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쾌락
상당히 열받네요. 거의 완성했었던거 늙어빠진 노트북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한번 날려서 분노에 찬 채로 완성했습니다. 하... 그나저나 요즘 글이 정말로 끝없이 길어지고 있네요. 가뜩이나 읽는 사람돋 별로 없는데 이거 완전 일기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느낌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누군가는 제 리뷰를 읽고 책의 스펙트럼이 넓어질지?
오늘 가져온 책은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름은 들어봤을법한 책인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입니다. 롤리타, 이 이름이 지니는 파급력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책이 처음 출판된 시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에는 그것이 콤플렉스라는 형태로 남아 여전히 우리에게 화두를 제시하며 문제제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름에 걸맞게, 롤리타, 이 세글자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굉장히 민감한 주제를 던집니다. 롤리타는 페도필리아 또는 소아성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녀를 진심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사랑한다는 내용을. 이런 내용을 지니고 있는 탓에, 반감을 지니시는 분도 있으시라는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완전히 작 중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에게 몰입하기보다는 그를 완전히 타자화하여 바라보았기도 했고요. 또한, 그가 이 책에서 하는 모든 말들은 결국 우리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변명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돌로레스 헤이즈라는 소녀를 사랑했다라는 사실만이 의미를 지니며 그가 하는 말들을 베일 속으로 가릴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감을 지니고 있거나 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반감을 지닐거 같다라는 이유로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저 혼자서 개인적으로 매우 슬퍼할거 같습니다. 롤리타는 단순하게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끝없는 혐오의 구덩이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을 만큼 정말 아름답게 책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번역본에서는 그중 몇개를 한글 표기 이후 영어로 표기하는데, 정말 감탄만 나올 수준의 것이기에 이런 언어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읽어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제가 처음 이 책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몇년 전입니다. 그때에도 당연하게시리 어디에서인가 이름을 흘러들어서 알고있는 상황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어보자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괴테와 쇼펜하우어가 살던 시대에는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녀에게 고백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여겨지는 시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였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의 육체적인 변화가 크게 나타나지 않을 만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변화는 그렇게까지 크게 차이가 난다고?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합의된 질서가 어째서 몇세기를 기점으로 바뀌어버릴까, 우리는 왜 지금 그런 것들을 거부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까지 이어져서 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유말고 제가 이해할수 없는 대상, 그러니까 어린 소녀, 자신의 딸뻘이나 되는 소녀에게 사랑을 표하는 사람의 입장과 그의 이유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것이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을 제대로 알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문뜩 궁금해졌습니다.
줄거리
롤리타를 롤리타로 부르기 시작한 남자, 이 책의 주인공이자 소아성애에 빠진 남자 험버트 험버트 (줄여서 H.H)가 있습니다. 그는 문학자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입니다. 앞에서도 잠깐씩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소녀들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H.H는 수많은 보편적인 소녀들 중에서도, 그가 님펫이라고 부르는 소녀들 - 일반적인 소녀들과는 다르게 무언가 아우라부터 다른 소녀들로 H.H에게는 육체적인 매력을 보이며 어른스러운 성숙함을 보이는 소녀들 - 을 찾습니다. 그는 그가 님펫들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13세때 자신이 사귀었던 여자친구인 애너벨이 병으로 죽고 난 이후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는 일종의 육체적으로만 성장한 정신적으로 어린, 어딘가 머릿속이 나사빠진 어른입니다.
부인과의 이혼, 문학가로서 여러 책을 쓰거나 교과서를 만드는데 일조한 그는 집필활동을 위해 뉴잉글랜드로 오게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돌로레스 헤이즈, 우리에게 앞으로 롤리차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게될 소녀를 마주하게됩니다. 한눈에 돌로레스가 님펫임을 알아차릴 H.H는 그녀의 어머니인 샬롯에게 그녀의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하며 그녀의 곁에서 머무를수 있게 손을 씁니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단순히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는 매번 자신의 욕망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어느날, 그는 샬롯의 편지를 발견합니다.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자신과 결혼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그는 샬럿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돌로레스를 더 오랫동안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 때문에 고백에 고민한 뒤, 그것을 수락하고 돌로레스의 아버지가 됩니다.
문학자인 H.H답게, 그는 돌로레스와 지내며 자신이 그녀에게 느낀 감정들과 님펫에 대한 생각들을 종이에 적어놓고는 그것은 책상 서랍에 보관해둡니다. 이 종이들은 샬롯은 우연찮게 보게되었고, 그에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H.H는 자신이 앞으로 작성할 책에 대한 아이디어 노트라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그에 대해, 그리고 어린아이를 사랑한 그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집을 떠납니다. 그렇게 H.H의 치부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 순간, 그에게는 다행히도 밖으로 나간 샬롯은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다시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그는, 돌로레스와 함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나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작가주의
작가주의란, 영화내에서 먼저 차용된 개념입니다. 영화, 즉 작품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써 작용하는 이 주의는 영화 그 자체를 바라보기보다는 작품과 그것의 창조자를 결부시켜서 해석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작가주의에서의 해석의 기조는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이전의 작품과 비교하였을때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작가의 생각과 철학이 어느 면에서 발전해나갔는지, 고유의 무언가가 들어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바라본다면 지니는 장점은 분명합니다. 작품을 만든 이의 의도를 더 쉽게 분석할수 있으며, 애초에 해석의 방향성 자체를 그것의 창조자에게로 돌려서 시작하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조금 덜어낸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창조자의 여러 작품을 비교하며 분석하기에 그것에 대한 일관성을 찾을수 있다거나 차이점을 상대적으로 쉽게 볼수 있습니다. 가령,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독회의 경우에도 해석을 가할때 작가주의적인 관점을 사용하여 해석하려는 것을 보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이전에 읽어오셨던 하루키의 책들을 연결짓거나 또는 하루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시키시기도 합니다. 이런 작가주의의 해석이 등장함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예술이라는 분야에 들어서게된 영화라는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졌습니다. 작가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우리가 거장이라고 부르는 감독들도 발굴되기도 했고, 늦긴 했지만 여러 영화가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이전 상업적인 영화산업에서 예술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시기이도 했죠.
하나의 기준을 만드는데 작가주의는 분명한 장점이기는 하지만, 작가주의에 대한 반발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도 작가주의적인 해석을 차용하기는 하지만 이런 작가주의적인 사고관을 답습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작가주의가 지닌 문제점 때문입니다. 작품과 그것을 만든 개인을 결부짓는 것에 대한 문제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가주의의 극단으로 흐른다면, 선명한 문제점 부상하게 됩니다. 가령, 롤리타의 경우 작가주의의 충분한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 롤리타는 소아성애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는 부정할수 없는 것이다. 이런 책을 집필한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자다!' 라고 말한다거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 사람에게 '너는 나치즘에 물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하는 것 모두가 작가주의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사고입니다. 롤리타를 다루면서 작가주의라는 사조를 다룬 이유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소아성애라는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 컨텐츠를 만들어 그것을 향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롤리타는 소아성애에 깊히 빠져들어 이것을 즐겨라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소아성애라는 문제점에 대해서 그것을 고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작가주의의 한계
작가주의의 한계는 그것의 극단성 말고도 여럿 존재합니다. 몇가지를 추려보자면 이런것들이 있습니다.
1) 독자의 주관성을 우선시하기보다는 작가 그 자신의 세계를 중요시하는 것
작가주의를 따르는 독자는 자신의 고유한 해석보다는 일차적으로 작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의 세계에 자기 스스로를 집어 넣어 그 안에서 사고를 한 이후에 해석이나 비평을 시도한다는 것이죠. 이는 작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발단이 될수도 있으며, 독자 자신의 성장을 막는 근거가 될수도 있습니다.
2) 독자성을 지니고 자신만의 철학을 지니고 있는 작품은 모두 좋은 작품인가에 대한 의문
어느 분야의 작품을 보더라도, 그것에 담겨있는 의미보다는 그것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가주의 사고관은 그런 예술적인 면모보다는 작가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작품의 예술성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좋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현대 예술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정말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비평가들은 그것에 무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은 위대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모든 부분에서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는가에 대한 의문
작가주의는 그 특유의 성향 때문에 작품의 모든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는 이러이러한 의도로 이것을 이렇게 배치했을거야 라거나 등장하는 인물의 심리를 보았을때 그는 특정한 사고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등. 이는 해석하는 해석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텍스트를 끝없이 뒤집어 봐야 하는 말그대로 정보에 대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시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많은 것을 숨겨 놓았다고 공표하였고, 지금까지도 그가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 문장하나, 심지어는 쉼표에 대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작가주의적인 해석은 옳은 것인가요? 우리는 작품을 그 자체로, 텍스트는 텍스트로 즐길수 없는 것인가요? 해석자는 작가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한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 것,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할수 있는 가능성의 오류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주의의 등장으로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당면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를 중심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또는 작품을 중심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이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롤리타라는 이 책을 소아성애를 부추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부할수도 있고, 그럼에도 한번 읽어볼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시만하고, 오히려 그 선택을 내리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향해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문학적인 문체
정말로, 롤리타는 아름답게 쓰였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작가가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정도로 영어를 탁월하게 구사합니다. 번역본에서도 그게 느껴질 정도면 말 다한거 같습니다. 롤리타에서는 나보코프 스스로가 만든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비슷한 음운이나 발음의 유사성으로 다양한 말장난을 숨겨놓았습니다. 이거는 진짜로 본인이 느꼈으면 좋겠어서 유명한거 몇개 소개하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enchanter와 관련해서 참 많이 나오고, the rapist에서 therapist로 바뀌는건 정말 유명하죠. 그가 계속해서 인용하는 애드거 앨런 포나 프루스트 등의 작품을 알고 있다면 이건 이런 메타포를 지니고 있구나! 하며 감탄할 부분도 있고요, libidream, quilty에 관해서도, humbert 그 이름에서도 수많은 변형들이 등장하며 글의 미학을 계속해서 불어 넣습니다.
교훈은 없다
블라드미르 나보코프는 이 책을 집필한 이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롤리타 속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다." 이 책에서 그 어떤 것도 배워가지 마라.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롤리타는 이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일반적이 소설이 택하는 N인칭의 관점이 아니라 이전에 소개해드렸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진행처럼 수기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됩니다. 롤리타를 읽고 있는 독자의 관점에는 총 3개의 시간선이 존재합니다. 1. 롤리타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H.H의 이야기 2) H.H가 재판이 진행되기 이전 사망한, 1955년 8월 5일의 시간선 (이 시간은 기록물이 전달되었던 책의 처음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3) 그 기록물을 읽고있는 돌로레스와 H.H의 불멸을 보장하는 독자의 시간.
이를 통해 우리는 롤리타라는 기록물 자체가 재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의 중간이나 끝에서가 아닌 처음에서부터. 이 사실을 알고 우리는 다음 장을 넘기고, H.H의 뒤틀린 성욕을 보게됩니다. 롤리타라는 이름을 그의 입안에서 굴리는 것으로 시작해 님펫들의 존재에 대하여,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런 성욕을 지니게 된 이유를 그는 어쩔수 없다는 듯 설명합니다. 그것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이제 일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내리는 재판관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기록은 재판을 위해 작성된 것이기에 그걸 읽고 있는 우리는 더더욱 재판관의 입장을 택할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시간, 즉 H.H와 돌로레스의 불멸에 대한 내용 때문에, 그는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재판대 위에 서게 됩니다. 죄를 알리는 죄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가야합니다. 처음의 글귀부터 마지막 한 글자까지. 그래야 비로소 이 모든 내용이 그의 이기적인 변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에서 교훈을 얻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를 심판하는 역할을 지니고 그가 저지린 죄를 객관적인 시선을 바라봐야 하는 역할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H.H가 롤리타의 내용에서는 비판받거나 응징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비난받거나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분노하면 안됩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나보코프가 나서서 그의 윤리적인 면모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의견을 시작을 삼을수 밖에 없습니다. H.H는 소아성애를 했기 때문에 잘못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비판을 하는 것이 사고의 유연성을 기르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상적인 돌로레스
그렇게 H.H는 돌로레스를 사랑합니다. 이제는 그녀를 부를때 때어낼 수 없는 이름인 롤리타로서, 그녀를 단순히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이 아닌 여성으로 여기면서. 그는 책을 시작하는 동시에 롤리타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언가 도달할 수 없는, 잡을수도 없는 무언가로 비춰집니다.
'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
그 이름 속에, 그것은 분명히 H.H가 돌로레스 헤이즈 대신 붙인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그가 지녔던 삶, 그의 열정, 그리고 그의 영혼까지. 그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돌로레스를 묘사하는, 누군가를 말할때 가장 먼저 말하게 되는 것, 누군가의 시작을 그는 이름을 부르면서 - 자신의 입 안에서 - 그것을 소유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을 보았을때 H.H는 돌로레스를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돌로레스를 님펫이라는 자신이 만든 하나의 좁은 범주 속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녀를 격화시키고, 나아가 그녀에게 자신의 이상을 집어 넣습니다. 그녀를 롤리타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그녀를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또다른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H.H는 돌로레스에게 수많은 것들을 씌워놓고 무엇을 보려고 하는 걸까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애너벨입니다. 그가 13살일 당시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가 평생동안 고통받는 소아성애자가 된 원인 - 그렇다고 애너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 자체인 애너벨. H.H가 롤리타라고 불리는 돌로레스를 애너벨의 또다른 잔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설득력 있어보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으로도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애너벨이라는 인간은 H.H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에게 처음 육체적인 끌림과 정신적인 끌림, 이 두가지를 제공해준 인물이기도하며, 동시에 그것들의 상실을 제공해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롤리타를 만들고 그곳에 애너벨을 집어넣음으로써 그가 이전에 마주했던 자신의 상실을 달래는 수단으로써 사용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자신의 애인의 분신을 만들고 그 젊음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젊음을 그는 탐욕스럽게 취하면서 그 시간의 메아리 속에서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H.H라는 인간의 모습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만들어낸 롤리타라는 인물이 항상 애너벨을 뜻한다고는 말하기 힘들어보입니다. 여러 부분에서 그는 단순히 애너벨을 원하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님펫이라는 자신만의 종족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시간에 대한 부분이 나올때 입니다. 돌로레스와 여행을 한참하고 있던 와중에, 그는 돌로레스를 보며 갑작스러운 혐오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H.H만의 롤리타를 보고 역겨움을 느낀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서서히 님펫에서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나는 돌로레스를 파악했을때 입니다. 어린아이만이 보일수 있는 성인을 따라하기 위한 그런 엣된 모습들과, 어린아이들이 보일수 있는 천진난만함과 그런 장난기 많은 모습들은 그녀가 커가면서 짜증과 분노의 요소로 자라게 되었고, 그녀의 신체적인 변화도 - 신체가 길어진다거나 커지는 그런것 - H.H에게는 사라져가는 님펫으로 그려집니다. 이 점으로 H.H를 조명한다면, 이런 차이를 인식하게 되는 때가 바로 H.H 스스로가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H.H에게 시간은 보들레르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시간이란 모든 것을 파괴해나가는 원수. 시간은 롤리타를 이제 돌로레스로 만드는 원수입니다.
그는 롤리타가 이제는 돌로레스로 보임을, 자신의 귀여운 님펫이 이제는 성장해나가는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봅니다. 사실 내가 미성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어리고 순결하고 요정 같은 금단의 소녀가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이상 - 즉 위대하지만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장밋빛과 잿빛의 미래 - 사이의 격차를 이렇게 무한히 완벽성으로 메워가는 상황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자신의 콤플렉스가 근본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의 자신을 내세움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적인 시간의 여행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롤리타라는 존재를 애너벨이라는 대상을 투영한 존재로써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H.H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으로 바뀝니다. 롤리타라는 존재 안에는 님펫도 들어있지만, 그 님펫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현재가 아닌 자신만의 이상적인 시간, 즉 롤리타와 H.H가 들어있습니다. 마지막, 그가 글을 마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롤리타가 이제는 없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곁에 롤리타와 함께할 자신도 없다는 그런 쓸쓸함을 그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쓸쓸함은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H.H는 이렇게 롤리타라는 책을 남김으로써 님펫이었던 그 시절의 롤리타와 불멸을 누리게 됩니다.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이 둘은 사람들의 상상속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임이 분명하기에.
더 쓸 이야기가 많지만 더 써버린다면 이제 진짜로 아무도 안읽을거 같아서 아쉽지만 H.H와 퀼티 (C.Q)의 이야기와 님펫에 대한 이야기는 빼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퀼티라는 존재,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Guilty를 연상시키는 단어처럼, 이를 중점적으로 이야기의 후반부를 보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퀼티라는 존재는 이야기의 중반부부터 어디에선가 돌로레스와 H.H의 여정을 따라다닙니다. 그의 이름처럼, H.H의 어디에선가, 무의식적인 죄악감을 나타난 것일까요? 라는 짧은 생각과 함께, 이번 기나긴 리뷰를 바쳐보겠습니다.
첫댓글 우와 써주신 그대로 정말 소재때문에 안 읽고 싶었는데 글을 읽어보니 진짜 궁금해지는 책이네요..
휴 다행이네요!
@22_2 박정균 이번엔 반드시 원문으로 읽겠읍니다..
@23_2임수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앙금 남으신건…아니죠…?
@22_2 박정균 아유! 전혀요~^^^^
@23_2임수현 뭐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