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과 자비 사이의 교리적 긴장
(2)세 종류의 자비
무아와 자비의 양극이 안고 있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무아의 지혜를 자비의 실천에 관계된 교의에 적용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하여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유정이라는 소연, 혹은 유정이라는 관념이 없더라도 자비가 가능하다고하는 것을 BCAP에서 시사한다. 목적을 위하여 망분별된 유정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세속적 진리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시설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승의 보살도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기 위하여 '세 종류의 자비'를 소개한다.
"첫째로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가 있고, 그것과 달리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 비], 및 소연이 없는 [자비가] 있다."
하지만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오온이 세속적으로 유정이라는 언어로 불린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문맥에서 세 종류의 자비를 잠시 언급할 뿐, 그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샨띠데바도 Śs에서 Akṣayamati-sūtra를 인용하여 증오(dveṣa)를 대치하는 방법으로 자비를 언급하는 문맥에서 세 종류 자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그것(자비)은 Akṣayamati-sūtra에서 세 가지로 규정되어 있다.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 자(자비)는 초발심을 일으키는 보살에게,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행을 실천하는 보살에게, 소연이 없는 자(자비)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 보살에게 생긴다."
반면, 『대지도론』 제20권은 세 종류의 자비에 대하여 상세하게 해석하고 있어 대승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먼저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衆生緣)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혹은 중간인 세 부류의 중생에게 바르고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야 한다. 시방과 오도(五道)의 중생들을 동일한 자심(慈心)로서 보아, 부모와 같이, 형제자매와 같이, 그리고 자손 자식 조카와 같이 생각해서 항상 좋은 일을 구해서 이로움과 평온함을 얻게 하고자 원한다. 이와 같은 마음이 시방의 중생에게 널리 펴져 충만한 것, 이러한 자심을 중생을 소연으로 하는 것이라고 부르나니 대체로 범부들이나 혹은 아직 번뇌가 다하지 않은 유학인(有學人)이 행하는 것이다."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유정에 대해 평등하고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성의 지혜를 지닌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자비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정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아직 번뇌가 다하지 않은 범부나 배움이 남아 있는 유학인이 행하는 자비이다. 게다가 '항상 좋은 일을 구해서 이로움과 평온함을 얻게 하고자 원하기' 때문에, 이 자비는 종교적 구제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이익과 행복을 베푸는 차원에 그치는 자비로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세 종류의 자비 가운데 가장 낮은 차원의 자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법을 소연으로 하는(法緣) 자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을 소연으로 행하는 자는 여러 번뇌를 멸한 아라한과 벽지불과 붓다들이다. 이들 성인들은 '나'와 '남'이라는 상(相)을 깨뜨렸고, '같다' '다르다'는 상(相)도 멸하였기 때문에, 다만 인연의 상속에 의하여 모든 욕망이 생겨남을 관찰한다. 자비심을 가지고 중생을 생각할 때, 인연의 상속이 화합하여 발생하는 것은 다만 공이고, 오온이 곧 중생이며, 자비로써 이 오온을 생각한다. 중생은 이 법의 공함을 알지 못하고, 항상 일념으로 즐거움을 얻고자 애쓴다. 성인은 이를 불쌍히 여기 그 뜻에 따라서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 세속의 법을 위한 것이므로 법을 소연으로 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여러 번뇌를 멸한 아라한과 독각, 그리고 붓다들은 무아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온이 임시로 화합한 것이 곧 유정(=아공)임을 관찰하여 오온에 대하여 자비심을 품기 때문에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라고 해석한다. 이 점이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유정을 대상으로 하는 범부와 유학인의 자비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법을 소연으로 자비를 행하는 자들이 비록 일념으로 열반의 즐거움을 얻고자 애쓰지만, 그들은 오온이 공임(= 법공)을 알지 못하고 세속의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최고의 자비는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연이 없는(無緣) 자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연이 없는 이 자비는 오로지 붓다들에게만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붓다들의 마음은 유위나 무위의 성품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세나 미래세, 그리고 현재세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소연들이 진실하지 않고 전도되고 허망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마음에 소연이 없다. 붓다는 중생이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오도를 왕래하면서 마음이 제법에 집착하여 분별하거나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 제법실상의 지혜를 얻도록 한다. 이것을 소연이 없는 것이라 부른다."
'소연이 없는 자비'는 아공뿐만 아니라 법공마저도 완전히 깨달은 붓다들에게만 있기 때문에, 아공만을 관찰하는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와 다르다. 하지만 소연이 없는 자비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자비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 다만 소연이 없는 자비도 유정으로 하여금 아공과 법공이라는 제법실상의 지혜를 얻도록 한다는 점에서 대상을 온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자비가 자비인 것은 유정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의 대상보다는 자비심을 지닌 주체의 구별에 의하거나 또는 자비의 내용의 측면에서 자비를 세 종류로 분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체의 측면에서 볼 경우, 샨띠데바가 Akṣayamati-sūtra으로부터 인용한 바와 같이,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초발심의 보살이,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6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이, 그리고 '소연 없는 자비'는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이 행하는 자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대지도론』에 따르면, 성문과 벽지불 및 보살은 처음에는 '유정을 대상으로 하는 자비'이고, 나중에는 '법을 대상으로 하는 자비'를 행하며, 붓다만이 '소연 없는 자비'를 행한다.
내용의 측면은 세 종류의 자비의 결론 부분에 기술되어 있는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대지도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으로 비유하면, 재물을 주거나 혹은 금은보물을 주거나 혹은 여의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중생연·법연·무연도 이와 같다."
즉 '유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법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는 금은보물을, '소연이 없는 자비'는 가장 귀중한 여의진주를 주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재물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금은보물은 소승의 즐거움(=열반)에, 그리고 여의주는 대승의 즐거움(=무주처열반)에 상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내용의 측면에서 자비를 세 종류로 분류한 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자비, 소승에서 말하는 자비, 그리고 대승에서 추구하는 자비로 환원되는 것이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