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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수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하였으며
교직 생활 38년 중 건강상의 문제로 부득이 명예퇴직했다.
만성신부전증을 오래 앓다가 남편으로부터 신장을 공여받았다.
휠체어에 실려 글공부를 하러 다녔으며 2019년 격월간 『에세이스트』에 등단하였다.
2024년 <올해의작품상>을 수상했다.
메일: djsh56@hanmail.net
특집 | 화제작가 신간 | 신희수
<대표작>
책 읽어주는 남자 외 2편
책 읽어주는 남자
신희수
퇴직하고 나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기는커녕 말도 어눌해지고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는 바보가 되어갔다.
퇴직한 첫해는 근처 도서관에서 독서달리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참여했다. 그때도 병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고서 정해진 양식에 책 이름, 작가, 읽은 쪽수, 느낌을 손글씨로 조금씩 써서 11월쯤에 제출하면 되었다. 열심히 했더니 구리시장상을 주었다. 종이 한 장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다음 해부터는 그저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침대와 친구하며 지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20여 년 전에 진단받은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되어 투석하게 되었고 신장이식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투석하면서 직장도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는데 난 그냥 누워서 보내기도 힘겨웠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네 시간씩 내 피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며 지냈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았는데 시간이 남아도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좋아하던 책도 먼지만 쌓여갔다. 모든 모임에서 빠졌고 친구들과 연락도 끊었다. 나 스스로 위축되어 안으로 안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칩거 중이던 어느 날 남편이 『에세이스트』를 들고 와 내 곁에 앉았다.
“심심하지? 내가 책을 읽어줄게. 잘 들어 봐.”
수필을 한 편 골라서 읽기 시작했다.
“목 아플 텐데…. 조금만 읽어.”
난 빙긋이 웃으며 책읽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한 문장 한 문장 또박또박 읽고 있는 남편의 낮은 음성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다가 모든 활동을 멈추고 지내는 침전된 삶에 윤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남편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언제 들어와 책을 읽어주려나 기다려지는 것이다.
이식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고 수술 날짜를 받았다. 내가 열흘 먼저 신장내과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받으며 수술준비를 마친 다음 수술 전날 외과 병동으로 옮겼고 남편도 그날 비뇨기과 병동으로 들어왔다. 딸은 나의 병실에, 아들은 남편의 병실에 머물러 우리 가족 모두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로 인해 우리 가족의 삶이 멈추어버렸다.
우린 수술 당일 수술실 입구에서 만났다. 공여자인 남편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늦어지는 바람에 침대에 누운 채로 마주쳤다. 억제하던 감정이 쏟아졌다. 멀쩡한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남편의 콩팥이 나의 뱃속에 들어와 새 친구가 되었다. 3일 동안 집중치료실에서 견딘 후 2인실로 옮겨져 24시간 간호를 받으며 지냈다. 나와 같은 날 수술을 한 젊은 친구는 10일 정도 지나 퇴원했는데 난 거부반응이 와서 적응을 위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다.
우린 혈액형도 다르고 공여자나 수혜자가 나이가 있어서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이식을 위해 검사를 받을 때 남편은 4박5일을 입원했다. 고혈압이나 당뇨는 없지만 고령인데다 1차 검사에서 한 부분이 경계선에 있음이 밝혀지며 수술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때 남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쉬움과 안도감, 두 마음이었을 것 같다. 콩팥 한 개로도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용기를 냈지만 얼마나 두려웠을까? 나도 두 마음이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과 남편의 공여에 대한 부담감이 서로 팽팽했다. 난 줄곧 이식을 거부하다가 ‘10년 혼자 사는 것보다 5년 같이 사는 것이 좋다’는 남편의 말에 설득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겪어온 어려운 과정이 모두 무위가 될까 봐 불안해졌다. 다시 정밀검사를 거쳐 이식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을 땐 그저 기쁘기만 했다.
내가 입원한 병실에서 4명이 퇴원해 나갔다. 난 일어서는 것도 힘든데 혈액형이 같은 가족에게 공여받은 젊은이들은 금방 일어나서 움직였다.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정상인 같은 모습이었다. 난 약병을 주렁주렁 매달고 검사와 치료를 받느라 기진맥진이었다. 남편은 먼저 퇴원해 집으로 갔다. 이제 남편도 무리하거나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등산을 좋아하는데 산책하는 정도만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병원에선 날마다 새벽 3시 30분이면 피를 뽑아갔다. 난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두렵고 떨렸다. 내 몸에 들어온 새 장기가 잘 적응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픔을 참았다. 옆 친구를 보낼 때마다 커튼을 치고 숨죽여 울었다. 그동안 절제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억울하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가, 원망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다. 마음을 바꿨다. 새로운 장기와 대화를 시작했다.
“나에게 와줘서 참 고맙다. 내가 너를 받아들일 테니 나의 친구가 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
거부반응 치료로 내 면역력을 낮추고 독한 약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당이 불안정해졌다. 당뇨가 생겨 인슐린도 맞고 저혈당쇼크로 여러 번 쓰러졌다. 다행히 수술하고 한 달이 지나자 수치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퇴원하게 되었다. 복대를 한 채 아직 정리하지 못한 배액주머니와 주사자국으로 얼룩진 두 팔과 두 다리를 훈장처럼 흔들며 집으로 왔다.
내가 돌아오자 남편의 책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간 맞춰 약을 먹고, 당 체크를 한 후 인슐린을 맞고, 흘러나온 배액 양을 재고 상처를 소독하는 일들이 나와 함께했지만 집은 안정감을 주었다. 읽어주는 책의 내용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에 와서도 1년 정도는 외부인과 접촉을 줄이고 소독하며 마스크를 쓰고 지내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걷기 연습도 하고 공원 산책도 할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만한 기력도 조금 생겼다. 면역이 약한 나는 도서관 책은 안 되고 되도록 새 책을 사서 읽으라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그럴 때 남편이 『에세이스트』를 갖다주었다. 덕분에 『에세이스트』 작가들 이름을 많이 기억하게 되었다. 난 멀쩡한 시간이 짧아서 자주 드러누웠다. 그러면 남편은 어김없이 책을 꺼내 읽어주었다. 힘든 내색없이 열심히 읽었다. 난 들으면서 내용을 상상하며 웃고 울었으며 일정하게 울리는 그의 낮은 음성을 자장가 삼아 잠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재입원했고 약으로 인해 입안이 다 터지고, 바꾼 약이 독하여 음식을 먹지 못해 영양실조가 되는 등, 수시로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냈다. 그래도 수술 후 1년만 칩거하면 외부 활동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견뎠는데 다리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더니 10개월째에는 아예 걸을 수가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고관절괴사가 왔다고 했다. 100명 중 5명 정도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의사는 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다 하냐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면역억제제가 들어가니까 내 몸 안의 바이러스들이 활동을 한 모양이다. 정형외과에선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아예 걸을 수 없다면서 단호했다. 무서운 수술을 또 해야 한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많이 두렵고 서러웠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식받은 신장에 문제가 생길까 봐 그게 더 염려스러웠다.
난 다시 수술대 위에 누웠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다리를 수술하고 24시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생명이 오고 가는 수술을 한 후에도 스스로 화장실 출입이 가능했는데, 걷기 위한 수술은 나를 바보가 되게 했다. 수술 전에도 아팠지만 재활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냥 다리에 문제가 있는 환자가 아니어서 의료진의 집중관리를 받아야 했다. 화장실 한 번 가려면 두 명이 움직여야 했고 다녀오면 힘이 들어 한나절을 누워있어야 했다. 나는 방광이 작아 다른 사람보다 자주 볼일을 봐야 해서 간병하는 가족들의 고생이 많았다. 가장 기본적인 일마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생활은 인간의 존엄성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내려놓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경험했다.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를 휠체어에 태워 밖으로 데려다주었다. 공원을 산책하고 한강 둔치로도 나갔다. 그때마다 그의 손엔 어김없이 책이 들려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듣는 남편의 책 읽는 소리는 서글픈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고 살아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나의 유일한 나들이인 수필반에도 그의 도움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무거운 휠체어를 차에 싣고 먼 거리 운전하여 나를 데리고 다니며 늘 듬직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주었다.
세 번의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낸 3년의 시간은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조용한 병실과 집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누워있을 때,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때맞춰 찌르는 주사와 투약과 식사뿐이었다. 그가 책을 읽어주지 않았으면 난 그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책 읽는 소리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자주 입원하는 병원에서도 커튼을 닫고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누워있어도 나의 귀는 행복했다. 남편이 주로 읽은 책은 수필, 성경, 시집이었다. 내용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끙끙 앓으며 참고 있는 나에게 고통을 이기게 해주는 보약이었고 빨리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치료제였다. 장소를 불문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귀로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 걸어다닐 수 있다. 퇴직하고 병과 싸우던 시간이 5년째가 되었다. 난 기초체력이 약해 작은 변화에도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인데다 이제부터 평생토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요주의환자로 분류되어 주치의 선생님의 호출이 잦다. 수시로 병원에 다니며 조심조심 살아야 하지만 조금씩 외부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남편은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했는데 사투리가 심해서 적응에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 발음교정을 위해 국어책을 천천히 소리를 내어 읽었더니 또박또박 말하는 훈련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이 들어 아픈 내가 그 혜택을 보고 있다. 남편의 책읽기는 모든 능력이 퇴화하며 바보가 되어가는 나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고 기억을 회복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도리어 듣는 사람이 되었다. 먼저 퇴직한 남편은 나와 함께할 것들을 공책에 적으며 기다렸다는데 아직까지 시도도 못했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아내가 기운 없이 누워있는 침대 곁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늘 씩씩하고 밝던 남편이 새벽마다 묵직하게 앉아 기도에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의 꾸부정한 뒷모습은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나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해야 했던 그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그는 먼 데 여행을 포기하고 그 자신의 깊은 곳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요즘 우리 집에 책 읽는 소리가 그쳤다. 대신에 남편은 이어폰을 끼고 경제나 바둑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 책이 배달되면 바로 나에게 전달한다.
“책 안 읽어 줘?”
남편은 그냥 씩 웃는다.
“이제 당신이 읽어 봐. 내가 들을게.”
나도 웃으며 책을 펴고 소리를 내어 읽어본다. 처음엔 또박또박 읽는데 바로 웅얼웅얼거리다가 멈추곤 한다. 쉽지 않다. 남편은 잘도 읽어주었는데….
책을 스스로 읽게 된 것이 감사하지만 차분하게 들려주던 그 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주었던 그 시간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오래오래 기억하고픈 순간들이다.
한 개의 신장으로 살고 있는 남편은 다시 바빠졌다. 아침마다 내가 차리는 식사를 하고 나가는 뒷모습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남편을 배웅하고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금방 지치고 발음이 꼬여 버벅거리지만 나의 바램대로 책읽기 봉사를 할 기회가 오려나 기대하며 소리 내어 읽어본다.
아픔은 생존이다
신희수
한 달을 누워있어 근육이 사라져버린 몸으로 퇴원을 했다. 정상인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아기가 자라는 과정을 겪으며 재활을 하고 있다. 아직 뒤뚱뒤뚱 걷지만 용기를 내서 혼자 공원에 나갔다. 벚꽃은 다 지고 철쭉이 활짝 피었고 이팝나무꽃도 예쁘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을 날을 그리며 산책로를 따라 힘을 내어 걸었다.
장미정원을 지나 좁은 물길 위에 세워진 다리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계신 할아버지를 보았다. 예전에 ‘넓고 좋은 곳 많은데 하필 이곳에서 하실까?’ 의아해하며 지나쳤는데 오늘도 팔다리를 흔들고 계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움직이셨다. ‘나 이렇게 살아있어’라고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나는 그분의 어설픈 동작도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어서 부럽기만 했다.
계속 걸어가는데 카톡에 무언가 올라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전화기를 열었다. ‘○○○ 소천’이란 문자가 왔다. “아~”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이렇게 황망하게 가시다니 너무 놀라서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분은 나랑 같이 근무를 한 선배로 3개월에 한 번씩 만남을 갖고 있었다. 코로나로 만남이 없다가 지난가을에 만났다. 그런데 풍성했던 몸은 간데없고 살이 쭉 빠져 날씬한 몸매로 나타나셨다. 우린 다이어트 성공을 축하한다고 호들갑을 떨며 맞이했다.
“그러지 마. 나 투석을 하고 있어.”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
우린 모두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뇨합병증으로 신장이 나빠졌단다. 그런데도 여전히 농사를 짓고 탁구도 친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기초체력이 좋아 잘 견디나 보다 생각하며 투석할 때 누워있기만 했던 나는 그 어려움을 잘 알기에 손을 꼭 잡아드렸다.
이번 3월 모임엔 근처에 사는 선배님이 비틀거리는 나를 데리고 가 주셔서 참석했다. 그런데 그분이 오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머물다가 일반병실로 옮기셨단다. 투석하던 혈관이 막혔는데 회복 중이라 했다. 우리는 다음 모임엔 뵙겠구나, 기대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 뒤 더 이상 볼 수 없는 소식이 전해져서 가슴이 먹먹했다. 우린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했었는데 작년 가을에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몇 년 전 추운 겨울 새벽에 뇌출혈로 갑자기 떠나버린 친구가 생각났다. 그녀는 나의 만성신부전이 악화되어 힘들어할 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녀보다 내가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며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처럼 존재했던 그들은 그리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난 작년 연말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코로나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죽음과 마주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음압병실에 격리되었다. 주사와 약물, 인공호흡기 등의 각종 기계가 나의 생명을 연장해주고 있었지만 어떤 처치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의식이 선명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의료진의 손길에 맡겨진 채 시간이 흘렀다. 어쩌다 눈을 뜨면 작고 힘없는 종이인형이 가냘픈 숨을 쉬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정말 죽고 사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시간에는 나의 삶이 없었다. 세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구별이 어려웠다. 의식을 차리니 아픈 것이 느껴지고 불편한 것이 생기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아프다는 외마디 소리도 재활하면서 표현할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이 보였다. 스스로 선택을 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내 눈앞에 전개되었다. 고통이 있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걸 절감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의 조건으로 다가왔다. 인생은 코미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를 했다. 나보고 많이 아팠는데도 얼굴이 좋아졌다며 보톡스를 맞았냐고 물었다. 분명 나를 기분좋게 하려는 말이었지만 난 기분이 상했다. 나는 약 때문에 살이 쪘고 얼굴이 커졌다. 10여 년 전 면역억제제를 먹기 시작했을 때 얼굴이 둥근 보름달이 되고 뚱뚱해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갑자기 10Kg 정도 늘어서 늘 보던 사람들도 아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기 전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기만 했었다. 난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고 많이 슬펐었다. 순간 그때의 우울감과 위축되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약부작용으로 인한 빵순이 얼굴을 다 잊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적은 양을 먹어서 덜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나도 내가 낯설다.
나의 회복속도에 맞추어 활동 범위가 넓어지니 자리마다 비슷한 질문이 오고 간다. 많이 아팠으니 비쩍 말라 있으리라 생각하나보다.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편한 사람들이라 긴장이 풀렸는지 나도 모르게 예민반응이 나왔다. 표정이 굳었고 퉁명스런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보톡스 좀 맞아보면 좋겠다….”
순간 서먹해진 분위기가 되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표정을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 이런 작은 마음의 상처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살아있으니 겪는 거겠구나.’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오랜 기간 만나며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아픔일 테니까. 살아있음으로 느끼는 작은 상처들도 스스로 온전히 견뎌야 하는 것인데. 내가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약 덕분에 주름이 없어서 젊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나는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환하게 웃어주었다. 삶이란 이런 작은 어울림들이 모여서 반짝이는 거겠지.
산책길의 공원 경계에 망초꽃이 가득하다. 다른 꽃으로 대체되면서 베어져 버려지는데도 살아남아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다. 어려움 속에서도 환하게 꽃을 피워내는 망초. 여리고 가냘프지만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산다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 내 삶의 터전에서 망초처럼 살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내 생명이 언제 꺾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주어진 삶을 나로서 살아낼 의무가 있음을 안다. 부족하고 연약한 현재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이름 한 번 더 불러주고 따뜻한 미소 한 번 더 날려주어야겠다.
기운을 내어 걷는 나를 바라보며 망초꽃이 힘내라 하며 예쁘게 웃어준다.
기도응답
신희수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렸다. 무겁고 시끄럽다. 이제 바꿀 때가 되긴 한 것 같다. 20여 년이 되었으니…. 요즘 나오는 청소기는 소리도 없고 가볍고 종류도 다양하다.
어머니는 기도를 열심히 하셨다. 항상 커다란 소리로 나라와 민족, 가족, 어머니와 관계된 사람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셨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남편과 재산을 다 잃은 고통을 겪으신 어머님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정이 가장 큰 기도목록이었다. 날마다 2시 30분이면 어느 곳이든 장소를 불문하고 무릎을 꿇으셨다. 다음에는 가족을 위한 기도로 세 아들과 그 가족들의 건강과 일터에 관한 기도였다. 큰시숙님이 기원(棋院)을 하다가 문을 닫게 되었는데 가게가 빨리 정리되지 않아 고민을 하셨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날마다 집에서 제법 떨어진 노량진 쪽에 있던 기원까지 직접 가셔서 문고리를 잡고 기도를 하셨다. 바쁘셨지만 먼 거리를 힘들어 하지 않고 버스로 이동하셔서 기도를 하셨다. 남편의 투자실수로 당시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금전적인 손실이 발생했을 때도 쉬지 않고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어머니 살아계시는 동안 우리 집에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우리 가족에겐 일상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난 솔직하고 구체적인 어머니의 기도 내용을 거의 알게 되었다. 그 중에는 어머니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았다.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해결해드렸다. 시간을 들여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고 매달 드리는 어머니의 용돈 범위 안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들도 있었다. 나는 힘들이지 않고 웃으며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는 가끔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데 제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약정을 하고 외치셨다. 한 집에 살면서 어머니의 기도를 듣는 사람은 우리 가족이고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듣는 사람은 나였다. 가끔 남편 친구들이 오면 용돈을 드렸는데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필요로 하시는 만큼 전달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는 감사기도를 하셨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심을…. 그런데 큰 금액이 필요한 요청을 큰소리로 외치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듣는 나를 괴롭게 했다. 날마다 외침을 들으면서 그것을 해결할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했다. 어머니는 수입이 없으니 결국 자녀들 몫인데 형님들은 멀리 계시니까 알 리가 없고 그럼 우리인데….
‘젊은 사람들이 하면 되는데 자녀용돈으로 생활하는 80대 어머니는 굳이 본인이 하려고 하실까? 형님들 계실 때 말씀하시지….’ 쉬지 않고 365일 기도를 하시는 부지런한 어머니의 신앙생활은 본받을 점이었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건 내 몫이라는 것에 가끔 의문이 일고 회의도 있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들리는 지속적인 귀울림은 나를 지치게 했고 나의 통장을 열게 했다. 모질지 못한 나는 힘겹게 모은 돈을 하얀 봉투에 넣어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원하시는 것 하세요”
내가 편하기 위해서였다. 하여튼 어머니는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간절히 외치셨고 그 외침에 대하여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어머니가 얄밉기도 했다.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어머니께 목돈을 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병가를 내고 잠시 집에서 쉬어야 했다. 모처럼 집에 있으니 별의별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중에 청소기 파는 사람이 있었다. 크고 성능도 좋아 보이는 외제 청소기였다. 난 그런 청소기를 처음 보았다. 당시 우리 집에는 우리나라 회사에서 나온 청소기가 수명을 다하고 있어 바꿀까 하던 때였다. 청소기의 기능과 사용방법을 설명하는 데 혹하였다. 특히 침대의 진드기 청소에 탁월하다는 말이 나를 흔들었다. 딸이 아토피가 있는데 침구를 깔끔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값이 엄청 비쌌다. 국산의 7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내가 어머니께 드린 돈의 두 배였다. ‘내가 속는 것이 아닌가? 또 속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는데….’ 고민을 하는 동안 청소기 아저씨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며 구슬렀다.
“다른 사람도 다 써요. 사모님 정도면 이런 것을 쓰셔야지~”
‘그래,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청소기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 하나?’불분명한 대상을 향해 괜한 질투심이 생겼다. 어머니께 자발적으로 드리고 마음이 편치 못했던 나는, 결국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거금을 주고 청소기를 구입했다. 식구들에겐 좋은 청소기를 싸게 샀다고 둘러댔다.
어느 날 가게에 갔더니 내가 산 청소기와 같은 것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크더라니, 업소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청소기였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소기 성능은 좋았다. 무겁고 커서 사용할 때 좀 불편하지만 용량이 커서 필터교환이나 청소기 비우는 작업은 석 달에 한 번 정도 해도 된다. 게으른 나에게 딱 맞는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침구류의 진드기 청소는 거의 하지 못했다. 용구를 바꾸어서 사용해야 하는데 게을러서 늘 쓰던 것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청소기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나고 기도소리가 떠오른다. 내가 스스로 드려놓고 그에 대한 반감으로 구입했던 비싼 청소기가 아직까지 내 곁에 있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엉뚱한 보상심리로 예상하지 못한 지출을 하고 한동안 절약하느라 힘들었던 그 가을이 생각난다. 며느리의 애틋한 마음을 움직여서 문제해결을 보았지만 기도응답이라 감사했던 어머니의 순수한 믿음이 생각난다. 어머니 생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되던 어머니의 기도가 우리 가정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집안이 떠나가게 쩌렁쩌렁 울리던 기도소리가 새삼 그립다.
그런데 항상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소원이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생전에 어머니가 약속한 헌금이 있었는데 3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장례가 끝났을 때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어머님은 본인의 조의금은 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가족들의 다른 의견도 있었지만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지낸 내가 주장하여 어머님의 약속이었던 300만 원을 헌금하였다. 실제 조의금의 소유권은 자녀의 것이 아니라 고인의 것일 테니까. 이로서 어머니의 미완성 기도도 응답된 것이겠죠?
난 아직도 생각이 많아 조용히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기도를 한다. 어머니의 외치는 기도는 막내며느리가 들어드림으로써 응답받으셨는데, 내가 용기내어 큰소리로 기도를 외친들 들어줄 며느리는 어디에 있는지….
결혼이야기만 꺼내면 40이 다 된 아들은 오늘도 딴청을 부린다.
신희수 론 | 김종완
서사(敍事, narrative)를 위하여
김 종 완(문학평론가, 격월간 에세이스트 발행인)
전편: 인생은 서사다(Life is a narrative)
신희수의 수필집 『책 읽어주는 님자』는 자전수필인데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야기다. 하나는 투병(闘病)기이고, 또 하나는 그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다 ―그런 거야 수필 독자라면 익숙하지! 크게 아팠나보군. 뭐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어?― 사실은 작가 신희수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니까요. 난 읽다가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고, 목이 막혔고… 감명받았어요. 근래에 읽은 수필 중 가장 감동이 컸어요. 무엇이 나를 이렇게나 감동시키는지 곰곰 생각하게 돼요.” 그러나 그녀는 좀체 입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고집이 쇠심줄이다. 누가 나에게 그녀의 수필집을 읽은 독후감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다. “사람이 얼마나 이쁜지, 착하다는 게, 순하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았어요. 그분을 보면 삶이란 살만한 것이더라고요.”
수필집 첫 장에 실린 작품이 「새롭게 쓰고 싶어」다. 만성신부전으로 오랜 세월을 앓다가 급기야 투석하게 된 첫날, 그녀가 빌었던 소원이다. 난 ‘다시 살고 싶다’가 아니라 ‘다시 쓰고 싶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무렵 난 한나 아렌트(1906~1975년)에 관해 읽고 있었는데 아렌트의 제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토론토대학의 초대로 <한나 아헨트>라는 제목으로 몇 주에 걸쳐 특강했던 원고다. 아렌트는 ‘삶은 하나의 이야기(서사)이다(Life is a narrative)’라고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스토리(story)도 내러티브(narrative)도 우리말로 모두 이야기라 옮기지만, 스토리는 보다 한정된 개념으로 사건(events) 그대로만을 서술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내러티브는 스토리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인 실제 또는 허구적 사건의 연속적인 연결을 의미하며, 그 속에는 다양한 시각, 관습, 체계, 가치, 담화,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스토리가 연합하여, 커져서 서사(내러티브)가 된다. 서사(narrative)란 스토리(story)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배치 전개한 종합 구조물이다. 작가가 새롭게 만든 세계다. 스토리가 새롭게 확대 편집된 가공물이다. 그래서 내러티브를 서사물, 서사된 것들의 결과물 즉 소설이나 영화 연극 수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의할 일은 내러티브라고 말해야 할 때도 스토리로 그냥 표현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엄청 고생하며 살았다는 의미로 흔히 하는 말이 ‘내 살아온 이야길 글로 쓴다면 장편소설 서너 권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 소설을 의미할까? 결론을 말하면 이 말은 부분만 맞다. 그들이 하는 말을 글로 그대로 옮긴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게 아니다. story가 소설이 되는 결정적인 게 있다. 서사화되는 과정에 중심을 둔 말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야기(서사)의 원형으로 삼는 게 소설의 꾸며낸 이야기(픽션)가 아니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벤야민은 이야기의 몰락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가 근대 초기 소설이 등장했을 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야기는 경험을 먹고 자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이야기의 서술자는 이야기할 내용을 경험에서 얻는다. 꾸며낸 이야기(픽션)이기에 경험이, 역사성이 없을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사실 난 이 점에서 소설과 다른 수필의 미래를 기약한다. ‘지어 쓰지 않은 내가 겪은 이야기’라는 수필의 정의는 호메로스로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의 원류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바로 벤야민이 꾸며낸 이야기인 소설의 등장이 이야기의 경험성과 역사성을 결정적으로 손상시켰다고 말하는 이유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소설)의 종언은 꾸며낸 픽션의 종언일 뿐 이야기(내러티브)의 종언이 아닌 것이다. 21세기는 진정한 서사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한병철은 스토리는 정보에 기반을 두고, 내러티브는 지식에 기반을 둔다고 하며 현대는 순간적인 정보의 범람으로 오랜 시간성을 요하는 지식의 위기이며, 그리하여 서사의 위기라고 한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스토리가 내러티브로 되는 그 결정적 과정이다. 그것을 서사화라 하자. 바로 이것이 아랜트가 ‘삶은 하나의 이야기(Life is a narrative)’ 즉 서사라고 정의할 수 있었던 근거다. 그리고 서사의 위기인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한 서사를 다시 찾는 것은 서사화를 일상의 삶에서 만드는 일이다.
서사화의 첫 단계는 주체성이다. 삶이란 살다보면 누구나 길고 긴, 왈 장편성을 갖게 된다(장편소설을 쓴다니까). 대개의 이야기는 지리멸렬하고 지루할 것이다. 그걸 서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발화자가 있어야 한다. 발화자는 시선의 출발점이며 주인이다. 그 시선에 의하여 세상은 정리되어 펼쳐질 것이다. 내가 “주체성이 흔들리는 이 시대에 수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첫째 이유로 ‘수필이 자기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우주를 가진다는 말은 각자의 고유한 주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마가 8:36).
그 주체성이 확립되어 세상을 자기의 시선으로 읽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세상을 갖기 시작한다. 바로 그게 스토리를 내 이야기(내러티브)로 환원하는 서사화이다. 서사가 널 구원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구원이란 죽어 천국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공수표가 아니라, 과정에 중점을 둔 ‘요게 천국 아녀!’라는 현재형의 천국이다.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는 ”예수가 핍박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며 즐겼던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었다고, 그는 살아서 지상에 천국을 이뤘다고 했다. 천국은 삶의 과정에 있다. 전태일이 어린 시다바리들과 어울려 노동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풀빵을 나눠 먹던 그때 그 자리가 천국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마가복음 8장이 예수 공생애 3년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관(観)과 유태교의 전통적인 메시아관과의 충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의 유대교에선 메시아는 불로 심판하여 쭉쟁이는 불로 다 태워 죽이고 알곡들만으로 천년왕국을 누리고 사는 거였다. 그런데 메시아란 자가 하는 말이 심판은커녕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들의 손에 죽으러 왔다니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이건 예수의 처형장에 예수 제자들이 흩어져 보이지 않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처형장 앞에 선 예수와 1·2차 대전을 겪은 후 인간에게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특히나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겪은 당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황폐함은 맥락적으로 상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황폐함을 발판 삼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몸을 떨었기에 한나 아렌트와 같은 새로운 지성이 등장했다. 만성신부전으로 생명의 밑바닥인 투석 단계로까지 떨어졌건만 다시 출발을 다짐하는 신희수도 나에게는 똑같아 보인다. 누군가는 말이 안 된다고, 어디 감히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가 분노할 수도 있다. 맞다, 그렇다. 그런데 난 예수님도 한나 아렌트 선생도 신희수와 자기를 비유한 걸 용서할 것 같다. 아니 잘했다고 할 것 같다. 예수의 사랑도, 아렌트가 말하는 서사(a narrative)도 요즘 내가 강조하는 아이러니도, 문학화도 어디에서는 다 만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삶의 이치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단어로 굳이 표명한다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무(無)다, 공(空)이다, 선(禅)이다, 사랑이다 등등. 어찌 서사라고는 못 할까. 일신(日新) 또(又) 일신하는 삶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천국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
이 책 전부를 통해서 가장 인상 깊은 한 문장을 골라 뽑으라 하면 난 망설이지 않고 뽑을 수 있다. 아내가 마침내 신장투석의 단계에 이르자 남편은 바로 자기 신장을 이식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아내는 이식을 거부했고 그때 남편은 말한다.
“10년 혼자 사는 것보다 난 5년 당신과 같이 사는 게 좋아!”
숱한 사랑의 맹세와 고백이 흘러넘치는 세상이지만, 난 이처럼 진실하고 절절한 사랑의 고백, 사랑의 맹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야기(narrative)를 가장 이야기스럽게 하는 힘은 경험과 그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역사성이다. 이들 부부의 절실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난 이럴 때, 이런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는 내 삶이 그런대로 성공한 것 같다. 이 마당에 웬 성공 타령이냐고? 면목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난 요즘 근 3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렇게 사는 내 꼬락서니가 참 미안해서 이렇게라도 그분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공헌한 바가 한둘이 아니겠으나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매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숱한 격언들처럼 상투적으로 듣고 흘렸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삶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었고 미래의 어떤 날도 힘들지 않은 날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욕망을 품고 사는 동물인 이상 항상 과도하게 꿈꾸고 그래서 허덕이고 좌절한다. 세상은 좌절하고 실패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실패한 자들 덕분에 돌아간다. 그런데 내가 실패한 당사자로 허덕이고 있는데, 매사에 감사하라고? 누구 약 올려? 나도 감사하며 살고 싶다고, 그런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잖아? 하지만 감사하기 선수들은 다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부모님 품에 안겨 투석실로 왔다. 이 아기가 무슨 일로 이런 고통을 견디며 살게 되었을까? 어른은 4시간이지만 아기는 더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단다. 난 나의 아픔보다 그 아이의 모습이 마음 아파서 눈물이 났다. 보살피는 부모에게도 마음이 쓰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가 60년이나 멀쩡하게 살았으니 참 감사한 인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상황을 다행이라 생각하다니. 나도 참 이기적인 사람같아 좀 부끄러웠다.
―「새롭게 쓰고 싶어」 중에서
남의 불행을 보며 나의 행운에 감사했다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감사할 줄 아는 것,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마음 아파할 줄 아는 것, 슬퍼할 줄 아는 것, 가진 걸 나눌 줄 아는 것,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진화다.
상업적 스토리텔링에 중독된 현대인은 감정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슬픔도 기쁨도 과도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해방된, 아니 물든 적이 없이 담담하게 넘기는 가족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남편의 이식 제안을 받은 후] 가족들은 다 내려놓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나를 보며 힘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 아이들과 남편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나를 돌보았다. 결코 난 혼자가 아니었다. (…) 가족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인생을 새롭게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새롭게 쓰고 싶어」 중에서
남편은 적극적으로 자기 신장을 제공하겠다고 이식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나이 든 남편이 지금이야 건강하다지만 미구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고 그러면 신장 하나보다 둘로 버티는 게 더 유리할 것이고, 아니 그보다 남편에게 무리한 희생을 치르게 하면서까지 굳이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투석으로 얼마동안 버티다가 그게 한계에 이르면 그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게 차라리 아름다운 일인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가족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앞당겨 이별의 슬픔을 남기기 싫어서였다. 그게 사랑이다. 그 사랑이 이식수술을 받을 결심을 세워줬다. “인생을 새롭게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식 수술 후] 셋째 날이 되어서야 눈을 뜨고 모기만 한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하게 되었다. 이제 물은 마셔도 된다고 했다. (…) 이제야 남편 생각이 났다. 나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었다. 얼마나 아플까? 언제쯤 얼굴을 볼 수 있나? (…) 참 인간은 이기적이다.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는 기억도 없었는데 좀 살만하니 남편의 고통이 보인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그려진다. (…) 4일째 죽이 나왔다. 조금 먹었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아프고 나무늘보처럼 엄청 느리지만 2인실로 가는데 내 발로 걸어서 움직였다. (…) 어서 일어나 남편의 얼굴도 보러 가고 싶다.
―「집중치료실 3일」 중에서
수술이 성공리에 끝나 살아났다. 그러나 끝난 게 아니다. 새로 들어온 신장을 자기 면역체계가 거부했다.
젊은 친구는 10일 정도 지나 퇴원했는데 난 거부반응이 와서 적응을 위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다. 우린 혈액형도 다르고 공여자나 수혜자가 나이가 있어서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나 하는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 마음을 바꿨다. 새로운 장기와 대화를 시작했다. ‘나에게 와 줘서 참 고맙다. 내가 너를 받아들일 테니 나의 친구가 되어 함께 잘살아보자.’ 거부반응 치료로 내 면역을 낮추고 독한 약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당이 불안정해졌다. 당뇨가 생겨 인슐린도 맞고 저혈당쇼크로 여러 번 쓰러졌다. 다행히 수술하고 한 달이 지나자 수치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퇴원하게 되었다. 복대를 한 채 아직 정리하지 못한 배액주머니와 주사자국으로 얼룩진 두 팔과 두 다리를 훈장으로 흔들며 집으로 왔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 남편의 책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퇴원했고 남편의 책 읽어주는 소리가 다시 들리자 당신은 ‘아, 이젠 평화!’가 절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다. 이 가족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 일상의 무탈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새삼 깨닫는다. 휴전은 아직 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수술 후 1년만 칩거하면 외부 활동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견뎠는데 다리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더니 10개월째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고관절괴사가 왔다고 했다. (…) 면역억제제로 인해 내 몸의 바이러스가 활동을 하여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입원해야 했고 약으로 인해 입안이 다 터지고, 바꾼 약이 독하여 음식을 먹지 못해 영양실조가 되는 등 수시로 입퇴원을 하며 지내야 했다. 정형외과에 가니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아예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수술을 또 해야 한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많이 두렵고 서러웠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고관절 수술을 했다. 그리고 오랜 재활 훈련을 했다.
가장 기본적인 일마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생활은 인간의 존엄성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내려놓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었다. (…)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경험했다.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세 번의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낸 3년의 시간은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그러나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던 나에게 남편의 책 읽는 소리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자주 입원하는 병원에서도 커튼을 닫고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책을 읽었다.” 그땐 실감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3자가 보니 모든 게 기적이다.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이 조용히 잠 좀 잡시다, 라고 하지 않는 것도, TV를 켜지 않는 것도 하나님 가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속없는 어떤 여자는 이 부부의 금슬이 부러워 남편이 책만 읽어준다면 나도 입원하겠다고 나서기도 하겠다.
호모사피엔스가 진화한다면 지략적인 부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부문일 것이다. 그만큼 진화해야 할 여지가 있다. 기뻐하는 법, 슬퍼하는 법, 감사하는 법, 사랑하는 것들과 말을 통하는 법, 행복을 느끼는 법 등등. 화자는 이 부문에 특화된 사람이다. 타고났다.
새로 몸에 들어 온 신장을 면역체계가 공격하는 거부반응이 나타났을 때 화자가 하는 일은 새 신장(내 몸)과 대화 나누기다. 새로 온 신장에게 새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난 어릴 때부터 기분이 안 좋거나 야단을 맞았을 때 혼자 주변 사물과 대화를 하며 풀곤 했다. 광 속의 곡식 자루, 부엌의 부지깽이, 장독대의 항아리 등이 친구가 되어 나의 하소연과 푸념을 받아주었다. 누에를 키울 때는 뽕잎 따는 것이 귀찮아서 뽕나무 위로 도망가곤 했다. 그때는 뽕나무 품에 안겨 이야기를 했다. 공부할 때도 지루해지면 천장이랑, 공책, 방바닥, 연필 등등 나의 눈에 뜨이는 것들과 친구가 되어 시간을 보냈다.
―「새콩이」 중에서
대화의 대상이 생물에 국한되지 않았다. 광물도 대상이 된다. 이쯤이면 혼자 놀기의 대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무한히 행복하기도 하다.
오남매의 장녀였던 나는 동생들을 돌보며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동생을 업고 손잡고 이리저리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난 혼자 노래를 지어 부르며 동생도 달래고 하기 싫은 심부름으로 짜증 나는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산에서는 새들이 내 노래에 화답해주었다. 이름도 모르는 새들의 소리는 하루종일 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 긴 소리, 짧은 소리 등 아주 다양하게 들려주었다. 혼자 부르거나 끼리끼리 부르거나 여러 새가 어울려 합창을 하는 새들의 연주는 행복한 순간이 되었다. 나는 새들의 소리를 흉내내며 시간을 보냈다. 수시로 들려오던 새들의 노랫소리는 나를 상상의 세계로 데려갔고 시골을 떠난 후 늘 듣고 싶은 소리가 되어 그리워하곤 했다.
―「아침의 노래」 중에서
내가 화자를 진화된 호모사피엔스라 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진화의 방향은 우울하기 쉽게가 아니라 행복하기 쉽게여야 한다. 화자는 혼자 가만두면 지루해하지 않고 행복해질 사람이다. 진화족(進化族)임에 틀림없다. 그 진화족이 후회를 한다. 라깡이 말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고. 가장 이성적이라던 독일 민족이 어떻게 열렬한 나치당원이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릭 프롬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선언 이후 결정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 곧 본인이 되면서 그 책무를 감당할 수 없어 판단의 주체를 예전 신의 자리에 국가를 세운 것이라 했다. 모든 결정과 판단을 신에 맡기고 오직 믿기만 했던 중세가 얼마나 좋았던가! 하고 그때로 돌아갔던 것이다.
항상 웃으며 행복한 척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내 마음이 유리그릇이었나보다. 돌이켜보면 그 그릇조차도 내가 만든 것이다. 성인군자도 아니면서 다 짊어지려고 했던 오만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유리그릇.
―「유리그릇」 중에서
“다 짊어지려 했던” 걸 오만과 비겁함이라 했다. 이 말만 가지고 토론해도 하룻밤은 새워야 할 것이다. 자신을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이라 한 것도 이 작가의 내공의 깊고 단단함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나름 처방전이다.
이제 기쁨도 슬픔도 힘겨움도 나누면서 살아야겠다. 혼자서 짊어지겠다고 하는 위선에서 벗어나야겠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또 후회할지 모르지만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자책보다는 위로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유리그릇」 중에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와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한다.
비록 유리그릇이지만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잘 버텨준 나의 그릇에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에게 도전장을 던져보려 한다. 마음의 유리그릇을 미련없이 깨뜨리겠다고. 내 몸이 강화유리처럼 단단해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유리그릇」 중에서
행여 깨질까 조심조심하며 지켜온 유리그릇을 이젠 부러 깨부수겠다는 새로운 다짐에 필자는 깜짝 놀란다. 그게 오만과 비겁이라 말할 때 그건 언젠가 스스로 깨부수고 넘어야 할 장벽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부가 이 정도의 역경을 겪었으니, 역경은 이제 그만! 일 것 같았다. 한 개인이 겪은 고난은 쿼터제여서 일정량 이상은 겪지 않게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공정하지. 그럴 리가 있나? 하느님이 공정하다고 어디 쓰여있기라도 하나? 공정이란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찾아낸 인간사회 규약이다. 하느님은 패던 놈만 패는 분 아니던가? 이런 부당함을 인간이 보다보다 더는 볼 수 없어서 찾아낸 규약이 공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광풍이 수그러들면서 정작 중증 환자들이 늘어가던 때, 화자는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았다. 우린 코로나가 끝물이고, 워낙 신경을 쓰는 상황이라 큰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구급차로 실려 간 대학병원에서 결국은 환자의 모든 의무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던 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고,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며, 하루에 한 번씩 병실 간호사의 브리핑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 부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했다.
4명의 구급대원이 데리고 간 것까지 기억을 하고 나의 시간은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동화 속 장면처럼 꾸며진 유리방 안에 혼자 온갖 기계를 달고 누워있었다. (…) 주렁주렁 연결된 관들이 나의 생명줄이었다. 내가 의식 없는 긴 시간동안 다양한 처치가 있었고 (…)난 살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 잘 이겨내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내가 깨어날 때마다 아주 단순한 질문들을 하며 나의 정신상태를 확인했다. 간호사의 이름을 알려주고 묻는데 난 대답하지 못했다. 날짜도 다 틀렸다. 꼭 기억해야지 하고 결심했던 간호사들의 이름도 다 잊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호흡을 하게 되었고 기계가 하나씩 떼어지더니 일반병실로 가게 되었다고 간호사와 의사가 기뻐해주었다.
―「11월 20일」 중에서
이런 와중에서도 간호사의 이름을 꼭 기억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맞히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고마운 사람의 이름은 기억이라도 해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잊어버렸다.
일반병실로 옮겨진 후 남편이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살아와 줘서 고맙다고. 남편이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이다. (…) 난 그때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본능만 남아있는 내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쁜 숨만 쉬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의 주치의와 간호사가 살아왔다고, 고생했다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받은 전화기 사용법이 기억나지 않아서 이틀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정말 정신도 몸도 아기가 되어버렸다.
일반병실에서 일주일을 머무른 후 퇴원을 했다.―「11월 20일」 중에서
다음은 화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단면이다.
“어? 눈 뜨셨네. 오늘이 며칠일까요? 11월 20일이에요. 오늘이 며칠이지요?” 간호사가 웃으며 날짜를 확인했다. 나는 멍하니 눈만 뻐끔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순간 ‘11월 20일? 아, 세종문화회관’이 떠올랐다. 그날은 내가 3층 하늘석이었지만 티켓을 구했다는 기쁨으로 엄청나게 흥분하며 두 달을 손가락꼽고 기다린 날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간호사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소리가 나지 않는 입으로 ‘콘서트 가기로 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한 간호사는 조그만 판대기 같은 걸 주면서 쓰라고 했다.
“와~ 멋지시다. 누구 콘서트에요?”
“○○○에요.”
“아, 저도 알아요. 제가 그 분 노래를 틀어 드릴 테니 마음 가라앉히세요.”
간호사는 안타까워하며 컴퓨터로 노래를 듣게 해주었다.
―「11월 20일」 중에서
이런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유지하는 이가 있다. 그 내면은 순수하고 온화하고 평화롭다.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행운이다. 간호사도 진정으로 행복했겠다.
신생아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집은 나의 재활을 위한 곳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아들은 쭈글쭈글하고 퉁퉁 부은 발을 정성껏 씻어주고 침대에 눕혀주었다. 또 한 번의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
“살아와 주어서 고마워. 당신이 45% 회복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날 위중증 461명 4명 감소라는 자막이 떴어. ‘저 중에 1명이 내 마누라겠구나’ 생각을 했지. 무심히 흘리던 자막이 그냥 보이지 않게 되더군.”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던 남편의 말 속에 내가 격리되어있는 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짐작되었다. 몸의 일부분을 쓰지 못하더라도 살기만 하라고, 업고 다닐 거라고 기도했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행복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살아만 다오」 중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 부부다. 행복하려면 사랑하라. 사람이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연인끼리의 사랑이 유동성 때문에 ‘안타까운(전쟁 같은) 사랑’이 되기 십상이라면, 결혼한 부부의 사랑은 ‘뿌리 깊은 나무의 사랑’이다. 그걸 이 부부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혼이 사랑의 무덤인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연옥의 투병 기간이 마치 두 분의 연애행각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사랑의 놀라운 힘이다. 아프면 아플수록 사랑은 절정을 향해 나간다. 영화 《타이타닉》의 절정 못지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그 사랑이 10대 20대의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 잃어버린 게 더 크게 느껴지는 허상(픽션)의 사랑이었다면, 반면에 이건 실제로 이루어진 리얼한 사랑이다. 그래서 이야기(narrative)가 되었다.
벤야민이 일찍이 간파했다. 이야기(narrative)의 진정한 힘은 픽션이 아니라 경험의 힘, 역사성이라 했다. 이 부부가 사랑의 이야기를 제대로 썼다. 문학을 제대로 한 것이다. 이야기(narrative)를 어떻게 하냐고? 이렇게 자기가 겪은 사건을 ‘서사화’한다. 서사화가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거칠게라도 이 작품을 들어 설명하면 투병(闘病)기가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다. 발효되어 다른 무엇으로 변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공한 이야기(narrative) 되기다. 난 안다. 그 변화가 사람을 실제로 키워버린다는 걸. 화자는 이 글을 쓰기 전과 후가 달라졌다. 독자 또한 그런 변화를 몸소 느낄 것이다. 그래서 서사화된 이야기는 살아 행동하는 위대한 문학이다. 그들이 호머의 이야기를 이야기의 원류로 삼는 이유이다. 그러자 한나 아렌트의 인생은 서사다(Life is a narrative)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 같았다.
신희수가 소설의 서사와는 다른 수필의 서사를 확실히 찾았다. 그랬더니 이게 바로 정통 수필이야! 하는, 놀라운 문학세계를 새롭게 발견했다. 어찌 이게 새로운 발견이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잃어버렸던, 잊혀졌던, 중요시되지 못하고 무시됐던 것임에는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개인으로서의 나/너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웅도 천재도 못 되는 뻔한 내가 경험한 걸 글로 쓴다고? 뻔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어? 우린 문학이 되는 게 일상을 넘어선 세계에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일상을 넘어선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일상의 현실만이 있다는 것이다. 난 사는 게 팍팍해서 숨이 가쁠 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힘을 얻는다. 옛 과학자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디까지일까? 지구 밖의 세계도, 저 별들의 세계도 지구와 같은 기준의 시공간일까? 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고, 이 우주가 똑같은 하나의 시공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감격이 어찌했을까? ‘오, 하느님!’이 절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예수 말씀에 ‘천국이 여기에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말씀 속 여기저기의 공간도, 내 마음속의 공간도 똑같은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네가 하늘이고 나도 하늘이여!’ 라는 동학의 가르침이 실감이 난다. 말이 너무 길어졌다. 결론은 네가/내가 겪은 이야기가 오물 다 빼고 순수한 상태로서가 아니라 오물 묻은 채 그대로의 이야기가 ‘진리의 절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절차’는 바디우의 용어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서사화의 다른 표현이며, 더 쉬운 말로 하면 ‘진짜배기 수필의 서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서사화보다 중요할 게 없다. 다음(후편)은 서사화된 몇 가지의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후편: 작품론]
아픔은 생존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시간에는 나의 삶이 없었다.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구별이 어려웠다. 의식을 차리니 아픈 것이 느껴지고 불편한 것이 생기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아프다는 외마디 소리도 재활하면서 표현할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 고통이 있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의 조건으로 다가왔다.
―「아픔은 생존이다」 부분
몸으로 직접 때운 삶의 이야기를 만나면 무섭다. 고통으로 끙끙 앓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길게 숨을 뱉으며 하는 일갈이다. 죽음이란 게 내가 얼마 전까지 빠져있던 혼수상태더라니까! “정말 죽고 사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시간에는 나의 삶이 없었다.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구별이 어려웠다. 의식을 차리니 아픈 것이 느껴지고 불편한 것이 생기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아프다는 외마디 소리도 재활하면서 표현할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을 떠보니 있더라.’ 나는 있음에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왜 있냐고? 내가 의도해서 있는 게 아니라 눈을 떠보니 있음의 세계에 피투(被投)되었더라니까. ‘있음의 의미 없음’은 진즉 간파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은 동어 반복이었다. 있음을 증명하려면 있음의 언어로 증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스승은 물었다. “세상은 어떻게 있나?” 그리고 당황해하는 고교 1학년 청소년 앞에서 손으로 공간에 크게 원을 그리며 “이렇게 있다”고 자답했다. 진리는 동어 반복이다. 이제 철학은 존재(있음, being)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있음의 구조를 말한다.
삶이 고(苦)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통이 있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의 조건으로 다가왔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죽음이다. 죽음이 있어 삶이 있고,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곧 살았으니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상 죽었으니 사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삶의 과정이다. 꽃이 시들고 풀이 마름은 하느님(생명)의 기운이 붐이라(이사야서 11장 4). 죽음 또한 삶이다. 그건 논리일 뿐이다. 난 오늘 빨래를 했다. 그런데 하얀 메리야스가 누레져서 그냥 널 수가 없었다. 삶기로 했다. 어떻게 삶더라? 냄비에 빨래를 넣고 락스를 몇 방울 떨어뜨린 다음 불에 올려놓으면… 그러다가 가물가물 아, 언젠간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아찔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군 제대 후 친구와 독서실에서 방 하나를 빌려 1년여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꼭 오늘처럼 빨래를 삶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육 년 전에 죽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생각나서, 너무나 그리워서 불에 냄비를 얹으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순간 그를 부르고 말았다. “자네, 내가 이렇게 그리워하는 걸 그쪽에서 알기나 해?” 이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멀다.
이런 그리움의 아픔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 그녀의 남편 송혁이다. “당신 없이 10년 사는 것보다 당신과 5년 사는 게 좋아.” 이게 픽션이라면 글재주 있는 사람이 만든 멘트에 불과할 거고,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코맹맹이 감동이 아니라 외려 시비 붙었을 것이다. “좋아” 그게 뭐냐? 그런데 그녀가 몸으로 때운 이야기라는 것에 그녀의 겪음이 곧 나의 경험이 되어 같이 울고 웃게 되는 것이다. ‘경험의 사실성’이 이렇게 중요하다. 정보가 몸에 배면 지식(경험)이 되고 지식이 몸에 배어 지혜(서사 narr가 된다.
그 지혜가 바로 ‘지금 여기’다. 오늘 여기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마지막에 나오는 망초꽃은 공원에 무더기로 피었는데 청소부가 잔디를 깎으면서 무심히 깎아버리는 그 망초꽃이다. 그런데도 해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핀다. 갑남을녀의 상징일 수도 있다.
꼴 보기 싫어
어느 날 남편이 “이제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가고 싶은 곳을 데리고 가 줄게”하며 날짜를 잡았다.(…)덕분에 지난달엔 종묘를 다녀왔다. (…)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잠도 안 자고 뭐하나?’ 비몽사몽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누웠다.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
“잘 갔다 올게.”
빈정이 상했다. 짜증이 났다.
“꼴 보기 싫어.”
한마디 외치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 어디 갔지? 아, 부산 갔구나.”
(…)카톡이 하나 와 있다.
“수필 제목 꼴 보기 싫어/신희수, 환영받지 못한 여행/송혁”
웃음이 나왔다.
―「꼴보기 싫어」 전문
한 달에 한 번은 부인을 위한 시간을 내서 “당신이 가고 싶은 데를 데려다줄게”하고 약속했단다. 그래서 종묘에도 다녀왔다. 그 다음 글의 제목이 「남편은 답사 중」인데 그곳에 당신을 모시고 가도 괜찮은지 답사를 간다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원정단을 꾸려서 열심히 다니시는 중이다. 이걸 알고 읽으면 독자들도 그들 부부만큼이나 읽는 내내 행복해진다. 슬픈 이야기도 즐거운 러브스토리로 만들고, 작고 가벼운 에피소드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신희수라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고 만다. 어쨌든 줄여 말하면 그들 부부의 ‘사랑 전선 이상 무’다.
기도응답
신희수의 사유법은 독특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 뜻대로가 아니라 상대(당신)의 뜻대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가능한 들어준다. 상대의 뜻을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걸 자비라고 할 것이다. 그게 가장 선명히 나타난 작품이 「기도응답」이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해둔다. 기독교 냄새가 진동한다고 읽기를 포기하지 마라. 결코 기독교 이야기가 아니다. 장르는 코믹이다.
어머니 살아계시는 동안 우리 집에는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도는 우리 가족의 힘이기도 했고 일상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어머니의 기도는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서 난 어머니의 기도내용을 거의 알게 되었고 어머니께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도 나의 작은 힘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도는 기쁜 마음으로 해결해드렸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는 가끔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다.(…)
큰 금액이 필요한 요청을 큰 소리로 외치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듣는 나를 괴롭게 했다. (…)
모질지 못한 나는 힘겹게 모은 돈을 하얀 봉투에 넣어 “이걸로 원하시는 것 하세요”하며 드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한 착한 행동이었다. (…)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하시며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
―「기도응답」 중에서
여기까지 만으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코믹을 했다. 본격적인 문학은 후반부에 일어난다. 장인의 솜씨다. 난 요즘 감동을 받으면 내용 불문하고 슬퍼져서,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슬픔에 숨이 막히곤 한다.
생전에 어머니가 약속한 헌금이 있었는데 300만 원이 남아있었다. 장례가 끝났을 때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어머님은 본인의 조의금은 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가족들의 다른 의견도 있었지만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지낸 내가 주장하여 어머님의 약속이었던 300만 원을 헌금하였다. 실제 조의금의 소유권은 자녀의 것이 아니라 고인의 것일 테니까. 이로써 어머니의 미완성 기도도 응답된 것이겠죠?
난 아직도 생각이 많고 조용히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기도를 한다. 어머니의 외치는 기도는 막내며느리가 응답으로 나타나게 들어드렸는데 내가 용기내어 큰 소리로 외치는 기도를 들어줄 며느리는 어디에 있는지….
결혼 이야기만 꺼내면 40이 다 된 아들은 오늘도 딴청을 부린다.
―「기도응답」 결미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응대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며 세상에 대고 하신 말씀이 ‘다 이뤘노라!’였다. 시어머님의 기도가 한 착한 사람의 조력으로 다 이루어졌다. 효녀로다. 효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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