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해표국
아침이 오자 금릉은 마치 밤새도록 껴안고 잤던 화장 짙은 기녀가 부스스한 얼굴로 깨어나듯이 눈을 떴다.
금릉이 먼저 눈을 뜨고, 금릉의 사람들은 금릉보다 늦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호는 보통의 금릉 사람들보다도 훨씬 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검호의 늦잠 자는 버릇을 익히 알고 있는 사형제들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래 잤다.
처음엔 화가 났던 사형제들이 혹시 그가 죽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이불을 들춰볼 정도로 그는 죽은 듯이 잤다. 그러나 이불 아래에서 풍겨 나온 것은 시신의 냄새가 아니라 코를 찌르는 술 냄새였다.
"술? 이사형이? 술?"
검매가 코웃음을 치고 혀를 찼다. 코웃음을 친 것은 호탕하게 술을 마시는 일이 검호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혀를 찬 것은 어제 저녁을 먹을 때만 해도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던 검호가 아침에 이렇듯 고주망태가 되어 있다는 것은 사형제들 몰래 한 밤중에 나들이를 한 것임에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검호가 나들이를 떠나는 것을 이미 눈으로 보았었던 검학은, 그의 나들이 목적이 다름 아닌 술이었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 대체 검호는 왜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저렇게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을까?
이유를 댈 수 있는 것은 술을 마신 그 입뿐일 텐데 그 입이 저렇게 쿨쿨 잠들어있으니 깨어난 다음에나 물어볼 일이었다. 술 마시고 뻗은 이사형은 검매도 깨울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그가 자다 지쳐서 잠에서 깨도록 내버려둔 채, 나머지 세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늦은 아침이나마 챙겨 먹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말을 잃은 검란은 침상 위에 꼼짝 않고 누운 채로 검호의 옆방에 남아있었다.
세 사람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을 닦던 점소이가 씨익 웃었다.
"그 분은 아주 곤드레가 되셨습죠?"
검학이 눈살을 찌푸리며 점소이에게 물었다.
"우리 사형이 어제 여기서 술을 마셨소?"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드셨습죠. 그분은 참 호인(好人)이시더군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서슴없이 한 자리에 앉으시고 그 사람들의 술값까지 계산을 하셨습니다."
검매와 검웅과 검학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여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한데 술을? 그것도 남의 술값까지?
검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리가 다 나도록 이를 갈았다.
"저 웬수같은 사람이 대사형의 흉내를 내보려고 작심을 했군."
대사형은 우연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거경방의 부방주를 친구로 사귀었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일 검호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거경방의 졸개라도 친구로 사귀었다고 자랑을 한다면 모두가 다 거짓말이라고 확신을 할 것이다.
점소이는 세 사람에게 아침으로 먹을 죽과 야채 절임을 가져다주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주시겠지요?"
그의 태도는 아주 싹싹해서,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어제만 해도 그들을 촌뜨기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듯 하던 점소이가 아니었던가?
세 사람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점소이는 손을 비비며 물었다.
"사해표국을 찾아 가신다면서요?"
세 사람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점소이는 어떻게든 호감을 사려고 안간힘을 쓰며 다시 물었다.
"부자라고 소문난 백리 국주님이 사숙 되신다면서요?"
검학이 점소이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점소이는 붙임성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점소이의 대답은 검학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과 같았다.
"이 근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지요. 술을 드시던 분이 밤새 그걸 아주 큰 소리로 외치셨거든요!"
검학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보았다. 검호는 소문을 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이 백리원을 찾아 장백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소문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학은 검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비단 검호뿐만이 아니라 식음을 전폐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검란의 생각도, 멀리 떠나버린 검표의 생각도, 한 자리에 앉아 죽을 먹고 있는 검매와 검웅의 생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불현듯 검호를 포함한 모든 사형제들이 아주 머나먼 타인처럼 여겨졌다.
검호는 아주 늦게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다음에도 한참을 뒹굴거렸다. 뒹굴거리다 일어난 다음에는 또 밥을 먹는다고 늦장을 피웠다.
결국, 그들 일행이 객잔을 떠나 점소이가 가르쳐 준 사해표국으로 출발한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문등표국의 정문보다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큰 사해표국의 대문을 들어서면서 검학은 피식 웃었다.
비록 그들은 백리사숙을 밤에 방문하게 되었지만, 낮에 방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중정(中庭)과 후원을 거쳐 백리사숙의 처소에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선발로 달려나와 사제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백리원을 만나게 되었다.
백리원은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장백산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더 늙어 보였다. 뺨은 주먹에 맞아 뼈가 무너진 것처럼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고 몸도 전보다 훨씬 말라 보였다. 숫제 그는 얼굴의 윤곽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사질들이 머나먼 길을 걸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그는 손수 사질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그는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냐?"
사형제들은 서로 얼굴만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백리원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거경방의 무리들과 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하더니……."
백리원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 수 없는 곳에 우리들은 모두 누워있었다. 장백산은 깊고도 험해서 며칠이나 그 안에서 헤매 다니다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갔더니 절은 텅 비었고 너희들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더구나. 이 사숙도 몸이 많이 상해서 더 이상 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산을 내려와 급히 금릉으로 돌아왔단다. 돌아온지 채 며칠 되지도 않았어."
백리원은 검학을 향해 다시 한 번 물었다. 검호를 무시하는 것은 여전한 듯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너희들은 모두 어디에 갔었던 거냐?"
검학은 느릿느릿 대답했다.
"저희도 사숙님과 똑같이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나보니 사숙님도 거경방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오직 사부님만이 치명상을 입으시고 남아 계시더군요."
백리원의 얼굴이 굳었다.
"의형께서? 그럼 의형은?"
"돌아가셨습니다."
백리원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들지 않았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 되었구나, 그리 되었구나. 일세를 풍미하던 호걸이던 형님이 그렇게 돌아가셨구나……!"
백리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통해 보였다.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질들에게 등을 보이고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의형이 돌아가셨으니 남은 너희들은 내 아들이고 딸이나 마찬가지다. 의형의 복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다행히 이 사숙의 집은 좁지 않으니 너희가 마음껏 머무르면서 우리 앞날에 대해 차차 상의해보자꾸나."
그의 목소리는 비분에 차 있으면서도 또한 인자했다. 사부를 잃은 이래로 거리를 떠도는 고아와 같이 마음이 불안하던 사형제들에게 백리원의 말 한 마디는 사뭇 감동적인 것이었다.
"앞으로 칠 주야 동안은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형님의 상을 치르겠다. 그리고 그 뒤에 너희들이 내 집에 온 것을 축하하는 연을 베풀 테니, 그때까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도록 해라. 우선 다들 가서 쉬어라. 내 너희들에게 방을 하나씩 주마."
백리원을 그의 방에 남겨두고, 사해표국의 일꾼을 따라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어 가면서 검학이 중얼거렸다.
"사숙께선 무척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검호뿐이었다. 검호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야. 서둘러 내보내시는 것을 보니."
"그래."
검학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 중에는 눈물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찡그린 표정이나 통쾌한 웃음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백리원은? 그가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과연 어떤 얼굴일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