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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불멸의 명시 모음
서 시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초 혼 (招 魂)
- 김소월 (金 素 月)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세월이 가면
- 박 인 환 (朴 寅 煥) -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귀 천 (歸 天)
- 천상병 (千 祥 炳) -
---주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쓰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만 하리라.....
청 포 도
- 이육사 (李 陸 史) -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국화 옆에서
- 서 정 주 (徐 廷 柱)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 영 랑 (金 永 郞)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그네
- 박 목 월 (朴 木 月) -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사 슴
- 노천명 (盧 天 命)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 이었나 보다.
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꽃
- 김 춘 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싶다.
님의 침묵
- 한용운 (韓 容 雲)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 떠날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진달래 꽃
- 김소월 (金 素 月)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사모
- 조지훈 -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낙화
- 조지훈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행 복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저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해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마 음
- 김광섭 (金 珖 燮)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금 잔 디
- 김소월 (金 素 月)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산 유 화 (山 有 花)
- 김소월 (金 素 月)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느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해
- 박두진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듬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귀 촉 도 (歸 蜀 途)
- 서정주 -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아 가 야
- 천상병 (千 祥 炳) -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 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 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
자주 뒤돌아 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메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 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마 !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
에너벨 리
- 에드가 알렌 포우 -
오랜 오랜 옛날
바닷가 그 어느 왕국엔가
에너벨 리라 불리는
혹시 여러분도 아실지 모를
한 처녀가 살았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이왼
아무 딴 생각 없는 소녀였답니다
나는 어린애, 그녀도 어린애
바닷가 이 왕국에 살았지.
그러나 나와 에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었지.
하늘 나라 날개 돋친 천사까지도
탐내던 사랑을
분명 그 때문이랍니다.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한 조각 구름에서 바람이 일어
나의 아름다운 에너벨 리를 싸늘히 얼게한 것은
그리하여 그녀의 고귀한 집안 사람들이 와서
나로부텨 그녀를 데려가서
바닷가 이 왕국의
한 무덤 속에 가둬 버렸지요.
우리들의 행복의 반도 못 가진
하늘 나라의 천사들이 끝내 샘을 냈답니다.
그렇지요, 분명 그 때문이죠.
(바닷가 이 왕국에선 누구나 다 알다시피)
밤 사이 구름에서 바람 일어나
내 에너벨 리를 얼려 죽인 것은 그 때문이죠.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드의 사랑보다도
우리 사랑은 훨씬 더 강했읍니다.
위로는 하늘의 천사
아래론 바다밑 악마들까지도
어여쁜 에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갈라 놓진 못했답니다.
달빛이 비칠때면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꿈이 내게 찾아 들고
별들이 떠오르면
에너벨 리의 빛나는 누동자를 나는 느낀답니다
그러기에 이 한 밤을 누워 보니다.
나의 사랑, 나의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
파도 소리 우렁찬 바닷가 내 임의 무덤 속에.
가는 길
- 김소월 (金 素 月) -
그립다
말을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西山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江물, 뒷 江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어서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낙 엽
- Gourmon -
시몬...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깔,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올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자취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편 지
- 김남조 -
그대만큼 사랑스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해바라기의 연가
- 이해인 -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어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이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 옷을 짜겠읍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어
드릴 것은 상처 뿐이어도
어둠에 숨기지 않고
못 잊 어
- 김소월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떠나가는 배
- 박용철 -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백치 슬픔
- 신달자 -
사랑하면서
슬픔을 배웠다.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보다 더 크게
내 안에 자리잡은
슬픔을 배웠다.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식량
사랑은
늘 타는 목마름
슬픔은 구름처럼 몰려와
드디어 온몸을 적시는
아픈 비로 적시나니
사랑은 남고
슬픔은 떠나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슬픔아
이 백치 슬픔아
잠들지도 않고
꿈의 끝까지 따라와
외로운 잠을 울먹이게 하는
이 한덩이
백치슬픔아
나는 너와 이별하고 싶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조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가지 계속 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침대갖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푸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사람을 사랑 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향 수
- 정지용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고독하다는 것은
- 조병화 -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 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개여울
- 김소월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룻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처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 김소월 -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 다 당신 때문에 있읍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같이 당신한테로 가오리다.
오오, 나의 애인이었던 당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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