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43 서양철학11 명상록 1
[인문학 고전콘서트] 27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1)-자명함과 인욕(1: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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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디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어갑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인 마르쿠스는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이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모부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양자로 들어간다. 양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안토니우스의 다른 양자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순탄한 과정을 밟으며 공동황제가 된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로마제국 국민의 타락한 윤리의 회복과 전염병의 퇴치,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는 직접 전쟁을 수행했으며 막사에서 죽을 때까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의 로마인들에 의해 ‘현제賢帝’로 인정받았다. 그의 지위는 아들 코모두스가 이어받았다.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다. 5현제 시대에는 친아들에게 제위를 주지 않고, 최선의 적임자를 선택하여 황제가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16대 황제고요. 121년에서 180년 기원후 분이죠. 에픽테토스의 제자격이죠. 에픽테토스의 글을 정말 열심히 보고 공부하신 분이라 명상록에 나오는 개념들은 에픽테토스가 다 썼던 개념들입니다. 그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철학으로 삼고 이분은 이제 에픽테토스는 철학자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교사로만 활동했지만 이분은 군주였잖아요. 황제이다 보니까 그 음모가 난무하는 궁정에서 이 철학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거. 노예와 황제의 이런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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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제로서 또 우리가 그분이 실제로 철학을 적용해보면서 삶에서 많은 고뇌에 빠졌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고 그런 고뇌를 이겨내면서 그 철학 이론이 살아남은 이론들이죠. 현실에 부딪히면 보통 철학 이론을 버리겠죠. “이게 말이나 그렇지 실제는 안 그렇구나” 할 텐데, 그 뭐죠, 아우렐리우스는 끝까지 죽을 때까지 가능하다라고 보고 이 현실을 철학화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니까 그 점만 봐도 우리가 배울 부분이 있고 이런 분들한테 배울 거는요 이런 겁니다. 간접 경험이에요. 여러분이 안 해보셨지만 이 철학을 품고 철학자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산다는 거는 어떤 거고, 그러면서 이런 경험 속에서 또 이런 지혜를 얻었구나 하는 걸 간접 체험하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 배우실 게 많을 거예요. 그래서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요 본명은 마르쿠스 아니우스 베루스인데 부모가 일찍 세상에 떠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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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인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양아버지가 황제가 돼요. 그러면서 또 안토니우스의 다른 양자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돼요. 그래서 공동 황제로 있다가, 그 형제이죠, 형제인 그 베루스가 먼저 죽습니다. 그래서 또 이 황제가 됐다가 아들과 또 같이 황제가 됩니다. 이게 재밌는데 이분이 로마 5현제 중에 마지막 황제예요. 그래서 영화 있지 않나요? 로마의 마지막 뭔가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거기가 이제 이분 돌아가신 뒤의 상황이죠. 이분이 가면서 로마가 운이 다하면서 이제 쇠퇴하기 시작하는.. 아들이 좀 문제가 있는 양반인데 이 양반을 황제로 시킨 게 황제를 앉힌 게 이분의 최고, 뭐죠, 잘못된 그런 정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분야를 많이 다뤄요, 영화에서. 글래디에이터 영화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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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아들이 살해하죠. 아들이 살해하고 그 막시무스 주인공을 치잖아요. 영화 기억하세요? 그래서 이때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들이 워낙 문제라 망나니라 아들한테 안 주고 그 주인공한테 주려고 하는 걸 황제 자리를, 그 아들이 없애버리고 정권을 차지해서 로마를 말아먹는 내용이거든요. 영화의 주요 소재예요. 이분이 마지막 5현제인데 재밌는 게 동이족도 동이족이 옛날의 전통이 그 아들한테 안 주는 겁니다. 아니면 아들 중에서도 유능한 아들한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장단점이 있는데요. 중국은 큰아들한테 주는 거예요, 무조건. 농경이 주인 것도 원인이고요. 농경사회에서는 크게 무슨 변란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큰아들한테 주면 별 문제가 없고 큰아들이 제사 지내주면 되거든요. 이렇게 하는 게 중국식이고 동이족식은 유목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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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많다 보니까 유목민족은요 리더를 잘못 뽑으면 여기로 가야 되는데 저쪽으로 가면 다 죽는 거예요, 그 부족이. 그러니까 부족을 뽑을 때 철저히 능력을 보는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신라 때도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했죠. 한 왕조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유능한 사람들이 자꾸 치고 올라와서 자리를 차지하는 그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그 청나라 때도 청나라 때 왕자의 난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이유가요 이제 이제 잘못된 그 작용을 일으키는 부분이죠. 큰아들한테 왕자를 주기로 하면 다른 왕자들이 일찍이 마음을 비우고 그냥 큰아들을 도울 텐데 청나라가 원래 저쪽 동이족 아닙니까. 동이족 전통이 있다 보니까 왕자 중에도 제일 유능한 왕자한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자면 다 대선후보로 등록이 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누구한테나 기회가 있기 때문에 왕자들마다 패거리를 지어서 실력 경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어디에다가 그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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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다 넣어놔요. 현판 뒤 같은 데다가 그래서 죽었을 때 거기서 꺼낸 이름이 황제인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 갈아치우느라고 끝없이 암투가 벌어지죠. 누구든지 한번 해볼 만하다 하는 그게 있으니까. 이게 동이족의 전통이 중국 문화 속에서 이렇게 안 맞아가지고 일어난 일이에요. 그 부작용을 일으킨 일인데 아무튼 그 장점은 아시겠죠. 유능한 리더를 앉히겠다는 거. 세종대왕이 셋째 아들인데 뭐죠. 왕이 된 게 나름 비슷하긴 하죠. 청나라 때 청나라는 늘 그런 식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왕자의 난이 끝이 없을 수도 있었겠죠, 조선도. 그래서 이 경우에 따라서 장단점이 이제 서로 달라지기도 하는데 장점은 유능한 사람한테 왕위를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로마는 어떻게 했냐면 로마도 융성할 때 5현제 시대는 다 그랬어요. 자기 아들한테 안 주고 유능한 이를요 양자로 맞아요. 그래서 이 아들로 만들어서 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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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의 제일 성인 임금이 요임금인데 동이족 전통이 그래요. 순임금이 동이족이고 요임금이 동이족인데 요임금이 딸이 둘이 있죠. 두 딸이 있고 전하는 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이 아들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맹자에 보면. 그래서 두 딸을 순임금이 제일 유능하다는 소식을 들어오고 실제 불러다가 일 시켜보니까 유능하니까 두 딸을 줘서 사위로 만들어요. 그래서 인척관계를 만들긴 합니다마는 이런 전통이 비슷합니다. 어느 시대나 잘나갈 때는 대개 저런 식이에요. 친아들보다는 요즘 기업 경영도 그렇죠. 교회도 아들한테 주려고 하는 마당인데 아들보다 유능한 사람한테 주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실 거예요. 지금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아들한테 주고 싶단 말이죠. 이 전통과 더 유능한 사람한테 줘야겠다는 거. 이 두 가지가 뭘 갈라내냐면요 예기 동양의 예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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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해 놓은 최고의 기록이죠. 유교 경전 중에 예기에 뭐라고 하냐면 공자님이 바로 아들한테 아들한테 안 주고 유능한 이한테 주는 사회를 대동사회라고 하고요. 아들한테 주는 사회를 소강사회라고 합니다. 조금 건강한 사회 정도 단 둘 다 통치가 잘 됐을 경우에 치(治) 난세는 아니에요. 이거의 반대는 난세죠. 네 난세. 난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들한테 주는 거는요 천하를 자기 걸로 사유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사사롭게, 천하를 공적인 걸로 아는 사회를 대동사회 그래요. 천하를 내 거로 안 보는 거예요. 내가 임시로 맡았을 뿐이지. 그럼 나보다 더 잘 맞는 사람한테 전문 경영인한테 넘겨주는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이런다고 꼭 잘 되는 건 아니에요. 그 전문 경영인이 실력이 진짜 좋아야 되니까. 또 이때도 아들이 더 실력이 좋으면 아들한테 주게 될 때도 오겠죠. 근데 이 미묘한 차이죠. 그래서 요 임금이 순임금한테 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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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인데 여기까지는, 공자님이 칼같이 나눠요. 순의 후계자가 우임금인데 순이 우한테 줄 때도 대동이에요. 우임금은 아들이 아니거든요. 아들 아닌데 유능하다고 준 거예요. 근데 우는 아들한테 줘요. 그래서 우임금부터 쉽게 말하면 소강으로 칩니다. 냉정하죠. 우임금을 유교에서 존중을 하더라도 우임금부터는 소강이에요. 아들한테 줬기 때문에 그래서 맹자에 보면 저 변명이 한참 나와요. 맹자가 변명을 해주는데 아들이 워낙 뛰어났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러면 이 아들까지 인정하겠는데 그럼 뒤에 또 아들한테 주거든요. 이거 여기서부턴 좀 말이 논리가 없죠. 그래서 쭉 아들한테 갑니다. 북한이나 지금 어디 그 돈 많이 모인 데들은 아들한테 주고 싶겠죠.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마는 그게 이제 대동은 못 된다는 겁니다. 진짜 양심정치, 양심 경영에서는 아들한테 주는 게 아니고 가장 양심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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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양심적이기만 해선 안 돼요. 경영을 하려면 경영 능력이 있어야죠. 유능하면서 양심적인 사람, 제일 적합한 사람을 뽑아서 준다는 겁니다. 로마도 잘 나갈 때는 이런 이런 가풍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5현제 그래서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는 그런 식으로 황제가 됐는데 이 사람이 아들한테 준 게 그 실정 중에 하나예요. 아들이 문제가 많았는데도 준 거는, 그래서 그렇게 뽑을 정도로 그런 얘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시고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건 로마제국의 국민의 타락과 윤리의 회복, 전염병 퇴치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막는 것. 이게 황제로서 가장 주력으로 삼았던 부분이라는 거고요. 직접 전쟁을 진두지휘해서요 막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느라고 이때 아주 힘들었고요. 또 이분이 기독교를 많이 박해하고 반대했어요. 그래서 그거를 실정으로 보는 분도 있는데 그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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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황 따라 다릅니다. 이분의 철학만 봐도요 이분은 기독교의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로마인은 로마인 스토아철학이라는 로마의 핵심 철학이 있고 이 철학에서는 인간이 신의 이성에 따르면 얼마든지 선을 실천하고 악을 버릴 수 있다고 봤는데 어떤 예수라는 한 개인을 믿음으로써 그게 구원받는다라고 믿는 그 당시의 그런 종교에 공감 못했을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그러니까 어떤 이상적인 기독교를 가지고 비교하지 마시고요. 현실적인 기독교가 그런 모습으로 선교하고 포교하는 데 대해서 반대하고 로마는 로마식의 방식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아마 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꼭 실정이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가 없었든 아니면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를 했더라도 이런 로마식으로 이미 충분히 그게 다 더 탁월한 해결이 가능했다라고 믿었던 여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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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냥 알아두시기만 하고요. 그는 직접 전쟁을 수행했으며 막사에서 죽을 때까지 게르만 침입을 막아냈고요. 이로 인해 이제 현제로 인정받았고 아들인 코모두스가 이어받았습니다. 5현제 시대 거기 써 있죠. 친아들에게 제위를 주지 않고 최선의 적임자를 선택해서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 보면 전문 경영인한테 준다고 잘 된다라는 보장이 있으려면 전문 경영인이 진짜 적임자여야 되고요. 또 소강시대라고 해서 그러면 안 되느냐 아들이 유능하면 돼요. 이거냐 이거냐의 진짜 핵심은 치(治) 경영을 잘할 수 있는 영성 지능과 영성이 높고, 즉 선악을 인간이면 해야 될 일 해선 안 될 일을 정확히 갈라보는 그 힘이 영성 지능이고요. 그것과 일반적인 재능이, 경영 능력이 다 갖추고 있는 그 리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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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통치는 됩니다. 그래서 통치가 되는데 소강은 천하를 사유물로 아니까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거고요. 대동은 천하를 우리 집안 거로 보는 게 아니고 천하 거로 보니까 국민 거로 보니까 좀 더 낫다 하는 거지. 소강시대에 세종이 나오죠. 대동시대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하면 꼭 대동될 것 같지만 지금 민주시대에 대동의 정치인 리더, 세종을 능가하는 리더가 나오질 않죠. 이런 거 보면은 리더는 일단 영성과 재능이 겸비된 사람을 뽑아야 되고 이왕이면 지금 이 시대는요 그 아들한테 주는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시대에 세종 같은 존재가 나오면 우리나라도 대동이 뭔지를 정확히 한번 보여줄 수가 있죠. 이론으로만 있는 대동을 현실화시켜 볼 수가 있는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그러려면 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런 현명한 황제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정치에 임했는지도 한번 알아두시면 좋잖아요. 그래서 철학이면서 동시에 또 이런 국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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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이론이라고 한번 보고 한번 봐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특히 요즘 같은 민주사회는 여러분이나 저도 얼마든지 출마할 수 있지 않나요. 예전에는 왕자들한테나 부여됐던 건데 지금은 훨씬 대동이 더 많이 이루어져서 천하를 공(公)것으로 보고 여러분이나 저나 실력만 되면 출마할 수 있는 제도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도 지금 이런 황제적인 고민을 사실은 해야 돼요. 민주사회의 성숙한 시민이라면 나라를 어떻게 경영해야 옳은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맞죠. 왜냐하면 그런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격이 있는데도 모른 척하고 아유 저는 못합니다 하면요 어만 사람들이 자꾸 합니다. 그래 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자꾸 그 자리를 차지하니까 여러분이 꼭 여러분이 꼭 뭘 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식견과 올바른 정치하는 그런 경영에 대해 경영하는 방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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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계셔야 엉뚱한 사람을 고르질 않아요. 진짜 전문가를 찾아서 그 사람한테 우리나라를 맡길 수가 있는 그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민주사회는요 내가 능력이 되면 출마하던가 아니면요. 최소한 올바른 사람을 추천할 그런 눈을 갖고 있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왕 이 황제 철학자를 한번 다루는 김에 제가 좀 사고를 크게 하시라고 이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하나씩 볼게요. 이 황제 철학자는 뭘 가지고 철학을 했는지?
[1.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작은 ‘육체’와 ‘호흡’, 그리고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성)일 뿐이다. … 세 번째 것은 인간을 주재하는 것(이성)이다. 당신이 노인이라고 생각하라! 더 이상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반사회적 행동에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해서는 안 된다. 또한 더 이상 현재에 불만을 품지도 말고, 미래에 위축되지도 말라. (2-2)]
첫 번째 나는 무엇인가? 나라는 게 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 나 하면요 제가 항상 그리는 그림 있죠. 나 하면 이게 참나고 이건 에고 이러죠. 제가 그리면 참나 그런데요. 에고도 번역하면 뭔가요? 나예요 또 똑같이 나 참나 나예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참나나. 참자가 붙어서 좀 더 강조하는 거예요. 진짜 나. 그냥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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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인 나, 그냥 나. 그래서 이 크게 보면 그냥 나예요. 나인데 나는 과연 뭐로 이루어졌느냐라고 이 황제가 아우렐리우스가 이제 화두를 던지고 답을 합니다. 먼저 육체, 에고 중에서 한번 또 한 번 갈라볼게요. 에고 중에서 이런 마음의 영역, 혼의 영역과 육체의 영역을 갈라볼게요. 그래서 육체도 나죠. 이건 내 육체죠. 내 마음이죠. 그리고 지금 에픽테토스 다룰 때부터 꾸준히 지금 우리가 이제 이 참나 이 영, 혼에 상대해서 영, 더 밝은 영의 위치에 그 이성을 로고스를 항상 설정해 왔습니다. 로고스. 이런 신적 이 부분은 신과 동일 사실은 동일한 뜻이에요. 신, 신의 이성, 단순히 인간의 이성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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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인 이성이지. 여러분 안에는 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거를 똑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럼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요. 인간적이지 않다라고 하긴 그런데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옳고 그름을 우주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하나씩 설명해 봅니다. 그래서 설명을 하나씩 원래 해요. 제가 말이 길어서 줄였습니다. 육체 그리고 영혼, 그리고 이성인데 여기서는 지금 영혼 대신에 제가 이렇게 설명 드린 것도 하나 알아두시고요. 지금 여기서는 여기에 영혼 대신에 호흡을 넣습니다. 몸보다 더 미세한 게 호흡이죠.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뒤에 가면 또 나옵니다, 이런 설명이. 이렇게 늘 인간을 분석해요. 육체, 호흡, 이성 이렇게 분석하거나 육체, 영혼, 육체, 마음 마음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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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요. 여기서 영혼 만약에 영혼 이렇게 써진 걸 보시더라도 그냥 이거는 혼이라는 뜻입니다. 영이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흔히 이제 혼을 영혼 이러니까 육체, 호흡 그리고 이성이다. 이제 앞에 거 두 개가 설명이 나오고 세 번째 이성을 설명하는 부분만 제가 실었는데 세 번째 것은 인간을 주재하는 이성이다. 당신이 노인이라고 생각하라.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왔을까요? 뭐냐면 욕망이, 욕망을 초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인생 다 살아서 욕망을 좀 내려놓은 단계라고 생각해 보라. 그때 중요한 건 이성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옳고 그름. 내 삶을 충실히 살아옴으로써 이제 욕망이 다 소진되고 이성만 남은 상태, 그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라. 더 이상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더 이상 반사회적인 행동에, 반사회적이라는 건 이성에 위배되는 행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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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이성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 늘 하는 얘기 있죠. 남을 나처럼 생각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걸 남한테 가하지 않고 내가 진실로 원하는 걸 남한테 해주는 게 선이겠죠. 그걸 위배하는 건 악일 거고요. 나라면 참 이런 거 싫겠다 하는 걸 남한테 해주고 나라면 참 이런 대접받고 싶겠다 하는 걸 남한테 안 해주는 거 이런 걸 이제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사회적 행동은 이걸 위배한 행동이에요. 그러니까요 지금 이 뉴스를 보고 정치 경제 문화의 온갖 일들이 매일매일 터지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은요 그런 인간적인 그런 행동들에 휘둘리지 마시고 대부분 반사회적 행동들이 많아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흔들리시면 안 돼요. 이게 흔들리셔버리면요 여러분도 똑같이 거기에 공범이 돼요.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본인도 같이 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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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그렇게 버리면 안 돼” 하면서 나도 같이 집 밖에 내놓고 있으면 공범이잖아요. “왜 왜 지구가 이렇게 되는 거야?” 하면서 나부터 안 지키고 있으면 그러니까 본인 한 명이 힘이 아무리 약해도 정확히 판단하고 계셔야 되고 여러분은 그런 힘을 갖고 계세요. 이런 우주적인 힘이 여러분한테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반사회적인 행동에 절대 물들지 않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힘이 여러분 안에 이성으로 있다는 이거 아셔야 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 다 알 수 있어요. 선인지 악인지? 뭐죠. 그 뉴스 보면 정치는 정당은 원래 이런 거야. 경제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해야 돼.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되니까 당연히 이런 이런 부분은 경제에서 어쩔 수 없는 거야.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런 말들을 다 하는데 다 개수작입니다. 이거 위배되면서 하는 소리들은요 본인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알아요. 그게 헛소리라는 걸. 그게 무슨 다른 꼼수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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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아는데 또 넘어가요. 아 그렇구나 하고. 공범이에요, 이게. 아 그렇구나 하고. 그렇구나가 아닌데 그렇구나 하고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 어느 기업이 이윤만 추구하면요. 우주적으로 보면 그 기업은 뭔데요? 암이에요. 암덩어리가 커지는 걸 허용하실 겁니까? 이윤을 추구한다는 말에요 사회랑, 사회에 도움이 되면서 나도 이윤을 추구한다는 개념이 들어갈 때만 선이지 사회가 망해도 우리 기업만 살면 된다라는 어떤 집단이 있다면 그게 야쿠자 집단 아닙니까. 황당한 집단이죠. 이해되세요? 뭔 말씀인지. 정치 경제에 막 쪼개가지고 말씀을 막 나누면요 여러분 눈이 현혹된다니까요. 이게 반사회적 행동인지 아닌지 판단할 힘을 잃어요.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요 그럴싸해요. 그래서 막 여러분도 아 그렇구나 하는데 가만히 봐보세요. 그게 여러분 이성이 자명하게 옳은 행위라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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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행위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시고? 그 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연습을 안 하시면요 이런 철학적 얘기들을 아무리 읽어도요 여러분 삶이 변하지 않고 사회가 개선될 리가 없습니다. 이해되세요?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되니까 이런 일을 해야 됩니다라고 했을 때 이윤의 추구에는 한계가 있는 거죠. 사회 공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기업이 사회의 공익을 해치는 단계까지 갔으면 우리 조직은 이미 암이다. 우주적 이성이 봤을 때는 우리 조직은 그 뭐죠? 암세포라 박멸시켜야 할 암세포에 불과하다라는 걸요 명확히 알고 있다면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판단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면요 철학자들은 다 얘기합니다, 동서 안 가리고. 금수랑 똑같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는 멋진 말을 해요. 만약 인간이 이성을 포기하면요. 그날로 인간은 멸종한 거다라고 그래요. 그건 짐승이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멸종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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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달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불렀다면 그 인간은 사라졌다. 아무도 이성을 따지지 않는 사회가 온다면요. 이 정도로 심각하게 경고를 하는 거 좀 들으셔야 됩니다. 지금 사회에서 뭔가 문제 생기는 건 다 이 로고스 어겼을 때 생겨요. 그래서 작은 위반은 큰 피해를 안 주니까 작게 작게는 우리가 살면서 얼마든지 위반하고 살아요, 사실. 그런데 이게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이제 좀 심각해집니다. 이 쓰레기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요. 너도 조금 나도 조금 버리다 보니 이게 대기가 오염돼서 숨도 못 쉬게 되는 상황이 언젠가는 오겠죠. 지금 그런 게 온 거예요. 사회에 대해 여러분들이 불신하게 되고 못 믿게 된 것도요 그 배경을 들여다보시면 이 사회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로고스에 너무 안 맞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포기하신 게 된 거예요. “이 사회는 살 게 아니다. 포기하자” 포기하면요. 이제 뭐 하냐 그 뭐 방탕하게 사시거나 아니면 또 도를 닦습니다. 사회를 버리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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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들겠다. 로고스를 다 어겨놓고 무슨 열반이 있습니까? 그런데 꼭 가능할 것처럼 또 얘기해 주는 현상계의 법칙이 있어요. 에고가 원하면 반드시 그 상품이 있습니다. 나가보시면 다 있어요. “운동 안 하고 살 뺄 수 없을까?” 있어요. “공부 안 하고 학교 갈 수 없을까?” 있죠.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이런 이론들이 시중에 다 있어요. 그래서 이거 안 하고 뭐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에 그 에고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는요 그 마음 가진 사람들이 미리 다 답을 내놔서 물건을 팔고 있어요. 이거는 현상계의 법칙입니다. 한쪽이 원하면 또 그거 들어주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요. 이렇게 해서 그래서 내가 자꾸 그런 마음을 나부터 품고 있으면 사회가 계속 그 지경이겠죠. 이거 이해하세요? 방금 제가 드린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우리부터 원하지 않아야 돼요. 나부터 원하고 있으면서 사회가 왜 자꾸 저런 것들이 많대 하는 건요. 그 마음으로 저쪽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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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다 갖고 있으니까 그렇게 굴러가는 거죠. 나부터 그런 마음을 극복해내는 힘을 못 갖추면요 사회를 아무리 욕해도 만 년 전에도 사회를 요구하는 분들은 많았을 텐데 만 년간 지금 욕을 해도 전혀 사회는 안 바뀌죠. 그런 게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욕을 하는 정도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알고 신의 이성에 입각해서 내 삶부터 한번 다시 리모델링하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시다는 겁니다. 아주 작은 거라도요. 여러분 삶에서요 아주 작은 반란이라도 한번 일으켜 보세요. 그동안 그 엄청난 혁명을 하시지는 못하더라도 그 로고스를 따르는 소소한 반란들, 소소한 혁명들을 계속 일으켜 보세요. 전에 못해봤던 걸 한번 하신다든가. 분명히 저게 선인 줄 알았는데 평소 못하던 걸 한번 해보시면요 그게 여러분을 통해서 우주의 로고스가 이 지상에서, 예수님 말씀 있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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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안 이루어지거든요. 나로 인해서 하늘, 땅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분들이 로고스의 화신이에요. 예수님 찾고 누구 찾지 마시고 내가 이걸 하면요 로고스의 로고스가 지상에서 드러나는 거고 내가 마음 하나 잘못 먹으면 로고스가 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거예요. 나한테 결정권이 있다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이런 거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되게 중요한 철학적 주제입니다.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또한 더 이상 현재에 불만을 품지도 말고 미래에 위축되지도 말라. 현재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현재를 못 받아들여서. 왜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분명히 내가 한 행위의 결과로 왔을 텐데 우린 못 받아들인단 말이죠. 그래서 그것부터 받아들이는 것도 이성적이죠. 그거를 불교식으로 하면 뭡니까? 인욕바라밀. 받아들여야 할 거를 냉큼 받아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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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욕바라밀과 미래에 위축되지도 말라 하는 것도요 미래에 겁먹고 있을 게 아니라 여러분 반야바라밀 있죠? 이성을 따라가는 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연습을 하세요. 먼 미래에도 미래가, 걱정되는 미래가 닥쳤을 때 여러분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훈련하시면 미래에 겁먹을 일이 없다는 겁니다. 반야바라밀과 인욕바라밀. 이 스토아학파의 아주 주제입니다. 또 어디 가서 반야바라밀은 스토아학파에서 주장한 건데요. 이러지 마시고요. 불교의 반야바라밀이 스토아학파 내용이랑 통한다고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반야바라밀하고 인욕바라밀을 아주 중시해요. 스토아학파 특히 인욕바라밀을 강조하죠. 에픽테토스 때부터, 에픽테토스 철학의 제일 첫 번째 원리가 뭡니까? 통제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이고, 인욕해버리고, 통제할 수 있는 것 안에서만 선악을 따지자 옳고 그름을 따지자. 반야바라밀을 쓰자는 겁니다. 그래서 인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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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이. 그래야 나머지 좋은 덕목들이 다 나오거든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철저히 에픽테토스 그 철학으로 공부한 분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 인욕이 좀 과할 정도로 많아요. 상대방이 뭔 짓을 해도 받아들이자는 정도까지 막 인욕을 강조합니다. 좀 제가 볼 때는 좀 과한 부분도 있어요. 너무 받아들이는 데 과한 부분. 여러분이 책 보시다 보면 잘 아실 겁니다. 여러분의 로고스로 판단을 잘 해보세요. 이게 첫 번째고요.
[2. 신으로부터 나온 만물은 ‘섭리’(신의 뜻ㆍ원리)로 충만하다. ‘우연’마저도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섭리에 의해 인도된 것들과 얽혀있다. 모든 것들은 여기에서 흘러나온다. 거기에는 필연성이 있으니, 그것은 당신도 한 부분인 전체 우주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전체의 본성이 가져오는 것, 이 본성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 선한 것이다. (2-3)]
두 번째 신으로부터 나온 만물은 섭리로 충만하다. 만물에는 다 하늘의 이성, 섭리도 역시 로고스입니다. 기독교에서 잘 쓰는 말인데 섭리, 하나님의 로고스, 하나님의 어떤 원리, 이성이자 원리라는 뜻이 있죠. 하나님의 큰 원리로 진행된다는 거. 그 원리는 자명하겠어요?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원리는요 무조건 자명하고요 공정하다는 게 핵심입니다. 누구를 특별히 봐주기 위한 섭리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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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가 없죠. 악인들이 잘 사는 걸 보고 하나님이 악인을 이뻐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라는 악인들한테 힘과 권세가 주어지는 건요 악인들한테 거의 지옥 갈 문을 열어주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선한 사람들한테 권세를 주는 거는 선을 더 짓게 도와주는 게 되지만. 서양철학자들은요. 본성대로 살아야만 행복하고 훌륭한 사람이고 진정한 인간이라고 보고 있죠. 그러니까 본성대로 선악을 잘 알고 사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고. 반대로요 선악을 자기 마음대로 선악을 설정해서 살고 있는 사람 뭘까요? 환자예요. 환자이고 뭐죠? 불행한 사람이에요. 아픈 사람이에요. 아픈 사람한테요. 술 때문에 아픈 사람한테 술을 엄청 사다 주는 건 죽으란 얘기죠. 그러니까 권세가, 일반인한테도 권세가 주어지면요 “철학의 위안”이라는 그 보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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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마지막 철학자의 글에 보면 이 얘기가 나와요. 권세는, 자리는 그 사람의 단점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이해되세요? 그러시죠. 이 권세를 얻고 나면요 그 사람한테 못 봤던 단점을 다 보게 돼요.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즉 좋은 작용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 덕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재산이 늘고 권세가 늘고 알아보는 사람이 늘고 이거랑 별도로요 철학자들한테 제일 중요한 주제인 로고스대로 사느냐라고 봤을 때는 권세를 가지게 되면요 일반인도 휘청하게 되는데 악인이 권세를 얻으면요 부귀 권세를 얻으면요 어마어마한 악을 짓습니다. 그 사람한테 불행이에요, 사실은. 본인은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악관이 잘못돼 있기 때문에 그런 거지, 그 위암 환자가 누가 이렇게 풀세트 술병을 줬더니 너무 좋다 행복해 하고 있는 그런 지경에 가깝다는 겁니다.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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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눈엔 그렇게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점도 아시고 보세요. 그래서 이 우주는 섭리로 충만합니다. 우연마저도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고. 우연이라는 걸 인정 안 해요. 다 섭리대로, 하나님의 로고스가 자명하고 공정한데 누가 잘못한 거 하나를 방치할 리가 없고요 누구 작은 선이라도 그거를 묵과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거기에 맞게 돌아오는데, 그러면 선한 사람이 불행을 만나는 건 뭐냐라고 했을 때 그 선을 더욱 단련시켜주려고 그런다는 겁니다. 철학자들은 그렇게 봐요. 아까 그 보에티우스의 철학에 의한 보시면요 그런 걸 설명을 특히나 자세히 해놨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지금 이런 맥락은 같은데, 이 철학자들한테 글에서는 글이 좀 짧게 지나가니까 좀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보세요. 로마에 아주 높은 직책을 하던 분이 철학자인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잡혀서 이제 사형당하기, 사형을 앞두고 철학의 여신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쓴 거예요, 문답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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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덕을 지키고 살았는데 왜 이렇게 불행이 찾아왔느냐?” 가지고 철학의 여신한테 위로를 구하니까 철학의 여신이 “넌 지금 시커먼 암흑 속에 있다. 내가 다시 하나씩 하나씩 밝혀주마” 해가지고 다시 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주로 나온 주제가 이거예요. “왜 악인이 복을 받고 선인이 불행을 겪느냐?” 선인한테 불행을 주는 건 더욱 단련하라는 기회를 주는 거고, 악인한테 행운을 주는 거는요 그건 악을 더욱 키우는 작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일종의 시험인데 악인이 거기서도 못 뉘우치고 그 권세를 이용해 버리면 훨씬 큰 악을 짓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이 나가는데 아무튼 이게 우주가 큰 섭리 속에 돌아간다는 거를 그 책에서도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 로마철학의 어떤 흐름을 한번 보고 싶으시면 그런 “철학의 위안” 같은 책을 참고하시고요. 거기에는 필연성이 있다. 모든 것들은 여기에서 흘러나온다. 거기에 필연성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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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당신도 한 부분인 당신도 한 부분에 해당되는 전체 우주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우주는 뭡니까? 공정하다는 게 뭡니까? 자명하고 공정하기 때문에 공익, 우주의 공익에 위배되는 짓은 안 한다는 겁니다, 우주의 원리는. 그러겠죠. 우주가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결정을 안 하겠죠. 자기에게 유리한, 근데 여기서 자기는 우주 자체이기 때문에 우주는 반드시 우주 전체에게 이로운 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를 왜 할까요? 이렇게 반야바라밀, 이런 진리를 안다면 반야는 옳고 그름을 아는 건 반야고요. 옳고 그른 걸 그런 진리를 받아들이는 건 심적으로 인욕이거든요. 올바르게 지금 이치가 이게 맞으면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거를. 내 눈앞에 닥친 어떤 일도요 다 신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일단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만 가지고는 좀 부족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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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악인이 저한테 악을 저질렀는데 여기에도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신이 그 악인을 통해 저를 단련하려고 했다든가 뭔가 섭리가 있다 하고 받아들여라라고 했을 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이런 부분은 이 철학자들의 글에 오해 여지가 많아요. 받아들이고 끝내라는 얘기인지? 그렇죠. 그럼 악인을 무조건 용서해라는 얘기인지? 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해요. 이분들은 이제 이거죠. 그것도 그 안에도 큰 섭리가 있다는 거르 이해하고 받아들여라는 얘기지 여기서 더 나가서 모든 걸 받아들여라. 모든 악을 용납하라. 이런 거면 왜 본인부터가 그 게르만족하고 싸우고, 그렇죠, 통치 자체가 안 됐을 거거든요.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까 자기가 힘든 걸 쓰잖아요. 제발 좀 받아들이자. 막 이렇게 자기가 자기한테 쓴 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자는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혹시 오해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이 글을 볼 때 다 받아들이고 끝내야 되는 거구나 이러면 뭔가 또 자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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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부분이 있으실 거예요. 그래서 이거죠. 원칙을 기억해 보세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이자. 단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선악을 따져서 선은 하고 악은 하지 말자가 제일 원리니까 이 글에서도 만약에 악인이 저한테 뭔 짓을 했어도 제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만큼만 받아들여야겠죠. 이미 그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겠죠. 이걸 못 받아들이면 안 되잖아요. “그런 일은 없었어야 됐는데 그때 내가 뭐 만 안 했어도 그 일을 안 당했을 텐데” 이런 식의 얘기는 의미가 없겠죠. 이런 부분은 빨리 받아들이되 이 부분은 받아들이면 안 되죠. 이제 내가 어떻게 대처할 건지에 대해서. 선을 하고 악은 안 해야죠. 그렇죠. 그래서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에 대한 어떤 분석과 받아들임이 조화를 안 이루면요 선악 분석을 안 해버리고 다 받아들이자. 다 통제할 수 없는 일로 여겨버리면 그것도 지혜가 없는 거죠. 혹시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그래요. 제가 이 명상록이나 이런 글을 보면은 밑도 끝도 없이 받아들이지는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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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나와요. 황제로서 되게 힘들었겠구나. 되게 힘든 상황에서 자기가 자기한테 쓴 글이다 보니까 “제발 좀 받아들이자 왜 너는 못 받아들이니?” 이런 식의 글이 많다 보니까 혹시 무분별한 받아들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오해가 있을까 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명상록을 보실 때 좀 주의하실 부분입니다. 어떤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진리니까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진리가 있는 부분만큼. 그것도 당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이익이 되니까 그렇게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니까 받아들이자, 진리에 맞을 경우에는. 전체의 본성이 가져오는 것, 이 본성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전체의 본성의, 보십시오, 전체의 본성은 선을 하고 악을 하지 마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 속에서 선은 하고 악은 안 한다면요 그거는 우주 전체에게 이득이겠죠. 여러분한테만 이득이 아니에요. 우주 전체에게 이득이 된다는 얘기를 지금 어렵게 써놨습니다. 전체의 본성 우주의 본성 우주의 로고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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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오는 거는 그 로고스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 즉 자연의 모든 부분에 선한 것이다. 우주 전체에게 이로운 것이다. 여러분은요 지금 이걸 다 계산을 할 수가 없잖아요, 인간이. 내가 지금 지구에게도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우주 전체에 도움이 되는지 난 모르겠다. 내가 하는 행위가 우주 전체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하실 수 있지만 그걸 다 따져본 뒤에 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자명하고 이성에게 맞는 것 같다 하면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 이성은 신의 이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자명하다고 하는 건요 이미 그 로고스 판단에는 우주 전체에게 이롭다라고 판정이 난 거라는 겁니다. 이거는 로고스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실 겁니다. 안 그러면 “내가 자명하다고 모두에게 자명하다는 보장이 어딨나?” 하실 수 있지만 그 자명하다는 느낌이 언제 드는지 보세요. 내가 나만 살겠다고 할 때 그 느낌이 안 들어요. 내가 전체를 배려할 때만 자명하다는 선명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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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시다 보면 로고스는 늘 우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한다는 걸 아신다면 로고스와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로고스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들은 다 우주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아시겠죠. 그래서 이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런 극치에 가면 성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인들은요 내가 우주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 아래는 좀 확신이 왔다 갔다 해요. 고민이 많아요. 이러면 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고민이 적을수록 성인이고요. 고민을 안 한다는 게 아니고 너무 자세히 알다 보니까 고민이 자연스럽게 줄어들다 보면 성인이 가까워지고 성인은 우주의 속사정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이고, 정치적 결정, 경제적 결정 뭔가 이런 사회적인 결정을 할 때도 우주적 입장에서 하게 됩니다. 하나 어느 정파의 입장, 어느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 개인의 입장을 중시하지 않고요 우주적인 입장에서 선택을 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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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존재들이 많이 나오시면요 이런 분들이 한번 정치를 하면요 천 년 만 년 가도 정치 잘했다는 얘기를 듣고요. 안 그런 분이 정치를 하면요 당대부터 욕을 먹죠. 올라갔을 때부터 욕을 먹어요. 아니면 올라가기 전부터 욕을 먹어요. 이 차이입니다. 이런 것도 있어요. 세종대왕도 당대에 욕먹었을 텐데요. 그런데 이런 차이가 있어요. 당대에 누구나 또 욕심 있는 사람이 있다 보니까 내 욕심에 위배된다고 욕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역사에다 맡기자 하는 게 그거죠. 역사가 평가할 거라는 건요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해관계가 이제 초월되죠. 당시에 이해관계 가진 사람들이 다 죽거나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이 냉정하게 보게 돼요, 선악을 가지고. 오히려 이제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욕망이 잦아드니까 냉정하게 그 일에 대해서 선악을 따지게 됩니다. 결국에 역사 속에서 평가받게 돼 있다. 양심적으로 한 일은 천 년 만 년 뒤에도 잘했다는 소리를 듣게 돼 있고 욕심으로 한 일은 못 했다는 얘기를 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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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큰 어떤 큰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하고요 아주 좁은 시야 당대 가지고 가지도 못할 그 돈과 정말 허망하게 그지없는 그런 명예, 그런 평판에만 매달려 가지고 한 생을 사는 분이 있고 우주적인 시야로 환생을 사는 분이 있고 이렇게 시야가 틀려요. 그래서 인간의 영성의 깊이라는 건 이런 데서 차이가 납니다. 세 번째.
[3.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이런 일들을 지체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당신이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는지를 기억하라. 지금이야말로 당신도 한 부분인 ‘우주’가 어떤 것이며, 당신의 존재를 나은 ‘우주의 주재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는 데 이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도 지나가버리고 당신도 지나가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2-4)]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이런 일들을 지체해 왔는지, 얼마나 자주 당신이 신의 은총,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데도 그걸 활용하지 못했는지를 기억하라. 신의 은총이 뭘까요? 신한테 막 도움 받은 거 생각하지 마시고요 로고스가 여러분 안에서 얼마나 늘 큰소리 치고 로고스가 작용하고 있는지 이게 은총이에요. 로고스가요 여러분 삶에서요 이건 아니다라고 하죠. 유교에서 말한 뭡니까? 이 로고스의 명령을 유교식으로 분석하면 뭐죠? 인의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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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게요. 이런 유교를 아우렐리우스가 모르겠지만요 인의예지. 아니면 불교식으로 하면 육바라밀. 이런 유사한 이런 유사한 개념들이 끝없이 명상록에 나옵니다. 비슷해요.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예절은 겸손과 통하죠. 겸손 지혜 이런 개념들은요 어느 철학자도 부정하지 못하는 선이거든요. 자명한 것들. 남을 배려하는 거,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거, 자신을 또 절제하는 거, 겸손한 거, 남한테 말과 행동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거, 옳고 그름을 이성에 맞게 판단하는 거. 이런 것들을요 이런 걸 할 수 있게 여러분 로고스가 여러분 안에서 끝없이 은총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영육, 혼육한테 끝없이 끝없이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고 있는데 계속 무시하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런 신의 은총을 받았는데도 활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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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는지를 기억하라.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들을 지체해 왔는지.. 계속 지금 미루고만 있다는 겁니다. 나중에 지킬게. 나중에 지킬게. 신의 명령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요. 지금이야말로 당신도 한 부분인 당신도 그 안에 한 부분에 해당되는 우주가 어떤 것이며 당신의 존재를 낳은 우주의 주재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로고스예요. 여러분 마음 안에서 자명하게. 자명하다는 건 이런 뜻이 있어요. 이 선악은 자명해야 되는데 자명하다는 건요 다른 말로 하면 의심할 수 없다는 거죠. 즉 여러분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이건 아니죠. 오로지 수긍, 인욕이랑 또 통하죠. 이런 개념이 반야랑 인욕이 참 통해요. 너무 자명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명상록 보시고 받아들여라 막 이런 말 나오더라도요 받아들여라 전에 자명한가부터 따져야 돼요. 그건 내가 받아들일 만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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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일 만한 거라는 판단이 분명하게 서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수긍 안 할 도리가 없으니까요. 자명하다는 거 갖고 있는 그 힘은 이게 신의 은총이에요. 신은요 애매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선명하게 얘기하고요. 여러분이 욕심에 빠져 있다 보니까 그게 잘 안 들리는 거지 마음을 조금만 비우고 학당에서 강조 드리는 몰라 괜찮아 하고 욕심을 좀 내려놓고 난 내 이름도 몰라 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존재하시면 당연히 그걸 받아들여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그것들이 제일 진리죠. “당연히 맞고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그것부터 하세요. 나는 다 그렇지 않던데 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거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런 거 그것부터 하시면요. 다른 또 친구들이, 자명한 친구들이 자꾸 찾아와요. 근데 그 하나를 부정하면 전체를 부정하게 돼요. 그 친구로 인해서 더 찾아올 친구들이 못 찾아오잖아요. 내가 그거 하나만 받아들이면 그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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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그게 맞다면 당연히 이것도 맞는, 그 논리에서 파생되는 자명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하나를 딱 부정해버리면 그 친구로 인해서 나한테 다가왔을 그 자명한 얘기들을 다 못 듣게 됩니다. 그거 한번 잘 생각해 보시고요. 아주 작은 거 하나만이라도 삶에서 한번 변혁을 일으켜보세요. 그러면 무궁무진하게 야 또 너 또 왔냐 하고 내일 가면 또 다른 친구 데리고 와요. 너도 자명하네. 또 안 할 수가 없고 또 친구로 받아들이면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 또 데려와요. 다 자명한 친구니까 여러분이 거부를 못해요. 그렇게 그렇게 받아들이다 보면 여러분은 성인의 경지에 가는 대철학자가 되는 거예요. 작은 거 하나만 허용해 주면 돼요. 작은 물꼬만 내면은 큰 둑도 무너지듯이 여러분 삶의 작은 어떤 구멍을 내보세요. 그러면 그쪽으로요 계속 물밀듯이 밀고 들어옵니다, 신의 은총이. 신의 은총 많이 받는 법 제가 말씀드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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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멍을 하나 내시라고요. 신과 나 사이에 소통될 만한, 신이 진짜 원하는 거 하나를 내가 들어주면 이제 채널이 연결이 되고 뚫리고 그 길을 통해서 엄청난 정보와 에너지들이 여러분들 쏟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가 어떤 존재고 우주의 주재자, 즉 신이라는 그 로고스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돼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는 데 이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 시간도 지나가 버리고 당신도 지나가 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아까 처음 얘기한 거는 진짜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이 신의 은총을 활용해야 된다는 얘기를 한 거고요, 지체 없이. 왜 그러느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을 가리는 구름. 표현 재미있죠. 로고스가 로고스가 우리 영혼에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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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에서 특히 발현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그 어둠을 지금 구름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 구름을 제거해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 마음이 로고스를 따르게 되겠죠. 여기에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게 지나가버리고 끝나요. 특히 스토아학파 철학은요 모든 만물은 해체돼서 신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거예요. 거기서 다시 재합성돼서 나오긴 하지만 지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이 시간뿐이라는 겁니다. 체합성된 뒤는 얘기하질 않아요. 그래서 만물이 해체되기 전에 나는 신의 이성을 충실히 따라야 된다는 게 지금 스토아학파의 시간관이고 그래서 되게 늘 마음이 조급해요. 나한테 주어진 이 삶 속에서 로고스를 다 구현하고 우린 죽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요. 네 번째.
[4. 이것만은 언제나 당신 가슴속에 간직해야 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무엇이며,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주의 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한 나의 본성은 어떤 전체의 어떤 부분인가? 당신이 한 부분을 이루는 ‘본성’(자연)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2-9)]
이것만은 언제나 당신 가슴속에 간직하십시오. 우주의 본성은 무엇이며 나의 본성은 무언지? 같은 거죠. 로고스입니다. 우주의 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의 로고스가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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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로고스거든요. 그래서 우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같아요. 나의 본성은 어떤 전체의 어떤 부분인가? 신의 어떤 로고스의 어떤 한 부분이다 이 얘기죠. 당신이 한 부분을 이루는 본성, 자연이라고 돼 있는데 자연은 로고스랑 같은 말입니다. 로고스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걸 방해할 자는 이 세상이 한 사람도 없다. “나는 누구 때문에 로고스를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스토아학파 철학자들한테 아주 보이는 특징이고요. 아우렐리우스가 늘 주장하는 건데 여러분이 로고스를 실천하겠다는데 방해되는 그런 존재는 우주에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막지 않았다는 거. 여러분이 안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내 가족이 날 너무 힘들게 해서 로고스 못하겠어.” 그런데 그 상황에 맞는 로고스가 있겠죠. 그러니까 로고스를 못 한다는 건 핑계가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직장에서 내 상사가 너무 못돼서 내가 로고스를 실천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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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상사한테 실천해야 할 로고스가 또 있겠죠, 그 상황에 맞는 로고스가. 이런 식으로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라는 게 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철학의 대게 또 특징이에요. 이런 주장을 계속 강조합니다.
[5. 그런데 분명히 죽음과 삶, 명예와 치욕, 고통과 쾌락 등, 모든 것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동등하게 일어나며, 이런 것들은 우리들은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않으며, 더 나쁘게 만들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2-11)]
그런데 분명히 죽음과 삶, 명예와 치욕, 고통과 쾌락 등 모든 것들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동등하게 일어나며 이런 것들은 선한 사람도 일찍 죽을 수 있고요. 치욕을 당할 수도 있고요. 평생을 고통 속에서 병에 시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단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을 악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즉 로스는 로고스를 실천하는 데 어떤 방해 요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 거는 방해 요소가 아니라는 거. 힐링캠프 이번에 이렇게 화상 입으셔가지고.. 근데 그분 안에서 오히려 우리가 볼 때는 로고스나 바라밀이 더 빛나죠. 받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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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공정한 판단을 하고 이 사지가 온전치 못해도 그 안에서 이성이 더 빛나고 있는 걸 우리가 볼 수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 우리가 저런 불행이 저 사람을 악하게 한 게 아니고 오히려 단련하는 도구가 돼서 더 이성이 드러날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시면요. 그런 거는요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우리가 악하다. 옛날 유대인들은 그랬어요. 유대교에 보면 환자를 예수님이 고쳐준 뒤에 이 말을 하세요. 너의 죄를 사하노라 너의 죄는 씻겨졌다라고 하는 게요. 유대인들 전통 관습의 고정관념에 아픈 거는 죄 때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그러니까 병을 고쳐주면 그게 결국 뭘 의미하냐면 죄를 없애준 게 돼요. 그래서 그런 말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프면 죄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이 스토아학파는 뭘 주장하는 겁니까? 그런 거는 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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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이 없다, 애초에. 그게 사람을 악하게 하는 게 아니다. 악하다는 거는 그 사람이 이기적인 무지와 아집의 판단을 했을 때 악한 거지. 그렇죠. 그게 선악을 가르지 않는다. 성인도 그런 모습을 할 수 있다. 철인도 그런 모습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이런 것들은 우리를 더 훌륭하게 만들지도 않고 더 나쁘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성을 실현하는 데 그런 요소들은 장애 요소가 아니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따라서 그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닌 걸로 보자는 겁니다.
[6.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죽음이란, 인간이 그 자체만을 살펴보아, 반성이라는 추상적인 능력으로 죽음이 가져오는 온갖 상상들을 모두 분리해낸다면, 죽음이란 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2)]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죽음이란 인간이 그 자체만을 살펴보아 반성이라는 이성의 어떤 작용이죠. 반성,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추상적인 능력으로 죽음이 가져오는 온갖 상상들을 모두 분리해낸다면 그러고 한번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면요 편견 다 빼고 냉정하게 진짜 자명하냐만 가지고 죽음을 바라본다면 그 죽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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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유 없이 지수화풍이 뭉쳐서 우리 생이 시작됐듯이 어느 날 또 지수화풍이 흩어지면 우리가 다시 우주의 본원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거다. 그 지수화풍도 우주의 본원(本原)에서 근원 에너지에서 나온 거고 이게 해체되면 다시 돌아간다. 이런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 작용이라고 보는 겁니다. 거기서 또 재생이 일어나서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질 거고 또 다른 존재가 만들어질 거고. 이렇게 해서 우주는 돌고 도니까 수토악화 철학의 입장이에요. 우주는 돌고 도는 거니까 이것도 자명한 얘기니까 받아들이자. 이걸 받아들이자. 그럼으로써 내 생에 집착하지 말고 더 원대한 성 이성의 실천에만 더 집중하자. 이렇게 지금 늘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겁니다. 이게 불교에서요. 우주가 무상 고 무아로 이루어졌다는 걸 늘 되새김질하라고 하죠. 마음에서 또 되새기고 또 되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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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불교에서 강조하는 그거랑 같은 겁니다. 스토아학파도 늘 이 세상은 무상한 거고 시간은 한정돼 있고 나는 이 안에서 선을 실천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무장하는 거죠.
[7. 당신이 3천년을 산다고 해도, 혹은 3만년을 산다고 해도, 어떤 사람도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며, 그가 지금 잃어버리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다. 인간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겠는가? (2-14)]
당신이, 7번이요, 당신이 3천 년을 살든 3만 년을 살든 어떤 사람도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며, 그가 지금 잃어버린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기억하라. 뭔 말인지 조금 잘 납득이 안 될 말인데요. 여러분이요 앞으로 만 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여러분이 그 사는 삶은 그때 그 순간의 삶뿐이라는 겁니다. 지금, 지금 여기요. 우리가 지금 몇십 년을 살아왔지만 지금 여기 말고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없죠. 다 기억 속에 있죠. 기억 속에 있는 걸 잃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지금 내가 죽는다 그러면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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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기억 속에 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래서 사람은 늘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죽는다고 해도 우리가 잃어버리는 거는 지금 여기에 내가 갖고 있는 이거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잃어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 이 얘기입니다. 즉 이 이해되시죠?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장은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잃어버리는 거는 그 순간의 삶일 뿐이라는 겁니다. 몇 십 년을 살아왔다. 심지어 3만 년을 살았더라도 죽을 때 잃어버리는 거는 그 순간의 삶일 뿐이다라는 겁니다. 왜냐? 우리는 이걸 다시 말하면 이게 죽고 안 죽고를 떠나서요 우리는 늘 지금 이 순간만 내 거라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지금 이 순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바로 1분 전이 지금 어디 가고 없어요. 지금 나한테 있어서 삶이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지금 이 순간이고요. 또 벌써 이 얘기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동안 좀 전 건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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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죠. 지금 이 순간의 삶밖에 없어요. 늘 내가 가지고 있는 거는 늘 그때그때 그 순간밖에 없다. 그 얘기를 하면서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는 없다. 인간이 갖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빼앗는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 80에 죽으면 80살을 잃어버린 것같이 생각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게 아니라 80을 살건 스물을 살다 가건 10살을 살다 가건 잃어버리는 거는 그 순간의 삶밖에 없다. 죽는 순간에 그 삶,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이렇게 따져 들어가다 보면 그 순간이, 그 현재라는 것도 따져보면 또 없어지겠죠. 그래서 그래서 이 시간이라는 게 참 오묘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이 분석이 나와요. 인간은 인간의 시간이라는 건 무한에서 온 거고 영원, 영원, 영원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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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예요. 지금 이 순간이라는 걸 엄밀히 현재라고 하는 말도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 또 지나가고 없죠. 즉 과거와 미래와, 그렇죠, 이 중간에서 계속 찰나찰나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만 있지, 정확하게 지금 이 순간이라는 걸 집중하면 거기에는 시간도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찰나에 딱 집중을 하면요 사람은 깨어나게 돼 있어요. 영원을 만나요. 인간이 참 신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교에서 어려운 얘기로 삼세가 공하다. 과거 현재 미래가 본래 공하다 그러면요 그거 어려운 개념일세 하는데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살고 계세요. 현재라는 걸 잡아낼 수가 있나요? 진짜 현재에 집중하시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게 없어요, 거기는. 여러분이 현재라고 말할 때도 이미 과거를 전제하고 있고 미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 찰나, 그 순간, 한순간에 점에 집중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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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분은 영원을 만나버려요. 거기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어요. 과거 현재가 미래가 없는 자리에 지금 자리를 토대로 해서 과거 현재를 만들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삶이기 때문에 삼세가 본래 공하다. 과거 현재 미래가 본래 없다 이런 말들은요 이런 내용을 담은 겁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게 살고 계세요. 그래서 아까 지금 잃어버리는 건 현재뿐이라는 것도 약간 두리뭉실한 현재라는 거예요. 엄밀히 분석에 들어가면요 사실 현재 랄 것도 없어요. 지금 이 순간 과거 현재 미래도 없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집중해 들어가 버리면 그대로 여러분은 깨어나세요. 그래서 깨어나는 방편 중에 하나입니다. 정신을 하나로 완전히 모으고 이 에고의 이성적 사고를 초월하는 방법이요 “지금”이라고만 하시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보세요. 과거는 없습니다. 미래도 없죠. 지금. 지금이란 말도 없어져야 돼요, 진짜 지금은. 그러면 정신이 또랑또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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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그 상태만 있지 어떤 것도 없어야 돼요.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이 시간이라는 거는 영원의 영원의 바탕을 두고 존재한다” 이런 말도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순간이 영원이 된다는 말도 가능해요. 왜 영원이냐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이에요. 영원한지 쟤보고 영원이 아니고요, 거기에는 시간 개념이 없어지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없는 데서 시간 개념이 있는 게 나와요. 이 우주는 어느 한 단면만 잘라보시면 여러분이 어디서든 신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삶 전체가 신에 의존해서 굴러가고 있어요. 생각 감정 오감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럼 생각 감정 오감이 없는 자리요. 거기가 신이에요. 이런 식으로 여러분 삶 전체가 신의 어떤 그런 뭐랄까요? 신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처럼 살아가고 계시면서 바다를 못 보는 거예요. 신이 어디 있을까 도대체? 아주 작은데 시선이 뺏겨서 과거 현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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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감정 오감, 여기서만 계속 돌아다니니까 이 바다에서도 파도만 보면은 바다를 안 보고 파도만 보면 꼭 파도만이 바다의 전부같이 보이지만 바다가 없으면 파도가 존재할 수 있나요? 여러분 이 글 보시지만 제가 나눠드린 자료, 지금 글자만 보고 계시죠. 여백이 있다는 거 아셔야 돼요. 여백이 있어서 글자가 그 위에 서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건 감정이건 시간이건 이런 게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잘 안 보고 살아요. 신성을 알고 산다는 건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삶 전체, 그냥 신성을 알고요 늘 신성을 느끼면서 살아가 보세요. 이것만으로 여러분 삶은 그냥 변해요. 매일매일 변하고요. 매일매일 어떤 환이가 오고 매일매일 새로운 깨달음이 오고 로고스에 대해서 매일매일 그 깊은 이해가 와요. 이렇게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이해되십니까? 신성을 먼저 느끼세요. 신성을 못 느끼고 이런 말들은 별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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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죠. 신성 얘기가 바로 나옵니다.
[8.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인간 내면에 ‘다이몬’(daemon, 신성)을 안치시키고, 모독하거나 해치지 않으며, 고통과 쾌락을 초월하고, 목적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을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며, 나아가 모든 일어나는 일과 할당된 모든 것을 그곳이 어느 곳이건 자신이 온 곳(자연, 신)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끝으로 죽음은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해체에 불과하다고 보고,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2-17)]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철학 말고는 믿을 거 없다 하는 겁니다. 분과학문을 왜 믿으면 안 됩니까? 분과학문은요. 어느 한 분야에 대해서만 얘기해주고 그걸 어떻게 쓸 거냐는 건 결국 철학의 얘기, 주제입니다. 철학을 모르고 어떤 과학만 발달시키면 문명이 잘 살 것 같죠? 그 분과학이, 간단하게 예를 들게요. 분과학은 무기예요. 그럼 무기는 뭘 연구하죠? 사람을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예요. 근데 이 무기를 언제 쓰고 언제 안 써야 되는지가 무기학에 나옵니까? 철학의 영역입니다. 아까 기업이요. 기업은 돈 벌려고 모인 거예요. 근데 어느 시점이 되면 이 기업이 사회 암적인 존재가 돼요. 그런데 그러면 그걸 누가 판단합니까? 철학이요. 너희는 이 사회에 인류의 해가 된다라는 판단을 누가 해야 될까요? 경제학에서 못 내린다는 겁니다, 잘. 자기 분과에 대해서만 연구한 학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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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요 어떻게 권력을 얻어서 어떻게 통치할 거냐인데 더 근원적인 바다가 있죠. 정치도요 바다 위에 파도에 불과해요. 어떤 바다 위에 서 있나요?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해로움을 주면 안 된다”라는 큰 철학의 바다 위에 있는 작은 물거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치가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철학을 위배하면 안 돼요. 근데 사람들이 흔히 권력을 얻으려면 아들도 죽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해요. 단단히 잘못돼 있죠. 그럼 그건 누구를 위한 권력인데요?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요 그 나 하나 어떻게 해보려고, 내가 권력 좀 얻어보려고, 내가 돈 좀 벌어보려고 인류를 희생하겠다라는 인간관계를 해치고 인류를 희생시켜서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얻겠다라는 그 마음만 남아요. 그러면 그걸 우리가 암이라고 하는 겁니다. 세포 중에 하나가요 쟤가 죽어도 좋대요. 자기만 살면 된대요. 그럼 우리가 그걸 뭐라고 합니까? 암이라고 하죠.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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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없앨 궁리를 하실 겁니다. 어떻게 해서 정상으로 돌리건 정상세포로. 아니면 없애건 그렇죠. 얘를 키워드면 내가 죽는다는 걸 아실 거예요. 이런 존재가 되느냐?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분 안에 이미 다 있는데 이런 거예요. “내가 정치를 몰라서 경제를 몰라서 쉽게 판단이 힘드네.” 이런 당연히 이런 부분도 있어요. 그 분야 전문 지식을 알아야만 이해하는 부분도 있지만 큰 그림은요 인간이면 다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치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뭘 배우지도 않았지만 “저 리더는 좀 이상한 것 같다”라는 걸 아는 겁니다. 그리고 법학을 배운 적이 없으신데요 저 범죄의 저 처벌은 너무 약한 것 같다든가 너무 과한 것 같다든가 다 판단하세요. 저 기업은 뭔가 잘못 가고 있다든가 이런 걸요. 판단 못 할 리가 없어요.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이런 게 여러분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이고 그 신성의 소리를 직접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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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그 신성이요. 각 분과 학문을 초월해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라 하는 그 신성의 소리를 듣는 게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은요 인간 내면의 다이몬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한테 늘 뭘 하지 마라라고 말해줬던 자리가 다이몬이거든요. 소크라테스 고백에 그게 나와요. 변론에 보면은 “다이몬은 나한테 뭘 하라고 한 적은 없다. 하지 마라고만 했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뭘 할 때 “하지 마” 하고 내면에서 울리는 그 양심, 그 신성을 다이몬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성을 안치시키고 모독하거나 해치지 않으며. 여러분 안에 있는 신성을요 여러분 혼 안에 마음 안에 제대로 딱 자리 잡게 한 다음에 모독하거나 해치지 않으며, 고통과 쾌락을 초월하고 목적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이 이성적 목적이 아니면요 선을 할 목적이 아니면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거짓과 위선을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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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한테 달려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은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로고스를 따르냐 안 따르느냐 그것만 보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내 로고스 실천을 방해하지 않죠. 나아가 모든 일어난 일과 할당된 모든 것을 그곳이 어느 곳이건 자신이 온 곳, 신에게서 온 거라고,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은 신의 질서 속에서 나한테 온 거라고 받아들이고, 끝으로 죽음은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해체에 불과하다고 보고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앞에 걸 다 안 하고요 그냥 갑자기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계시면 여러분은 그것도 또 다른 변태죠. 이해되세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로고스대로 잘 살았다는 그 힘에서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셔야 할 건 일단 로고스대로 사시는 거예요. 로고스대로 살면서요 인간이 우주에 왜 존재하게 되는지도 아셔야 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도 아셔야 되고, 인간이 왜 태어났는지도 아셔야 되고. 이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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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냐면요. 제가 얘기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로고스 대로 살 때만 알아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그 신성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신성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구현될 때만 이 신성, 신이 아는 정보가 여러분한테 옵니다. 그래서 말하기 이전에 이미 아시고 내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도 다 알게 되고요, 의미 있게 사는지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지도 다 아시게 되고, 그렇게 해서 보람과 의미가 꽉 찰 때 죽음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단순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철학자는 아닙니다. 생사를 초월해서 로고스를 따르는 삶을 살다 보니까 죽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로고스가 더 중하다는 걸 알고 나는 로고스대로 산다는 게 어떤 맛인지 어떤 건지 알기 때문에 나머지 고통과 쾌락도 초월하게 되고, 더 큰 걸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은 얘기를요 논어에는 뭐라고 했냐면 자로가 공자님한테 죽음에 대해 물어보죠.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생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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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라. 자명하지 않잖아요. 죽은 뒤 얘기는 자명, 아무리 얘기해도 자명하지가 않아요. 그거 이해하시죠? 죽은 뒤에 얘기는요 우리가 뭔 얘기를 해도 자명하지 않아요. 우린 다 살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게 뭔지 알면 죽음도 알 텐데 우주의 두 요소 아닙니까?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있으면 이쪽 걸 알면 반대 것도 알 텐데, 생은 아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생은 아냐?” 산다는 게 뭔지 아냐는 건요 온전히 이성대로 살았을 때만 공자님 식으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경지로요 절대 하늘의 천명을 어기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았을 때만 알아요. 삶이 어떤 거구나 하는 걸. 그러면 죽음도 안다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철학자들의 답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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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43 서양철학11 명상록 1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