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42강
0:11
지난 시간에 구공 공부하는 법은 말씀드렸어요. 구공 어떻게 공부 하나?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걸 간단하게 요약 드리면, 요 그림(⊛) 한 번 보세요. 꽃잎 같죠? 이게 우리 마음 안의 영적인 DNA입니다. 거기는 대승기신론식으로 써 놨는데 그냥 우리 식으로 할게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게 참나의 덕목들이라는 거. 이 6가지 덕목을 갖추고 여기는 지금 시공 없는 세계입니다. 시공 없는
1:06
세계에 이미 여러분의 영적 DNA가 확립되어 있어요. 여러분 마음에 이게 박혀 있어요. 요 자체로 말하면 마음이죠. 어떤 마음이냐? 공적영지의 마음입니다. 유교에서는 뭐라고 하죠? 허령지각의 마음입니다. 공적한데 텅 비어 있는데 신령하게 알아차린다. 여기(허령지각)는요? 텅 비어 있는데 신령하게의 지각. 알아차린다. 똑같죠. 유교에서도 지각불매라는 말을 씁니다. 이 지각은 절대로 어두워지는 법이 없다. 이 알아차림은 절대로 어두워지는 법이 없다. 유교는 윤회를 얘기하진 않죠. 전생 내생을 얘기하진 않아요. 최소한 유교는 아무튼 살아있는 동안 절대로 이 의식은 꺼지는 법이 없다. 공자님은 “죽음 이후는 죽은 뒤에 연구해라” 하고 말아 버렸죠. 그래서 나중에 유학자들이 불교랑 싸우느라고 윤회론을 부정하는 주자학이 대세가 돼서 윤회론 얘기를 안 합니다만 그런 주자학마저도
2:09
뭐라고 하냐면 지각은 절대로 어두워지는 법이 없다. 공적영지 불교. 유교 허령지각, 다 같죠. 그래서 이 마음 측면, 마음은 의식이죠. 의식의 측면에서는 이렇고. 지금 여기 새겨져있는 이것은 본성이에요. 구분하잖아요. 같이 쓰기도 합니다. 공적영지가 나의 불성이다 그러면 본성인지 마음인지 그냥 퉁 쳐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구분하면 이 본성은 뭐죠? 예 육바라밀의 본성이 들어 있어요. 유교에서는요? 인의예지신 그러죠. 이걸 선비들은 오덕이라고 합니다. 요즘 오덕(오타쿠)이란 말이 다른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조선시대 실제로 오덕이라고 했어요. 이거(육바라밀)는 육덕이겠죠. 6가지 덕 5가지 덕을 얘기했어요. 우리 본성 안에는 새겨져 있어요. 나누는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3:04
여러분 음양 오행 팔괘 64괘 쪼개면 한없이 쪼개지죠. 이게 다 불변의 것들이에요. 우리 마음 안에 불변으로 박혀 있는 진리를 기준에 따라 이렇게 쪼개보고 저렇게 쪼개보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냥 방위를 동서남북만 쪼개서 관찰할 수도 있고. 8방을 쪼개게 볼 수도 있고 더 세세하게 나누어 볼 수도 있죠. 마찬가지로 똑같은 거죠. 제가 강의하는 중에 늘 말씀드렸어요. 어떻게 이게 서로 하나가 되나? 지금 여러분이 쓰시는 양심 노트에는 이미 하나로 종합이 되어 있죠. 그런데 요 2가지 구분만 하자고요. 이게 마음의 근원이자 본성이 갖춰진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제 구공이라는 것은 갖출 구자 갖춤이 핵심입니다. 분명히 공의 마음이 공심 안에 뭘 갖추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육바라밀과 인의예지신이 중요하죠. 뭘 갖추고 있는지 알아내셔야 돼요. 텅 빈 중에 내 삶의 어떤 내비게이션이 이 안에
4:03
분명히 다 장착돼 있다는 거예요 이리 가면 찜찜하다. 이리 가면 자명하다. 이 신호가 내 안에서 다 울리고 있잖아요. 그거를 읽어내는 게 영성에서 제일 중요하죠. 이걸 못 읽어내면 아무리 견성을 하고 아무리 열반 안에 사는 아라한일지라도 실수를 하게 돼 있고 악의 카르마를 짓게 돼 있어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악을 짓게 돼 있어요. 왜? 본인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남한테 피해 줄 수 있죠. 결국 남한테 피해 주는 언행을 계속하게 돼 있어요. 자기는 남한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그런 부분은 하늘이 감안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피해가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악을 정확히 알고 살아가려면 우리가 매순간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려면 내 안에 있는 본성, 타고난 내비게이션,
5:01
본래 갖추어져 있는 이런 영적인 DNA를 정확히 읽어내야 됩니다. 간단하게 여기에 맞으면 선 안 맞으면 악입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은 간단합니다. 이걸 현상적으로 관찰해 보면 모두에게 이로우면 선, 모두에게 해로우며 악 이렇습니다만 이거는 현상계적 관찰이고 절대계적 관찰은 이렇습니다. 이 본성대로 하면 선이고 아니면 악입니다. 이게 사실은 하나예요. 이대로 하면 신기하게 현상적으로 모두에게 이롭게 돼 있고요 이걸 어기면 신기하게 모두에게 해롭게 돼 있어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거를 체험을 통해 알아내셔야 돼요. 여러분이 시험보시는 거예요. 저는 족집게 강사는 돼 드릴 수는 있어도 시험은 여러분이 보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우주적인 시험을, 실험이자 시험이죠. 이걸 매일매일 여러분이 하시게 되어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 거냐?
6:03
이것 정하셔야 되거든요. 선택하셔야 되거든요. 그 선택을 할 때 그 기준이 여러분 내면의 양심이 되셔야 돼요. 안 그러면 기준이 뭐가 돼요? 에고의 무지와 에고의 아집이 기준이 돼버리면, 즉 욕심 쪽이 기준이 돼버리면 여러분이 악을 택하기가 쉬워집니다. 이 자체가 무조건 악을 저지른다는 건 아닌데 악으로 계속 흐르기가 쉬워요. 선에서 자꾸 멀어지기가 쉬워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참나와 에고 관계예요. 왜 우리가 구공을 중요시해야 되나? 구공을 연구하는 방법도 어떻게 하느냐? 이 육바라밀 연구를 하시려면 먼저 몰입을 통해서 여러분 내면에 참나가 내 에고를 어느 정도 덥힐 정도는 해놔야죠. 보세요, 지금 파란 기운이 찬 기운이라면 빨간 것은 뜨거운 기운, 이게 기독교식으로는 성령의 불기운입니다. 참나의 불기운이 내 에고를 어느 정도 덥힐 정도는 해놔야 되죠. 즉 일단 몰입을 하셔야 돼요.
7:03
선정 쪽에서 먼저 힘을 들이셔서 “몰라” 몰라 할 때 진짜 잠깐이라도요 내 이름도 “몰라” 그냥 이 우주를 통으로 몰라 하고 놓아버리세요. 그러면 순수한 여러분 의식이 드러납니다. 괜찮아도요 다른 말 못 나오게 “괜찮아” 하고 입을 막아 버리는 겁니다. 에고가 뭐라고 2% 부족하네 몇 % 부족하네 궁시렁거리려고 할 때 “괜찮아”라고 해버리면 막아버리는 괜찮아가 돼요. 그냥 힘없는 괜찮아로는 변화가 안 일어나죠. “진짜 괜찮아. 진심으로 괜찮아.”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세요. “진짜 내 이름 모르겠어.” “진짜 난 괜찮아”라고 해버리시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이런 영원한 현존의 I AM이라는 나의 현존하는 느낌에만 집중하시면, 시공을 초월해서 현존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게 지금 공적영지고 허령지각이죠. 요 마음에 집중하셔서 본성을 알아내시는 게 중요합니다. 수심결에 이런 말도 해요. “내 마음 밖에 어디 부처가 있겠으며
8:03
내 본성 밖에 어디 법, 진리가 있겠는가?” 즉 내 마음 안에, 부처의 마음 안에 진리가 들어 있을 거 아닙니까? 부처와 진리가 지금 내 마음 안에 다 있다는 거예요. 부처의 마음을 찾아내서 불법, 부처의 진리까지 읽어낼 수 있으면 우리는 당장 부처처럼 살 수가 있거든요. 이걸 알아내기 위해서 그동안 아공 법공의 길을 걸어온 겁니다. 그런데 아공에서 멈추면 아라한 밖에 안 되는 거고 이런 말에도 분개하시는 분 많죠. “저 윤홍식은 아라한을 아주 개똥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제가 아라한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라한의 단계를 가지고 말하는 거예요. 아라한에 단계는 아공, 내 안의 이 열반과 참나, 영원한 현존을 찾는 데까지고, 법공은 “여기서 온 우주가 나왔구나”까지고, 구공 와야 우주를 어떻게 경영할지 뭐가 선인지 뭐가 악인지는 구공까지
9:00
가야 안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라한들은 부처님이 이게 선이다 이게 악이다 해놓은 거를 듣고 안 성문승들이잖아요. 듣고 그대로 따르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런데 이게 선이고 이게 악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누구한테 들었을까요? 법구경에 보면 “선과 악을 저울 재듯이 해야 된다. 그래야 성자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다 부처님한테 계율을 듣고 따르는 거라고요. 모세도 하느님의 율법을 듣고 따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처럼 “율법 너머의 성령에서 오는 지혜가 있다.” 이 말이 바로 나와야 되잖아요. “성령에서 바로 오는 지혜가 있다.” “남이 가르쳐주는 계율이 아니라 자성이 가르쳐주는 계율이 있다.” 육조단경에서 이걸 자성계라고 합니다. “자성에서 나오는 계율이 있다.” 요거 읽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거든요. 그런데 이거는 지금 구공까지 가야 압니다. “내 자성에 어떻게 살아라고 쓰여 있다” 말이에요. 이게 계율이에요, 자성계. 이게 지혜고 자성혜. 이게 자성정. 원래 고요하니까 자성의 선정.
10:03
본래 선정이고 본래 지혜. 본래 우주 만물의 진리를 알고 있고 이 진리대로 우주를 경영하고 있어요. 이 안에 지금 계정혜가 다 들어 있잖아요. 본래 고요하고 본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고, 그 진리대로 우주를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경영하고 있습니다. 요 참나만 우리가 정확히 우리 안에서 확립시키면 어떤 일을 당해도 나도 하느님처럼 고요하고 부처님처럼 고요하고 부처님처럼 하느님처럼 지혜롭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힘까지 갖고 있다는 거죠. 서유기 생각해 보세요. 손오공, 공은 지혜입니다. 손오공이 깨달은 공은 구공이에요. 손오공이 깨달은 것은 “내 안에 본래 공인데 우주 진리를 갖춘 공이 내 안에 있다”는 거 알고. 사오정, 본래 고요한 선정을 이루면서 오정. 저팔계가 이름이 오능입니다. 능력을 깨닫는다. 왜 계율이 능력일까요?
11:02
실천력이니까. 저팔계처럼 팔계를 실천하는 힘을 깨달아 가지고 실천하면 계정혜 삼학이 딱 맞으면 끝납니다. 여기서 이제 공부론이 나옵니다. 어떻게 양심을 계발할 거냐? 구공의 삶을 살거냐? 계‧정‧혜. 선정과 지혜와 실천. 계정혜 이렇게 많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유교식으로 말하면 거경, 깨어있음이죠. 선정이 먼저 바탕이 돼서. 유교와 불교를 함께 다시 배열해 볼게요. 선정이 바탕이 돼야 돼요. 먼저 참나랑 몰라를 통해 접속이 돼야 되잖아요. 몰라로 접속한 다음에 반야바라밀, 지혜바라밀을 써 가지고 지혜로 뭘 합니까? 궁리, 사물의 원리를 깨달은 다음에, 어떤 게 본래 내 본성에 새겨진 진리인지 알아낸 다음에, 역행, 실천하면 그만이죠. 이게 계율이죠. 선정 지혜 계율. 계정혜를 이 순서로
12:05
해봤어요. 정‧혜‧계. 이렇게 얘기하는 게 유교의 거경 궁리 역행. 유교의 선비들의 종신사업이라고 하죠. 요 3가지 공부랑 맞춰 보시면 딱 맞습니다. 여러분 이거만 하시면 돼요. 원불교에선 이걸 뭐라고 하죠? 선정을 정신수양, 지혜를요 사리연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역행을요 작업취사. 업을 짓되 선은 취하고 사, 버릴 사(捨)자입니다. 악은 버려라. 이게 다죠. 이 공부 외에 뭐가 있겠어요? 여러분 경을 통해서 양심각성을 하고, 양심각성입니다. 요거(정신수양)는 양심각성. 정신수양이란 건 양심각성입니다. 그 다음에 사리연구를 하고 궁리를 그대로 푼 겁니다. 사리연구. 원불교의 용어들은요 선비들이 쓰던 용어를 그대로 지금 활용한 거예요. 불교랑 유교를 합쳐서 쓰는 거예요. 지혜를 사리연구라고 푼 거는 조선 선비들이 내내 지혜를 궁리라고
13:05
불렀기 때문에 사리연구. 그 다음에 힘써 실천하라. 업을 실제로 지어라. 그런데 선은 취하고 악은 버려라. 공부 다 나왔죠. 양심을 이렇게도 써볼까요. 양심을 깨달은 다음에 타고난 양심 안에 있는 판단력, 양지를 활용해서 진리를 깨치고 양능을 활용해서 양심을 실천하면 그만인 거죠. 다 이 양심 하나로 설명이 됩니다. 여기까지 정리되시죠. 지난 시간에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요. 제가 구체적으로 몰입 4단계에는 들어가시라고 했어요. 깨어있는 상태, 참나가 정확히 자각되는 상태. 내 안에 있는 텅 비어 있는 신령한 알아차림, 공적영지, 나의 현존이 느껴지는 그 정도까지는 가셔야 돼요. 100%는 아니에요. 일단 느껴지기만 하면 돼요. 내 안에 있는 에고를 초월한 마음을 느끼면서. 그래야 육바라밀이 내 안에 있는지
14:09
연구할 수가 있잖아요. 자 선정과 지혜는 아공 법공에서부터 이미 계발이 돼 있잖아요. 깨어있음 잘 하시잖아요? 그리고 깨어있음 속에서 자명한 판단하실 수 있잖아요? 그 판단력을 가지고 이걸 판단해 보세요. 판단 뭘 해보느냐? 내 마음에 이 깨어있음과 지혜, 몰라와 자명이 흐를 때 내 에고가 실제로 남을 사랑하게 되는지? 그리고 남한테 양심에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는지? 진실을 수용하고 겸손해 하는지? 실제로 양심의 구현에 최선을 다하는지? 늘 깨어있는지? 늘 자명한 판단하는지? 이걸 계속 깨어서, 불을 좀 넣어놓고 실제 불이 들어오면 내 에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계속 관찰해보면 내가 깨어 있기만 하면, 양심각성만 하면 신기하게 양지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나머지 것들은 실천이죠, 양능이
15:04
올바른 이런 실천 덕목들을 실천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관찰하면, 육바라밀로 하면 거경이 뭐겠습니까? 이게(거경) 선정바라밀이고, 요거(궁리)는요 반야바라밀이고 요거(역행)는 이제 나머지 바라밀이겠죠. 이게 계속 굴러가주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계속 양심 굴러가는지만 보는 겁니다. 이때부터는 깊은 선정 얕은 선정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육바라밀을 굴리는 선정이 중요해요. “내 선정이 육바라밀을 내 안에서 굴릴 수 있는가?” 늘 이것만 보는 거예요. 별일 없으면 선정만 하고 계셔도 되잖아요. 그때는 선정을 즐기시되 뭔 일이 있으면 육바라밀로 처리하는 것을 수행으로 알고 즐기시면 돼요. 그래서 이런 수행은 동정이 이제 하나가 됩니다. 그전의 수행은 조금 더 정적인 데 치우쳤다면 육바라밀 수행까지 가면 이제 동정이 제대로 하나가 돼요. 그전에는 동정이 하나가 된다고 해도 깨어있는 것을 얼마나 붙잡고
16:01
있느냐에 관건이 있었기 때문에 정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진짜로 수작을 육바라밀 에 맞게 하는지를 보는 거예요. “말을 할 때, 행동을 할 때 얼마나 양심의 뜻대로 육바라밀의 뜻대로 진리에 맞게 하느냐?”가 포인트가 됩니다. 그전에 아공 법공 단계에서는 “얼마나 내가 깨어 있느냐?”가 포인트죠. “참나와 함께 하느냐?”가 포인트죠.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수작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어요. 깨어서 수작할 뿐이죠. 근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까지 이미 지침이 다 나왔단 말이에요. 계율이, 자성계율이 나와 버린 거예요. 실제 계율을 받는 것은 구공 단계입니다. 이제 계율을 받아요. 육바라밀이란 계율을 남한테 받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아요. 스승한테 받는 것도 아니에요.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통해서 받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해서 깨어서 살아보니까 진짜 내 안에서 “사랑하라
17:00
정의로워라 겸손하라 성실하라 깨어있어라 지혜로워라” 이런 영적 DNA가 시공을 초월해서 내 안에서 항상 울리고 있다는 거. 이 DNA가 아주 박혀있다는 거. 실제로 살아보니까 이것만 따르면 나는 찜찜할 일이 없다는 거. 이것만 따르면 찜찜할 일이 없고 이렇게만 하면 자명하다는 거. 이걸 경험적으로 확인하시지 않으면 남이 하는 말 듣고 믿고 계셔서는 여러분 한방에 날아갑니다. 조금만 삶이 힘들어지면 바로 날아가요. 아무리 힘든 일이 와도 안 날아갈 정도로 저게 여러분 안에서 진리로 수용돼 있어야 돼요. 그걸 불교에서 인가라 그래요. 인가를 하셨느냐 하는 거죠. 그 인가를 제가 뭐라고 합니까? 자명한 이해. 제가 풀어 드린 거예요. 사실은 수용이죠. “자명하게 이해하고 수용하셨느냐?” 이거를 불교에서 진정으로 인가를 했느냐? 진정한 인가를 했느냐? 이게 진정한 인가입니다. “나 인가했어.” “나 육바라밀을 진리로 인가했어.” 처음의 인가는 그런 거죠.
18:04
개념적인 이해죠. 그거 그럴싸한데. “개념적인 이해.” 그 다음에 실제로 살아보니까 육바라밀이 체험이 돼요. “체험적 이해.” 그러다가 어떻게 돼요? 나중에 “자명한 이해.” 의심할 수가 없네 단계예요. 자명한 이해는 의심할 수가 없네. 이게 진정한 인가입니다. 진정한 인가. 더 인가할 수 없어요. 해 봐서 너무 자명하게 의심 없이 수용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게 맞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면 진짜로 막 칼 대고 한 번 해보시면 실감은 나실 겁니다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그 정도로 목에 칼이 들어왔다고 상상만 해도 벌써 무너져 내리는, “아 모르겠어요. 아직 난 모르겠어요.” 이런지? 그렇게 상상을 해봐도 “그래도 이건 맞는 거 같은데” 이 느낌이 드시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시라는 거예요. 본인이 확인해야지 “믿습니다” 이건 안 돼요.
19:03
그것은 나중에 위기의 순간에 한방에 날아가요. 예수님이 내 말대로 실천하는 자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거고 그 외에는 사상누각이다 그랬죠. 모래 위에 집짓는 것 같아서 태풍까지 안 와도 그냥 한방에 무너져요. 남이 조금만 흔들어도 날아가 버려요. “그러다가 진짜 육바라밀이 진리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벌써 “그러게.” 이러면 여러분 아닌 거잖아요. 실험이 부족해서 그래요. 여러분이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실험을 안 해놓고 먼저 결과부터 믿어버리신 격일 뿐이에요. 실험을 해보시라고요. 실험만 해보시면 다 아시죠. 자기 마음을, 내 영혼을 실험실로 삼아서 매일매일 연구해야 될 게 결국 이것입니다. 유교 선비들은요 아공 법공도 중요시 안 했어요. 무조건 바로 구공으로 들어가서 무조건 “내 안에 인의예지 있나?”만 평생 연구했어요. 그분들 레벨이 높아요. 절에서 아무리 견성해봤자 1주 보살 왔다 갔다 해요. 선비들 중에는요 올라가면 1지 2지 올라가요. 왜냐하면 인의예지만
20:05
죽어라고 파니까 그렇게 파다가 아공 법공의 단계를 자연스럽게 넘어가 버려요. 그냥 계속 깨어서 자기 양심만 연구하다 보면 아공인지도 모르고 아공을 넘어가요. “내 안에 불변의 내가 있구나.” 법공도 넘어가 버려요. “이게 우주의 진리구나. 이게 내 마음의 진리만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구나. 우주의 진리가 인의예지신 밖에 없구나.” 처음에는 그냥 믿음으로 들어갔다가도 나중에 그게 체험적으로 확인돼 버리면 무서운 영성의 달인이 돼버린다고요. 유교 방식이 더 무서워요. 제가 예전 강의도 있어요. “영성계 최고단자가 되는 비법.” 제대로만 공부하면 유교 가르침이 제일 무서워요. 보통은 사서삼경 외워 가지고 잘난 체나 하고 보통 꼰대가 되기 쉽죠. 남 지적 잘하고. 양심 없는 사람들이 유교를 공부하면 자기는 절대 지적을 안 해요. 남을 지적하면서 희열을 느끼며 살다 갑니다. 그걸 꼰대라고 하죠. 남 지적할 때 희열 느끼고 절대 자기는 지적하지 않은 사람들이 꼰대죠.
21:08
여러분 남 지적하듯이 자기를 막 지적하고 있으면 자기반성까지 철저하면 꼰대라고 하기 약간 애매해져요. 안 해줘야 맛이죠. 자기반성 안 해줘야 맛이죠. 꼰대들은 절대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남 지적은 살벌합니다. 0.0000001mm까지 재요. “너 방금 표정이 안 좋다.” 이걸 잡아내요. 다 잡아내요. 근데 자기 안 좋은 건 하나도 못 잡아내요. 이게 엉터리죠. 진짜 유교를 가지고 자기한테 적용해버리면요 엄청난 달인이 돼요. 그 차이입니다. 선비들을 보면 너무 극단이다. 보면 완전 갑질 꼰대와 진짜 나라를 위해 자기를 초개처럼 던지는 선비도 있고. 요 차이가 이 양심을 “자기한테 적용했느냐? 남한테서 찾아다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게 논어에 이미 나와요. 진짜 군자는 위기지학을 한다. 진짜 군자는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고
22:05
소인배들은 위인지학, 남을 위하는 학문을 한다. 이게 논어에서 되게 오해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저한테 많이 물어보는 구절입니다. 공자님 좀 이상하다고. 군자가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고. 이건 위할 위(爲)자입니다. 소인배들이 남을 위한대요. 이상하죠? 보살이 남을 위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공자가 말한 위기지학은 진짜 자기한테 도움 되는 학문을 하고 위인지학은 남한테 보이기 좋은 학문만 한다는 뜻입니다. 남 위하는 학문만 한다는 건요 소인배들은 겉으로만 꾸미고 있다. 이걸 딱 성경에 적용하면 바리새파들은 위인지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이 보기에 그럴싸한 학문. 진짜 하느님의 사도와 성도들만 성경적으로 위기지학을 하고 있는 거죠. “진짜 너 내면이 깨끗해지는 공부를 하라고 남한테 보여지지 않더라도 너를 위하는 공부를 하라고.” 이게 공자님 말씀입니다. 똑같습니다.
23:04
진짜 나를 위한 공부를 하려면 자기 안에서 이런 실험들이 매일매일 이루어져야 돼요. 이런 거 하다보면요 나중에 조선 후기 가면 요 맛을 안 선비들은 아예 과거를 안 봐요. 어 그래도 세상을 구하려면 과거를 봐야지. 왜냐하면 이미 많이 늦은 게 부정행위가 횡행해 가지고 과거에 합격하기가 힘들어요. 백범일지 보시면 김구 선생이 과거 한 번 시험 보려고 갔다가 공부를 좀 덜 하셔서 그럴 수 있지만 막 컨닝 부정행위들이 난무하는 걸 보고 에이 어차피 안 될 판이구나 자각하셨다 이런 장면들이 나오는데. 많은 선비들이 이미 요즘 입시부정처럼 그때도 이미 험했던 거예요. 거기에 포기하고 고향에 아예 서원을 지으면 되잖아요. 사립학교를 지어서 교육 사업에 전념하신 선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
24:02
분들이 원래 정치에 나가야 되는데 안 되니까 학당 열어서 한 거예요. 저도 학당 열어서 그냥 해야 되는데. 학당 열어서 하다가 정리하셨죠.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도 다 선비들은 정치 욕심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불교 분들은 중생 구제를 절에서 하시지만 선비들은 원래 공부해서 나라에 나가서 하는 게 본 임무거든요. 그게 차단되니까 불교처럼 서원을 짓는 방식을 택하신 거예요. 그것도 아시면 재미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선비들의 수행법이라는 것은 공적영지 허령지각을 자각하고 이렇게 방에 앉아서, 산에서 수련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새겨져있는 본성을 구현하는 거거든요. 지금 이 나라의 백성이 아프다 그러면 누군가 분명히 반응을 해줘야 돼요. 내가 들었잖아요. 못 들었으면 모르는데 들은 이상은 내 양심에 맞게 반응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게 수행인 거예요. 이렇게 나라에 나가서 뭔가 백성에게 좋은 일을 해야 된다
25:05
하는 발상이 있죠. 욕심 때문이 아니라 양심상에서 “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가 계속 울려 퍼지니까. 이왕이면 선비들도 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해 가지고 더 큰일 하고 싶죠. 그게 차단될 때는 또 교육 사업에 전념하고. 공자님도 그랬거든요. 공자님이 정치에 계속 문을 두드려보다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아무도 등용을 안 해줬어요. 그래서 말년에는 교육 사업에만 전념하십니다. 왜냐하면 인재를 많이 키우고 진리가 잘 전승되게 거기에 몰입하시는 거죠. 그런데 힘이 있는 동안에는 두들겨 보는 거죠. 왜냐? 논어의 나와요. “나를 쓰기만 하는 2년이면 나라가 안정될 거다. 좀 써 달라.” 당시 많은 제후국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도 안 써요. 왜냐? 왕은 써보고 싶어 해요. 왕은 자기 나라니까 공자도 써보고 싶어 합니다. 내 나라 안정된다면 좋잖아요. 기득권층이 다 반대해요. 왕하고 또 입장이 달라요.
26:06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기득권층은요 공자가 여기 오면 경쟁자잖아요. 이 주변의 무리들이 인의 장막이 계속 이간질 해가지고 못 쓰게 합니다. “공자님은 학자로 남지 왜 그랬대?” 하실 게 아니라 실제로 왕들이 다 흔들렸어요. 공자 말을 듣고 싶어 했어요. 근데 간신들이 중간에 다 막았어요. 그래도 그 간신들도 못 막은 게 공자 제자들은 고액 연봉에 스카우트돼서 다 잘 나갔어요. 공자한테 배운 사람이라도 쓰겠다는 마인드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 거 생각하시면 여러분 양심의 힘이란 게 있습니다. 공자님 말을 들으면 내 나라가 안정될 것 같거든요. 근데 옆에서 간신들이 계속 간언을 해요. “저 사람 쓰면 큰일 난다. 큰일 난다.” 그래서 멈추죠. 그런 선비들의 마음도 이해하시려면 구공을 이해하셔야 되고
27:03
구공을 닦다 보면 여러분도 또 영성계의 고수가 되는데 사실은 아주 또 빨라집니다. 유교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유교는 곧장 구공으로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그 안에 아공 법공이 없느냐? 아니에요. 다 있어요. 왜냐하면 여러분 중용 보시면 이런 말 하죠. 에고의 희로애락 가지고 얘기해요. 유교가 천하를 얘기할 것 같잖아요. 중용이면요 바로 손자가 쓴 글이니까 공자님의 육성의 가르침에 제일 가깝죠. 현재 실제로 손자가 썼을 거라고 학계에서도 인정받습니다. 왜냐하면 중용은 워낙 고본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건 손자가 쓴 게 맞다고 봐요. 공자님의 손자 자사가 썼다고 보는 게. 그런데 그 자사가 뭐라고 했냐면. 그때 아직 불교도 들어온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에고의 세계를 희로애락으로 대표하면서 “희로애락이 없는 자리가 천하의 중심이요 희로애락이 일어난 일어나서 절도에 양심에 맞는 것은 조화로다” 하면서
28:04
이 중심은 천하지대본, 천하가 다 여기서 나왔고. 내 마음의 희로애락 없는 자리에서 천하만물이 나왔대요. 이게 지금 아공 법공의 극치입니다. 그 당시에 그런 이상한 말들을 막 했어요. 이게 천하의 대본이고 그리고 희로애락을 양심으로 조절하는 건 천하가 공통으로 걸어야 할 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만 이루면 우주에서 인간이 천지를 바로 잡게 하고 만물이 잘 번성하게 도울 수 있는 길이다. 우주적이에요. 우주론적이에요. 이 온 우주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라고요? 자기 감정경영만 잘하면 된대요. 이 감정 경영하는 비방은 어디서 나오냐면 천하 만물의 큰 뿌리에서, 그게 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바로 꺼내서 쓰면 된다는 겁니다. 양심대로만 양심성찰만 잘하면 되고. 양심성찰의 원리는 뭐라고요? 요거는 희로애락이 발동해서 굴러가는,
29:02
육바라밀과 인의예지 펼쳐지는 건 제가 얘기하는 보편법칙이죠. 요 안에 시공을 초월해서 들어있는 큰 뿌리(대본)라고 하는 것은 근본원리입니다. 예전에 많이 해드렸데 중용 나온 김에 복습 차원에서. 이걸 통달된 길이라 그래요. 통달된 길이다. 달도. 천하의 큰 뿌리다. 희로애락 없는 자리는, 시공을 초월한 이 영원한 현존 자리에는 천하 만물의 큰 뿌리가 들어 있고. 이 희로애락을 양심적으로 잘 굴리는 것은 그게 동서고금이 공통으로 걸어야 할 길인데 요거는 보편법칙입니다. 양심을 시공 안에서 잘 따르는 것. 시공을 초월한 양심의 근본원리와 시공 안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양심의 보편법칙. 구체적인 보편법칙들이에요. 이렇게 해야지 양심이다.
30:05
남한테는 겸손해라. 사랑해라. 시공 안에서 구현될 때는 이것들도 다 보편법칙입니다. “왜 사랑을 해야 되죠?” 하는 건 근본원리 차원입니다. 왜 그래야 되겠어요? 사실 이유가 없죠. 우리 본성에 그렇게 박혀있어요. 그게 옳다고 여기게 박혀 있다고요. 여러분이 왜 그래야 되는지는 다음 문제예요. 여러분이 일차적으로 알아내야 되는 건 뭐라고요? 내 본성에 명령어가 뭐라고 새겨져 있나? 그거 알아내는 거예요. 유교에서 그거 알아내고 보니까 뭐라고 새겨져 있다고요? 인의예지신이라고 새겨져 있더라는 거예요.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예절 지켜라 성실하라.” 이렇게 새겨져 있더라. 불교에서 보살들이 알아내니까 뭐라고 새겨져 있더라고요? “보시하라 계율 지켜라 수용하라 정진하라 깨어 있어라 지혜로워라.” 요거 6개 박혀있더라는 거예요.
31:01
재밌지 않습니까. 근데 그 항목들이 맞춰 보니까 똑같더라는 거예요. 그게 놀라운 겁니다. 불교와 유교가 연구해서 같은 결론을 낸 이 부분을 우습게보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불교 유교의 최고수들이 연구해서 우리 마음 안에서 알아낸 게 이거예요. 희로애락을 초월했다는 건 시공이 없는 세계입니다. “이원성과 시공이 없는 세계에 불변으로 천하 만물의 뿌리가 딱 박혀있는데 우주는 이런 원리로 만들어지고 굴러간다 하고 박혀져 있는 원리가 인의예지신 그리고 육바라밀의 근본원리더라.” 그리고 현상계에서 그럼 어떻게 살아가면 되느냐? 그것만 잘 따라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상황상황에 맞게 육바라밀과 인의예지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법칙들이 보편법칙이라는 거. 즉 이럴 때는 상대방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게 더 육바라밀에 맞아.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 현실 속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현실 속에서 이럴 때 저럴 때 상황에 맞게 각종의 보편법칙을 동원해서
32:00
문제를 풀어 가는데 그 보편법칙이 결국 뭐겠어요? 양심에서 자명하다고 하는 것들이에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이런 게 있는 건 알더라도 현실에서 보편법칙을 못 찾아내시면, 즉 “이 경우는 뭐가 더 자명한 거야?” 이걸 못 읽어내시면 여러분 양심 못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공 법공까지 깨달아서 내 안에 양심이 있는 줄까지 아는 분들도 있어요. 아공 법공까지 알아서 늘 깨어 있어요. 늘 자기 허령지각, 공적영지를 잘 보존하고 살면요 그 안에 사랑의 덕목들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는 분들도 실제로 있어요. 그런데 왜 이분들이 문제냐? 밖으로 꺼내서 써본 적이 없는 거예요. 상황상황마다 보편법칙이 연구가 안 돼 있는 거예요. 근본원리에 대해서는 나름 체험이 있습니다만 보편법칙 차원에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이분은 사실은 남하고 실제 대화를 해보면 엉망이 돼버리기가 쉬워요. 저 안에서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부모님한테 저 내면에서 ‘효도하라’고 외치고 있죠?
33:03
막상 효도해보려면요 “아 이거 못 해 먹겠네”가 돼요. 부모님이 이렇게 해도 싫다 하고. 또 자녀 교육도 사랑으로 덤볐는데 몇 번 대화를 오고가면 “야 진짜 넌 나랑 다시 보지 말자.” 뭐 이런 마음이 또 금방 일어나죠. 그런데 그게 보편법칙 공부의 중요함이에요. 그 상황에서 또 육바라밀을 적용하고 인의예지를 적용해서 또 풀어가고 또 풀어가고 하다가 어떤 결이 보이는 게 보편법칙이에요. 보편법칙은 현실에서 투쟁을 통해서 알아내는 겁니다. 역경과 순경이 올 때마다 양심을 총동원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중에 “이런 게 자명하다 이런 건 찜찜하다”를 계속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내죠. 그게 과학적 실험과 똑같은 거예요.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다가 “야 이거는 의심할 수 없게 맞는 법칙 같아” 하고 여러분이 살면서 하나하나 알아낸 것들이 그게 양심의 보편법칙이에요. 보편법칙이라는 게 막연한 게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거예요.
34:03
근본원리는요 사실 오히려 엄청 추상적이죠. 근본원리는 우리 저 내면 안에 있는 명령이라면, 보편법칙은 그 명령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부응할 거냐 해서 연구를 통해서 알아낸 법칙들이에요. “현상계에서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되더라” 하는 것들이에요. “너무 잘해줘도 안 되고 또 너무 멀리해도 안 되더라.” 이런 건 요령이죠. 이게 보편법칙의 요령, 현실의 요령들이에요. “딱 요 정도 줘야지 달랜다고 더 줬다가는 꼭 나중에 후환이 있더라.” 거기 딱 맞는 자명 찜찜의 그 선들이 있어요. 결국 어려운 게 아니에요. 여러분 수많은 보편법칙 공부하려면 어느 책을 봐야 돼요? 그게 아니라 양심 노트를 많이 쓰셔야 알아요. 여러분 마음에서 읽어내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보세요. 찜찜한지 안 찜찜한지? “찜찜” 그러면 보편법칙을 어기신 거예요. 과하게 어겼거나 부족하게 어겼거나 아무튼 어긴 거예요. 자명하다는 소리 나게 늘 살아가시다 보면 자기 내면에서 보편법칙이 자연스럽게 정립됩니다.
35:01
내가 알아낸 보편법칙 중에 또 찜찜한 부분이 있으면 그렇게 막 적용하다 보면 또 찜찜할 때가 와요. 그럼 또 고치고 고치고 해서 그런 과학자 같은 마음으로 계속 탐구하시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무형이라 법칙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마음 안에 이미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내가 마음을 이렇게 쓰면 찜찜해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남들이 괜찮다고 해도 내가 안 풀려요. 찜찜해요. 그러면 “내 욕심인가?” 명상을 자꾸 해보시고. 제가 얘기한 대로 과거도 내려놓고 미래도 내려놓고 다 내려 놨는데 그래도 찜찜해요. 그럼 이거는 뭔가 양심상에서 내가 지금 죄를 지은 겁니다. 그럼 그 부분을 감안한 보편법칙을 다시 정립하는 거죠. 이럴 때는 이렇게 하자. 이럴 때는 이렇게 하자. 실제로 여러분이 공부한다는 건 다 현실 속에서 보편법칙을 탐구해 가시는 거예요. 양심 공부는 일차적으로 보편법칙 탐구입니다. 보편법칙을 많이 알아내신 분이 사실은 근본원리도 제일 정확히 읽어내고 계신 거예요.
36:05
그렇지 않겠어요? 묘하죠. 동전의 앞뒤예요. 많은 분들이 난 한 큐에 우주의 진리를 깨치겠다 하는 분들이 보통 착오를 일으키는 게 이거예요. 아공 법공 정도 깨닫고 내 안에 육바라밀 있더라. 근데 실제로는 못 해요. 왜? 육바라밀 공부가 제대로 된 건 아니에요. 여러분 참나 안에 육바라밀 있으니까 참나만 깨달음으면 왠지 자비로워지고 정의로워지고 해요. 그러니까 감각은 있어요. 누구나 체험은 있다구요. 내 안에 육바라밀 있다는 체험은 있는데 보편법칙 탐구라는 구체적인 수행을 안 했기 때문에,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실제로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뭐처럼 막연하냐? 일반인들도 다 양심해야 된다는 거 알아요. 그 정도 체험적 이해는 있어요. 그런데 잘 안 하죠. 또 결정적인 순간에 못 해요. 공부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학습이 안 돼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일반인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더구나 더 문제가 일반인은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이라도 있는데 아공 법
37:03
공을 어설프게 깨달아 놓으면 양심 어겼을 때 참나로 도망가 버려요. “일체 모를 뿐”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소시오패스에 가까워질 수도 있어요. 모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양심이 좀 딸리는 분은 견성 이후 사실은 더 망가질 수가 있습니다. 구공 공부에선 탈선해버릴 수도 있어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를 얻었다라고 하는 아상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더 더 꼴 뵈기 싫어지는 어떤 행동을 보여요. 실제로 육바라밀에서 더 멀어져 버릴 수도 있어요. 그거 되게 위험한 거예요. 다 그렇다는 거 아니고. 원래 좀 양심지능이 높은 분들은 견성을 하면 자동으로 육바라밀을 지향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선근이 좀 딸리는 분들은 여기서 탈선을 합니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도 많이 되고 그래요. 견성해 놓고 사이비 교주된 분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우주에서 제일 잘 난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그래서 남을 함부로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공부를 안 했으니까 사실 자기는 뭐가 선인지 악인지 구분도 못 하잖아요.
38:05
그 부분을 자기 억측으로 막 채워가면서 가다 보면 나중에 괴물이 돼버릴 수도 있어요. 여러 인생 파탄내고 끝냅니다. 요런 것도 잘 생각해보셔야 돼요. 그래서 이런 결로, 지금 제가 얘기하는 것도 보편법칙이죠.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더라.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더라. 이런 것들을 체험적으로 많이 알아내셔야 돼요. 그리고 보편법칙은 언제든지 또 수정할 용의가 있어야 돼요. 더 자명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는 바로바로 법칙을 또 수정해서. 고집 부릴 게 아니죠. 난 뉴튼 법칙이 제일 아름답더라.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이걸 또 깼어요. 아인슈타인 미워하고 막 그럽니다. 아인슈타인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돼. 뉴튼 선생님이 얼마나 지금 또 실망하실까? 이런 이상한 팬심으로 가고 빠심으로 가면 진리가 왜곡됩니다. 여러분 내면에서 수많은 실험을 통해 의례히 이렇게 하면 먹혔는데 어느 날 해봤는데 안 먹힐 때 보면 빨리 그
39:00
보편법칙을 수정해야 돼요.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이 법칙은 맞는데 내가 잘 못 적용했다던가 뭔가 여러 가지 늘 분석을 하셔야 돼요. 보편법칙은 그 순간순간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게 보편법칙입니다. 저도 내일 결혼식 또 가는데 얼마를 내야 할까요? 여러분 보편법칙에 맞게 판단해야 됩니다. 여러 안을 내놓고 어떤 선이 있겠죠. 찜찜과 자명이 만나는 선. 이 선을 넘어가면 찜찜해지고 이 선에 부족해도 찜찜해지고 이 선에서 할 때 더 자명해지는 그 선을 계속 찾아내시는 것, 그게 보편법칙이에요. 그 법칙을 꼭 무슨 말로 하실 필요가 없고 자기만 알면 돼요. “이럴 땐 이렇게 이럴 땐 이렇게.” 그래서 보편법칙은 결국 뭐냐? 한 마디로 하면 양심이 현상계에서 여러분이 하는 생각 언행에 대해 자명하다고 하는 것, 그게 보편법칙에 맞는 겁니다. 그게 계율에 맞는 겁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렸죠. 여러분 마음이 알면 되지 말로까지
40:07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이 보편법칙입니다. 꼭 법칙화 한다는 게 아닌 이유가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이때는 이게 옳아 하는 걸 어떻게 다 말로 해요. 수많은 데이터를 여러분이 갖고 있는데 그 데이터를 가지고 “이게 제일 자명해.” 이건 육바라밀 밖에 말할 수 없어요. 육바라밀 이상의 나름의 많은 법칙을 세우려고 하시지는 마라고요. 자명하게 딱 말로 하기 좋은 법칙도 있지만 애매한 법칙도 많아요. 애매하지만 우리는 자명하다는 걸 알아요. 그럼 그걸 따르시면 됩니다. 아시겠어요? 왜 그러냐? 왜 그러냐? 윤리적으로 애매한 게 많다는 게 우리 인간의 삶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몇 마디 보편법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꼭 계율들이나 율법들이에요. 계율과 율법이 사실은 보편법칙이에요. 그렇죠? 십계명이 다 보편법칙이에요. 안식일을 지켜라.
41:03
그런데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해도 예수님처럼 양심에 안 어긋날 때도 있거든요. “나 오늘 안식일 어겼는데 양심에 더 뿌듯해.” 이게 안 잡히잖아요. 이게 어렵습니다. 몇 개의 법칙으로 우리 삶을 다 풀 수가 없어요. 중요한 건 육바라밀이 그 상황에서 최대한 잘 적용되는 게 핵심이기 때문에 꼭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게 많을 거예요. 다만 자기는 자명한지 찜찜한지 분명히 알 거예요. 육바라밀 분석을 자꾸 하다보면 어느 부분 때문에 자명한지는 알 거예요. 어느 항목에 부족으로 인해서 그게 찜찜한지? 보편법칙을 말로 한다는 것보다 요런 거 잡아내시면서 계속 매순간 자동으로 그 자명한 걸 선택할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말로 설명되는 것도 있지만 설명 안 되는 영역도 많아요. 인간의 삶이 워낙 복잡다단해서. 복잡한데 감을 딱 잡아요. “요럴 땐 요렇게 해야 돼” 하는 감이 있는 거죠.
42:00
말로 해 보세요. 말로 하기 힘들죠. 지금 저 상대방 눈빛이 이렇고 저 사람이 이런 눈빛일 땐 요렇고 이게 자명해. 이걸 말로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눈빛과 이런 현장 분위기 속에서는 이게 자명. 이걸 말로 어떻게 하시겠어요? 못 해요. 그런데 율법만 보고 연구한 사람은 현장 분위기 다 무시입니다. 배운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분위기가 개판 되는 겁니다. 간신히 불안 불안하던 현장 분위기 쫙 깨지는 거죠. 아시겠죠. 이게 말로 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하지만 보편법칙은 뭐냐? 그 순간 제일 자명하다고 판단되는 그것. 그게 보편법칙의 맞는 겁니다. 아시겠죠. 여기까지 감 잡으실 거예요. 이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군자고 보살입니다. 그러면 재밌겠죠. 보살은 일어나면 “오늘 하루 또 어떤 경험을 하며 거기서 뭘 또 얻어서 또 내가 이 사회에 어떤 좋은 업을 지어서 기여할 건가?” 요런 게 제일 삶의 주 미션이죠.
43:03
저도 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살아가는 게 제일 군자와 보살의 삶이다 하는 확신은 있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저도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제가 또 살아보니까 이런 공부를 먼저 해봤잖아요. 근데 이거 아니고는요 사람의 삶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게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내가 지치고 삶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고 있을 때에도, 에고로만 하면 이런 생각 안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몰라 괜찮아 5분이라도 하면서 요런 생각을 하면 막 의욕이 일어나요. 에고의 의욕이 아니라 참나가 에고를 덥힘으로 인해서 에고가 뜨거워져서 일어나는 의욕이에요. 차가와졌을 때 에고한테 이런 의욕 내라고 하면 못 내요. 자기도 죽겠는 사람한테 “야 인류를 위해 니가 보살도를 해야지.” 내가 죽겠는데 전혀 안 와 닿죠. 제가 하나 지금 걱정하는 게 우리나라가 자꾸 더워지고 있어서. 제가 옛날 강의
44:04
때 말씀드렸죠. 더운 나라는 대승을 좀 싫어합니다. 일단 내가 죽겠는데 어디 그늘에 가서 가만히 어떤 움직임도 없이 존재하는 게 1차 목표이기가 쉽거든요. 그런 나라는 더운 나라들은 소승 수행이 대개 유행해요. 누구를 돕는다는 게 이 정도예요. “이쪽에 그늘이 있다. 와서 앉아라.” 이 정도. “너도 열반에 들어” 이런 거죠. 그늘을 열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너무 삶이 힘드니까 열반에 들어서 쉬는 게 제일 목표입니다. 근데 우리같이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대승이 발달해요. 가만히 있다가 바로 철이 또 지나버려요. 철모르는 사람이 돼요. 계속 철을 따라가야 돼요. 옷도 계속 줄였다 더 입었다 이걸 계속해줘야 되죠. 이게 때에 맞게, 사계절에 맞게. 즉 4계절이라는 게 결국 인의예지신이거든요. 봄 기운 여름 기운 가을 기운 겨울 기운에 맞게 계속 움직여주는
45:04
문화에서는 대승이 더 발달하구요. 너무 더워서 몸까지도 “이건 내 몸 아니야. 이거 내 몸 아니야. 지금 땀나고 있는 거 이거 내 몸 아니야. 나는 어떤 더위도 느끼지 않아.” 이렇게 정신승리로 계속 가야 되는 문화에서는 소승이 발달합니다. 우리나라가 자꾸 더워진다 그래서 제가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나 더 해요. “아 이거 대승 분위기도 아직 지금 새로 갱신이 안 됐는데, 업그레이드가 안 됐는데 더워지기까지 하면 이거 안 되는데.” 그냥 제 쓸데없는 기우인데 느낌 아시겠죠. 우리가 나름 축복받은 거예요. 사계절 문화라는 건요. 보세요. 중용도 사계절 문화예요. “일 없을 때 희로애락 없는 세계에 들어가 있다가 일 생기면 희로애락을 잘 조절하고.” 부지런해야 돼요. 바빠요. 이게 소승 수행자들한테는 되게 좀 빡세 보여요. “왜 저렇게 현상계에 대한
46:02
미련을 갖고 움직이지? 그냥 딱 들어 앉아있으면 되는데. 그늘에 일단 들어왔으면 절대 안 나가는 거지 왜 이렇게 들락날락 하는 거야?” 이렇게 보입니다. 서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그늘에만 들어 앉아있을 수 없는 이유가 결국 구공의 강조에 있어요. 소승철학에서는 구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냐? 강조하더라도 이 정도로 강조해요. 참나 안에 들어오면 구공도 이미 완성된 것이다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해요. 제가 지금 선불교가 소승이라고 하는 이유 아시겠죠? 선불교 고승들 얘기할 때 보세요. “견성만 하면 그 안에 모든 게 원만구족해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견성만 하면 이제 끝이다”라고 자꾸 얘기를 하는 문화는 다 소승문화예요. 대승은요 견성은 시작일 뿐이에요. 견성이라는 건 내 안의 진리가 뭔지 알아낸 거잖아요. 넌 이제 죽었다 이거예요. 견성했냐? 넌 죽었다. 세세생생 너는 니가 알아낸 진리를 가지고 이 우주를 아름답게 꾸미고
47:02
다니는 인테리어 하는 업자로서 세세생생 살아가야 돼요. 장자에서 천형이라고 했죠. 천형. 하늘이 내린 형벌을 받았다. 여러분 구공까지 아시겠습니까? 혹시 더 안 가시려면 여기서 멈추세요. 구공을 알아내고 나면 나쁘게 말하면 천형을 받은 것처럼 돼요. 이제 여러분은 비로자나 부처님한테 보살로 고용돼 버려요. 파트너 관계이지만 고용이 돼서 계속 지령이 옵니다. 미션 임파스블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자꾸 지령이 와요. “너 양심 찜찜하지 않아? 움직여야지.” 이렇게. “가족들 지금 다 출근했는데 너 계속 누워 있는데 양심에 자명하냐?” 이런 게 자기 양심에서 계속 자기를 움직입니다. 그럼 밖으로 나가요. 딱 눈에 뭐가 띄어요. “저 사람을 보고 있으면 너 찜찜하지 않냐?” 그럼 가서 도와야 돼요. 어떻게 보면 천형이죠. 재미있는 게 장자에서 천형을 누가 얘기하느냐 하면 공자가 얘기해요.
48:06
도교 도인들이 물어봅니다. 그때 도교는 없었지만 도교의 선조들이 있었어요. 중국에도 소승이 있었어요. 숲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시는 도인들. 공자를 보면 이해가 안 되니까 늘 비판해요. “야 인간들이 그렇게 양심적이 될 리가 있냐? 너도 도를 알았으면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명상에 들어가 있어라.” 이걸 자꾸 조언합니다. 공자 입장은 그래요. “난 천형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형벌을 받아서 이렇게 살다 갈 수밖에 없다.” 이 얘기를 합니다. 이게 보살도예요. 장자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논어에도 나와요. 논어에서도 수많은 중국 도인들이요 “봉황아 멈춰라. 너도 알지 않냐. 세상 사람들이 니 말 안 들을 거 알지 않냐. 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느냐.” 그 말을 전해 듣고 공자가 이 말 합니다. “내가 사람하고 살아야지 새나 짐승하고 살겠냐? 내가 자연에서 그렇게 동물들 벗해서 살 수 없다. 난 사람이다.
49:07
사람들 이롭게 하는 게 내 임무다.” 이 말 합니다. 중용에도 이 말이 나와요. “사람이 도를 닦는다면서 사람을 멀리 하면 그 도는 도가 아니다.” 공자가 얻은 도는 뭐예요? 구공의 도요. 남을 사랑하고, 남한테 죄짓지 않고, 남을 인욕해 주고, 나와 남 모두가 더 잘 되는 방향으로 정진하면서, 늘 깨어서 지혜롭게 인간의 이런 관계를 이끌어가는 거. 이게 공자가 깨달은 도예요. 이걸 아셔야 돼요. 이게 대승 소승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분이 무슨 신통 있어서 들으시는 게 아니라 그걸 아주 제대로 깨달았던 분이 공자님이기 때문에 성인 소리 들으시는 거예요. 이게 최고 신통이거든요. 이걸 못 알아내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도인도 이건 못 알아내요. 자기 마음 안에 어떤 우주적 진리가 새겨져 있는지 이건 못 알아내요. 이거 알아내는 분이 제일 신통자예요.
50:03
신통 중의 신통이 육바라밀 잘하는 게 제일 신통이에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통을 좋아해요. 일단 하늘을 좀 날아 주고 물 위도 좀 걸어야 되고. 지금도 성경에서 예수님이 물위 걸은 거 가지고 팔아먹잖아요. 지금 유튜브에 제가 물위를 걸어서 올려봤자 저거 다 조작이네 합성이네 좋은 평가 못 받을 거예요. 그런 말단적인 거 가지고 승부를 보려고 하면, 그 승부 보려는 마음도 오죽한 마음이에요. 도를 전하러 와서 물위를 걷는 거 보여주고 있어요. “나 봐라 물위를 걷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요 사람이 물위를 걷는 게 그렇게 신비입니까? 신비죠? 왜 신비인가요? 그런데 여러분 원래 이렇게 살아가는 건 신비하지 않으세요? 뭔데 이렇게 계속 내가 팔다리, 이거 물질을 내가 굴리고 다니는지? 물위를 걷는 걸 보고 신기하다고 하는 건 여러분이 부리는 신통과 다른 신통을 보고 신기하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걸어 다니는 것도 신통이에요. 신기한 거예요. 새가 날아다니는 것도
51:04
신기한 거예요. 인간이 날아다니니까 신기하다고 하는 거죠. 그게 일반적인 보편법칙과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는 것뿐이에요. 신통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요 “나는 일반적 보편법칙에 좀 어긋난 보편법칙을 갖고 따르고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좀 어기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이에요.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역천이야. 빨리 내려서 걸어. 하늘을 무시하냐. 인간이 날아다녀야 되면 하늘이 날아다니게 만들어 놨겠지.” 이렇게 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타고난 그걸 잘 발현하는 게 우주에 제일 효도하는 거지 뻘 짓을 이상한 해괴망측한 짓 하는 것이 절대 하늘에 우주에 효도하는 게 아니다. 과한 비판이지만 요것도 염두에 두세요. 그래서 중을 잡으세요. 예수님이 그거 보여주려고 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거 자꾸 보여주면 인간이 오히려 도에서 멀어져 버려요. “도를 닦읍시다.” “예. 저 준비됐습니다. 오늘은 하늘을 날까요? 물위를 걸을까요?”
52:06
이런 분이 학당에 오시면 저희는 아마 이번 생에는 치료가 좀 힘듭니다. 도를 그런 걸로 알고 오시면 진짜로 게임 끝나요. 뭔 얘기를 해도 “견성해보세요.” “견성하면 물위를 걷나요? 안 되면 안 할랍니다.” 예. “양심성찰 해보세요.” “이거 하면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아마 안 될 걸요.” 배우시겠어요? 그것은 정말 방편이고 정말 양념입니다. 양념. 조심해서 써야 할 신통이 있더라고요. 제일 중요한 도의 본질이 이거다. 이 얘기 좀 드렸습니다. 5분 쉬고 구체적으로 주역으로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52:44
[출처] (녹취)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42강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