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이야기

[정음시조]

시절 이야기

이정환

삼국유사면 학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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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모태는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군 고로면 학암리 성황골에서 시작된다. 뜰채를 내리기만 하면 한가득 올라오는 시어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곳, 내 시의 젖줄은 네댓 살 때부터 시렁 위에 얹힌 채 꾸들꾸들 말라 가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몹쓸 사무침이 스멀스멀 밀려오면 불쑥 고향 바람 길에 몸을 싣는다. 서둘러 빈 옹기마다 고독의 물을 채우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띄워서 두 손을 모아 목을 축인다.

아! 아직도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시의 금싸라기 땅, 원시의 내 고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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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12일, 양력으로는 1955년 1월 5일이었다. 학암리에서 위로 다섯 누이들을 이어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순공 이규보 선생의 27대 손이기에 격세유전을 신뢰한다면 세월을 한참 건너 뛰어 그 피를 얼마간 물려받은 셈이다.

빈농의 가정,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초가집에서 마침내 세상 빛을 본 것은 아들을 얻고자 했던 아버지의 지극한 열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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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높아지려는 것과 끝없이 깊어지려는 것 사이의 저 내적 갈등!

고향 가는 길, 인각사 못 미쳐서 화수에 각시봉이 있다. 앞의 시「산」은 각시봉을 보고 쓴 것이다. 아직 확인해 본 일은 없지만 각시봉 꼭대기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작은 샘물이 있다고 한다. 묘한 것은 길 건너 서쪽 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총각봉이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은 먼발치에서 서로 바라보며 누거만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고 있다.

상거의 아름다움, 애태움을 어찌말로 다 이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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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학암리는 두메산골이었다. 우리 마을은 ‘고향의 봄’ 속의 정경과 흡사하여 처음 와 보는 이들에게도 정겨움을 안겨주는 동네였다.

고향 가는 길목에 깎아지른 바위벼랑인 학소대 건너편에 인각사가 있다. 일연선사가 말년에『삼국유사』를 집필한 절이다. 지금은 큰길 옆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길은 절 안마당으로 천천히 끌려들어간다’는 느낌을 줄 만큼 고찰의 분위기가 있었다.

일찍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주해 왔지만 고향에서 보낸 기억은 적잖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이른 봄 뒷산에 올라 그 당시 귀했던 성냥으로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불이 크게 번져 혼비백산 뿔뿔이 도망치던 일이며, 입언저리가 붉어지도록 참꽃을 따먹으며 허기진 배를 안고 온 산을 헤매던 일, 어느 늦가을 날 꽃상여를 따라가다 마른 떡을 받아먹던 기억들이 아직도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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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 오신 아버지가 지게 위에 꽂고 온 한 묶음 참꽃을 마당에 놀고 있던 내 품에 불쑥 안겨주셨다. 그 추억으로 말미암아 평생 문학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염 난 까칠까칠한 얼굴을 내 얼굴에 마구 부비며 하늘 높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주셨을 때 나는 양 겨드랑이에 날개가 곧 돋아날 듯싶었다. 쟁기를 타고 흥얼거리며 아버지와 함께 밭 갈던 일, 포근한 누이 등에 업혀 늘 밀고 드나들던 사립문을 나와 동네 구석구석을 구경 다니던 기억도 생생하다.

뒤란 감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샘물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가지가 부러져 옹달샘에 곤두박질쳐 죽을 뻔 했던 사건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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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순 유순 승자 말례 점례. 다섯 누이들의 이름이다. ‘이겨서 아들 얻자, 이제 끝내자, 점찍자.’라는 뜻을 가진 누이들의 이름에서 아들을 얻고자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병으로 잃고 내리 다섯 딸을 낳았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약주에 취해 돌아와서 마을 뒷산에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군위군 고로면에 아들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노라고. 그런 와중에 내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렇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잦은 병치레 때문에 어머니의 애간장을 적지 않게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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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건너가서 십여 년간 지낸 부모님은 해방이 되자 고향을 다시 찾게 되면서 신산의 삶을 살았다. 일본에 남자고 고집했던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참혹한 전쟁의 고통을 겪었고, 빈농으로 말미암아 식솔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기가 어렵게 된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 컸다.

그러나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 산천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도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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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님을 산 너머 싸리밭골 마을로 시집보낸 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물려받은 논밭으로는 여덟 식구가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철부지였던 나는 왜 학암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모른 채 낯선 대구로 왔다. 그러나 나의 뇌리 속에는 늘 고향 마을 뒷산과 당산나무, 물놀이하던 개울가, 가을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리던 감나무가 있던 초가집과 눈에 환한 골목길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한동안 잠을 자다가도 깨면 문득 이곳이 학암리 우리 집 안방이 아닌가 하고 화들짝 놀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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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네 살 어린 남동생과 낙전동 싸리밭골 큰누님 집에 방학 때면 자주 놀러가곤 했다. 누님은 동생들이 애처롭다면서 찰밥과 토끼 고깃국을 끓여주었다. 얼어붙은 홍시와 달디 단 고염 열매, 토종꿀도 실컷 맛보게 하였다. 떠나는 날 누님은 동구 밖까지 따라와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잠시 슬픔 같은 것을 느꼈지만 정겨운 산길을 내려가는 재미에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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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소대, 인각사와 더불어 오리쯤 떨어진 석산 마을에 있는 아미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 높지 않지만 우뚝 솟아오른 바위산이 절경이다. 석산초등학교에 가을 운동회가 열릴 때면 수백 명이 넘는 아이들과 동네 주민들의 함성이 아미산을 뒤흔들 정도였다.

큰누님 집이 있는 낙전동 싸리밭골 가는 길에 고불고불 수십 굽이를 돌아 오르면 압곡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이다. 압곡사 경내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그 또한 절경이다. 의상대사가 아미산 봉우리에서 손수 깎은 나무오리를 날려 보내자 날개를 퍼덕이며 순식간에 날아가서 앉은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하나 더 있다. 고즈넉한 학암리 마을의 정취와 함께 뒷산 가는 길 어귀에 서 있는‘신비의 소나무’다. 수령 오백 년 가까이 된 이 소나무를 보며 자란 이들 중에 외지로 가서 꽤 훌륭하게 된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진 뒤 여러 차례 방송과 신문에 보도된 바가 있다. 요즘도 날마다 적잖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그곳에서 기원해 본 적은 없지만, 신비의 소나무의 헌걸찬 위용은 가히 바라보는 이들의 눈길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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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고로면 소재지가 물에 잠겨 버렸다. 고향 오가는 길에 추억거리가 많던 초․중학교와 장터, 눈에 익은 많은 집들이 사라지고 낯선 면사무소와 농협이 산중턱에 자리 잡았다. 댐 건설로 말미암아 옛 기억을 더듬기란 쉽지 않다.

고로면 학암리. 윗대 선조와 부모님이 잠든 그곳은 내가 언젠가 돌아가야 할,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본향과 같은 곳이다. 내 생명의 근원이고 상상력의 원천이기에 내 젖은 눈길은 이따금 동북 편 하늘 쪽으로 향하고는 한다.

칠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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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와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은 칠성초등학교였다. 구역 개편으로 1학년 2학기 때 갓 개교한 옥산초등학교로 옮겨 거기서 졸업했다. 세 살 위인 막내 누이와는 동기였다. 동생을 돌보라고 입학을 늦추었다가 함께 다니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깊은 배려였지만 누나는 무척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가 6학년이 되어서야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입시가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낙방하면 중학교 모자를 쓸 수 없었다. 처음으로 긴장감 같은 것을 느꼈다. 썩 공부 잘 하던 막내 누이는 일터로, 나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지금도 함께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홍세영은 6학년 때 한반이었고, 대학 시절 칠성동에 있는 북부교회를 같이 다녔다. 홍세영은 나의 시편들을 스무 편 넘게 동요와 가곡, 합창곡으로 만들어 연주했다. 오랜 벗이자 내 시를 가장 잘 해석하고 있는 작곡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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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이니라.”

중학교 성경 시간에 심상선 목사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씀이다. 무심코 들었던 그 말씀이 오늘날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 삶의 근간이 될 줄 그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69년 가을, 가슴 속에서 부단히 들끓어 오르는 정체모를 그 무엇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이 시를 쓰게 된 첫 경험이었다.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연극인이었던 박상근 선생님이 예이츠의 육성을 들려주었다. 저 유명한「이니스프리의 호도」였다. 아주 강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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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만 구분하던 내 시작 노트는 고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소월과 목월만 알던 내가 미당 서정주의 경이적인 시 세계에 눈을 뜬 다음부터 신발이 닳도록 질마재 그 신화의 길을 넘나들면서 시를 닥치는 대로 외우곤 했다. 커다란 물기둥은 한시도 나를 가만 두지 못하고 내 감성을 무너뜨렸다. 들이닥치는 대로 체에 걸러 햇볕에 보송보송 말리기만 하던 그 시절……. 하지만 골라도 골라내어도 쭉정이는 섞여 제 값을 받기 어려웠다. 노력한 만큼 소출이 나지 않았을 무렵 박용철의「시적 변용에 관하여」라는 글이 그 무슨 비밀 정경처럼 내 안으로 뛰어 들어와 나는 색깔을 확연히 구분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바이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월과 미당, 청마, 박인환, 김현승의 시편들을 대하면서 나는 활화산이 되었다. 당시 국어를 가르쳤던 문학평론가 오양호 선생님이 내게 도전의 불길을 당겨 주었다. 아, 평생 시를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릴케의 말처럼 어느 날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나를 발견하고는 종종 놀라곤 했다. 그 뒤 문학이 곧 영혼 구원의 지름길이라고 오랫동안 굳게 믿었다.

지금은 목사가 된 이흥식과 화가 임학득은 고등학교 시절 한 반에서 공부하며 시를 썼다. 이흥식은 사유의 깊이가 엿보이는 차원 높은 시를, 임학득은 서정성이 농후한 아름다운 시를 종종 보여주었다. 나는 이 친구들보다 못했다. 내가 쓴 시들은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고 미진했다. 열패감을 느꼈다. 새로운 돌파구 같은 것을 천천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줄기차게 일기와 시를 썼다. 매우 퇴폐적인 나의 시들은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영혼의 그림자였다. 그 당시 스무 살을 맞는 것은 극도의 치욕이라고 여기고 열아홉 살까지만 살아야 하겠다고 혼자 다짐하기도 했다. 어리석을진저!

졸업할 때 영신 교지에 시 두 편과 일기문을 실었다. 첫 지면화의 경험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참으로 눈부신 환희였다.

봉덕동 ·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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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의 대학 생활을 줄곧 시만 생각하다가 한동안 방황하였다. 봉덕동 시절 토마토만 먹으면서 몇 달을 견디던 때가 있었다.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글을 쓰게 만든 것은 20대 초반 내 시조가 실렸던 ≪여성동아≫와 ≪샘터≫ 그리고 대구교육대학 학보였다. 특히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샘터 시조’는 나를 지탱케 하는 힘이었다. 대학 졸업 후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내가 쓴 시조들이 여러 번 게재되고, 연말에 ‘샘터시조상’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76년의 일이다. 삶의 활력을 주었다. 아직도 대구시 남구 봉덕2동 876-4번지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문청 시절 무수한 편지들을 주고받던 주소지였기 때문이다.

이 무렵《샘터》를 통해 평생 문학 동지인 박기섭 시인과 만났다. 등단 이후 의기투합하여 1981년 가을 2인 시조집『덧니』를 내고, ‘오류동인’,《열린시조》편집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척박한 시조문단을 일구는 일에 힘써왔다.

《샘터》로 말미암아 고 류제하 선생으로부터《시조문학》지를 한 권 받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77년 1회 추천, 1978년 추천완료로 등단했다. 그 뒤《시조문학》주간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이태극 선생을 뵙게 되었고, 결혼식 때 주례를 해주셨다.

지례면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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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산간벽지의 교사가 되었다. 자연과 벗할 수 있는 경북 금릉군 지례면 지례초등학교. 나는 그곳에서 어린이들과 마음껏 뛰놀았다.

고개만 들면 산과 냇물과 푸른 하늘, 맑은 바람 속에서 시를 썼고 낚시를 즐기다가 1981년「냇가에 앉아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전화통지가 오기 전 날이던 1980년 12월 19일 밤에 나는 선산 무을 못에서 생애 최초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았다.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었다. 현실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깨니 꿈이었다. 12월 20일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학교로 갔다. 교무실 앞 자석식 전화기 앞에 대기했다. 서울에서 내게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중했고, 나는 꿈에 그리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69년 가을 처음으로 시를 시작한 이후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해 겨울 새벽마다 중앙일보 신문을 석 달 동안 배달했던 일이 떠올랐다.

신춘문예 당선 통지를 받고 인터뷰 하러 중앙일보사 문화부로 찾아갔을 때 담당자 임재걸 기자를 만났을 때 그는 대뜸 자신의 책상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5편을 응모했는데 당선작이 무엇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번번이 틀리자 「냇가에 앉아서」라고 말하면서 당선자가 당선작을 모르니 당선을 취소해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참 짓궂었지만 흥미로운 인터뷰였다. 그 때 심사를 맡았던 박재삼 선생은 당대에 빛나지 않으면 후세에 길이 남을 수 없으니 부지런히 쓸 것을 당부하셨다.

가정을 꾸렸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나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이따금 공허를 견디지 못한 내 영혼은 약한 바람에도 쉬이 허물어지곤 했다. 그 와중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썼다.

신암동 · 복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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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갓 넘었을 무렵 내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신앙이었다.

‘아, 이번에 놓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혼자 그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어느 날 시가, 문학이 영혼을 구원하리라는 나의 확신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영적 사건이 내게 닥쳤다. 그것은 폭풍우와 우레와 같은 힘으로 내 안으로 쳐들어 왔다. 감히 거부할 수도, 거부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더 이상 다른 선택은 없었다. 흡사 들끓어 오르는 마그마와도 같은 것이 무한정 분출하여 나를 뒤덮어 버렸다.

나는 마침내 사로잡힌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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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세상의 빛을 받게 한 아버지, 어머니…….

다분히 서정적이고 즉흥적이셨던 아버지는 일평생 뜬 구름이었다. 풍류를 아는 만큼 가정적이지 못했다. 집안 사정 돌아가는 것에 대해 깜깜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이야기꾼이었다. 동생과 나는 특히 겨울밤이면 무척 행복했다. 늘 내 차지였던 아버지의 등은 한없이 따뜻했고, 나직나직 귓전을 울리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말처럼 지금까지 나를 움직여 온 것은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였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키워 주었기 때문이다.

글을 익힐 틈이 없었던 어머니는 평생을 집으로 오가는 시내버스 번호 몇 개만 인지하고 사셨다. 종종 글을 깨우치지 못한 안타까움을 토로했지만, 신기하게도 동네 반장 일을 맡아 오랫동안 잘 해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큰아들이 글을 쓰고 선생이 된 것에 대해 흡족해 하셨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를 천주교 대세로 장사 치르면서 작은 일에도 잘 흔들리곤 하는 내게 신앙을 가질 것을 권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앉아 내 머리맡에서 쪽진 머리를 빗으시던 온화한 모습의 어머니가 지금도 한 번씩 생각나곤 한다. 스무 해가 훨씬 넘었지만 평화롭게 눈 감으시고 돌아가셨을 때의 모습도 생생하다.

세상 뜬 지 마흔 해 가까운 아버지, 아버지의 임종을 당시 스물 셋이던 나 혼자서 지켰다. 첫눈이 함박눈 되어 퍼붓던 초겨울 날 고향 선영에 묻히셨다. 하관 때 누이들과는 달리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 몇 해 동안 몹쓸 병고로 모진 세월을 보내실 때 곁에서 처절하게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퇴장이자 등장이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언젠가 천국에서 두 분을 만나 뵙게 되리라.

지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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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그 중 탁구는 이십여 년 이상 함께 한 벗이다. 작은 공 하나의 움직임에서 세계를 읽는다. 속마음을 읽는다. 승패와는 거리가 먼 쾌활한 웃음이 있다. 경쾌한 몸놀림과 재빠른 스윙, 끊임없는 눈동자의 움직임에서 세계를 긍정하는 힘이 생성된다. 탁구는 실로 지금까지 내 삶의 견인차, 원동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몸과 마음의 균형 유지에 이만한 운동도 없기 때문이다.

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눈길이 끝까지 공을 좇아가야 한다. 들어 올려 넘기기 위해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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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과정을 하면서 현대시조에 관해 학위 논문을 썼다. 원용문 선생님은 박사과정을 권했고, 빼어난 미학적 안목과 평필로 시조문학의 울타리를 크게 넓히고 있는 문학평론가 유성호 선생님은 지도교수였다.

학문하는 즐거움은 창작과는 또 다른 보람과 긍지를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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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적잖은 이들을 시조의 길로 이끌었다.

후진 없이 앞서간 이는 없다. 뒷사람을 육성하여야 앞사람의 업적도 빛이 난다. 고려 말경에 우탁과 같은 시조작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첨단정보화 시대, 우주 개척 시대에 그 누가 한글로 시조를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우겠는가.

시조가 얼마나 멋진 시의 한 갈래인지, 한 편도 써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우리말을 하고 우리글을 쓰는 이가 시조 한 편 써 보지 않고 종언을 맞이하였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일평생 동안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시조의 미래는 젊은 후진들이 얼마나 많이, 성실히 이 길을 걷는가에 달려 있다. 체계적으로 시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의 양식으로서 우리 것 중에 시조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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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천후다. 글로 세상을 꿈꾸는 자로서 한시도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쓴다는 것은 때로 커다란 고통이다. 기쁨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그 순간은 뼛속 깊이 아로새겨진다. 영혼을 움직인다.

내 몸의 갈빗대를 취하여 얻은 시에 살을 붙이고 혼을 불어 넣는다. 내 몸과 영혼은 곧 시요, 시는 곧 나 자신이다. 무궁무진한 마력의 세계는 항시 나를 견인하지만 나는 줄곧 아가페적인 사랑만을 보냈을 뿐이다. 내가 얻고자 한 것이 진정 무엇이었던가. 나는 늘 시 빚을 갚기 위해 오늘도 갈빗대를 취하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쉼 없이 언어의 자맥질을 하는 전천후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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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그렇다. 우리 인생도 언제나 휘영청 했으면 좋겠다. 어둠을 걷어내는 말로 이만한 낱말이 있을까. 언어는 언제나 민감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이 세계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것처럼.

일생을 한 가지 일에만 전력을 쏟아 붓는 일은 지난하지만 복되기도 하다. 말과의 씨름, 말과의 시름은 끝없다. 언어의 묘미는 무한정한 것이기에.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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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랑시를 적잖게 썼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처절한 쟁투의 나날에「헌사」와「별사」를 썼고,「자목련 산비탈」과「에워쌌으니」를,「애월 바다」와「주상절리」를 썼다. 서정적인 세계가 체질상 내게 잘 맞았다. 그리고 누군가를, 무언가를 만나면 불붙어 불타오르기까지 신명을 다하는 내 성정이 사랑의 시편을 부단히 쓰게 만들었다.

내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 천애를 넘나드는 눈물꽃나비여.

오오 다함없이 어여쁜 이

내 눈물의 끝자락을 적시는 미림의 하늘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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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꽃은 자목련과 모란이다. 자목련은 나의 삼십대를 관통한 꽃이다. 그 이후 자목련의 아름다움은 경주 남산 천년의 세월과 접맥되어 내 영혼의 일부분이 되었다. 아니 전부가 되었다.

어느 해 시월 북유럽 길에 무수히 부르던 이름 모란! 무슨 연유에서일까. 기나긴 여정 중에 내 가슴 속에서는 수천수만 송이의 모란이 꽃구름처럼 피어났다. 모란꽃 속에는 내 영혼이 깃들어 있다. 말할 수 없이 여린 이의 숨결이 어려 있다. 저 아득한 천년의 깊이로부터 피어오르는 모란꽃. 눈물 없이 부를 수 없는 나의 꽃, 모란!

내가 늘 기대고 있는 곳은 주상절리다. 주상절리에서 십자가를 본다. 임마누엘의 현현을 본다. 그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성채와 같은 뼈대의 주상절리는 눈물꽃나비를 향해 불타오르는 영원의 불길이다.

자목련……모란……주상절리……눈물꽃나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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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의 성소와 같은 곳을 몇 군데 알고 있다. 이따금 혼자 찾는다. 여름이면 작약꽃이 만발하는 최정산 정상이다. 그곳에서는 곧장 하늘로 가는 길이 내 눈에는 보인다. 깊은 사유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더욱 그러하다.

또 한 곳은 비슬산 자락에 있는 명적암이다. 용연사 옆길에서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이 이채롭다. 시의 근원 같은 풍광을 보듬고 있는 곳이어서 쫓기는 일상 중에도 그곳 일대가 뇌리에 종종 침투해 들어오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한 곳 더는 수도암이다. 김천시 증산면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 전 폭설이 내린 날 찾았을 때 군데군데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삭정이들이 부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내 팔이 떨어져나가 눈 위에 던져져 있지나 않나 하고 불시에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함께 한 그가 연푸르게 미소 지었다.

천지가 눈 속인데 빛바래어서 더욱 신비스러운 푸른빛 문살을 보는 순간 그 문을 밀면 다른 세상으로 곧 건너갈 수 있을 듯싶었다. 아아, 그날 그곳 어딘가에서 순백한 한 영혼이 소리 소문 없이 승천했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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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전한 합일을 믿는다. 시와의 완전한 합일, 우주와의 완전한 합일을. 오래 전 나는 완전한 합일과 해후했다.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하늘나라에서도 이루어질 일체, 영원한 분신 그 눈물겨운 주상절리와 꿈의 사닥다리를.

내 영혼의 주인이신 그 분의 무한한 은총과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