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아홉째 이야기, 우리 동네 황사장(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65)
[삽화-백소(白笑)]
황사장과 함께 술을 마신 첫날에 그의 청소년기까지 주루룩 들었다. 신돌석씨는 황사장이 살았다는 동네 지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흥미진진하였다. 황사장이 놀았다는 극장에 신돌석씨도 동네 형 따라 많이 갔었다. 한동안 학교 안 다니는 어린 애는 공짜라고 해서 어떤 형이 데리고 들어갔다. 당시 극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영화를 보러 왔는지 수다 떨려고 왔는지 모를 분위기였다. 두 편을 동시 상영하였다.
주로 액션 영화들을 상영했다. 신영균, 독고성, 이예춘 등이 나왔다.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칠 때는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다가 한번은 2층에서 1층을 향해 오줌을 싼 일이 있었다. 난리가 났다. 오줌을 싼 사람은 만취 상태였는데 직원들한테 끌려서 나갔다. 그 뒤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떨어졌는데 마침 미취학 어린이도 돈을 받게 되면서 데리고 가던 형만 들어가고 집으로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 극장은 옆에 새 극장이 생기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고 한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청년 시절 이후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황사장은 신돌석씨의 지난 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한두 마디 말하면 다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이발할 때 이야기하는 것도 손님들 재밌으라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이야기를 못 참는지도 몰랐다. 들을 내용도 많았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였다. 지겨운 듯하다가도 어느새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황사장이 기와공장에 다니면서 건달 비슷하게 놀던 때에 절도죄로 구속되었던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절도죄로 소년원에 가서 얼마 안 있다가 나왔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 폭행으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반가웠다. 그 친구와 며칠 지내는데 자기와 함께 광주대단지 가보지 않겠냐고 하였다. 그게 어디인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거기만 가면 일거리가 무궁무진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좀 망설여졌지만 이제 형네 집에서 나와야 할 판이었다. 형네는 기와공장 터 귀퉁이에 살다가 산동네 쪽으로 몇 차례 이사를 갔다. 당시에 집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한 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클수록 못할 짓이었다. 그리고 황사장이 클수록 형수도 불편할 게 뻔한 일이었다. 지금 사는 방은 칸막이로 둘로 나누어 놓은 곳이었다. 아랫방에서 형네 부부와 딸아이가, 윗방에서 황사장과 남자 조카애가 잤다.
칸막이가 있다지만 사실 한 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황사장이 나가야 했다. 형한테 이야기하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형수는 펄쩍 뛰었다. 조금만 참으면 도련님 따로 방 줄 수 있게 큰 집으로 이사한다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어느 세월에 그렇게 할 것인가? 친구 제안도 있고 해서 결단을 했다. 형은 말없이 듣기만 했고, 형수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지낼 거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그리고는 결국 둘 다 승낙을 했다.
광주대단지는 지금의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일대인데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이었다. 면소재지에서 산을 둘씩이나 넘는 첩첩산중에 서울 청계천 일대 등의 판잣집을 철거해서 철거민들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하였다. 철거민들에 이어서 그곳에 집도 생기고 일터도 많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친구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거기 가면 일거리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고 황사장과 함께 가자고 한 것이었다.
지금은 어디인지도 잘 모를 곳에 도착한 황사장은 천막이 처져 있는 곳에서 한 달 정도를 보냈다. 개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 주변에 천막들을 치고 살았다. 친구가 아는 사람이 천막 한 구석에서 있게 하였다. 일거리는 정말 하늘에 별을 따는 식이었다. 대부분 서울로 다시 나가서 일해야 했다. 그런데 천호동까지 나가는 버스가 하루 세 대이다가 여섯 대로 는 정도였다. 그걸 타기도 어려웠지만 서울로 간 다고 일자리가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주 더운 여름날로 기억하는데 소문이 흉흉하더니 사람들이 성남출장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친구가 황사장더러도 같이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하여튼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잘 몰랐다. 형네 집에서 나올 때 형수가 싸준 돈이랑 쌀 조금이 다 떨어지면서 황사장도 배가 고파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였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삽화-백소(白笑)]
사람들 틈에 서 있는데 누군가 수진리 고개에서 굶주린 엄마가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말을 했다.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출장소 쪽에서 불이 확 타올랐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황사장도 따라갔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돌을 집어서 유리창을 박살냈고, 경찰차를 태우는 데 따라했다. 그렇게 사흘을 했다고 하던데 황사장은 이틀째 되던 날 경찰에 잡혔다. 친구도 잡혔다.
이번에도 그 친구는 구속되었고, 황사장은 형과 형수가 달려와서 신원보증을 서고 풀려났다. 나중에 친구에게 듣기로는 자기가 절도, 폭력 전과가 있으니 마치 전과자들이 폭동에 나섰다고 보여주려고 별로 나서지도 않은 자기를 구속시켰다고 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단순가담자에 지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또 구속되어서 별을 달았다. 이번에는 좀 색다른 별이기는 했다.
형한테 끌려서 형네 집으로 왔다. 형이 소주 한 잔 하자고 해서 둘이 가까운 공터에 소줏병 들고 갔다. 형수가 김치와 두부를 들려주었다. 형 말로는 우리 식구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좌익으로 몰렸는데, 그게 밝혀지면 더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형한테 처음 들었다. 궁금해서 자꾸 묻게 되었는데 형도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였다. 큰아버지가 호적을 자기 밑으로 옮겨 주었다고만 했다.
그런 이야기 끝에 형은 황사장에게 군대를 가라고 했다. 자기도 큰아버지가 전쟁 직후에 빨리 군대 가라고 해서 지원해서 갔다 왔다는 것이었다. 일거리도 없고 머물 곳도 마땅치 않은 차에 형 신세를 안 져도 되는 길은 군대에 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에 갈 결심으로 육군에 지원을 했는데 호적이 늦어서 그런지 아직 나이가 안 됐다는 답이 왔다. 기가 찼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해병대가 나이 제한이 더 적다고 해서 거기로 가기로 했다.
해병대에 갔다가 월남까지 가게 됐다. 청룡부대였다. 해병 2여단이었다. 부대가 가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본인 의사도 확인했다. 황사장은 까짓것 가서 죽으면 형한테 진 신세 갚는 거지 하는 식의 단순한 생각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고생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 딱 1년 있고 돌아와서 제대했다. 말뚝 박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고, 부대에서 권하기도 했는데 겁이 나서 거절했다.
황사장 생각에는 여기 와서 베트콩을 우습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독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베트콩인지 양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특히 황사장이 있던 때는 전세가 거의 기울어져 갈 때라서 양민들이 베트콩 편을 드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어린 남매가 던진 수류탄에 죽는 전우를 봤다고 하였다. 남동생은 도망가서 못 잡았는데, 누나는 잡히게 되자 가진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단다.
고국에 돌아와서 형네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 사이 형은 좁은 평수지만 서민아파트 하나를 마련했다. 남자 조카와 한 방을 쓰면서 있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형수가 이웃집 사람 말을 듣고 이발을 배워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배운 것이 이발 기술이었다. 막상 해보니 황사장과 맞는 기술인 듯했다. 황사장은 자기가 손재주가 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하고 살아왔는데 이발을 해보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신사장 혹시 월남 갔다 온 군인들 전투수당 어떻게 된 건지 알아? 언젠가 전우를 한번 만났는데 우리가 전투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거야. 뭐 해외라서 군인보수법에 해당되지 않았다나.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우리가 뭐 국가와 무관하게 나가서 전투를 했단 말이야? 어이가 없더라구. 그리고 미국이 우리 주라구 한 돈을 박정희가 가로챘다는 이야기도 있다네. 혹시 그런 거에 대해 아는 것 있어?
말을 놓으면서도 신돌석씨를 신사장이라고 불렀다. 이 점에 대해서야 신돌석씨가 경수형한테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전투근무수당지급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라고 계속 1인시위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이 법이 국방위엔가 계류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황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였다. 그저 박정희 하면 구국의 영웅인 줄만 알았는데 쌩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자기도 미약한 힘이지만 보탤 일 없냐고 해서 함께 국회 앞에 가보자고 했다. 화요일 빼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발소에 묶여 있어야 하니 휴일이라도 시간 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이제 우리 나이로 일흔 넷이다. 중노동을 하고 있으니 화요일이라도 푹 쉬어야 할 텐데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의지를 보이는데 지레 힘들 거라는 단정을 할 거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발 기술을 배운 뒤 규모가 큰 이발소에 취직했다. 그때만 해도 이발사가 4-5명씩 있는 이발소가 꽤 있었다고 했다. 몇 년 일하다 동네 아줌마가 소개해 준 여자와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살림을 차렸다. 작은 봉제공장에 다니던 여자였다. 그때만큼 행복했던 때가 인생에서 없었던 것 같다. 딸 아이 하나를 낳았다. 이발소에 취직해서 버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울 것 같아서 무리를 해서 이발소를 차렸다. 그때 진짜 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아내가 그만 뺑소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어린 딸을 데리고 힘겹게 살아왔다. 그런데 빚만 늘고 잘 운영이 되지 않았다. 문을 접고 다시 취직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남 일 도와주는 식으로 살았다. 그러던 차에 이발소 분위기가 슬슬 바뀌기 시작했다. 88올림픽 이후인 것 같다. 젊은 면도사가 늘어나더니 커튼을 치고 이상한 짓을 하는 곳들이 생겼다.
딸 키우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그런 데서 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발소를 차렸는데 그때가 IMF 때였다. 또 망했다. 그리고 퇴폐 이발소를 갈 수는 없어서 한동안 쉬었는데 그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사우나 이발소에 자리가 생겼다. 거기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린 뒤에 지금 이발소를 차리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고 있다.
딸래미는 다 커서 미용 기술을 배워서 미용실을 차렸다. 결혼도 해서 애비 고향인 충주 부근 어디서 살고 있다. 미용 기술을 전문대학에 가서 배웠다고 한다. 황사장은 이발사로서 안타까운 점이 그것이라고 했다. 미용사는 점점 전문가가 되고, 대학에서도 배우는데, 왜 이발사는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자기 짧은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을 것인가?
작은 소도시이지만 서울 근교에서, 그것도 변두리에서나마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몸이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게 소원이란다. 남편과 이혼한 동네 여자와 느즈막이 결혼을 했단다. 혼자 살다 보면 사람이 자꾸 처지는 것 같아서 재혼을 생각했고, 딸도 권했는데 마침 말이 통하는 여자가 있더란다. 그 여자는 지금 식당 주방에서 일한단다. 평생 요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황사장도 혼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마누라한테 의지하는 삶은 살지 않고 있단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하고, 요리도 청소도 다 각자 알아서 했다. 그래도 한 번 분란이 없었다. 사실 남자들 나이 들어서 힘든 것이 평생 마누라 시켜 먹고 살아서 그런 것 아닌가? 황사장은 그에 대해 특별한 생각은 없지만 살다 보니 터득한 이치 같다고 했다. 그런데 손님들한테 그런 이야기하면 다들 한심하다고 말한단다. 우리나라 나이 든 남자들은 다들 그렇더란다.
신돌석씨는 황사장과 두 번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반세기 넘는 개인사를 들었다. 황사장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소중한 역사다. 우리가 흔히 그런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이야기들을 할 때면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림자 취급하고, 역사에서 커다란 일들은 뛰어난 사람이나 예외적인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황사장의 삶을 보아도 그런 사건이 민초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친 일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신돌석씨는 좀더 많은 사람들과 개인사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들은 잘 못 느껴도 우리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그들의 삶이 여러 가지로 녹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피와 땀,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모여서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우리는 종종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황사장과 가진 두 번의 술자리는 정말 의미 있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뿌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