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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4주일 / 해외원조주일(2017-01-29)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곰곰이 묵상합시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
[금주의 말씀(요약)] : [제1독서 : 스바 2,3;3.12-13 / 제2독서 : 1코린 1,26-31 / 복음 : 마태 5,1-12ㄴ]
[제1독서 : 스바 2,3; 3.12-13] : 성서의 기록에서는 자주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느님의 섭리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겪는 불행은 자주 하느님 분노의 표징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를 달리 해석한다. 그에게 참된 이스라엘은 "남은 작은 자들"이다. 그들은 백성 중에 낮추어진 이들이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부인하지 않아 고통을 겪을 사람들이다. 이제 예언자가 언급하는 새로운 역사는 가난한 이의 역사이며 복음의 참된 행복의 역사이다. [제2독서 : 1코린 1,26-31] : 코린토 공동체는 지체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이 공동체의 바탕이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 음 : 마태 5,1-12ㄴ] : 참된 행복의 선언은 먼저 이집트에서 고통을 당하던 히브리인들을 상기시킨다. 오늘날에도 이집트의 히브리인들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에서 해방하시는 주님을 만났듯이 그들도 해방자를 만날 것이다. 참된 행복의 선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증해 주며, 탈출의 커다란 희망이 언제나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난한 이들이 현존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들과 하나되는 것이고 그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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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4주일 / 해외원조우일(2017-01-29) | 기도문 |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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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4주일 / 해외원조주일(2017-01-29) | 말씀 묵상방 |
'행복'이란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일시적인 것들에 너무 자주 쓰인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좇고 있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지 못한다. 잠시 행복하다고 느꼈다가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곧 불안해한다. 우리는 인간 안에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철학자는 그것을 "초월의 부름"이라고 불렀다. 그치지 않는 불안,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구와 열정은 초월을 향한다. 끝이 없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다. 행복은 분명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러한 행복은 지금,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 곧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바른 정신과 깨끗한 의향을 지녀야 한다.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 말씀은 또한 인간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내놓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은 우리가 바라고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라시는 행복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부서진 세상, 돈과 소유와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 거짓과 사기가 횡행하고, 외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 폭력이 난무하고 편견과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 계층 간의 이기심이 사람들을 갈라 놓고 배척하는 세상을 새롭게 건설하려고 오셨다. 우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오직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록'에서 말했듯이 하느님 안에 쉬기 전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착찹해질 수 없다. |
† [주일묵상-1] :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의 참행복 |
성경은 가난한 이들의 행복에 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봉독한 스바니야 예언서는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에게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스바 2,3). 여기서 겸손한 이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나빔”으로 가난한 이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나빔, 곧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를 ‘겸손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도 표현되는 그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스바 3,13).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행복 선언’은 이러한 가난한 이들의 특징을 더욱 상세히 묘사해 줍니다. 먼저,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입니다(마태 5,3).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영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영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스바니야 예언서가 이야기하는 겸손한 이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 세상의 죄 앞에서 슬퍼합니다. 또한 온유하여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짊어집니다(마태 5,5; 12,28-30 참조). 언제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자비로운 모습을 지닙니다. 마음이 깨끗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며(마태 15,15-20 참조) 분열이 아니라 평화를 이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때문에 박해를 기꺼이 참아 받습니다. 이렇게 보니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참행복 선언’은 이처럼 가난한 이들이 진정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은 약속된 땅을 차지하는 것,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영원히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나중에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5,3). 하늘 나라의 행복은 나중에 가서야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의 시각에서 볼 때 슬퍼하고, 박해받아 고통 속에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늘 나라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은 종말에 가서이지만 가난한 이들은 이미 하늘 나라에 속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상속받게 될 하늘 나라가 당신을 통해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마태 4,17). 그러면서 이 나라를 차지하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가난한 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슬퍼하며, 온유하여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의로움에 목말라하며,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가난한 이로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다시금 회개의 삶을 살아 하늘 나라를 상속받읍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염철호 신부(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2] :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간혹 "저 집은 잘 사는 집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뜻은 부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말은 부자만 되면 잘 살고 행복해진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다고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부러워하고 꿈꾸는 인기 연예인이나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 큰 권력에 오른 정치인들 역시 인기나 돈, 권력 그 자체가 행복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 같은 이들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고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모욕받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고, 남들에게 칭찬 받으며 살고 싶은데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니 어찌 살아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소유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이지요. 가진 것이 많아 그것만을 의지하고 산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루카 12,16-21)에서 재산만을 의지하고 끝없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가진 것이 적어도 하느님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빠져도 행복한 삶이라는 강조의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탈무드)는 말처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했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며, 얼마나 감사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통해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과 타인과의 상대적인 비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콩글톤 경은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오! 나에게 5파운드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무심히 지나치다 들은 말이지만 그는 하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는 정말 행복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엌으로 찾아가 그녀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뒤, 5파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하녀는 감격하여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콩글톤 경은 부엌을 나와 작은 돈으로도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한 자신의 선행을 기뻐하며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안에서 하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참 바보야. 왜 10파운드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등장합니다.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모차르트가 등장하면서 열등의식으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밤잠을 설쳐가며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지만 놀 것 다 놀고 취미삼아 작곡한 모차르트의 곡은 불후의 명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진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왜 저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만 주시고, 모차르트와 같이 천재적인 작곡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치닫게 합니다.
불행은 어느 날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과 비교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이기적 욕심이 지배하는 대로 맡기고 산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때만이 부족하고 불편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유나 위치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 느낄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만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자료 : 이기양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1] :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
마태오 5, 1-12ㄴ : 행복의 답 예수님 안에 머물기
우선, 지난주 결론 부분이 약간의 실수로 인해 누락되어 조금은 속상했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니,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내용은 “고 이태석 신부님이 나누던 사랑을 달콤하고 낭만적인 감성으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장한 꽃향기가 됩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상한 것을 넘어, 여유를 가지니, 행복감도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주에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이 더 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의 행복한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온 이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성하고 의로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로서, 기적적인 치유를 받고자 모여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병으로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아 불행하게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통해 새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체험을 하며 잠시나마 하느님 나라를 맛보는 여유를 가지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더욱이 이러한 군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행복하여라, ~한(하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가르침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이상 배고프거나 아프지 않고,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권위 있는 말씀은 그 자체로 군중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첫 가르침인 행복선언은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신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꿔 당신을 따라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그곳에서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는 장엄한 선언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행복 선언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행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하는) 사람들”이라는 문구 앞에 “예수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어”라는 구절을 넣어보면, 더욱 정확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 모든 행복의 답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복팔단 묵상 중에, 지난해 9월 25일 시복된 끼아라 루체가 떠올랐습니다. 17살의 여학생이었던 루체는 골육종 암 판정을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25분 동안 방에서 혼자 있다가, 밖으로 나와 부모님에게 “이제는 저의 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했고, 의사들과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의사들이 죽음 직전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잊도록 모르핀 주사를 권했으나, 그녀는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다며 투약을 거부했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도리어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잖아. 그리고 단 하나의 생명을 갖고 있으므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내야 해!”라고 말하며, 젊음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하느님께 믿고 맡기세요. 엄마는 모든 것을 했어요. 내가 없을 때는 하느님을 따르세요.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녀는 “엄마, 행복하세요. 나는 행복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19세의 나이로 예수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끝까지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각막을 세상에 선물하였습니다.
어린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자신의 처지(죽음)를 받아들이며 여장부의 큰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누구와 함께하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서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자료 : 최인각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2] : '행복'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
어떤 사람이 환하게 밝은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궁금해 무얼 하느냐고 묻자 "잃어버린 시계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시계를 어디에서 잃었는지…"하고 다시 묻자 "저쪽 어둡고 캄캄한 가시덤불 숲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행인이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한 곳에서는 찾느냐"고 핀잔을 주자, 시계를 찾던 그 사람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밝고 편한 가로등 밑에서도 못 찾는 시계를 어둡고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찾느냐?"고 되레 큰소리를 치더랍니다.
누가 바보입니까? 시계를 잃어버린 데서 찾으라는 행인이 바보입니까? 어둡고 불편한 곳이 싫다고 밝고 편한 가로등 밑에서 찾는 사람이 바보입니까?
어떤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합니다. 그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물질이 풍부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 밝고 편하니까 그 곳에 행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어둡고 불편하더라도 시계를 잃어버린 곳에서 시계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찾기 힘들더라도 행복이 있던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이 없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 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로 가야 합니다. 산에서 절대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고, 물에서는 절대로 산토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악착같이 재물을 모았지만 재물에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차지했지만 거기에도 행복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의 건강이나 외모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외모와 건강에 온 힘을 다 기울여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어냈지만 거기에도 역시 행복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행복이 있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참 행복은 어떤 것인지 8가지나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8가지 참된 행복 중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이 바로 가난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너도 나도 부자가 돼야 행복한 줄 알고 부자가 되려고 난리인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신 예수님 말씀이므로 100% 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에서도 재산에만 의지하면서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진 재물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아니 가진 것이 없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행복할 수 있고,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하느님과 함께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음을 복음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언젠가 영국 「런던 타임즈」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했는데 상위에 뽑힌 네 부류 사람은 뜻밖에도 소박한 서민들이었답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은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고, 둘째가 아기를 목욕시킨 후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셋째는 멋진 공예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넷째가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낸 의사였답니다. 행복한 사람들 중에 재벌이나 귀족은 거의 없었답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부귀영화에 있지 않음이 또 한 번 입증된 것입니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 적게 바라는 사람이 많이 갖고 있으면서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신부와 수녀들은 행복합니다. 가진 것도 적고 바라는 것도 적기 때문입니다. 콜튼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진정한 만족감은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복음에서 배웁니다.
행복하기 위해 디오게네스에게는 목욕통 하나로 충분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온 세상도 너무 좁고 부족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말씀자료 : 박용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5] : 행복선언 |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입니다. 루가복음서에도 같은 행복선언이 있습니다. 루가복음서의 것은 짧고 간결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은 길고 더 발전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선언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더 길게 만들어 기록하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루가복음서의 것이 행복선언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행복한 사람들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말하는 반면 루가복음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입니다.
행복선언은 하나의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비록 지금 가난해도, 굶주려도, 또 울어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성취된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서의 예언자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현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언자는 이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들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누리겠다는 이해타산에 근거하여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언자는 강자의 횡포를 비판하고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말합니다.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합니다. 예언자는 재물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 피해를 감수합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하는 말과 다른 말을 하다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예수님은 예언자의 삶을 살다가 그 대가로 십자가를 지셨고 제자들도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가치관을 따라 살기 위해 인류역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수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많이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인류역사의 통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하느님 앞에 우리의 보람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먹는 일에만 매달려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비록 현재 굶주려도 인간으로 또 하느님 앞에 보람 있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기쁘고 즐거운 것만 쫓아다니며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저자의 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타버린 재만 남기지만 우리가 겪는 비극과 함께 하는 아픔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게 한다.” 자기가 겪는 고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도 참여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생의 진실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 진실은 하느님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믿으셨던 그 하느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삶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고 적고,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를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모두 하느님이 버리신 결과로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복선언은 하느님이 우리의 염원을 곧 이루어주신다는 축복의 말씀이며 또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도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통념에서는 하나같이 불행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들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언은 하느님은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들을 외면하고 버려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즐겨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굶는다고, 고통을 당한다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원하셔서 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드는 빈부의 격차입니다. 19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산업만 발달하면 하느님도 해결하지 못한 기근을 퇴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었지만, 세상의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영양의 과다섭취로 병들어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아직도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류가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발전에는 피해를 입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고 가난과 굶주림의 영적 의미, 슬픔과 아픔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론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을 왜 축복하시는지 설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행복선언이 아닙니다. 단순한 선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을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해타산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우리의 통념은 그것을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말하며 외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선언을 들은 사람에게 그들은 우리의 축복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라면, 하느님의 축복을 그들에게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축복을 실천합니다..............◆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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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