을 갈망했던 것을 가리킨다 :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민11:4). 이 대목 중에 이스라엘이 고기를 먹고 싶어했던 욕망 자체를 죄악으로 단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광야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문제는 섞여 사는 이방인들에 의해 야기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 이스라엘 내에 급속히 확산되어갔다는 점이다. 그 불신은 의혹을 가져왔고 결국에는 배반을 낳았다.
성 경: [시106:1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 요구한 것을 주셨다는 것은 상당한 양의 메추라기를 공급하셨던 것을 가리킨다(민 11:31, 32). 한편'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의 해석 관건은 '파리'인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라존'(*)으로 '야위게 하다', '황폐해지다' 등을 뜻하는 '라자'(*)에서 온 명사이다. 본문의 핵심은, 그들의 영혼이 황폐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메추라기를 원했던 그 욕망이 그들의 영혼을 황폐케 하고 야위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과 식욕의 만족만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고 골몰할 때 인간의 영혼은 항상 공허해지고 말라버리기 마련이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일시적인 성공과 번영 따위에만 몰두할 때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잊기 쉽다. 즉, 영적 축복과 특권의 가치를 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로 하는 필수품을 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도외시한 채 육적 필요만 구한다면 그는 결국 영적 패망을 보고 말 것이다.
성 경: [시106:1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여호와의 성도 아론(*, 아하론 케도쉬 예화) - 직역하면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이다. 아론이 이렇게 불리웠던 것은 그의 제사장직때문이었다. 레위 족속들이 이렇게 불리웠고(대하 35:3), 엘리사가 이렇게 불리웠고(왕하 4:9), 나실인 역시 이렇게 불리웠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드려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론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분적 특권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는데 이 배타적인 특권이 고라와 그의 무리들의 공격을 낳았다. 그들은 온 회중이 '거룩하다'는 기치를 들고 아론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었다(민 16:3, 5, 7).
성 경: [시106:1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 거룩하다는 기치를 들고 아론의 독보적 대제사장직에 항거했던 자들은 고라와 다른 레위인들 그리고 르우벤 족속이었던 다단과 아비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 기자는 다단과 아비람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고라 족속은 성전 성가대를 이루는 족속으로 유명하였는데 성가대에 관심이 많았던 본 시편 기자가 그 족속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생략했다고 주장한다(Rowley, Anderson).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에 대한 항거로 죽은 자들의 명단에 고라 자손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 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 11). 그리고 고라를 제외한 채 다단과 아비람만이 항거의 주역인양 묘사하고 있다 :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단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민 16:27).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비록 그 이름이 항거자의 명단에 들어가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고라는 항거의 실세(實勢)가 아니였으며 따라서 본 시편 기자도 그를 제외한 다단과 아비람만을 적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라는 그 반역 음모에 가담한 대가로 죽었다. 성경은 그것을 밝히 말한다.
성 경: [시106:1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 바로 앞절의 징벌과는 또 다른 징벌을 가리킨다. 이 징벌은 회중 총회의 뽑힘을 받은 250인이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다가 위에서 떨어진 불로 몰살했던 것을 말한다(민 16:2, 35).
악인 - 민 16:26의 표현을 그대로 따왔다 :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성 경: [시106:1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범죄를 말한다. '호렙'이란 호칭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아 본 기자는 이스라엘의 송아지 숭배 사건을 그리고 있는 출 32장을 인용 묘사하고 있다기보다는 모세가 특히 '호렙'이란 지명을 들먹이며 이스라엘에게 연설하였던 신 9:8-12을 인용 묘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호렙'이란 지명은 신명기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름이다(신 1:2, 6, 19; 4:10, 15; 5:2;9:8; 18:16 등).
성 경: [시106:2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자기 영광 -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영광'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여호와(3:3) 곧 그들 가운데 명백히 제시했었던 하나님 자신의 현시를 가리킨다. 본절의 가장 근접한 평행구로서 렘 2:11이 있다 :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 여기서 기자가 '풀 먹는'이란 구절을 첨가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 형상 숭배의 우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도움을 필요치 않으시고 도리어 모든 필요 공급의 근원이 되시는 자족적(自足的) 존재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타인으로부터 필요를 공급받되 공급이 끊어지면 곧 죽고 말 생물을 숭배하고 의존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비난을 받았던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만들기는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분명히 그들은 '출애굽을 이룬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송아지를 만들었다(출 32:4). 즉, 생각 속의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형상화한 까닭에 그들의 죄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예배할 목적으로 우상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하셨다(출 20:4, 5).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크게 초월하는 분이시다. 인간은 그분을 그려낼 수 없다. 만일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동물, 무생물 따위의 모습을 그리면서(혹은 빚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인간 세계를 넘어계시는 분을 인간 세계의 그 무엇으로 축소, 전락시킨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존적 실체인 송아지로 전락시킨 죄를 범한 것이다.
성 경: [시106:2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경고를 이스라엘이 어겼던 것을 가리킨다 :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2). 여기서 '구원자'(*, 모쉬아)는 신명기 저자와 이사야서 저자가 여호와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다(사 43:3, 11; 45:15,21; 49:26).
성 경: [시106:2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기사...놀랄 일 - 각각의 원어는 '니플라오트'(*), '노라오트'(*)이다. 이 둘은 동의어이며 함 땅에서 있었던 재앙들과 홍해에서의 구원 역사를 각각 가리킨다. '함 땅'을 '함의 장막'으로 지칭한 경우도 있다(78:51).
성 경: [시106:2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하셨으나(*, 요메르) - 일반적으로 '말하였다'로 번역되나 본 용어가 나오는 배경 기사가 실린 신 9:13, 14을 고려하면 '결심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반역의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시키려고 하셨다(신 9:25). 그러나 모세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의 변경이라는 각도에서 조명하면 안되고, 단지 이스라엘 반역의 극심함을 지적하는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렬된 중에서(*, 바페레츠) - 문자적인 뜻은 '벌어진 틈 사이에서'이다. 모세의 중보 기도는 요새 성벽의 갈라진 틈을 그 몸으로 막고 있는 용감한 지도자의 행위에 비유되고 있다. 유사 비유가 겔 22:30에 나온다 :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성 경: [시106:2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낙토 -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유사 구절로는 렘 3:19; 슥 7:14등이 있는데 개역 성경 슥 7:14의 경우 '아름다운 땅'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탐꾼들의 과장된 보고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인간의 의견을 더 신뢰한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시켰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애굽으로의 귀환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민 14:4).
성 경: [시106:2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원망하며 - 신 1:27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일종의 원망이 아니라 출애굽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불신앙적 시각의 표출이다.
여호와의 말씀 - 그 내용은 신 1:21에 요약되어 있다 :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성 경: [시106:2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저가 맹세하기를(*, 이사 야도 라헴) - 직역하면 '그가 그들에게 그의 손을 쳐들었다'이다. 이는 언약 맹세의 일반적인 제스처이다(창 14:22;민 14:30; 겔 20:23). 단 12:7의 경우 양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다는 식으로, 계10:5, 6의 경우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06:2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 이것은 열방에게로 이스라엘을 흩으실 것을 암시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불신앙의 사건을 직접 기록하고 있는 민 14장엔 나오지 않는다. 이말씀은 레 26장, 신 28장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포로 운명은 이스라엘 자체가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훨씬 전인 광야 시대 때 이미 예언되었다. 포로 시대이후 선지자인 에스겔은 그의 선지서 20:23에서 본절의 예언을 회상하고 있다. "또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하였었나니."
성 경: [시106:2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이차메두 레바알 페오르)- 직역하면 '그들이 바알브올의 멍에를 메었다'이다. 이것은 민 25장에 기록된 범죄를 가리킨다. 바알브올 숭배 예식에 동반되었던 음란 행위를 언급하는 대목인 민25:3, 5에서 본문에 사용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멍에를 메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음란 행위에 가담하였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겠다. 한편 70인역(LXX)은 본 구절을 '그들이 바알브올의 회에 가입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 이것은 일차적으로 '산 하나님'에 대비되는 죽은 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는 제사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본 행위는 신과 예배자의 상호 유대 관계 지속을 위해 행해졌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죽은 실체인 우상의 재물을 먹음에 있어서 그 예배자들도 그 행위를 통하여 그 죽은 신(神)과의 교제를 원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구절에서, 죽은 영과의 교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강신술적(降神術的) 예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신 18:11; 사 8:19). 이스라엘의 죄는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는 데에 있지 않고 생명이 없는 물체인 우상을 살아있는, 그래서 뭔가 교훈을 전해주는 실체로 의식했다는 데에 있다. 바울도 문제가 되는 것은 희생 제사에 드린 예물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자의 양심이라고 밝히고 있다(고전 10:28, 29).
성 경: [시106:2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재앙 - 본 용어는 대체로 신적(神的)징벌, 좀더 자세하게는 질병을 뜻할 때 사용되지만 해당 사건의 본문인 민 25:8, 9, 18을 고려할 때 비느하스 등에 의해 수행되었던 '살륙'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유행하였도다(*, 티프라츠) - 직역하면 '깨뜨렸도다', 혹은 '갈라진 틈을 만들었도다'이다. 이것은 살륙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됨으로써 전체 공동체 구성원에 큰 공백이 생겼던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성 경: [시106:3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 비느하스의 행위를 의로운 행위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상급을 내렸음을 말한다. 의에 대한 상급이란 그의 가계를 통한 영원한 제사장직의 계승이었다(민 25:12, 13).
성 경: [시106:3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 이는 광야 여정 사십 년째 되던 때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거역했던 사건의 핵심을 짚어주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모세가 약속의 땅 입성(入城)을 거절당하였던 이유를 해당 사건의 기사 대목에서보다 더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사건 당시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침으로써 그의 인내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이같이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 입성을 막았던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된 궁극적 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분노케 한 것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세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이었다. 요컨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민 20:2-13).
성 경: [시106:3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1) '그 심령'을 모세의 심령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은 모세의 영(마음)을 자극하였다'로 번역된다. 이 해석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거역하다'로 번역된 '힘루'(*)를 '자극하다'로 번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2) 본문을 하나님(그의 영)께 대한 반역으로 이해한다. 유사 구절로는 사 63:10이 있다.(3) (2)의 해석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동사의 주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고 본다. 물론 주어, 곧 주의 영을 근심케 한 주인공을 모세와 아론으로 볼 수 있다(민 20:24; 27:14).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백성들을 주어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성 경: [시106:3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실행하도록 명령받은 사실을 이행치 않은 죄를 지적하고 있다. 곧 가나안 민족들을 뿌리 채 뽑지 않은 죄(삿 1:21, 27-35), 그들의 우상 숭배를 용인한 죄(살 3:7) 등이 그것이다.
성 경: [시106:3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열방과 섞여서 - 가나안의 이방 족속과 결혼하고 그들의 타락한 악습을 좇아 행한 것을 말한다.
그 행위를 배우며 - 가나안의 생활방식 및 종교 양식을 수용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6:3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올무가 되었도다 - 이것은 출 23:33; 34:12; 신 7:16 등에서 계속되었던 경고를 무시함으로 이방의 혐오스러운 것, 곧 몰렉 숭배때에 행해졌던 인신(人身)제사 따위가 이스라엘 가운데 행해졌던 것을 특별히 암시한다.
성 경: [시106:3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사신(*, 쉐딤) -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이 '마귀'(demons)로 번역한이후 대체로 '마귀'(혹은 악마)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는 본 용어는 복수형으로만 나오며, 이곳과 신 32:17에서 '우상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타락한 천사인 사단의 세력, 곧 귀신들로 본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고전 10:20).
성 경: [시106:3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 범죄하지 않은 자, 피를 흘릴 만한 일을 행하지 않은 자의 피를 흘린 것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우상 숭배의 악습을 좇아 결백한 자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그 같은 제사를 바쳤던 것은 결백한 자의 피가 자신들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까지 우상에게 바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레 18:21;신 12:31; 왕하 16:3; 21:6; 23:10; 렘 7:31; 겔 16:20, 21). 정해진 율례를 범한자를 위하여서는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원칙은 희생 제물로 양을 바치던 제사의 원칙과 흡사하다. 이 원칙을 따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양처럼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러나 가나안에 두루 퍼져 있었던 인신 제사는 모세 율법에 제시된 희생 제사와근본적으로 다르다. 인신 제사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제사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또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여 희생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존재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가나안에서 비롯된 인신 제사는 왕국 시대 이후에 살인을 합법화하는 제사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왕하 21:16; 사 1:15; 렘 22:3).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 '더러웠도다'의 '테헤나프'(*)는 어떤 원인으로 되어진 결과가 극악의 상태임을 암시하는 강동사로 '크게 오염되었도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동사는 민 35:33에서 따온 것이며, 사 24:5에서도 볼 수 있다. 인신제사로 말미암아 그 땅에 거주하는 거민들뿐 아니라 토양 자체도 심히 오염되고 저주를 받았다.
성 경: [시106:3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이즈누 베마알레헴)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행위로 그들은 매춘부가 되었다'이다. 여기서 '이즈누'의 원형 '자나'(*)는 일반적인 혹은 예식적인 매춘 행위에 가담하는 여인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매춘 음란 행위는 고대 근동의 셈족들에게 잘 알려진 생활이자 종교의식의 일부였다(Anderson). '매춘'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 왜곡을 의미하는 비유의 소재로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음녀와 같은 생활하기를 택하였지만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결혼 관계로 종종 묘사된다(사1:21; 50:1; 57:7-13; 호 2, 3장). 한편 하나님이 음란 행위를 엄하게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매춘이 이스라엘 중에 묵시적으로 허용된 듯하지만(창 38:15,16; 레 19:29; 수 2:1; 왕상 3:16; 암 7:17), 일단 결혼한 여자가 혼외 정사를 갖는 일은 분명히 죄로 간주되었다.
성 경: [시106:4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이하르 아프 예화 베아모) - 직역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그의 백성을 향하여 불탔으며'이다. 어떤 사람이 정열로 타올랐다고 묘사하듯이 기자는 하나님께서 불과 같은 진노를 품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나타난다(79:5; 89:46; 에 1:12; 렘 4:4; 애 2:3). 불타는 듯한 진노로 범죄한 그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읽을 수있다.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 '미워하사'로 번역된 '예타에브'(*)의 정확한 뜻은 '싫어하다'이다. 본 구절의 의미는 범죄한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마치 싫어하는 물건을 대하듯 하셨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물건을 멀리 내던지듯이 팽개침으로써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을 받게 하셨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이 같은 묘사가 너무 인간적이고 유치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맞서고 있다. '본 기자 보다 더 솔직하고 정직한 작가가 있겠는가? 그의 표현속에는 그 민족을 옹호하려는 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범죄를 숨기려는 기색도 없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 묘사에 있어서 부드럽게 해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혐오스러웠다. 그들은 하나님의 싫어함을 받아 마땅하였다. 그들은 감사하지도 않았고 악하고 반역적이었다. 경건한 주석가들이라면 기자가 기술한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Barnes).
성 경: [시106:4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열방의 손에 -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고 우상을 섬겼던 이방 압제자들, 예를 들면 가나안, 모압, 미디안, 블레셋과 같은 나라들의 통제 속에 이스라엘을 두셨던 것을 가리킨다. 기자는 지금 가깝게는 사사 시대를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왕국을 형성한 후 포로로 잡혀가기까지의 역사에 관한 회상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성 경: [시106:4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복종케 되었도다 - 사실 이 같은 사항은 한때 이방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취한 행위였었다 :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삿 3:30),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신지라'(삿 4:23).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살 8:28),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삿 11: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와 인신 제사로 그 땅을 더럽힌 후 그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복종케 되었다는 말은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이다. 이스라엘은 비참하게도 하나님께만 숙여 절하여야 할 머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을 향하여 절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성 경: [시106:4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끝없는 반역, 징벌, 회개 그리고 구원의 연속이었다. 반역-징벌-회개-구원의 사이클은 옷니엘-에훗-삼갈-드보라 등으로 이어지는 사사 시대 초기 역사 속에서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삿 1-5장).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이 만든 계획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목적대로 따를 것을 계속 권유하다가 듣지 아니하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81:11, 12).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큰 고통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당한 자이다(롬 1:24, 26, 28).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암쿠) - 이는 '가난해지다', '약해지다', '낮아지다' 등을 뜻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본문 외에 두 군데밖에 나오지 않는데 각각 '낮아져서'(욥 24:24). '퇴락하고'(전 10:18)로 번역되었다. 본 문맥에서는 범죄로 인한 징벌로 이스라엘의 국력(國力)이 고갈되고 쇠약해졌던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6:4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 '권고하시며'(*, 야레)의 문자적인 뜻은 '머리를 돌려 주시하다', '보다'등이다. 여기서 기자는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통 중에 부르짖는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에게 불 같은 분노만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그들을 주시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신다. '부르짖음'(*, 리나탐)은 주로 '기쁨의 노래'를 뜻할 때 사용되나 여기서와 같이 고통의 울부짖음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왕상 8:28).
성 경: [시106:4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시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단순한 인간적인 감상, 연민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비록 그 백성은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 여기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뜻을 돌이키사 - 마치 그의 마음이 바뀌기나 한 듯이,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후회하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위에 내리려던 징벌을 중단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의 가변성(可變性)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후회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민 23:19). 기자가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하나님의 인애가 큰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그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분의 속성, 계획이 변경된 듯 보일 정도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한 인애(仁愛)를 나타내신다. 많은 역본들이 이 같은 이유때문에 '뜻을 돌이키사' 대신 '자비를 베푸사'로 번역하고 있다(repented, KJV; relented, NIV, RSV, LB; 출 32:14; 렘 18:8; 욘 3:10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시106:4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은 이방 지도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편케 하고 결국은 놓임을 얻게 하셨다는 뜻이다. 왕상 8:50; 단 1:9 등을 보면 이방 나라가 포로된 이스라엘을 관대하게 대하는 표현을 읽을 수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같은 마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었다.
성 경: [시106:4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구원에 대한 간구와 찬양]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진술하여 왔던, 이미 그의 백성을 향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열방 중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모아 다시 한 국가를 이루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언어들, 특히 본 구절의 용어들은 본 시편이 포로 시대 중에 기록되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있다. 기자는 아직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한편, 본절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 대상 16:35에도 언급되어 있다.그런데 대상 16:35은 언약궤를 다윗 성에 안치하고 난 후에 지은 다윗의 찬양시의 일부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편 구절에 익숙했던 역대기 기자의 문체가 대상16:35에 반영되었을 것이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 여기서는 동사 '히쉬타베아흐'(*)는, 본 시편에서는 유일하게 상호 재귀형(힛파엘)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본문의 정확한 원문 직역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서로서로 찬양하게 하소서'가 되겠다. 기자는 흩어졌던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있다.
성 경: [시106:4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구원에 대한 간구와 찬양]
이 마지막 절은 본 시편이 작성된후 시편 제 4권의 종결을 표시하기 위하여 첨가한 송영과 같은 것이다. 본절 첫행은 약간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제 2권을 마감하는 구절72:19의 첫행과 거의 유사하다. 본절을 인용하고 있는 역대기 기자는 미래형의 소원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를 역사적 완료형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로 바꾸고 있다(대상 16:36). 역대기 기자는 자신의 시적인 글에 본 구절을 포함시켜 놓고 있는데 이 사실은 이미 그 시대에도 시편이 현재와 같은 형태의 여러 권의 책들로 구분되었고 송영은 본 시편의 전체를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부분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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