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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산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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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산행기 111127 용두산(콰이강의다리-고기고횟집-용두산-x192m-제2전망대-제3바다길-연륙교)
明山 김승곤 추천 0 조회 146 11.11.29 12:10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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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7.09.16 13:34

    첫댓글 최근 경남 창원시가 '2018 창원 방문의 해’을 대비해 적극 홍보에 나선 '콰이강의 다리 스카이워크'(이하 콰이강의 다리)에 대한 아픈 역사를 배제한 마구잡이식 행정 처사가 지탄을 받고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는 1957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에서 이름을 따온 동명 콰이강의 다리가 있다. 이곳은 1987년 의창군 시절 구산면 육지와 저도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옛 저도 연륙교'로 2004년 바로 옆에 새 연륙교가 들어서면서 제 역할을 다하고 보행교로 사용됐다.
    이를 지난해 시에서 사업비 7억원을 투입해 길이 170m, 폭 3m 규모로 바닥에 투명 유리를 깔아 아래가 훤히 보이도록

  • 작성자 17.09.16 13:35

    하는 '바다 위를 걷는 다리’로 탈바꿈시켰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콰이강의 다리는 금세 인기를 끌었고 1일 평균 1600여 명, 주말에는 7600여 명이 찾아왔다. 지난달에는 개장 5개월 만에 입장객 50만 명이 돌파하면서
    마침내 창원의 새 '관광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 작성자 17.09.16 13:35

    ■ 창원시, 영화의 다리와 외형닮아 지은 마구잡이식 이름 '콰이강의 다리'
    그러나 시는 관광객 50만 명 이상이 다녀갈 동안 콰이강의 다리에 아픈 역사를 왜곡시켰다.
    지난달 8일 설치한 콰이강의 다리-스토리텔링 안내판에 따르면 다리 이름의 유래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동명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따왔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다리의 모습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포로들이 콰이강 계곡에 건설한 태국과 미얀마를 잇는 철도용 다리와 닮아서다'라고만 안내되어 있다. 웹사이트 '창원관광', 관광안내지 등에도 마찬가지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잘 알려진 만큼 기성 시대가 영화의 배경을 이해한다지만 젊은 세대는 이 영화

  • 작성자 17.09.16 13:35

    이 영화를 잘 모를 뿐더러 아무리 외형이 닮았다고 해도 이름을 그리 짓는 건 개연성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이 이름은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의해 세워진 다리의 이름으로 더 나아가 우리와는 한국인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얽혀 있는 만큼 충분한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 일제 동남아 침략 전쟁의 상징 콰이강의 다리가 '사랑의 다리'?
    지난 3월 8일 창원시가 발행한 다리 관련 보도 자료의 제목은 "콰이강의 다리 스카이워크 거닐며 사랑 이루세요"다. 이어서 '‘스카이워크’는 걷는 것만으로도 교량 아래 쪽빛 바다에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스릴이 느껴져 누구나 한 번쯤 짜릿한 기분을 체험해보고 싶어진다.

  • 작성자 17.09.16 13:36

    ■ '콰이강의 다리'는 일제 동남아 침탈의 상징이자 우리의 아픈 역사
    '원조' 콰이강의 다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1943년 일본군이 미얀마로 군인과 전쟁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태국 칸타나부리주 콰이강 계곡에 세운 '버마 철도'의 일부다. 이곳은 당시 일제의 동남아 침탈의 상징인 동시에 우리와는 한국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의 상흔이 깃든 곳이다.
    영화에선 영국군이 주를 이룬 반면 실제 이 다리는 다국적 전쟁 포로의 피로 세워졌다.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네덜란드군 등 연합군 전쟁 포로 6만여 명과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식민 국가에서 끌려온 노동자 20만 명이 동원됐다.

  • 작성자 17.09.16 13:37

    이 과정에서 약 11만6천여 명이 사고·질병·부상·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할 만큼 악명 높았다.
    특히 일본군은 인근 '껑쑤피니'에 한국, 중국, 대만 등지에서 끌고 온 여성들로 위안소를 운영했고 한국인 남성은 강제징용돼 연합군 포로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노역시켰다.
    2015년 태국의 정부가 공개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 자료에 기록된 태국 포로수용소의 한인 위안부는 수는 1500여 명, 이중 463명은 명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으로 끌려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2011년 태국에서 생을 마감한 위안부 피해자 고(故) 노수복 할머니도 포함된다.

  • 작성자 17.09.16 13:38

    이상 파이낸셜 신문에서 퍼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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