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8 금요 성령집회 / 김지훈 목사(동양선교교회)
말씀 : 창세기 39:4-20
제목 : 믿음의 시선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LA 동양선교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지훈 목사입니다.
오늘 제가 존경하고 참 사랑하는 주승중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주안교회에서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참 감격스럽습니다.
저희 교수님, 신학교 시절에 설교학도 가르쳐 주시고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심리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고
또 담임으로 섬겼을 때, 참 많은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는데요,
이렇게 삶의 변곡점마다 함께 하신 우리 목사님과 또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
이 시간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로 우리에게 함께 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한 가지 징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기하게도 제가 세차만 하면 비가 옵니다.
그래서 저희 목사님들은 '목사님, 세차 하셨어요?'라고 묻거든요..
제가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데
제가 세차를 하면 비가 오는데, 그럼 이게 미국에서만 그런 것인가,
제가 사실 지난 여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0년 만에 한국에 와서
그래도 한국에서 바다를 한 번 봐야 되겠다고 여름에 잠시 반나절 짬을 내서 부산 해운대를 내려갔었는데요,
그날 그 시간에 태풍 카누가 해운대에 와서 아무것도 못 보고 비만 쫄딱 맞고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겪었던 현실들을 심리학 용어로는 '머피의 법칙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머피의 법칙'은 이상하게도 내가 무엇을 잘 하려고 하면
꼭 부정적이고 힘든 일이 삶에 연거푸 생기는 것을 '머피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옛 속담에도'가는 날이 장날이다'라는 말을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그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 뒤에 또 어떤 속담이 있느냐면,
"그 장에 가서 밀가루를 팔려고 하면 바람이 불어서 가루가 다 날아가고,
왕소금을 팔려고 하면 비가 내려서 소금을 팔지 못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일들이 그저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정도의 일이라면
그냥 잊어버리거나 농담으로 웃고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부정적이고 그리고 어려운 일들이 소소한 수준을 넘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수준, 그런 큰 일이라면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한 번이 아니라 내 삶에 계속해서 연거푸 감당할 수 없게 일어난다면, 이런 고통은 견뎌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이제까지 정말 많은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이겨내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그런데 또 다시 재기할 수 없을 것같이 큰 어려움이 내 인생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누구라도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맙니다.
'내가 이를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이번에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불안함에 사로잡히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삶이 딱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이후에 낯선 이국 땅에서 정말 많은 고생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이 애굽 왕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면서 인정을 받아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요셉이 가정총무의 자리에서 자리를 좀 잡나 싶었는데,
아니요.. 요셉은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감옥에 잡혀 들어가게 됩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큰 누명을 쓰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밑바닥으로 또 다시 떨어져서
이제까지 이루어 놓았던, 그나마 쌓아놨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셉의 삶이 정말 이렇게 꼬이면 안되는 것이 요셉은 이제까지도 참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아, 요셉은 나이가 젊고 또 신앙이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이 보디발의 집에서 잘 가정총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인생의 고난들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선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애굽의 언어를 먼저 배워야 했는데요,
이 당시에 요셉이 쓰던 히브리 말은 당시 애굽에서 사용하던 이집트와는 완전 다른 언어였습니다.
저도 미국에 살고 있지만, 처음에 이민을 가서 언어소통이 되기까지 정말 최소한 2년 정도는 언어를 공부를 해야 되는데,
이처럼 요셉도 처음 애굽에 팔려갔을 때, 애굽 땅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아,
언어가 달라서 말을 배우는데 몇 년 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또한, 요셉은 이제까지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문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애굽 땅에서 살게 되는데, 애굽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입니다.
요셉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그 문화와 사회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사회구조에서 살면서 힘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때 요셉의 나이가 고작 열일곱 살이었는데, 그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로 죽이려고 했고,
또 그 형들이 자기를 먼 타국에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그 마음의 상처가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꼭 살아 남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보다는 어쩌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그 삶에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을 다해서 그 고통을 이겨냄으로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 많은 고난과 아픔을 다 이겨내고, 또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정총무의 자리를 잘 지켜냅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유혹할 때에도 "그런즉 내가 어찌 그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할 정도로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한 바르고 올곧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고, 또 어려움을 이겨냈던 요셉이라면
또한 여러 어려움 앞에서도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며 바른 신앙을 지켜냈던 이 요셉이라면,
하나님이 이런 요셉을 감옥에 보내시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좀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이제 좀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요셉을 지켜 주셔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그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또 바닥을 치도록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여러분, 이게 무슨 예수 믿는 자의 인생이란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살다가 보면, 인생의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알겠고,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나에게 또 다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때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부정적인 시선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상담학 박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카운셀러로 상담을 해 보면, 인종과 나이에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인생에 연거푸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꺼번에 확 좁아져서 무슨 일을 보아도 부정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두려움과 불안함에 함몰되어 버리고 마는데요,
이런 겁니다. 이 그림에서 검은 색을 한 번 주목해서 보시면,
같은 그림을 보아도 저를 볼 때에 까만색을 중심으로 보면 저를 기억할 때 까만색 양복만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저를 처음 보실 때, 와이셔츠 중심으로 보시면 색깔을 볼 때 하얀 색만 드러나게 되지요.
같은 설교자를 보아도 어디를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하고
이게 하얀색을 중심으로 보이기도 하고 까만색을 중심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같은 모양을 보아도 어디를 주목하느냐에 따라서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심리학 이론인데요,
긍정적으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흰색을 먼저 주안점을 두고 그 사람을 계속 보게 되면 흰색만 뚜렷하게 보이고
처음에 어떤 사람을 볼 때 까만색 배경부터 보기 시작하면,
양복 색깔만 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볼 때 계속 까만색만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 번 인생을 볼 때도 까만색에 한 번 시선이 고정되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내 입에서 자꾸 부정적인 말만 나오게 되고,
그러면 나의 부정적인 말을 들은 옆의 사람들도 결국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고,
나는 또 다시 그 부정적인 반응을 내 귀로 다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내 입과 내 귀와 내 주변에서 반복되는 부정적인 것들만 계속 맴돌면서
내가 그것을 듣고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동일한데, 우리의 시선이 한 번 부정적으로 고정되면 그때부터는 어려움만 강조되고
그 어려움만 도드라져 보여서 나중에 는 낙심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낙심한 마음 때문에 지금 우리 삶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낙심은 요셉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말씀 속 요셉의 이 어려움 가운데에서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
또 다시 연거푸 어려움을 당하는 이 요셉의 삶에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에서 요셉의 인생을 설명하는 대목에는 히브리어 "와예히"라고 말하는 독특한 단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따라 해 보실까요.. "와예히"
- 이것이 한국어 성경에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이 '와예히'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그 시간과 그 공간에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와예히가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있을 때, 창세기 39장 1절에 보면 원문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 [와예히]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와예히]
이렇게 원어를 보면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 말은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던 이스마엘 상인의 수레에
요셉 혼자만 덩그라니 앉아 있은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이 그 수레에 요셉과 함께 앉아 계셨다는 말입니다.
또,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도 "와예히"
※ 하나님도 그 집에 요셉과 함께 문턱을 함께 넘으셨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그 공간에] "와예히"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요셉이 안주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창세기 39:21-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이는 [와예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갈 때에도 ※ 하나님께서 "와예히" 요셉과 함께 그 감옥에 함께 들어가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 "와예히"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시각으로 요셉을 보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지키시고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와예히"의 시각을 가지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가는 그 장면부터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없애기로 계획을 짜는데 사실 이때 형들은 요셉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 말하자고 거짓말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그 계획을 짜는 순간에 첫째 형인 르우벤이 나타나서는
맏형이라고 책임감을 가지고 생명은 상하지 말게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37장 21절에 보면, "르우벤이 듣고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원어로 보면, "생명 만은 살려 주자"
그리고 이 르우벤의 한 마디, "그래도 요셉의 목숨은 살려 주자"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요셉이 일단 목숨은 건지게 됩니다.
둘째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는데요, 이 구덩이를 '보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구덩이를 보시면, 양들을 치는 목동이 보통 여름에 땅을 파게 되는데요, 땅을 파 두었다가
우기 때가 되면 물을 모아다가 이 보르라는 큰 웅덩이에 물을 저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한 시기에 건기 때 바가지로 물을 퍼올려서 양들에게 줄 수 있도록 그 보르라는 물탱크 안에 저장을 하게 되는데,
이 당시 목동들이 물을 채워서 썼던 보르를 보면 보통 땅에서 사람 키보다 5m 이상 높게, 아주 깊게 파서 만드는데요,
입구는 좁고 안은 넓기 때문에 자칫 여기에 빠지면 죽게 됩니다.
특히나 형들이 요셉을 보르에 빠뜨렸던 때는 분명히 이 때가 우기였기 때문에 이 보르 안에는 당연히 물이 가득 차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창세기 37:24절에 요셉이 빠진 보르를 한 번 주의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이 일로 인해서 두번째로 요셉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당시 보디발은 애굽 왕의 최측근에 있는 근위대장이었습니다.
그러니, 권력의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 집에서 일하는 종 하나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나 고대 애굽 법에 의하면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면 반드시 그 종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입니다.
게다가 이 히브리 노예가 여주인을 욕보였다면, 이것은 당장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일 이유가 되지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보디발이었는데,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서 요셉이 잡혀 왔을 때 그를 죽일 법도 한데,
요셉이 도망쳤다가 잡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만 왕의 감옥에 잡아 넣는, 그 죄수의 감옥에 집어넣기만 할 뿐이지요.
이어서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할 기회를 가지게 되지요.
여러분, 이제 좀 보이십니까?
가만히 보면, 상황이 그저 어렵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계속 실패의 연속인 것만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요셉의 어려운 순간 순간마다 그의 인생을 다음으로
다음 기회의 현장으로 요셉을 신실하게 인도해 나가고 계십니다.
억울하다면 한없이 억울할 수 있는 인생이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감고 한 번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이 "와예히"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요셉과 함께 머물러 계셔서
요셉을 생명싸개와 같이 지키시고 그 순간 함께 하시어 그를 살려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내가 너와 와예히 하고 있어. 너의 그 어려운 시간에, 그 힘든 공간 안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나눌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 그저 까만색, 두려움과 공포 속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믿음의 눈을 들어 이 공간 이 시간에 나와 함께 계시는 "와예히"의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볼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내 인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어떠한가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가 보면,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상'이라는 유명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저도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 피에타상을 본 적이 있는데,
피에타상을 보면,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살아 생전에 완성한 조각품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씩은 보신 적이 있으실 건데요,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상을 처음 공개했을 때, 정말 많은 비난의 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피에타'라는 제목 이탈리아어로 '깊은 슬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탄'이라는 그런 뜻인데,
그런데 마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아무리 봐도 피에타상에는 전혀 슬픔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 사람들이 혹독하게 이 작품을 보면서 비난했던 말을 보면,
'마리아의 모습이 지나치게 곱다', '마리아가 너무 젊어 보인다'(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렇게 시기와 질투가 많았습니다)
또한, '피에타는 마리아의 모습만 보이지 예수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이건 마리아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요.
여러분도 방금 보았지만, 화면으로 보셔서 일면 수긍이 되실 것입니다.
이 작품이 눈에 보기에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리아의 얼굴만을 직접 봐서는 어떤 비탄과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말들이 미켈란젤로에게 쏟아지자
미켈란젤로가 어렵게 이 비판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이러합니다.
'이 조각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니 감히 인간의 시선으로 판단하지 말아라'
그런데 여러분, 미켈란젤로의 말, '이 조각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니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봐야 된다'라는
이 말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미켈란젤로 시대에는 피에타상을 위에서 아래로 보는 기술이 없어서 몰랐지만,
현대에는 카메라 기술이 발전해서 이 조각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피에타상을 위에서 아래로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도 인간의 시선으로 보지 말라는 미켈란젤로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림을 한 번 보여 주실까요...
위에서 보면, 마리아의 정수리가 보이고, 예수님이 안겨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았을 때 감당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 같은 비참한 예수님의 그 얼굴이 보입니다.
위에서 보면, 마리아의 정수리만 보이고, 안고 있는... (어머니들은 아실 거예요)
아들을 안고 있으면 아이 얼굴만 보이잖아요. 앞에서 보면 아이의 옆 모습만 보이지만,
정면이 아닌, 하늘의 관점... 관람객의 시선이나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셨을 이때 하나님의 비통한 마음, 하나님이 느끼셨을 고통이 여실히 느껴지지요.
그리고 이 조각의 주인공은 마리아라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선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께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아무리 봐도 내 삶에 희망이 있을까 싶고,
또 실패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는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안에 두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시어 내 안에 다시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과 생명이 하나님 눈에는 우리 안에 정확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내 삶에 나타난 시련과 아픔과 반복되는 죄를 두고
절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평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감히 사람의 시선으로 내 인간적인 잣대로 자신의 생명과 삶을 평가하거나 좌절하여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주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1:15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고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아멘!
그럼에도 내 삶이 내 앞날이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붙들 때, 우리는 주님의 손에서 다시 반드시 회복되어 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주님이 참 사랑하는 우리 주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소망을 두며 이 말씀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 삶에서 꼭 기억하십시다.
우리 마음, 주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회복과 은혜로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내는 역사가, 그리고 우리가 피에타상에서 보았듯이
내 인생을 내 주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두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회복하시고 결국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끌어 가시는 "와예히"의 하나님을 기억하시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믿음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우리 삶의 소망이 오직 주님임을 고백하면서
주 은혜임을 이 시간 고백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의 맘 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