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과 사회수필
이정림
1. 사회수필의 필요성
우리의 수필은 이제 분명한 성격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몽테뉴 식의 관념적인 수필도 아니고 프란시스 베이컨 식의 중수필도 아니다. 작고 사사로운 신변의 이야기들을 친근하게 소재로 삼은 찰스 램의 경수필(輕隨筆)과 그 성격이 흡사하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근접한 정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은연중에 한국 수필의 성격이 정착됨으로써 우리 수필계에는 자연스럽게 서정수필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신변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서정수필만큼 적당한 형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정수필은 우리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호소력을 안겨 준다. 어떤 성격의 수필도 서정수필의 이와 같은 친근감과 호소력에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정수필은 또한 시대를 초월한 긴 생명력을 지닌다. 서정수필이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시대성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년 전의 사랑 이야기나 오늘날의 사랑 이야기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눈 오는 날, 천장을 쳐다보며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노천명, <설야산책> 중에서)는 절절한 고독의 감정은 1940년대의 노천명이나 2000년대에 사는 우리의 감정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수필의 작품세계는 자연히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필이란 장르는 일정한 형식이 없는 대신, 여러 형식의 글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다양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김진섭(金晉燮)도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서정수필은 이런 무한한 포용성을 사실상 차단하고 제한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서정수필이 안고 있는 숙명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수필평론가들은 수필인들 스스로 좁혀 놓은 수필의 세계에서 과감히 탈출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어느 평론가는 심지어 수필도 논설문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수필문단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지만, 그 역시 끝내 개인사와 주관적인 정서에 치중하는 서정수필의 영역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론은 그렇게 혁신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자신은 왜 그 이론에 부합되는 수필을 쓰지 못했을까? 그것은 서정수필이어야만 문예성을 지닌다는 고정관념에서 그 역시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에 좌우되는 문제이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협소해진 한국 수필의 성격에서 탈피할 수 있는 방안으로 나는 일찍이 사회수필을 권장해 왔다. 그것은 우리 수필가들도 자신이 처한 시대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공동의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는 내 수필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지용(鄭芝溶)을 일러 순수시인(純粹詩人)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순수문학이라는 것에 일찍이 자조(自嘲)를 했다. "국토와 백성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를 썼다. 그것이 시집이 되어 잘 팔리었을 뿐이다. (…) 사춘기를 훨씬 지나면서부터는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그런 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 그러니까 나의 영향을 다소 받아온 젊은 사람들이 있다면 좋지 않은 영향이니 버리는 것이 좋을까 한다."(정지용, <산문>에서 인용함.)
한 편의 수필 속에는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시대적인 배경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배경적 요소에는 특별한 사회의식이 없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수필가들도 사회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회문제를 다루되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하는 방법론이 될 것이다. 수필은 문학이지만, 칼럼은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수필이 사회칼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문제를 다루되 문예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지 않고서는 사회수필은 시도하기 어렵다. 사회의식은 지녔으되 사회수필을 시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난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양하(李敭河)도 수필 제1기에는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경수필만을 썼다. 어쩌면 그도 정지용처럼 일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수수필에만 매달렸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그는 서정수필을 버리고 중수필과 잡문에만 주력했다. "이상향(理想鄕)을 그리는 낭만주의가 청소년의 전유물인 데 반하여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현실주의자가 장년(壯年) 이후의 귀착점인 일반적 경향에서 그 역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양하 수필의 제2기는 "현실을 직시하는 산문적 잡문의 시기"(유병석, <이양하의 수필>에서)였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양하의 사회수필은 실패했다. 개인수필에서는 지나친 미문과 외국문장 식 표현이 결점으로 지적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수필에서는 사회의식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성과 문학성의 접목은 수필의 세계를 넓히고자 하는 수필가들에게 있어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만 풀 수 있다면 사회수필은 문예성을 지니게 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도 지닐 수가 있게 된다.
시체에 달려드는 쇠파리들을 굶주린 가엾은 백성으로 비유해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정약용(丁若鏞)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이라든가, 엄동설한에 모두 얼어죽은 줄로만 알았던 개구리가 바위 틈에 한 마리 살아 있음을 보며, 일제의 폭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조선 백성의 항일민족사상을 풍유적(諷喩的)으로 표현한 김교신(金敎臣)의 <조와(弔蛙)>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주제로 한 수필이지만 서정수필 못지 않은 생명력을 지니고 오늘에까지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해 본다면, 사회수필의 방법론은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 수필과 칼럼의 상이점
① 정서와 논리
어떠한 형식을 빌리듯 문학은 모두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정서는 개인의 감정에서 출발하나 타인의 정서에까지 울림의 파장을 전달한다. 그럼으로 사회수필도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식을 전개해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칼럼에는 이런 정서가 개입되지 않는다. 정서보다는 논리가 앞서고,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객관적인 논거(論據)에 치중하는 것이 칼럼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②상징성과 구체성
상징이란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곧 '순결'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과 비유는 시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수필은 뜻의 전달에 주안점을 두는 산문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예적인 산문이다. 따라서 사회수필에서도 이런 상징성은 필요하다. 사회수필은 다루고자 하는 사회 문제를 먼저 상징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사회칼럼은 매우 구체적으로 또한 직설적으로 접근한다. 사회수필에서 상징은 구체적인 것을 오히려 추상화시킴으로써 주제의 전달에 큰 여운을 주게 되며 따라서 문예적인 효과를 제공하게 된다.
③우유체(優柔體)와 강건체(强健體)
수필과 칼럼의 상이점은 문체와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칼럼의 문체는 강하고 설명적이다. 독자를 설득시키기 이해서는 표현도 직설적이다. 그러나 사회수필의 문체는 부드럽고 온유하다. 강한 메시지도 부드러운 문장으로 감싸고, 설득시키려는 조급성보다는 천천히 공감성을 유도해낸다. 칼럼의 문장에는 수식이 없지만, 수필의 문장에는 비유와 수사가 동원된다. 강하게 설득시키려는 칼럼에서는 부드러운 문장이 비효과적인 것과 같이, 마음에 호소하는 수필에서는 강한 문장이 적합치 않다. 이것이 사회수필과 사회칼럼의 문장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3. 예문으로 본 사회칼럼과 사회수필
<예문1>은 사랑의 나눔을 주제로 한 글이다. 사회칼럼과 사회수필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문1-1>
몸보시(布施)
송영언
불교의 실천덕목 중 하나인 보시(布施)는 원래 세 가지였다. 재물로 베푸는 재시(財施)와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법시(法施), 그리고 두려움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그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보시의 범주도 넓어졌다. 꼭 이들 세 가지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시간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면 모두 보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남에게 늘 환한 얼굴을 보이는 것이나 따뜻한 마음, 봉사하는 자세, 양보정신,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 것 등도 모두 보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보시는 불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외국에 비해 아직 열악한 수준이지만 최근 들어 우리 나라에도 조금씩 '보시 문화'가 싹트고 있다. 수입의 1%를 나눔의 실천에 쓰자거나 유산의 10%를 이웃을 위해 내놓자는 캠페인 등이 벌어져 나름대로 호응을 얻고 있다. 며칠 전에는 팔순의 실향민 강태원 씨가 270억 원을 불우이웃을 위해 쾌척했고 교수 출신 사업가 황필상 씨는 재산 215억 원을 대학에 내놓았다. 30년간 노점상으로 일군 전재산인 연립주택을 대학에 기증한 할아버지도 있다.
이번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의 도우 스님이 말기 간경화 환자를 위해 간 일부를 떼어줘 세상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자신의 몸 일부를 내준 것이니 '몸보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환자복을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비의 마음으로 베푼다'는 보시 정신을 몸소 실천한 20대 스님의 선행이 아름답기만 하다. 3년 전 신장질환자에게 신장을 기증하기도 했던 그는 혈액암 환자를 위해 골수 기증 신청까지 해 우리네 보통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이들처럼 재산이나 몸의 일부를 내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행이 공개되는 것을 거북해한다. 도우 스님도 처음에 "대단한 일도 아닌데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고, 연립주택을 내놓은 할아버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며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들은 지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라는 그들의 믿음이 깨진 것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그만 일을 해놓고도 생색내기에 바쁜 이 땅의 속인들에 비하면 그들의 정신은 참으로 고귀하고 소중하다. 탐욕과 부정비리가 만연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메마르지 않고 지탱되는 것이다.
(논설위원, 동아일보, 2002. 8. 21)
<예문1-2>
사랑은 돌고 돌아
이정림
병원에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으러 가는 문우가 있다. 어느 날 약국 앞에서 자기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십대쯤 보이는 부부가 약값을 계산하다 말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돈이 좀 모자라는 모양인데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보아도 속수무책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수납 직원에게 다음에 올 때 계산하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까지 해 보았지만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런 개인적인 청을 들어 줄 리가 만무했다.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신용카드가 없다면 둘 중의 하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돈을 가져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런 딱한 사정을 지켜보던 문우가 마침내 참견을 하고 나섰다. 알고 보니 큰돈도 아니라서 자기가 대신 빌려주겠노라고 제의를 했다. 난처한 입장을 면하게 된 그들 부부가 얼마나 고마워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들은 예금계좌 번호를 가르쳐 주면 곧 보내드리겠노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 날 양쪽 모두의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돈은 보내 오지 않았다. 급한 것만 면하면 다음 일은 곧 잊어버리는 게 사람의 타성이라 하지 않던가. 문우는 그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다니 하고 후회도 했으리라. 돈의 액수보다 믿음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속으로 끌탕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돈이 입금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문우는 무릎을 쳤다. 이래서 세상은 아직 살아 볼 만하다고 하는 모양이로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다. 빌려준 돈만 온 것이 아니라 예상치 않은 빚이 덤으로 왔기 때문이다. 입금된 액수가 빌려준 돈의 갑절이나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나머지 돈에 대해 빚쟁이가 되어 버린 문우, 그는 그제야 자신의 예금계좌 번호를 적어 준 일을 후회하였다. 자기의 계좌 번호를 적어 줄 것이 아니라 그 돈은 당신처럼 난처한 지경에 처한 사람을 보게 되면 그때 그에게 주라고 왜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덩굴줄기처럼 끝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 아닌가.
불가에서는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돈 안 들이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선의(善意)를 일컫는다. 따뜻하고 정다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안시(眼施), 환하고 밝은 얼굴로 남을 편하게 해주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말에 친절을 담는 언사시(言辭施), 기꺼이 몸으로 돕는 신시(身施),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심시(心施),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좌상시(座床施),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방사시(房舍施).
보시(布施)라는 것은 이렇듯 꼭 물질로만 행하는 것은 아니다. 문우가 딱한 사정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은 마음이 곱기 때문이다. 그가 한여름이면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부인네들을 생각하여 시원한 보리차를 내가는 일을 계속하는 것도 그들의 갈증을 자기의 목마름으로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살뜰하지 못한 마음을 쉽게 물질로 대신한다고 나무라곤 한다. 그러나 물질도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렵다. 그런데 요즘 마음과 물질을 함께 베푼 주인공이 있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어느 팔순의 실향민이 불우 이웃을 위해 270억 원이라는 거액을 기꺼이 쾌척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의 선대인(先大人) 역시 자신의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했다고 하지 않는가.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도 크면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는 말을 늘 들려주었고,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아들은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훌륭한 신념이 아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한 형국이었다.
나 같은 소시민이야 270억 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그 일이 알려지면서 기부 문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번에는 교수 출신 사업가가 그의 재산 215억 원을 대학에 내놓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은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너무 많아 사회에 기부하게 되었노라고 하면서. 아흔아홉 섬을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는 말도 있는데, 그런 소유의 한계를 명쾌하게 내릴 수 있었던 그의 철학이 215억 원의 재산보다 더 값져 보였다. 또 이번에는 30년간 노점상으로 일궈 마련한 전재산인 연립주택을 대학에 기증한 할아버지도 나왔다. 할아버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한 일이 아니라면서 극력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만유의 법칙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에게서 신장을 기증 받아 아내에게 이식시킨 남편은 또 다른 이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고, 또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고…. 이렇듯 타인에 대한 사랑이 돌고 돈다면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그 은혜를 갚으면 그 고마움은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갚고 또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갚아 나간다면 사랑은 끝없이 생명력을 지니며 순환되어 갈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본래 내 것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잠시 내게 머물렀다 가는 것일 뿐, 영원한 소유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영원한 소유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것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며 홀가분하게 떠나는 삶. 그런 삶이 바로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닐까. 간경화 환자를 위해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 준 20대 스님의 해맑은 얼굴이 햇살에 어른거리는 청량한 아침이다. (2002)
<예문2>는 간첩죄로 미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한 로버트 김에 대하여 각각 사회칼럼과 사회수필로 쓴 글이다.
<예문2-1>
로버트 金
송영언
조국에 미국의 국가 기밀을 넘겨주었다가 체포돼 간첩죄로 미 연방교도소에서 7년째 복역중인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63). 징역 9년을 선고받은 그는 모범적인 수형 생활로 15% 감형을 받아 내년 7월 출소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거 및 활동을 제한하는 보호감찰 3년형도 함께 선고받아 출소하더라도 3년간은 거주지 인근에만 머물러야 한다. 현재로서 그가 조국에 가장 빨리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남은 형기와 보호감찰 형에 대한 미국 정부의 사면.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로버트 김 사건은 유대계 미국인 조너선 폴라드 사건과 자주 비교된다. 김씨와 같은 미 해군 정보국(ONI)에 근무했던 폴라드 씨는 미 군사위성이 촬영한 중동지역 군사 시설 사진 등 1000여 건의 군사 기밀을 주미 이스라엘 무관에게 제공한 것이 인정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정부와 유대계 미국인 단체들은 그의 석방 노력을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들은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폴라드 씨의 사면을 요청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2001년 2월 폴라드 씨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돼 자유의 몸이 됐다.
이에 비하면 그의 석방을 위한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지에 '로버트 김 미주 후원회', 국내에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고 우리 나라 일부 의원들이 석방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으나 정부는 여전히 뒷전에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물론이고 대통령을 수행한 인사들도 이에 대해 언급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김씨는 올해 초에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자신의 사면을 위해 힘써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당시 김씨에게 비밀 자료를 넘겨받았던 백동일 전 주미 해군 무관이 그와의 만남과 자료 전달 과정 등을 처음으로 ≪신동아≫ 5월호에 공개해 눈길을 끈다. "한국의 대북 첩보 여건이 그렇게 열악한가. 그렇다면 도와야지"라며 조국을 위해 뛰었던 김씨의 열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백씨는 "김 선생은 조국에 대한 순수한 애국심 하나로 나를 돕다가 불의의 피해를 보았다"며 "노 대통령이 이 달 열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그의 사면을 부탁해 달라"고 간곡히 주문했다. 김씨는 석방되면 한국으로 돌아와 불우청소년을 위한 기숙사나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꿈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김씨의 '조국 사랑'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보답이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2003. 5. 5)
<예문2-2>
로버트 김의 외로움
이정림
96년 12월, 광화문 조선일보 미술관 앞에는 눈발이 날리는데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50∼60년대의 못살았던 시절을 인형과 소품으로 꼼꼼하게 재현해 놓은 이승은·허헌선 부부의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성공회 앞길까지 늘어서 있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 인형들 가운데에서 '어머니 방'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늦은 시각 어머니의 방에 모여 앉아 아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전구(電球)를 넣어 양말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 옆에는 수저가 하나 내보이는 밥상이 상보에 덮여 있고, 무쇠 화로에는 된장 뚝배기가 부젓가락 위에 놓여 있다. 두 사내아이와 고명딸은 나란히 앉아 군용 담요 속에 발을 들이밀고 만화책을 보는데, 아이들이 꼼지락거려서일까 그 밑에 넣어 둔 밥 주발이 뚜껑이 열린 채 모로 쓰러져, 밥풀이 담요 안자락에 몇 개 붙어 있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5남매와 어머니가 자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오실 막과자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빈손으로 돌아오신다 해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서로 안기려 들 것이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요 힘이지 않은가.
국가는 국민의 아버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절대적인 의미요 힘이듯이, 국민에게 국가는 절대적인 의지처요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96년에 한국 정부에 미(美) 국방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복역중인 로버트 김(한국명·金采坤)이 우리 정부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제가 대한민국의 스파이였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조국이 얼마나 자기 일에 침묵하고 있었으면 이런 질의서를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그 침묵에 얼마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정부측 입장은 이 사건을 "법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 시민권자의 개
인적 행위에 대해 미 사법부가 실형을 선고한 사안"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해도 그는 한국인이다. 또 그의 '개인적 행위'는 그가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애국심의 발로였지 않은가.
우리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와는 다르게, 명백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유태계 미국 시민 조너선 폴라드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구속되자마자 국적과 시민권을 부여했는가 하면, 당시 총리 네타냐후는 다음과 같은 친필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왜 그런 지도자가 없는 것일까. 로버트 김의 외로움이 겨울 추위처럼 옷섶으로 파고든다. (1999.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