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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팽가 일행은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鄭州)를 지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여행에 지칠 법도 하건만, 무이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팽만우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 완고한 은색 수염을 가진 노가주를 즐겁게 해주었다.
무이가 팽만우의 신경을 모두 가져가준 덕분에 팽주형과 일행들은 한결 즐겁게 여정을 보낼 수 있었다.
팽관수는 답답한 마차에서 나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버지인 팽주형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공의 형(形)을 이해하려면 그 속에 담긴 의(意)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무공을 창안한 사람의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아무리 무공이 대를 이어 발전을 거듭한다 할지라도 무공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무공의 본질을 알 수 없다.”
팽관수와 팽주형은 나란히 말을 몰며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는 팽가의 식구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팽주형은 웃음을 지으며 가문의 무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비록, 자신의 아버지인 팽만우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나 이렇게 시간이 있을 때 하나라도 더 가르쳐 가문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마차 안에서 팽만우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무공을 익히는 마음 자세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결국 무공의 본질은 적을 상하게 하는 것, 도를 뽑았으면 반드시 적을 죽인다는 각오를 하거라.
팽가의 도는 본시 용맹함과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것.....
하지만 세대를 거치면서 본연의 마음가짐은 사라지고, 단지 형(形)과 의(意)만 남았을 뿐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鬪志)니라.”
팽만우는 무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채 무공의 강론을 했다.
그가 하는 말은 그동안 정리해왔던 그의 무공관에 최근 신항과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까지 가미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누워 있다 무공을 회복한 후 신황과 대결에서 그는 자신이 늙었음을 실감했다. 아무리 무공의 깨달음이 높고 내공이 높아도 젊은 사람만큼 근력이 따라갈 수 없었다.
신황과의 대결도 그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벌써 예전에 지쳤는데, 신황은 무한한 패기와 젊음으로 그를 압박했다.
팽만우는 그런 신황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조금 더 승리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면 싸움의 양상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젊음의 패기를 누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鬪志), 자신이 잃어버린 그 투지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 그가 하는 강론도 그 투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팽가의 식구들은 모두 팽만우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금 패가의 무공은, 팽가가 처음 시작되었을 당시의 순수한 모습을 찾아가는지도 몰랐다. 본래 투사(鬪士)들의 집안이라고까지 불리던 곳이 바로 팽가다.
그만큼 그들의 무공은 순수하고, 격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여러 가지 기법으로 가미되고, 초식들은 점점 세련되어졌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팽가의 무공의 본연의 모습은 희석되어 갔다. 지금 팽만우는 그 점을 되짚고 있었다.
무이는 팽만우의 무릎에 앉아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아직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라거나 이론에 대해서는 이해하기도 힘들거니와, 그리 크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투지라는 측면에서는 팽가의 그 누구도 무이만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부님!’
무이가 알고 있는 최고 강한 사람은 신황이다.
그런 신황이 강호에서 나와 싸우는 곳에는 어김없이 존재했던 이가 바로 무이였다.
때문에 강호에 신황이 싸우는 방식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가 어떻게 손을 쓰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역시 무이였다.
비록 이론으로는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신황의 모습만으로도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지 무이의 성격이 신황과 달라 머릿속에 있는 것을 몸으로 풀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만약 무이가 신황처럼 모진 성격이었다면, 벌써 팽관수를 한두 번 정도는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무이는 그녀의 오빠가 아플까봐 비무를 할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팽관수에게 여러 번 잔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무이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 아픈 것이 싫었으니까.
팽만우의 강론은 계속되었지만 무이는 곧 흥미를 잃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며 스쳐지나가는 낮선 풍경의 연속, 그러나 무이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신황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황과 헤어진 지 불과 한 달여, 하지만 무이에게는 그 기간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제 얼마 있으면 곧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설아두.'
그 생각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무이였다.
팽만우는 일장강론을 모두 마치고 미소를 짓고 있는 무이를 발견했다.
'인석이.....'
팽만우는 무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팽가에 있는 동안에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 이 나이에 이르도록 질투심을 하나 못 버린 것인가?'
팽만우는 무이의 가슴속에 자신보다 신황이란 존재가 더욱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딸을 버림으로 얻은 원죄가 아니겠는가.
팽만우는 미소를 짓고 있는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허한 마음을 달랬다.
"백부가 그리 보고 싶으냐?"
"보고 싶어요. 그런데 할아버지하고 있는 것도 좋아요."
"허허~. 그러냐?"
"네~!"
무이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팽만우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무이는 남들에게 엄해 보이는 팽만우가 자신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깐깐해 보일지 모르지만, 무이에게 있어서만큼은 오직 한 분뿐인 할아버지였다. 그만큼 아낌없이 애정을 주었기에 무이는 팽만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꾸임없는 무이의 말에 다시 팽만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무림맹에 도착하면 다른 세가의 사람들도 많이 올 게다.
특히 황보 세가의 황보 늙은이나 하후 늙은이, 손자 농사를 잘 지었다고 이제까지 그렇게 자랑했지만... 올해는 나에게 안 될 것이다."
"왜요?"
"너하고 관수가 있는 이상 내 무엇이 부럽겠느냐? 너희 둘만 있으면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다."
팽만우가 자신의 가슴을 텅텅 치며 소리쳤다.
강호의 사람들은 대륙십강의 인물하면 그저 근엄할 거라 생각하지만 삼존(三尊)에 속하는 권존(拳尊) 황보숭이나 사제(四帝)의 일인인 벽력대제(霹靂大帝) 하후광,
그리고 철혈도제(鐵血刀帝) 팽만우는 사적으로 모이면 그저 말 많고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팔불출들에 불과했다.
누가 강호에서 그리 명성을 날리고 있는 그들이 말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이제까지 팽만우는 팽관수란 걸출한 손자를 두고도 손녀가 없어 이제까지 항상 그들에게 말로 밀려왔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어림도 없었다. 자신도 이렇게 귀여운 손녀가 생겼으니 큰소리를 칠 수 있게 생겼다.
"껄껄껄! 나중에 그 늙은이들을 만나면 무이 넌 이 할아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어디 글도 제대로 못 읽고, 무공도 제대로 이해 못하면서 코나 찔찔 흘리는 어린 아해들이 똑똑하고 귀여운 내 손녀에게 당할까?
그것들이 무이를 보고 기가 팍 죽을 생각을 하니 벌써 내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크하하핫~!"
팽만우는 무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밖에서 흘러나오는 팽만우의 이야기를 듣던 팽주형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휴~. 무림맹에 도착하면 두 분 숙부님을 뵙겠구나. 하여간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이 자존심 싸움은......"
팽만우, 황보숭, 하후광, 이 세명의 관계는 오직 세 집안의 식구들만 아는 대외비였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 가지고 자존심 싸움을 하는 집안의 어른들이 망신스러워서 자식들이 입단속을 한 결과였다.
때문에 벌써부터 무림맹에 도착해서의 일이 걱정스러워지는 팽주형이었다.
의창의 무림맹은 벌써부터 축제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이미 천하대회의를 위한 대회의장이 새로 세워지고, 축제를 위한 비무대 또한 설치됐다.
무림맹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정말 천하대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무림맹의 정문,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전날 의창에 들어온 무림인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초청장을 보여주며 의연하게 무림맹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유독 거대문파들이 속속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이곳 호북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무당파(武當派)였다.
소림과 함께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며 수많은 검성을 배출해낸 이 시대 최고문파,
평소에는 속세에 그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가지게 하는 그 문파가 오늘 무림맹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수십 명의 도복을 입은 도사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도인이 있었으니, 비쩍 마른 몸에 하얀 도복을 입고 유난히도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고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도인이었다.
수많은 도사들틈에 둘러싸여 있어도 너무나도 눈에 띄는 그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그를 향했다.
그러나 정작 노도인은 그런 군웅들의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옆에 공손히 서있는 도인에게 말을 했다.
"백우야, 풍영이 그 아이도 이곳에 와있다고 하였느냐?"
"예! 사숙님, 전서에 그리 적혀 있었으니 이곳에 있을 겁니다."
백우라 불린 도인은 공손한 자세로 노도인의 말에 대답을 했다.
백우진인(白羽眞人), 백자 항렬의 무당파 장로로 이곳 무림맹의 천하대회의에 온 무당의 제자를 이끌고 있는 실무책임자였다.
그리고 그런 백우진인에게 사숙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는 대무당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적엽진인(赤葉眞人), 마선화 함께 이선(二仙)의 자리를 함께 차지하고 있는 무당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세속에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나 군웅들은 그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적엽진인,
그의 나이가 이미 백수에 가까운데도 백우진인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얼마나 고절한지 알 수 있었다.
무당의 장문인인 백령진인(白令眞人)은 이곳 무림맹에 오지 않았다. 원래 그는 무당이 있는 호북에서 열리는 행사였기에 어떻게든 참석하려 했지만,
그의 사숙인 적엽진인이 나서며 만류를 하는 바람에 이곳에 오지를 못한 것이다.
왜냐고 뭇는 백령진인의 말에 적엽진인은 간단하게 한마디 했다.
"천기(天氣)가 어지럽다. 이럴 때 너까지 무당을 비우게 할 수 없다."
천기를 운운하는데 백령진인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결국 그는 무당에 남고 셋째 사제인 백우진인에게 대신 제자들의 인솔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무당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은 백우진은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본래부터 그리 나서는 성격도 아닌데다 카랑카랑하기로 유명한 그의 사숙을 모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하는 것이다.
한편, 무당의 제자들은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 마냥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제자인 서문수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불듯 훈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까지 삼십 년 이상을 오직 무당에서만 보내고 무당과 주위를 벗어난 적이 이번이 처음이니 오죽 하겠는가.
"대사형, 들어가면 또 삼사형을 볼 수 있겠지요?"
"후후~. 또 그녀석의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보겠구나."
"삼사형은 내려온 지도 꽤 오래됐으니, 구경도 많이 했겠네요?"
서문수에게 말을 거는 무당의 제자는 얼굴에 부럽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대부분의 무당제자들은 하산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초풍영은 세상을 주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여러 달째 말이다.
자신의 숙부를 핑계로 이리도 오래 외유를 한 제자는 무당의 역사상 아마 초풍영이 처음일 것이다.
만약 초풍영의 숙부가 초관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초관염이 많은 영약을 무당에 기부하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문수는 초풍영을 질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초풍영의 숙부인 초관염이 기부한 영약으로 많은 혜택을 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당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적엽진인의 눈은 유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며칠 전의 천기가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천기의 흐트러짐을 보지 않았다면 결코 무당산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 천기는 분명 무언가 커다란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기에 세속에 흥미를 잃은 노검선(老劒仙)이 세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무당의 사람들의 뒤쪽, 무림맹에 들어가기 위해 일단의 상인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장대한 덩치에 망치 평야처럼 드넓은 등판을 가진 남자, 그는 무리를 지어있는 무당파의 인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 바로 무당의 살아있는 전설이란 검선(劒仙)이군.'
굳이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지 적엽진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으니까.
그는 자신의 심장이 더 이상 격렬한 고공을 치지 않게 냉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척이나 노력해야 했다.
"도련님~!"
그의 흥분을 알았는지, 그의 등 뒤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덩치 큰 남자를 불렀다. 그러자 덩치 큰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숙부님."
"이곳은 호굴입니다."
"후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굴에 들어가야지요... 그것을 가리쳐 주신 분은 숙부님이십니다."
나직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그들은 바로 백용후와 그의 숙부인 서종도였다. 마교의 주인인 백용후와 서종도가 무림맹의 정문에 서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아예 자신들의 존재감을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누군가 공손히 말을 건넸다.
"이제 저희 차례이옵니다. 준비하십시오."
말을 건네는 남자는 바로 그들이 들어온 상단의 주인으로 백용후의 부하 중 한 명이었다.
"흠, 다른 이들은?"
"이미 안으로 들어가 계십니다. 이제 교주..... 아니 대공자님만 안으로 들어가시면 완료됩니다."
"그런가!"
백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의 성벽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묘한 감회가 서려 있었다.잠시 성벽을 올려다보던 그는 무림맹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내가 왔다.'
그가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적엽진인에게 백우진인이 이유를 물었다.
'착각인가?'
그러나 적엽진인은 백우진인의 말을 무시한 채 조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순식간에 느껴졌던 강렬한 적의(敵意),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팽팽하게 일어나 아직까지 떨고 있는 그의 신경이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누가 있어 이런 위압감을 줄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주위를 둘러봤으나 이미 그 느낌의 주인은 사라졌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적엽진인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의창을 벗어나는 관도, 신황은 말에서 내려 바닥을 보고 있었다.수백 마리의 말이 지나가면서 바닥에 수많은 말 발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워낙 많은 말이 지나갔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 발자국은 선명했다.
비록 수백 마리의 인마가 은밀히 이동했지만 워낙 인원이 많았기에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의창에서 그들이 빠져나가는 방향을 본 빈민가의 아이들이 그에게 모든 정보를 전하였기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의 싸움인가?"
신황은 말 발자국을 손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간 방향을 알았지만 그들과 신황 사이에는 결코 넘기힘든 벽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천산파의 인물들이 출발한 시간은 새벽, 그리고 지금은 늦은 저녁이다. 한나절의 차이, 그것은 결코 줄이기 쉽지 않은 거리였다.
신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풍영이 말을 끌고 왔다.
"형님, 빨리 출발해야겠습니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 추적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그래!"
신황은 말에 올라탔다.
그들이 간 방향을 확인하자 마음이 절로 급해졌다. 이들은 팽가와 무이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푸르르~!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말은 무척 예민한 동물이다. 겁이 많기에 조그만 기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 신황과 초풍영이 탄 말이 그랬다.
분명 신황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말들이 먼저 기운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형님!'
초풍영은 그런 말들과 신황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표정도 없지만, 눈에 흔한 살기조차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지금의 신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했다.
이제까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내왔던 초풍영은 그런 신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 순간, 누군가 그를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하~앗!"
신황이 말의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질주하는 신황의 뒤로 짙은 어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초풍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사신이 날개깃처럼 보였다.
크르르~!
뒤따라 말을 달리는 초풍영의 귓가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섬뜩하게 바람결에 흩날렸다. 이미 설아는 천산파 무인들의 냄새를 쫓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
신황은 말을 힘껏 내달렸다. 이미 여러 날을 전력으로 질주한 말의 재갈에는 이미 하얀 거품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신황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독려했다.
한계까지 달한 말의 체력, 그에 비례해 천산파와의 거리는 착실히 좁혀지고 있었다.
지금 신황이 말을 달리는 곳은 하남성의 무강(舞鋼)이란 곳으로 근처에 평정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천산파의 흔적은 바로 평정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크르릉~!
이제까지 내내 신황의 품에만 있던 설아가 흥분을 했는지 나직하게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이미 바닥에 남은 흔적은 희미해 거의 없어졌지만, 설아의 놀라운 후각은 천산파의 흔적을 착실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제까지 신황은 헤매는 일없이 천산파의 뒤를 추적할 수 있었다.
크르~!
설아 역시 무이에게 닥친 위험을 아는지 신황을 재촉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신황은 말을 달리는 내내 끊임없이 운기를 했다.
이제까지 한시도 쉬지 않아 몸에 피로가 쌓인 것도 있었지만 몸 한쪽에 제어해놓은 당만천의 극독이 날뛰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훅, 훅!"
초풍영의 숨도 턱 끝에 다다랐다. 말을 타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은 말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된다.
초풍영 역시 당만천의 독에 당했다가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몸에 많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을 달리는 신황을 보니 도저히 엄살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한 무이가 위험하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자신의 조그만 고통을 가지고 쉬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무이를 자신의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했기에.
푸르르~!
때문에 초풍영은 투레질을 하며 힘들어 하는 말을 다독여 질주했다.
번쩍~!
그때였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무언가 빛을 내며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만약 신황과 초풍영이 절정에 달하는 무인이 아니었다면 암습에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암습한 물건을 잡아챘다.
'비도?'
신황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는 물채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초풍영 역시 자신에게 날아온 비도를 한쪽으로 쳐내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그림자들.
푸르르~!
말들이 그들의 살기에 놀라 두레질을 쳤다.
촘촘하면서도 잘 정련된 살기, 그것은 그림자들의 무공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풍영이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무림맹의 개들이냐?"
그러나 초풍영의 말에도 그림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순간 신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크르릉~!
이어 터져 나오는 설아의 울음소리, 설아가 드물게 신황의 품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완전히 그 몸을 드러냈다.
그동안 더욱 커지고 늘씬해진 설아, 그동안 오직 신황의 품속에서 잠을 자며 성장을 한 것이다.
크르르~!
설아가 내뿜는 살기에 신황과 설아가 타고 있는 말이 꼬리를 다리 사이로 감추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황은 설아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어둠에 휩싸인 숲을 한번 쳐다봤다.
마치 숲 전체가 거대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숲이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초풍영이 신황을 보며 말했다.
"진법 같습니다."
촤~아~앙!
순간 신황의 장포가 갑주처럼 날을 세우며 일어섰다.
"가로 막는 자 모두 벨 것이다."
신황이 싸늘히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에는 지독한 살기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숲 전체가 내뿜는 살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초풍영 역시 살기를 피워 올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무당파의 제자였기에 그동안은 살심을 자제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막았고, 자신들은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자신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자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했다.
숲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팽가 일행은 평정산(平頂山)을 지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어제 이곳을 지났어야 하지만 뜻밖에 마차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때문에 무림맹의 일정에 맞추기 위하여 그들은 무리해서 산을 올랐다. 이곳 평정산만 통과한다면 무난히 일정을 마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이는 약간은 겁먹은 눈빛으로 어둠에 둘러싸인 산을 바라보았다. 비록 횃불이 길을 밝히고 있지만, 그래도 칠흑 같은 어둠을 완벽하게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어둠이 물든 산은 기묘한 공포를 무이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괜찮다. 이깟 어둠이 무에 무섭다고 이러느냐?"
무이의 떨림을 느낀 팽만우가 웃음을 지으며 무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헤~. 꼭 무서운 것은 아닌데 그래도 왠지........."
무이가 혀를 내밀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넌 너무 겁이 많아서 탈이야....,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그러니, 나중에 혼자 어떻게 잘려고 하느냐?"
옆에서 팽관수까지 합세해 무이를 놀렸다. 그러자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칫! 난 아직 할아버지하고 할머니 품이 더 좋다. 그러니까 더 오래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 있을 거야!"
"에?"
뜻밖의 무이의 말에 순간 팽관수가 당황해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팽만우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팽만우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좋아 오래도록 같이 있겠다는 무이의 말에 팽만우가 감격을 한 것이다.
팽관수는 눈을 감고 곧이어 떨어질 불호령을 기다렸다.
"귀여운 내 손녀, 할아비가 그리 좋더냐?"
"네! 할아버지."
"어이쿠~! 우리 무이가 착하기도 하지. 관수 너도 무이를 보고 좀 본받거라. 아무리 사내자식이라지만, 무뚝뚝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으니."
예상대로 엄한 불똥이 팽관수에게 튀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리오. 이미 무이에게 눈이 먼 팽만우에게 팽관수의 변명이 통할리 없으니 그저 '나 죽었소.'하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팽관수의 눈에 미안한 듯하면서도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무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크으~!'
팽관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무이에게 눈이 멀어버린 팽만우에게는 자신의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예상에 없는 동생이 생겨 처음엔 당황했지만, 무이가 있음으로 해서 집안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팽만우였다.
예전에 팽만우의 앞에만 서면 그 서릿발 같은 기운에 숨이 막혀 왔는데, 요즘은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팽관수는 그 정도로 족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자신의 여동생이 그 역시 사랑스러웠다.
푸르르~!
그때 밖에서 말들이 투레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멈춰섰다.
팽만우의 얼굴이 순간 싸늘해졌다.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기파, 마차의 벽을 격하고 느껴지는 그 느낌에 그의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너희들은 여기 마차 안에 있거라."
"할아버지?"
영문을 몰라 하는 아이들을 마차 안에 두고 팽만우가 내렸다.
마차 밖에는 그야말로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십 명의 팽가 사람들 주위로 수백 명의 남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팽가의 주위를 점유한 남자들, 팽만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토록 많은 인원들이 잠복해 있었는데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의 불찰이구나.'
무이와 팽관수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한순간 주위 경계를 소홀히 한 자신을 자책하는 팽만우였다.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비록 적이 팽가의 인원에 비하여 열 배 가까이 많았지만 자신이 건재한 이상 저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팽만우가 웅혼한 내공을 실은 음성을 토해냈다. 그러자 일대 숲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일제히 바람에 흩날렸다.
그러나 그런 모습에도 남자들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이놈들!"
팽만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분명 자신들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이 아닌가? 그는 열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팽주형과 팽관형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그들의 말에 팽만우는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흥분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몫이고, 말리는 것이 나이든 사람의 몫인데 상황이 반대로 변했기 때문이다.
팽만우는 잠시 그들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차례 커다란 환란을 겪더니 젊은 아이들이 한결 냉철해졌다. 그것이 무척이나 기꺼운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한결 냉정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한 장년인이 말을 몰고 그들 앞으로 나왔다.
이제 삼십대 초반의 남자, 그러나 얼굴 표정만큼은 북해의 빙설보다도 더 차가워 보였다.
"당신이 철혈도제라는 팽만우요?"
"넌 누구냐?"
"맞는가보군! 내 이름은 적무영. 천산파의 문주요."
적무영은 자신 있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천산파? 천산파에서 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인가?"
"후후.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이토록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길을 막았는데...... 좋은 이유일 리 없지요."
"감히 천산파 따위가 대 팽가에 시비를 거는 것이냐?"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그가 우리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는구려."
팽만우의 말에 적무영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오늘의 습격은 그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단 한 사람에게 압도되어 인질을 잡으려 수백 명의 천산파 문도가 우르르 몰려나오다니,
만약 이 일이 강호에 소문이 난다면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적무영의 시선은 팽만우의 뒤에 있는 마차를 향해 있었다.
마차 안에서 느껴지는 두 줄기 기운, 그것은 마차 안에 아이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무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챈 팽만우와 팽주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무영의 시선에서 그가 노리는 것이 아이들이란 것을 알아챈 것이다.
"감히, 팽가의 아이들을 노리다니... 간이 부었구나!"
"후후, 정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래야 할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야 더 큰 대어를 잡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적무영이 말을 마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있던 천산파의 무인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모두 방진(防陣)을 펼친다. 누구도 마차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팽주형의 명령에 팽가의 무인들이 마차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들은 제각기 도를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비록 숫자에 있어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위축된 기세가 없었다.
이미 한차례 지독한 환란을 겪은 그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를 하지 않을 만큼 신경이 굵어져 있었다.
그런 팽가의 모습에 적무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이 정도의 숫자 차이라면 대부분이 자포자기하기 마련인데, 팽가의 어디에도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무영의 예상보다 팽가가 훨씬 잘 단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겠군.'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상황도 어쨌거나 그들이 예측했던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쿵~!
그때 팽만우가 크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대지에 거센 울림이 일었다.
"누구도 나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왜 철혈도제라 불리는지 오늘 확실히 보여주마."
광폭한 기운을 흩뿌리며 은발을 허공으로 줄기줄기 뻗친 모습을 보여주는 팽만우, 일순 주위가 조용해졌다.
"과연....... 철혈도제, 하지만....."
스릉~!
적무영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조용히 서있던 초로의 노인 둘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우리 셋이라면 당신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 것이오."
적무영의 뒤를 바치고 있는 자들은 천산파의 양대 호법으로 무공과 심기가 뛰어나 적무영이 무척이나 신뢰하는 자들이었다.
"흥! 감히 피래미들이 노부 앞에서 건방을 떨다니."
팽만우의 수염과 눈썹이 동시에 하늘로 곧추섰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흉신악살(凶神惡殺), 패도적인 기세가 주위를 광폭하게 몰아쳤다.
채~앵!
그것을 신호로 동시에 여기저기서 무기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숨 가쁜 대치, 하지만 대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야앗~!"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며 방진을 형성한 팽가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이 대지를 울리는 처절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팽만우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모조리 쓸어주마!"
숲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신황에게 거센 적의를 표출했다.
조금 전에 모습을 보였던 검은 그림자들도 모두 사라지고 숲에는 어느새 고요만이 남았다.
하지만 고요 속에 감춰진 살기는 더욱 예리하게 버려져 신황과 초풍영의 피부를 자극하고 있었다.
초풍영은 거대한 어둠속에 가려진 숲을 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진이다. 숲 전체가 완벽하게 진으로 동화되었다. 누가 있어 이런..... 설마 제갈가?'
뛰어난 머리와 수많은 책사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제갈세가는 예로부터 수많은 절진을 만들어 세상에 내놨다.
그때마다 지독한 절진의 위력에 세상은 치를 떨어야 했다. 만일 제갈문이 정파가 아닌 사파였다면, 벌써 예전에 무림공적으로 몰려 멸문을 했을 것이다.
'젠장, 제갈가의 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뭐였더라?'
초풍영은 필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평소 제갈가에 관심이 없던 그가 제대로 진의 이름을 생각해낼 리 만무했다.
그렇게 초풍영이 머리를 굴리는 순간, 신황은 이미 진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푸슉~!
순간 수많은 비침들이 신황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순간 신황은 철판처럼 단단해진 소매로 머리를 가리며 침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런 신황의 자신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침들은 신황의 장포를 뚫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신황, 손가락 사이로 그에게 날아오는 은빛 광채들이 보였다.
푸~확!
순간 두개의 검이 신황의 옆구리를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기습을 한 남자들은 의외로 자신들의 공격이 쉽게 성공하자 오히려 눈에 의아한 빛을 떠올렸다.
그때 신황의 무신한 눈빛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서 타격을 입은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옆에서 보면 관통한 듯 보였지만, 남자들의 검은 신황의 옆구리와 팔 사이에 교묘하게 기어 있었다. 때문에 신황에게 어떤 타격도 없었다.
과~캉!
신황이 몸을 비틀자 그들의 검이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동시네 신황이 그들의 몸을 스치듯 지나쳐갔다.
"이 자식.......?"
그들은 자신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신황의 태도에 분노를 터트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의 몸이 덜커덕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혈이 치솟아 올랐다.
신황의 소맷자락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남자들의 몸을 신황의 월영인이 자르고 지나간 것이다.
사사삭~!
기습을 한 남자들이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숲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이 발동된 것이다.
크르르~!
그 모습에 설아가 더욱 거세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숲의 중심에 있는 높다란 나무에서 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남자는 주먹에 힘을 주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희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흐흐흐~. 이 손으로 대륙십강의 새로운 강자를 사냥할 수 있다니.... 이것 정말 짜릿하군!"
남자의 이름은 제갈영휘로 바로 제갈문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리고 이 숲 전체를 포위한 이들은 다름 아닌 제갈세가의 정예들이었다.
이것은 제갈문이나 비영의 뜻과는 별도로 제갈영휘가 움직인 결과였다.
무림맹에서 군사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 제갈문과는 달리 제갈영휘는 가문에서 오직 절진을 연구하고 만드는 데만 전념을 했다.
그 결과 이십여 년의 세월을 투자해 제갈세가에서 이미 오래전에 잊혀졌다던 육합천괴멸살진(六合天壞滅殺陣)이라는 상고의 절진을 복원해낼 수 있었다.
복원을 해놓고 실전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제갈영휘는 자신의 형에게 처참한 실패를 안겨준 신황을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었다.
신황만 잡는다면 그의 형 제갈문을 능가할 명성을 순식간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비각의 인물들이 이곳에서 신황과 초풍영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느 것을 안 순간 그가 대신 나선 것이다.
비각의 인물들이 반대를 했지만 백여 명이나 되는 정예를 이끌고 온 제갈영휘의 고집을 당할 수 없었다.
제갈영휘는 이곳 숲에 육합천괴멸살진을 펼쳐놓은 상태였다.
천지사방 어디도 빠져 나갈 곳이 없고, 하늘마저 붕괴시킬 수 있다는 천과의 절진, 그 절진이 신황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스스슥~!
동시에 주위의 풍광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숲이었는데 어느새 풍광은 마치 유부의 한 조각을 잘라낸 듯 음침하면서도 귀기가 물씬 풍기는 광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육합천괴멸살진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생문(生門)을 찾아야 해요. 안 그럼 저들의 의도대로 이끌리고 말 겁니다."
초풍영이 뒤바뀐 풍경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일단 이런 절진이 한 번 발동되면 생문을 찾기 전에는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황은 묵묵부답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무심하게 전면을 바라봤다.
스르륵~!
그때 살며시 신황의 그림자가 늘어나며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그것은 너무나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초풍영과 신황, 그 누구도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마침내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춘 그림자는 마침내 신황의 등에 무기를 꽂으려 했다.
캬~웅!
그때 설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휘릭~!
순간 신황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림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딴에는 은밀하게 습격한다고 했는데 조그만 고양이 따위에게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부르르~!
순간 그림자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다. 그의 몸에 집중된 과도한 살기 탓이다.
'치잇~!'
그림자는 기습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진의 일부로 합류하려 했다.
육합천괴멸살진의 특징 중 하나가 주위의 풍경에 동화되어 얼마든지 진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진에 합류하면 제아무리 신황이라 할지라도 그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오산을 하고 있는지 몸으로 느껴야 했다.
"커~헉!"
어느새 그가 움직이는 방향에는 신황이 서 있었고, 그의 목 줄기에는 신황의 손아귀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렬한 통증.
푸~욱!
복부에서 불같은 통증이 올라오는 동시에 그림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느새 신황이 칼날처럼 변한 소맷자락으로 그림자의 복부를 쑤신 것이다.
주르륵~!
신황의 소맷자락으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무너지는 그림자를 밀쳐내며 신황이 그림자의 복부에 꽂혀있던 팔을 휘둘렀다.
휘~이~익!
점점이 흩뿌려지는 핏방울. 핏방울이 닿은 자리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먹물에 물들어가는 화선지처럼 그렇게 변해가는 풍경.처음으로 신황의 입이 열렸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그는 정말 화가 나있었다. 시간이 없는데 그의 발길을 잡는 검은 그림자들이 그의 화를 머리끝까지 돋운 것이다.
휘~익!
순간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오며 파상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황이 빙글 돌기 시작했다.
신황과 초풍영이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바야흐로 무강의 한 야산에서 처절한 혈전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크헉~!"
"으와악~!"
챙챙! 채채~챙!
평정산에 비명과 검명이 난무했다.
천산파와 팽가의 무인들은 사력을 다해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은 절기를 펼쳐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열 배의 숫자 차이가 있었지만, 팽가 무인들은 그래도 잘 버텨냈다.
방진이란 특성과 같은 핏줄이란 유대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바로 팽주형과 팽광혈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밀리는 곳이 있다면, 바로 팽주형과 팽광형이 도와줬다. 때문에 숫자의 열세에도 한동안 팽팽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팽주형은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곁눈질로 흘끔흘끔 자신의 아버지인 팽만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팽만우와 적무영, 그리고 천산파의 양대 호법은 숨 막히는 대치를 하고 있었다.
팽만우를 중심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포위한 적무영과 양대 호법,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산악처럼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팽만우의 몸에서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허명이 아니라는 것인가? 하지만....'
적무영이 팽만우의 등 뒤쪽을 점유하고 있는 양대 호법에게 전음으로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양대 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스윽~!
팽만우의 전권으로 한걸음 내닫는 양대 호법, 순간 팽만우가 그에 반응하며 폭발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쉬~앙!
무겁게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도가 어느새 양대 호법의 몸을 두 동강 낼 듯 무섭게 몰아쳐왔다. 그에 양대 호법은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감히!"
팽만우는 노호성을 터트리며 그들을 따라 같이 몸을 날렸다.
은발을 날리며 사납게 몰아쳐 오는 그의 모습은 마차 커다란 대호를 보는 듯했다.슈우우~!
팽만우의 도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며 폭발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오호단무도의 일초식인 대호출동(大虎出動)이 펼쳐진 것이다.
"챠핫~!"
"이야앗!"
순간 양대 호법이 천산파의 절기인 단천비검(斷天飛劒)의 일초식인 비천삭룡(飛天削龍)을 펼쳐냈다. 그러자 음한한 기운이 몰아치며 팽만우의 대호출동을 막아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두 기운이 폭발을 일으키고, 그 순간을 노려 적무영의 파상공세가 시작됐다.
"타~핫! 비금백팔무(飛禽百八舞), 제1절 대호도륙(大虎屠戮)."
적무영의 외침과 함께 그의 검에 검기가 마치 그물처럼 촘촘하게 뻗쳐 나왔다.
화르륵~!
허공을 일순간에 가득 채우며 팽만우를 조여 오는 검기, 순간 팽만우의 몸이 팽이처럼 팽그르 돌며 오호단문도의 두 번째 초식인 노호만황(怒虎滿荒)을 펼쳐냈다.
눈부신 빛과 함께 토해져 나온 노호만황의 기세는 적무영이 펼친 기운을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그의 면전까지 밀어닥쳤다.
"젠장~!"
적무영은 자신의 공격이 순식간에 소멸하고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를 악물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팽만우의 공세를 피해냈다.
순간 양대 호법이 적무영의 위기를 돕기 위해 공세를 펼쳐냈다.
"삼절파천(三絶破天)."
"붕천설파(崩天雪破)."
그들의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철학들, 그것들은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팽만우의 등을 노렸다. 때를 맞춰 적무영의 공세도 발동됐다.
"도룡참호(屠龍斬虎)."
비금백팔무중의 제 삼식인 도룡참호는 명칭 그대로 용을 도륙하고 호랑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진 초식이었다.
팽만우를 가운데 두고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위력의 공격들,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보던 무이가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순간 팽만우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네 녀석들은 오늘 날을 잘못 잡았다. 내 손자 손녀 앞에서 항상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할아비의 마음일지니."
꾸~욱!
팽만우는 그리 중얼거리며 도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심상치 않은 기세, 심상치 않은 자세.순간 팽만우의 거센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호왕천하(虎王天下)."
푸화학~!
대기를 헤집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폭한 기운, 그 기운은 자신을 향해 몰아쳐오던 세 기운을 순식간에 잡아먹고 적무영과 양대 호법까지 집어 삼켰다.
"크으!"
"흡!"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거센 바람이 지나간 후 나타난 광경, 적무영과 양대 호법은 옷이 여기저기 찢겨진 채 난감한 모습으로 겨우 검을 들고 서있었다.
그 한가운데 팽만우가 오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하늘의 신장이 내려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팽만우의 모습은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 녀석들이 왜 손자, 손녀를 노리는지 모르나 오늘 날을 잘못 잡았다. 네 너희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릴 것이다."
팽만우는 그리 외치며 적무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적무영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큭큭큭! 확실히 허명은 아니군, 정말 대단해! 우리 셋을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다니."
꿈틀!
그의 말에 팽만우의 미간이 움직였다.
분명 명백한 힘의 차이를 알았을 텐데 전혀 기가 꺾이지 않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야. 당신이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적무영의 눈에는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광기와 더불어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 그것이 팽만우의 신경을 긁었다.
"그전에 네놈의 목부터 따주마."
팽만우는 다시 도를 들며 말했다. 그러자 적무영이 자신의 검을 들며 훌쩍 뒤로 물러섰다.
"도망가겠다는 것이냐?"
팽만우가 수염을 푸들푸들 떨며 적무영을 향해 쇄도했다.
적무영이 적장지계를 쓰는 것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 몇 번의 격돌로 명백한 힘의 우위를 느꼈기에 그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적무영이 외쳤다.
"지금이다. 노호(老虎)사냥을 시작한다."
슈우우~!
순간 숲 속에서 팽만우를 향해 커다란 창 몇 개가 쏘아져 왔다
맹렬히 회전을 하며 날아오는 어른 주먹만 한 굵기를 자랑하는 창, 창에 실린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주위의 소리마저 제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창들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감히 이 따위 기물로 날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팽만우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저따위 창, 그저 피하면 그만이라 생각한 것이다.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이야앗!"
그때 팽만우의 머리 위를 점유한 양대 호법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검기가 쭈욱 일어나며 팽만우를 압박해왔다. 동시에 적무영 역시 자신의 절초를 날려 팽만우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놈들이...."
팽만우는 자신을 방해하는 적무영에게 노호를 터트리며 다시 한 번 호왕천하를 펼쳐냈다. 그러자 또 다시 폭발하는 엄청난 기운.
"크윽!"
"흑!"
다시 한 번 답답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적무영과 양대 호법이 뒤로 튕겨나갔다.
휙~!
그때였다. 이제까지 팽만우가 서 있던 자리의 땅거죽이 뒤집히더니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예의 창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허공에 홀로 남은 팽만우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힘껏 던졌다.
"이런....!"
팽만우가 곤욕스런 표정을 지었다. 비록 적무영과 양대 호법을 물리쳤지만 그로 인해 다시 몸을 움직일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면 부숴주마."
또 한 번 팽만우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부숴버릴 듯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몰아쳤다.
그때였다.
잡자기 날아오던 창들의 끝이 부숴 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은색의 파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파파~팟!
순간 폭발하는 창신, 그리고 비산하는 은색의 파편들, 그것은 무서운 기세로 팽만우를 향해 쏘아져왔다.
팽만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할아버지.... !"
무이의 외침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후두둑~!
하늘에 혈우(血雨)가 내렸다.
신황은 혈우를 고스란히 맞았다.
"헉헉!"
초풍영은 신황의 등 뒤에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에도 검붉은 선혈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육합천괴멸살진의 삼분의 일쯤 되는 지점이다. 그동안 그들은 정면으로 진을 돌파해왔다.
원래대로라면 진의 운용을 살펴 생문을 찾아와야 정상이지만 신황이 택한 것은 정면대결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막고 있는 수많은 난관들과 사람들을 오직 정면으로 부딪쳐 하나하나씩 부숴나갔다.
초풍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시신과 붉은 선혈로 물든 통로가 보였다. 그들이 지나온 자리였다. 이제까지 신황이 앞에서 걸어온 자리였다.
이제 다시 돌아가면 언제든 물러설 수 있지만 신황은 그러지 않았다.
'후퇴 따위는 없다. 물러서지도 않는다. 내가 지나간 길이 피로 붉게 물들지라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서~걱!
"그르륵!"
신황의 눈앞에서 한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며 무너져 갔다. 신황은 무심히 그의 눈을 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지는 남자의 눈이 그의 눈에 인으로 남았다. 원통한 눈빛, 생명력이 사그라지는 그 순간이 생명의 가슴에 비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신황은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이미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저런 눈빛을 보내며 그의 손에 쓰러져갔다.
그 삶의 무게가 신황을 짓눌렀지만 이 정도에 마음이 약해지기에는 신황이 걸어온 전장의 길이 너무나 험했다.
"후회는 지옥에서......"
신황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나무에서, 허공에서 몸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신황의 살기가 다시 전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갈 곳은 지옥뿐,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 사과를 하지."
그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오직 초풍영뿐이었다.
부르르~!
순간 초풍영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신황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지독한 어둠, 그리고 홀로 서 있는 신황,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지옥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화~학!
신황의 양손이 활짝 펴졌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오는 지독한 기운, 신황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자신을 압박해 오는 기운을 거슬러 올라갔다.
"죽어랏!"
"제발!"
신황을 공격하는 자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육합천괴멸살진을 복원해 진법을 연습하면서 그들은 세상의 그 어떤 상대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만큼 육합천괴멸살진의 위력은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다.
검으로 찔러도 튕겨나가고, 도로 후려쳐도 도를 모조리 막아냈다. 그의 몸에 가중되는 극도의 압력도 그의 움직임에 전혀 지장을 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움직이며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도륙했다.
그는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진의 정면으로 향해 걸어갈 뿐이다. 그러면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알아서 먼저 공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그들이 신황의 움직임에 걸릴테니까.
쉬이익~!
신황의 팔이 그를 공격해오는 남자의 팔을 훑으며 지나갔다.
그러자 남자의 팔이 세로로 쫙 갈라지며 엄청난 양의 선혈을 허공으로 분출했다.
"끄으으~!"
남자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앞에 올라오는 피분수 사이로 신황의 무심한 눈빛을 보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뻐끔댔다. 그러나 신황의 소매가 그 순간 그의 입에 처박히고 말았다.
"커헉!"
부들부들 경련하는 남자,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못했다. 신황의 팔이 아직 박혀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동료는 들었던 칼을 든 채로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허공에 들린 자신의 동료 등 뒤로 보이는 신황의 눈이 너무나 무서웠다.
주르륵~!
순간 남자가 무너지며 그의 몸에 가렸던 신황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피에 물든 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얼굴, 그러나 북해의 바람처럼 차가운 눈빛이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으으으~!"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보았겠는가? 그가 어디서 이런 광경을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제갈세가라는 강호의 세가에서 태어나 머리를 굴리는 일에만 열중했던 그이다. 물론 무공이란 것을 익히며 나름대로 수련이란 것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수련과 실전은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스으윽~!
그의 목 위로 한줄기 혈선이 생겼났다.
이어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 진법을 수련할 대는 절대 느낄 수 없던 통증이었다. 그리고 그 통증이 그가 생전 마지막 느꼈던 감각이었다.
펄럭~!
신황은 무너지는 남자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순간 무너진 남자의 시체 밑에서 은밀히 그림자가 일어나며 신황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일어나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닥에 몸을 누여야 했다.
크르릉~!
어느새 그의 어깨 위로는 조그만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입에는 한 움큼의 살 무더기가 물려 있었다.
설아는 기습을 하려던 남자의 목 줄기를 물어뜯어 해치우고 꼬리를 살랑 흔들며 신황의 뒤를 따랐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그 광경을 보고 초풍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갈영휘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다.
그의 눈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붉게 충혈 돼 있었다.
백 명의 인원을 동원해 육합천괴멸살진을 펼쳤다.
비록 이론상이긴 했지만 육합천괴멸살진은 완벽한 진법이다. 그런데 이런 진으로 신황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신황은 오직 정면을 향해 걸을 뿐이다. 바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서, 그것이 문제였다.
신황이 진에 휩쓸리지 않고 걸으니 오히려 진이 신황으로 인해 어지럽게 흐트러져 버렸다.
육합천괴멸살진은 분명 완벽한 진법이었으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은 완벽하지 못했다. 그들은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들이었고,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제갈가의 사람들은 지금 신황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공포 앞에 심장을 비롯해 온몸의 감각이 침식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로 인해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진법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이미 육합천괴멸살진은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제갈영휘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제 신황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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