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발해의 문화유산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대조영이 세우 나라로,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나라', '상경성' 등을 통해 발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해의 문화유산을 답지에서 찾으면 됩니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발해의 상경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외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으며, 궁궐 앞으로는 성문 앞까지 이어지는 넓은 주작 대로를 내었습니다. 궁궐 중에는 고구려의 특징인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어요. 그리고 궁궐과 사원터에서 발굴되는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불교는 고구려 불교를 계승하여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널리 융성하였어요. 불교 문화유산으로는 상경에 남아 있는 석등과 동경에서 나온 이불 병좌상, 영광탑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석등은 팔각 지붕 모양의 덮개돌과 뚜렷한 연꽃무늬,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불 병좌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광탑(발해전탑이라고도 함)은 높이 13미터의 5층 전탑(벽돌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발해의 고분으로는 정혜 공주 묘와 정효 공주 묘가 대표적입니다. 정효공주 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벽돌 무덤으로, 묘지(죽은 자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관과 함께 묻은 유물)와 12인물상이 그려진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정혜 공주 묘는 고구려와 같은 굴식 돌방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묘지와 함께 힘차고 생동감 있는 돌사자상이 출토되었어요. 이들 두 무덤은 공통적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라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① 칠지도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것으로, 백제의 뛰어난 금속 기술을 보여 줍니다.
② 이불병좌상은 발해의 불상으로, 흙을 구워 만든 두 분의 부처(석가불, 다보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③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입니다.
④ 가야의 바퀴장식 뿔잔입니다.
⑤ 신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로, 말의 배가리개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유사 기출문제
발해의 역사
②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은 백제(660)와 고구려(668)입니다.
③ 발해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국임을 밝히기도 하고,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10. 발해 답①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발해고(渤海考)’입니다. 한자만 알면 책을 바로 읽어낼 수 있으니
(가)에 들어갈 나라는 발해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요. 유즉공은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입니다.
제시된 자료를 보면, "부여씨가 망하고(백제 멸망), 고씨가 망한 다음(고구려 멸망),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였고(신라),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여(대조영이 세운 발해)"라고 나와 있으니 (가)에는 발해가 들어가야 함을 알 수 있어요.
유득공(1749~1807)은 "발해고"에서 반도 사관 탈피와 남북국 시대를 설정,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하고 백제와 신라를 대등한 국가로 인사하여,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 부를 것을 처음으로 제안하였습니다. 또한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여진·거란에 대해 영토적 권리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어요.
① 발해는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조직하였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② 고려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으로는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있었어요.
여기에서는 재신(중서문하성)과 추밀(중추원)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③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 실시(194)한 빈민 구제 제도입니다.
이는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제도였어요(194).
④ 화랑도는 신라의 청소년 집단이었습니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사회 규범을 배웠어요.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며 국가의 인재가 되었어요.
⑤ 정사암 회의는 백제의 귀족회의체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3. 발해 답①
제시된 설명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대씨(대조영)가 부쪽 땅을 차지하고 세운 나라'라고 나와 있으니, 발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선왕(818~830) 때 발해가 전성기를 맞이하자, 이 시기 중국인들이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어요.
② 신라가 당군을 한반에서 축출한 나·당 전쟁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라는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였고, 이어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676).
③ 9주 5소경은 통일 후 신라의 지방 행정 체제입니다.
④ 건원은 신라 법흥왕, 개국은 진흥왕 때 사용된 독자적인 연호입니다.
⑤ 고려가 쌓은 천리장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북쪽 국경 일대에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 발해 무왕(719~737)의 업적 답③
문제에 제시된 사료에 나타난 '대조영의 아들로 이름은 대무예, 인안이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 흑수 말갈 정벌'이라는 내용을 통해 발해의 2대 왕인 무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조영(고왕)에 이어 즉위한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정한 후 당과 대립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어요.
이때 당은 흑수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였습니다. 무왕은 흑수 말갈을 토벌하는 한편 흑수 말갈의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당의 조치(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자 대문예를 우대하면서 발해를 분열시키려는데 이용)에 불만을 품고 수군을 보내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① 대조영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구려 멸망 후 요서 지역에 이주되었던 대조영은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이 지역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698),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습니다.
②, ⑤ 문왕(737793)에 대한 설명입니다.
문왕은 동모산에서 중경(742)→상경(756)→동경(785)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어요.
③ 무왕은 흑수 말갈의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당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장문휴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산둥 지방의
등주를 공격하도록 했어요. 이에 장문휴는 등주 자사를 죽이고 귀환하였습니다.
④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개선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불교 문화유산
24회 중급 6번 문제
6.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 답①
불교 관련 문화유산은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되죠?
'바위에 새겨져(마애) 있고', '백제의 미소'라는 내용에서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예전에는 서산 마애 삼존불상이라고 불렀었죠)을 떠올릴 수 있어요.
①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7세기 초 백제의 문화재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온화한 모습이 특징입니다.
삼국 시대의 불상인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 신라의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등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온화한 모습이 특징입니다.
통일 신라로 가면 왕의 위엄 등을 반영해 불상의 모습도 근엄한 모습을 보이죠.
② 경북 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불 좌상입니다.
경주 남산에는 다양한 불상과 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불상은 통일 신라 때인 9세기경에 제작된 것입니다.
③ 파주 용미리 마애 이불 입상은 고려 시대의 불상입니다.
거대한 천연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2구의 불상을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④ 합천 치인리 마애 여래 입상은 9세기경 통일 신라의 불상으로 추정되입니다.
자연 암석에 부처님과 광배를 새긴 것이 특징입니다.
저도 본 적 없는 불상인데,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것에 오답을 만들기 위해 생소한 불상을 답지로 제시한 느낌이네요.
⑤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은 고려 시대인 11세기경에 만들어졌습니다.
거대한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몸체를 만들고 머리는 별개의 돌로 조각해 올려 놓은 특이한 형식의 불상입니다.
고대의 불상
삼국 시대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나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서산 마애 여래 삼존불이라고도 함), 신라의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은 미소를 머금은듯한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고류 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유사한 형태여서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를 잘 보여줍니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고구려)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왼쪽은 탑 모양의 관, 오른쪽은 삼산관을 쓰고 있음)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충남)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경북 경주)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들입니다.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입구 쪽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점점 정제되어, 불교의 이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죠.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습니다. 이불 병좌상이라고 부르는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경주) 발해의 이불 병좌상
23회 중급 4번 문제
45.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답⑤
이 문제는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문화유산을 고르면 되는 1점 배점의 쉬운 문제입니다.
불국사 3층 석탑은 창건 이후 원형을 보존해 왔으나, 1966년에 도굴범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따라 그 해에 탑신부의 해체 수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 12월에 복원이 이루어졌어요.
해체 수리 과정에서 2층 탑신의 상면 중앙에 있는 네모난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莊嚴具)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습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두루마리 불경으로, 불경의 글자 중에 8세기경에 만들어져 이때에만 사용된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가 사용된 것이 발견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임이 밝혀져 당시에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①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염원으로 간행하였습니다.
1011~1081년에 걸쳐 간행한 이 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만 현재 전하고 있습니다.
②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맞아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을 바탕으로 조판되었습
니다(1236~1251).
팔만대장경은 15세기에 건축된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어요.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은 그 우수성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③ "직지심체요절(1377)"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입니다.
이 책은 청주 흥덕사에서 만든 직지라는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④ "상정고금예문"은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1234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어요.
⑤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에서는 수리 과정에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중급 8번 문제
8. 선종의 특징 답②
제시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전남 화순)은 선종 승려(선승)인 철감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것입니다.
신라 말에는 당에서 귀국한(821) 도의에 의해 선종이 도입되었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중시하여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입니다.
문화적으로는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습니다. 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연곡사 동부도 등 등이 있습니다. 승탑과 함께 승려의 일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합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석탑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강원도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이 특징입니다.
ㄱ - 신라 말 선종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입니다.
ㄴ - 문헌공도는 고려 중기에 최충이 설립한 사립 교육 기관입니다.
ㄷ - 선종은 스스로 참선이나 좌선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였어요.
ㄹ -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천태종을 창시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22회 중급 8번 문제
8. 통일 신라의 문화유산 답②
'성덕 대왕 신종', '성덕왕, 경덕왕, 혜공왕'을 통해 이 국가가 통일신라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죠?
특히, 제시된 왕들의 재위 시기는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며 통일 신라의 전성기가 유지되다가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던 때입니다.
따라서 통일 신라의 문화유산을 찾으면 되겠네요.
통일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고, 당 및 서역의 문화를 수용하여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특히, 신라 중대인 무열왕 ~ 혜공왕 시기(654~780)에는 왕권이 강화되었고 예술도 전성기를 이룬 때였어요.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왕실의 후원 등으로 사원을 많이 축조하여 훌륭한 불교 문화유산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대표적인 사원이 신문왕 때인 682년에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와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에 의해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입니다. 이들 사원의 건립과 함께 사원 내에 세워진 석탑도 통일 신라 석탑을 대표하죠. 감은사에는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은 감은사지 3층 석탑, 불국사에는 이를 계승한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그리고 형태가 특이한 다보탑이 건립되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평창 상원사 동종(725)과 비천상 무늬와 신비한 종소리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 771)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①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으로, 삼국 시대의 고구려의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연가 7년(延嘉七年)이라는 고구려 관련 연호가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어요.
② 석굴암의 본존불로, 통일 신라 때 제작된 불상입니다.
석굴암(751) 주실 중앙에 모셔져 있으며,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이 특징이죠.
③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에서 제작한 불탑입니다.
미륵사지 석탑과 백제 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목조탑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어요.
④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고려 전기의 불상입니다.
⑤ 경천사 10층 석탑(1348)은 고려 후기의 불탑입니다.
이는 원의 석탑을 본뜬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탑으로, 조선 시대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0회 중급 3번 문제
3. 신라의 문화 유산 답②
삼한(마한, 진한, 변한) 중 하나인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12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신라는 이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습니다(기원전 57).
따라서 신라의 문화유산을 생각하며 문제를 풀면 되겠네요.
바로 답지별로 설명으로 하겠습니다.
① 금관총 금관은 최초로 발견된 신라 금관입니다.
이 시기 신라 금관의 특징은 ‘출(出)’자 모양의 나뭇가지 형태의 장식과 사슴뿔 모양 장식을 덧붙인 형식을 하고 있죠.
나뭇가지 모양 장식에는 곡옥(멧돼지 어금니 형태 장식)이 붙여져 있습니다.
② 칠지도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것으로, 백제의 뛰어난 금속 기술을 보여 줍니다.
③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화랑이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나라가 편안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3년 내에 시경, 상서, 예기, 춘추전(좌전)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라는
맹세의 글을 기록한 유물입니다.
이는 당시의 화랑도 사상과 한자 사용, 유교 경전 공부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④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 종)은 통일 신라 혜공왕 (771)때에 만들어진 범종입니다.
이 종은 비천상 무늬와 신비한 종소리로 유명하죠.
⑤ 토우 붙은 항아리는 경주 황남대총 출토된 것으로, 항아리 목 부분에 사람·새·거북·개구리 등의 다양한 토우를
장식한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0회 중급 5번 문제
5.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답②
'고구려 불상'하면 무조건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을 떠올리면 됩니다.
고구려 불상으로 현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것은 이 불상밖에는 없어요.
이 사실만 알면 3점 배점의 이 문제는 10초 안에 정답을 맞출 수 있는 아주 쉬운 문제가 됩니다.
그럼 이 불상에 대해 조금 알고 갈까요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남한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의 불상입니다.
전체 높이가 16.2㎝의 작은 불상이지만, 조각 수법 드이 매우 후륭한 불상입니다.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입니다. 특히, 명문의 서두에 '연가 7년(延嘉七年)'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연가(延嘉)’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연호로, 명문에서 ‘고려국(高麗國)’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천불 가운데 29번째의 이 불상이 당시 신라 또는 가야 지방이던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이와 동시에 만들어진 다른 불상들이 주위 여러 나라에 흩어졌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의 국력과 불력(佛力)의 유포,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주위 모든 나라에 천명한 의의 있는 불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1967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 도중 감쪽같이 도난되었다가 되찾았던 해프닝이 유명합니다.(아래글 참고)
① 이불병좌상은 발해의 불상으로, 흙을 구워 만든 두 분의 부처(석가불, 다보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②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남한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불상입니다.
③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죠.
이 불상은 신라 또는 백제의 작품으로 추정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이를 본 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④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은 고려 초기의 불상입니다.
⑤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신라 말에 만들어진 철불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덕수궁 미술관 전시 중 '증발'된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 1967년에는 두달 간격으로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국보 제76호의 ‘이충무공 난중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다행히 도난당했던 두 국보 중 불상은 사건 발생 13시간 만에, 그리고 ‘난중일기’는 열흘만에 되찾았다.
·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경,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이 덕수궁미술관 2층 제3전시실의 진열장에서 백주에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
- 그날도 미술관은 평일처럼 오전 9시에 전시실 문을 열고 9월 24일부터 한 달 동안 계속돼 온 해방 후의 출토 및 발굴문화재 특별전 관람객을 입장시키고 있었다.
제3전시실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김영석 씨가 국보 불상의 도난 사실을 발견한 것은 오전 10시 40분께였다. 잠시 딴 방을 돌다가 제3실에 돌아온 그의 눈앞엔 청천벽력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게 높이 1m의 진열대 위에 놓여져 있던 사방 60cm의 유리곽 속의 국보 고구려 불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담한 범인은 유리곽 속에 푸른색 볼펜으로 급히 적은 메모 쪽지를 남기고 있었다.
“국장님(문화재관리국장을 지칭)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 부리다 죽은 자식 자지 만지는 격이 되지 말고. --24일. 이따 11시께 국장님께 아리겠음(인편·편지·전화 등). 지문감정 의뢰 불요.”
물론 국보 불상의 도난사실은 즉시 경찰에 신고되었다. 치안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전국의 공항 및 항만을 긴급 봉쇄하고 철저한 비상검문을 실시하도록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서울 시경에서는 민완 형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벌써 안전한 은닉처에 숨어 있었다.
한편 하갑청 문화재관리국장은 범인이 메모로 약속한 자진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30분쯤 지난 때에 하국장의 집에 범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은 “미안하다. 돌려주겠다”는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오후 3시와 6시에도 걸려 왔다. 같은 말의되풀이였다. 불상을 언제 돌려주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범인은 메모에서 24시 안에 반환하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국장은 피가 마르는 듯한 초조감 속에 범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밤 11시 5분께, 드디어 네번째로 범인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다. 부인 서정희 씨가 먼저 전화를 받은 후 하국장에게 넘겨주었다.
“불상을 한강철교의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맡의 모래밭에 묻어 놓았으니 찾아 가시오”
마치 스릴러 영화의 대사 같았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하국장은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부인과 운전사 셋이서 한강으로 차를 달렸다. 과연 불상이 비닐봉지에 잘 싸여져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극적인 사건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하국장이 경찰에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한 처사와 범인이 20만 원을 요구했다는 설은 뒤에 많은 의혹을 낳게 했고, 사건 내막은 시종 미스테리로 남았다.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19회 중급 8번 문제
8. 경주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답②
문제에 제시된 설명이 어려울 수도 있으나, 내용을 살펴 보면 '신라 때 만들어진 탑'+'다보여래를 상징'한다고 했으니 다보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사찰인 불국사 대웅전 앞에는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석가탑(불국사 3층 석탑)과 다보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묘법연화경(법화경)"에 근거하여 건립되었습니다.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묘법연화경을 설법하자 칠보의 탑과 함께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나타나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며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옆에 함께 앉았다고 하는데, 석가탑과 다보탑은 이 내용을 그대로 묘사해 건립한 것입니다.
두 탑은 형태면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석가탑(釋迦塔)은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며, 동탑인 다보탑(多寶塔)에 대칭되는 호칭입니다. 석가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①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신라의 석탑으로,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모전 석탑)이며,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② 불국사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는 다보탑입니다.
다보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 석탑입니다.
③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다각다층탑인 평창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입니다.
이 석탑은 송이나 거란 등에서 유행하였던 다각다층 석탑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고려 초기 석탑입니다.
④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의 석탑입니다.
⑤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8회 중급 6번 문제
6. 석굴암 본존불 답①
'통일 신라 때 만들어진 인공 석굴 사원에 있는 조형미가 뛰어난 불상'이라는 설명을 통해 석굴암 본존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조화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 탑등의 불교 예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탑에서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불국사 3층 석탑)이 가장 뛰어났고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상이 대표적입니다.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들은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가지게 하고, 또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① 통일 신라의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부처님의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잘 묘사해 웅장한 기상이 넘치는 통일신라 조형 미술을 대표합니다.
이를 인정 받아 1995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②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입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 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중에서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유명합니다.
③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입니다.
위엄이 넘치는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불상입니다.
④ 고려 때 만들어진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입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조성된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입니다.
⑤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6회 중급 11번 문제
11. 선종과 관련한 문화유산 답③
'선종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한 것'은 승탑(부도)입니다.
선종과 관련하여 나타난 대표적인 문화유산은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새겨 넣은 탑비입니다.
신라 말에는 당에서 귀국한(821) 도의에 의해 선종이 도입되었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중시하여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누구나 참선을 통해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취향에 적합하여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입니다.
문화적으로는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습니다. 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연곡사 동부도 등 등이 있습니다. 승탑과 함께 승려의 일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합니다.
①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입니다.
석등은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만들어진 유물입니다.
②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은 승탑이 아니라, 불탑의 하나입니다.
③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전남 화순)은 선종 승려(선승)인 철감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입니다.
④ 법주사 팔상전은 17세기의 불교 건출물로, 불탑의 하나입니다.
⑤ 천마총의 불교 문화유산이 아니라 신라의 왕릉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6회 중급 13번 문제
13.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답①
'고구려 불상'하면 무조건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을 떠올리면 됩니다.
고구려 불상으로 현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것은 이 불상밖에는 없어요.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남한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의 불상입니다. 전체 높이가 16.2㎝의 작은 불상이지만, 조각 수법 드이 매우 후륭한 불상입니다.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입니다. 특히, 명문의 서두에 '연가 7년(延嘉七年)'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연가(延嘉)’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연호로, 명문에서 ‘고려국(高麗國)’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천불 가운데 29번째의 이 불상이 당시 신라 또는 가야 지방이던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이와 동시에 만들어진 다른 불상들이 주위 여러 나라에 흩어졌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의 국력과 불력(佛力)의 유포,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주위 모든 나라에 천명한 의의 있는 불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①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입니다.
②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입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 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이 유명합니다.
③ 고려 때 만들어진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입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조성된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입니다.
④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은 고려 초기의 불상입니다.
⑤ 통일 신라의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부처님의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잘 묘사해 웅장한 기상이 넘치는 통일신라 조형 미술을 대표합니다. 이를
인정 받아 1995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5회 중급 5번 문제
5. 신라의 분황사탑 답⑤
자료에 제시된 내용의 '경주에 남아 있는 삼국 시대의 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모전 석탑)'은 분황사탑 밖에는 없습니다.
삼국 시대의 불탑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어요.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계승한 것이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과 분황사탑이 유명합니다. 신라인의 통일 의식을 염원하여 선덕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건립한 황룡사 9층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탑의 층 비율로 추정해 봤을 때 원래 7층이나 9층탑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① 익산에 있는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② 부여에 있는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③ 경주에 있는 통일신라의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입니다.
④ 강원도 양양에 있는 통일신라의 진전사지 3층 석탑입니다.
⑤ 경주에 있는 신라의 분황사탑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발해의 불교 문화유산
21회 중급 8번 문제
8.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유산 답⑤
발해 문화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였다는 근거 자료를 찾는 문제네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정치적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내세웠고, 이는 발해가 일본 등에 보낸 외교 문서 등을 통해 알 수 있어요.
또 하나는 문화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였다는 것이로, 이는 무덤 양식이나 온돌, 불상 건축 양식으로 알 수 있죠.
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에 모줄임 천장 구조를 하고 있어 고구려 고분과 닮았습니다(정효 공주 묘는 벽돌 무덤에 모줄임 구조가 특징).
또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 중의 하나인 온돌 장치를 한 것이 발견됩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이 발굴되었어요.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이불병좌상).
그리고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ㄱ - 발해의 영광탑은 벽돌로 만들어 쌓은 전탑으로 당나라 건축 기법과 유사한 탑면으로 조성되었어요.
현재 중국 동북 지역에서 현존하는 고탑(古塔)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ㄴ -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습니다.
즉,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습니다.
ㄷ - 발해의 연꽃무늬 기와는 고구려 무늬를 계승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ㄹ - 이불병좌상의 수인, 두상 등의 표현 양식은 당과는 다른 고구려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을 하고 있어, 고구려
불상 양식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9회 중급 11번 문제
2. 발해의 문화유산 답④
밑줄 그은 '우리나라'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결정적인 내용은 '상경용천부로 돌아가면'이네요.
상경용천부는 5경(상경, 동경 서경, 남경, 중경)의 하나로, 발해의 수도였다는 아시죠?
그럼 발해의 문화유산을 찾으면 됩니다.
발해의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습니다. 궁궐 중에는 고구려의 특징인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경의 절터에는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발해의 석등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발해의 탑으로는 영광탑(발해전탑이라고도 함)이 남아 있는데, 이 탑은 높이 13미터의 5층 전탑(벽돌탑)입니다.
불상으로는 이불 병좌상이 대표적으로,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발해의 고분으로는 정혜 공주 묘와 정효 공주 묘가 대표적입니다(정혜 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 정효 공주는 넷째 딸).
정효공주 묘는 중국과 비슷한 벽돌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묘지(죽은 자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관과 함께 묻은 유물)와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벽화에는 12인물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혜 공주 묘는 고구려와 같은 굴식 돌방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묘지와 함께 힘차고 생동감 있는 돌사자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두 무덤 모두 모줄임 천장 구조라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①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백제 또는 신라의 문화유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② 수레모양 토기는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가야의 토기입니다.
③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고구려의 연호(연가)가 기명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불상입니다.
④ 영광탑은 전탑(벽돌탑)으로 발해의 대표적인 불탑입니다.
⑤ 첨성대는 신라의 천체 관측을 위한 건축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6회 중급 7번 문제
7.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유산 답③
이 문제는 발해 문화유산 중 고구려적 요소가 있는 것을 찾는 것이지만, 답지에는 발해 문화유산이 하나만 제시되어 있으니 그냥 발해 문화재만 찾으면 맞을 수 있네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무덤 양식이나 온돌, 기와, 불상 건축 양식 등 발해 문화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문화적 요소임을 알아두세요.
발해의 궁궐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 중의 하나인 온돌 장치를 한 것이 발견됩니다.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무덤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에 모줄임 천장 구조를 하고 있어 고구려 고분과 닮았습니다(정효 공주 묘는 벽돌 무덤에 모줄임 구조가 특징).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이 발굴되었어요. 특히,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불병좌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고구려 후기 법화 사상과 관련이 있으며, 수인(손 모양), 두상 등이 당과는 다른 고구려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을 하고 있어, 고구려 불상 양식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줍니다.
① 호우명 그릇(경주 호우총 출토)으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과 관련된 유물입니다.
② 가야의 수레모양 토기입니다.
③ 발해의 이불 병좌상입니다.
④ 백제 금동 대향로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 능사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⑤ 칠지도로,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 대에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고급 교재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3급 준비에도 최고!!!!!
25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감사합니다^^ 자세하게 알게 되었네요.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문화파트 자세하게 정리할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진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정말 공부에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빌헤 문화유산 문제가 자주 나오네요^^ 이불병좌상 영광탑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자세한 해설로 한문제만봐도 많은 걸 이해할수있어서 좋아요
중급이라 그런지 조금 쉽게 느껴지네요 근데 개인적으로 사진으로 탑 구별하는 문제가 어려운 것 같아요
부여가 많이 나오네요.
이불병좌상으로 겨우 맞췄네요
이렇게 자세한 답변이^^ 꼼꼼하게 살펴보았어요..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듯합니다.
은근히 헷갈리네요ㅠㅠ 더 열공해야겠어요!
보기의 지문으로 나라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을 찾는게 어렵네요..그만큼 관련된 문제들을 풀면서 잘 출제되는 문화유산을 외우고, 나라마다 문화유산의 특징을 파악하는게 좋을꺼 같아요!
문화유산부분은 공부해도 끝이없는 것 같아요! 자세한 풀이 덕분에 복습이 제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잘알아가요
등업 안되는 댓글...
생각보다 많이 어렵네요. 자극받아 열공하기로!
발해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사진이 잘 나와있어서 한꺼번에 정리하기 좋네요 풀이가 자세해서 문화유산부분을 거의 몰랐는데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공부하는데 도움 마니 되네요~
발해를 한곳에 모아 정리하니 공부하기 진짜 좋습니다
발해 감사합니다^^
유물이 항상 헷갈려요!!!!ㅠㅠ
유사문제가 같이 정리되어 있어서 한 주제를 깊이 깔끔하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맘에 듭니다. 발해는 자신있습니다. ^^
발해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네요ㅠㅠ
문화 너무어려워요ㅜ.ㅜ
ㅠㅠ 진짜 어렵네요...흑 발해는 !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발해에 관련된 문제로 정리해놓아서 좋았습니다.
도움 많이 됐너요.
첫번째 문제 해설중에
첫줄에 오타가 있네요 '대조영이 세운' 같은데 '대조영이 세우' 라고 적혀 있네요 ㅎㅎ
유물 너무 헷갈리네요. 많은 도움 됫습니다
상경용천부가 발해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맞은 문제지만 더 확실하게 알고자 확인하였습니다. 상경용천부에서 틀렸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