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45)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 은, <순간의 꽃> 중에서
이 시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이던가. 트레킹을 하던 산길 입구에서였던가, 아니면 버스를 타고 지나며 올려다 본 교보생명 건물의 <광화문글판>에서였던가.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아도 시를 읽으며 내가 느꼈던 오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고은의 이 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그래서 뇌리를 스치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할 때에 목표 외에는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산을 오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정상만을 바라보며 오르기에 주변의 꽃은 눈에 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을 하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딛다 보니 그간 눈에 뜨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앞만 보고 달렸던가. 그렇게 달렸다가 되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홉 개의 단어로 된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책 한 권 분량의 인생론과 철학이 담겨 있다.
△ 시집 <순간의 꽃> 원문
이 시의 제목을 ‘그 꽃’으로 많이들 알고 있고, 다른 출판물이나 여러 시비(詩碑)에 그렇게 표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 시는 제목이 없다. 2001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고은 시인의 시집 <순간의 꽃>에 처음 수록된 작품인데, 출간된 후 이 시만 가리켜 편의상 <그 꽃>이라 부르다 보니 아예 시 제목이 ‘그 꽃’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순간의 꽃> 중에서’라 표기하는 것이 옳다.
△ 등산로 혹은 공원에 세워진 시비와 시판
이 시가 수록된 <순간의 꽃>은 ‘고은작은시편’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삶의 순간마다 시인이 발견하게 되는 깨달음과 감응을 제목이 없는 185편의 짧은 시구들로만 구성하고 있다. 시인은 꽃이나 나무, 눈송이 같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아주 소소한 것들에서 직관적인 통찰을 이끌어 낸다. 짧으면서도 간결한 시인의 이러한 통찰력이 깊은 의미와 연결되며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특히 ‘그 꽃’이라 불리는 이 싯구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다른 출판물에 있는 싯구 - 3행이 5행으로, '보지 못한'이 '못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전국 등산로 입구나 공원에 이 시를 새긴 시비 혹은 시판(詩板)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다른 출판물이나 시비에 싯구를 시집의 원문과 다르게(3행을 5행으로 혹은 ‘보지 못한’을 ‘못 본’으로) 기재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백담사 앞에 세워놓은 시비에도 시집의 원문과는 다른 싯구를 적어놓고 있다.
△ 백담사 앞의 시비 - '보지 못한'이 '못본'으로 되어 있다.
시집 출간 후에 고은 시인이 싯구를 수정하였는지, 그리고 따로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시 원문이 상처를 입은 것 같아 안타깝다.
[출처] 고은의 <순간의 꽃> 중에서|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