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9)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자
(참고: 롤런드 알렌의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행 9:10~15
I. 서론
오늘 우리가 참고할 책은 롤런드 알렌(Roland Allen) 선교사님의 책, <바울의 선교, 우리의 선교>입니다. 알렌 선교사님은 영국 성공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후 안수를 받고,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중국에서 선교할 당시, 서양 선교사님들의 선교 방법을 보면서, 그들의 선교 방법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선교 방법에 관한 책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선교 방법은 바울이 보여준 선교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선교’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린 후, 바울이 보여준 선교 방법을 대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선교에 대해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선교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선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영어로, Mission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Miss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Missio는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미테레 (Mittere)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선교가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가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 45:4~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이집트로 먼저 보내셔서, 야곱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도록 하셨습니다. 렘 7:25~26,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성경 5군데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공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선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내시는 분, 보냄을 받은 자, 보내신 분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선교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제가 내리는 선교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선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전도 종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선교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선교의 절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그 후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과 관련된 선교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바울과 관련된 본문을 하나 더 찾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눈 먼 바울에게 보내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행 9:10~15,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여기에도 “선교에 대한 개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입니다. 보내신 목적은 바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역사의 여정을 지나는 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입니다. 만약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않는다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 본질을 잃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선교를 한다’라거나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선교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행 9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스스로 바울에게 가서 바울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보내어 바울에게 안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교에 아나니아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선교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이 개념이 중요할까요? 이 선교 개념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역사에 나타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의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누구에게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살고 계신 곳에 우연히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살고 계신 그 곳에 보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곳에서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실까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성도님과 그렇지 않은 성도님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저는 바울 선교의 차별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다는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푯대를 향하여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 바울의 선교의 특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2. 둘째,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섬기면서 몇몇 성도님으로부터 참 좋은 강연이라고 소개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듣고 넘어갔는데, 만날 때마다 언급을 하셔서 유튜브에서 찾아서 그 강연을 들어봤습니다. 어느 신부님의 강연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고, 전하는 내용도 상당히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연을 듣고 난 후, 마음 속에서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이 1시간 남짓한 강연을 하셨는데, 그 속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아마도 이 강연만 그렇겠지 하고, 다른 강연도 찾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강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미도 있고, 내용도 좋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 강연이 지상파에서 다룬 것이었다면, 방송 심의 규정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연은 성당에서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작년 코로나가 한창일 때,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서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이었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글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좋은 강연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신부와 목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만약 사도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무엇을 전했을까요?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만약 사도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인문학과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인문학과 철학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유는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고상한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거절당할 것에 대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명이 이 질문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은 전도가 아닌 것에 대해서 2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전도는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전도하다’라는 단어의 용례는 회심자를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는 결과에 상관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도 아니고, 회심자를 얻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실제로 이것들이 전도의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둘째, 전도는 방법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란 어떻게 선포하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군중에게든), 문서나 그림이나 영상으로, 드라마로 (드라마 내용이 사실이든 창작이든), 사랑의 선행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가정으로, 변화된 삶으로, 그리고 심지어 거의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을 즐거워함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선교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그 결과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열매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교수님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돌이키거나’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만이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의 어둠을 밝히시고, 그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좋은 책이나 설교를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초청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 같은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3. 셋째,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행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는 본문에서 참으로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6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7절: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선교의 방향을 돌려 주셨습니다. (9~10절)
바울은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세울 때, 행정 중심 지역이나 상업 중심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이곳에 교회를 세우면 그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선교 방법은 이러한 자기 계산대로만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이끄시면, 자신의 계산을 내려 놓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것이 우리가 바울로부터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여기서 롤런드 알렌(Roland Allen) 선교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바울의 세 차례 선교 여행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전략은 모든 장소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두세 곳에 복음의 거점을 만들어 복음이 주변으로 확산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개척한 큰 도시나 작은 도시들은 모두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보든, 헬라 문명과 유대교의 영향력으로 보든, 상업적으로 보든, 모든 면에서 중심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징들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마게도냐 지방만 보아도, 베뢰아가 벨라만큼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갔습니다. 그분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들어가서 교회를 설립했고, 그곳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우리의 계산과 맞지 않는 사역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역이 인간적으로 봤을 때,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전도 대상자를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은 인간적으로 봤을 때, 절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매번 우리에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러한 상황을 얼마든지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교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교수님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결국 단순히 누군가를 어딘가로 보내는 일은 그 배후에 어떤 목적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선교’는 단지 보내는 행동이나 보냄 받는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내는 자에게는 장기적인 목적이 있어야 하고, 보냄 받는 사람은 보내는 이의 더 큰 목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적인 선교의 의미는 보냄을 받은 우리가 보내신 하나님의 더 큰 목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말입니다.
III. 결론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일평생 선교사의 삶을 산 사도 바울의 마지막 말입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제가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본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장례식장에서만 선포되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은 노년이 된 자신의 삶을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로 묘사를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 길을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이 면류관은 주님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면류관은 내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이다.
이 말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네 가지입니다. 1) 모든 일에 신중하라. 2) 고난을 받아라. 3) 전도자의 일을 하라. 4) 네 직무를 다하라. 이것을 요즘 말로 풀이하면, 이런 것입니다. 1)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라. 허송세월 하지 말고, 항상 깨어서 생활하라다. 2) 예수님을 전할 때, 고난이 따라올 것이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어찌 주님의 종인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3) 복음을 전해라. 이것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4) 네게 주어진 직무인 목회 사역이 네가 달려야 할 길이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길을 마치라. 사실 이 네 가지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삶이었고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울의 선교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즘 얼마나 진지하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요즘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요즘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요즘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이번 한 주간 살면서, 이 네 가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해 봅시다. 그리고, 바울이 달려간 그 길을 우리도 달려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