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사진첩[2-1] "학교 교정"(1)
2008년 1월19일! 얼마나 설레임으로 기다렸던가! 이 날은 1964년-69년의 추억을 되찾으러 대구에 가는 날이다.
대구에 도착하니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빛 바랜 사진첩[2]를 의식하며, 혹 잊은 기억들을 더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추억의 옥산 학교 교정을 찾았다.
아, 이게 몇 년만인가!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까? 학교 교정에는 옛 기억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후문이 되어버린 학교 정문, 그리고 모래사장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엄청 굵은 플라타너스 나무(그때는 굵기가 10-15센티 정도였는데 지금은 40센티 정도...그래서 그 나무가 그 나무인지 확실치 않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교정에 들어선 건물들, 담장들, 나무들, 운동장에 있는 이상한 그물들....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 밖에 없었다.
'아, 괜히 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무 것도 안보고 학교 교정을 그려내는 건데......그랬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물론 한 가지 얻은 것은 있다. 그것은 세월이 더 지나서 내 기억 속의 학교 교정이 다 사라지기 전에, 빨리 옛날의 학교 교정을 재생시켜서 우리 옥산 친구들에게 선물해야겠다는 절박함이 내 가슴을 밀고 들어 온.... 그것이었다.
이제 우리 함께 그 시절 학교 교정으로 가 보자!
학교 정문! 그 시절 아침마다 등교할 때 만났던 문! 사실은 작은 축에 속하는 보통 철 대문인데, 그 때는 왜 그렇게 크게 보였는지.......아마 우리가 너무 작아서 그랬겠지?
교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고풍 창연한 3층 짜리 본관 건물이 우뚝 솟아있고, 경명여중고 쪽으로의 뒷 공간은 온갖 화초들과 토끼장, 그리고 유리로 된 제법 큰 온실이 있다. 이쪽으로는 적어도 학생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그래서 입구부터 마치 감옥의 철창처럼 안을 드려다 볼 수 있게, 쇠창살이 있는 철문이, 큰 자물통이 잠겨진 채 말없이 있었다(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조금 더 하기로 하고...).
정문에서 오른쪽으로는 게시판 몇 개가 나란히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연못(금붕어 하나 없는 구정물로 채워져 있었지만...)이 있었으며, 연못 중앙에 예술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설픈 조형물 하나.... 석고, 아니 흰 석회로 만든 조형물인데 모양은 종종 바뀌었다. 상식적으로는 어떤 미술 선생님이 이 일을 하셨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허드레 일을 하는 작업 인부 같은 사람이 석회 반죽으로 대강 여기저기 바르면서 조형물을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으로 작은 건물 하나, 마치 수위실처럼 생긴 사각형의 작은 건물인데, 전에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6학년 때 어느 날.... 구내 협동조합을 그 곳에 만들고, 학용품들을 진열해 놓고 학생들에게 구매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상이 시원찮았나보다. 협동조합 담당 선생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니가 어린이 회장이니까 우리 학교 학생들이 우리의 것인 구내 협동조합을 애용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애교심에 마음이 뜨거워져 구내 협동조합의 매상을 올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 동안은 월요일 아침 전교생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서 구내 협동조합을 이용해서 학교를 사랑하자는..........전교생들에게 애교심을 부추겼고, 4, 5, 6학년 회장단을 소집해서 구내 협동조합을 적극 애용하도록 반 학생들을 종용할 것을 촉구했다(요즘 전교어린이 회장은 거의 허수아비 수준이지만, 그 때는 꽤 힘이 있어서 할 만 했다. 고학년 회장단을 소집하면, 80명 이상 모여서 교실이 꽉 찼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나 보다. 담당 선생님께서 날 또 부르셨다. 나는 고민 끝에, 회장단에게 통보했다. 앞으로 교문 밖 문방구에서 물건을 사면 교문에서 압수, 그리고 이름을 적겠다고.....(그때는 이름을 적겠다는 협박이 참 잘 통했다)
그래도 별 효과가 없었다. 아침에 교문에서 대부분 학용품을 가방에 넣어 오기 때문에 얼빵하게 손에 들고 오는 저학년 학생들에게 도화지 몇 장정도 적발하는 것 밖에는......
나는 그때,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선도들을 풀어서 멀리 학교 들어오는 입구인 대구문방구 앞에, 그리고 들어오면서 문방구가 있는 곳마다 완장 찬 선도들을 배치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구내 협동조합의 매상은 급속도로 뛰어 올랐고, 담당 선생님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문방구점 앞에 파견 나간 선도들이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머니에 한 움큼 사탕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일부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기네들이 가졌다. 문방구점 주인들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역시 권력이 있는 곳에는 비리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아침마다의 이런 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문방구점 주인들이 교장선생님께 집단으로 항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구내 협동조합은 문을 닫았고, 아침마다 얻어먹었던 사탕의 즐거움도 같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구내 협동조합이 있던 곳을 지나 조금 위로 올라가면 수돗가가 나온다. '주번'이면 아침, 그리고 점심 때마다 여기에서 큰 주전자에 물을 길어서 교실에 갖다 놓았던 생각들...그리고 체육시간이 끝나면 서로 경쟁하듯 여기로 달려와서 먼저 수도꼭지를 차자하고 머리를 감으며,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셨던 기억들.....
수돗가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벽 쪽으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우중충한, 긴 화장실(가장 규모가 큰, 옥산학교 메인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은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칸막이조차 없는, 남자들 소변보는 곳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여학생용 겸, 성별 불문하고 대변보는 화장실들이 있었다.. 이게 그 당시 학교 화장실의 구조였다. 요즈음 애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 당시 여학생들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남학생들이 수시로 장난을 치며,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요즈음 애들은 상상조차 물론 그때 남학생들은 몰랐겠지만, 여학생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학생들의 그것을.....
그러나 그 때 남학생들은 소변보면서 벽에 뚫려있는 사각형의 조그만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재미와 낭만은 꽤나 괜찮았다.
화장실 뒤쪽은 땅바닥에서 약간 튀어나온, 시멘트로 된 사각 똥통, 그 위에 짙은 적색의 철판으로 된 똥통 뚜껑 몇 개가 덮혀 있었다. 아마 화장실 뒤쪽으로 가 본 친구들은 생각이 날꺼다. 제법 적막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조금은 나쁜 듯한 화장실 뒤쪽의 이 분위기를........
화장실 위쪽 입구로 나오면,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장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는 3, 4학년들이 주로 썼던(1층 일부는 2학년도 썼음) 3층 콩크리트 건물인 신관이 우뚝 서있고 바로 눈 앞에는 야구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백 스크린 철망, 신관 중앙의 현관 바로 앞에는 철판으로 만든 단상 등...(운동장 이야기는 뒤에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자)
화장실 위쪽 출구로 나가면 오른쪽 벽을 따라, 우리 친구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놀았던 여러 가지 놀이 기구들이 길게, 거의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이 평행봉(그러나 위치가 분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음), 그 뒤로 쇠파이프를 여러 개 옆으로 겹쳐 놓아, 마치 사다리처럼 여러 명이 경쟁하며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게 만든 철제 구조물(처음에는 하늘 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으나 금방 다 지워지고 말았다).
그 옆으로 높은 것부터, 중간 것, 낮은 것까지 철봉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철봉대 앞에는 5센티 두께의 시멘트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개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 속에 모래를 채워 놓은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 앞쪽 운동장 쪽으로, 10-15센티 두께의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글 서두에 언급했던 현재 그 곳에 서있는 그 굵은 나무가 바로 이 나무인 것 같다).
이 모래사장은 체육시간 말고는 주로 우리 남학생들이 맞짱을 뜨는 장소로 애용되었다. 이 곳에서 2학년 때 성탁이와 맞짱 뜬 이야기를 "아직 주소지도 찾지 못한 친구들을 그리워하며.......(6-1반)"에서 얘기했지만, 또 하나 잊지 못할 맞짱 사건이 있었다.
6학년 때 어느 토요일 오후, 학교 수업은 다 파하고, 나는 우리 반 여학생들에게 그네를 타게 하고(그 당시 그네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 기구여서 힘있는 남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 나는 주로 우린 반 학생들, 그것도 예쁜 여학생들에게 그네를 탈 수 있도록 다른 애들이 타고 있는 그네를 빼앗는 무력을 행사했다).
나는 교실에서 월요일 아침 자습 문제를 칠판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교실에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나에게 말한다. "누가 그네 뺏고 여자들 때렸어! 여자들 울고 있어!"라고......나는 화가 나서 뛰어 나가며 말했다. "어떤 놈이 감히 우리 반 여학생을......"
그네 쪽으로 달려가니 놀랍게도 중학교 남학생이 떡 버티고 서있었다. 교모도 삐딱하게 쓰고, 좀 불량스럽게.....순간 움찔했지만, 내가 누군가? 한참 주먹에 물이 올라 있었던 때였고, 지금 여자아이들이 내 앞에 여럿 있는데........
나는 자못 태연한 척 대담하게 그 중학생에게 맞짱을 신청했고, 우리는 철봉 앞 모래사장으로 갔다(그때 이미 그 중학생은 나에게 쫄았던 것 같았다).
많은 구경꾼들이 따라왔고, 그에게 맞은 여학생들도 눈물을 훔치면서 날 따라왔다. 난 그때 대중들 앞에서는 제법 강했나 보다(일년 내내 일주일에 한 번씩 조회 시간이면, 높은 단상에 올라가서 전교생 4500명 앞에서 단련되었으니까......).
역시 게임은 싱겁게 끝났다. 나의 일격에 쉽게 그 중학생은 코피를 흘리며 뻗어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옥산 7회 선배였고, 중학교 3학년,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싸울 때 명찰을 봤는데 이름(지금은 존함)이 양두식이었다(혹 양두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7회 졸업앨범을 보면 분명히 그 얼굴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자리를 빌어 그 형님께 사과하고 싶다. "그 때 저 때문에 얼마나 쪽팔렸습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후배에게 맞고, 뻗었으니.........미안합니다. 그 때 맞은 코는 어떠신지요? 혹 이 글을 읽으신다면, 그리고 그때 생각이 나시면, 저에게 꼭 연락 주십시오. 선배님! 정식으로 만나 뵙고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때 선배님께서 잘못하신 것은 사실이니까 그때 일에 대하여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철봉대 앞 모래사장 바로 옆에는 1학년 말고는 누구에게도 별 인기 없는 시이소가 두 개 있었고, 벽 쪽으로 세로로 철봉 기둥을 여럿 세워서 맨손으로 그 철봉을 잡고 끝까지 위로 올라가는....그런 철제 구조물.......
그리고 그 옆으로 세 개의 큰 틀에, 한 틀마다 2개씩 6개의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그네 개수는 약간 기억이 희미함). 이곳에 있는 그네들이야말로 놀 것이 별로 없었던 그 당시의 모든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놀이기구였다.
점심시간만 되면, 그리고 방과 후만 되면, 그네를 서로 타려고 이 곳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는데, 그러나 내가 가면 전쟁은 끝난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무력으로 그네를 장악하던 자들을 진압하고, 줄을 서서 차례로 그네를 탈 수 있게 질서를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반 여학생들이 와서 그네를 원하면, 금방 이곳의 질서 정의는 깨어지고 만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의가 존재하나 보다.
나는 개선장군처럼 자랑스럽게 다른 애들이 타고 있는 그네를 빼앗아 우리 반 여학생들에게 타게 하곤 했었다. 그때 주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우리 반 여학생들을 부러워했다(아마 속으로는 나를 죽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은 아니? 내가 그 때 너희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충성스럽게 서비스를 했는지, 앞에서 언급한 데로 중학생하고도 맞짱을 불사하면서까지 여학생들을 지켜주려고 했었는데....그때 나로 인해 행복하게 그네를 탔던 여학생들이여! 빨리 나타나서, 카페에 등록하고 함께 놀자. 이제는 빼앗아 줄 그네도 없고, 또 설령 그네가 있다고 해도 빼앗아 줄 힘도 없지만, 그래도 너희들을 위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단다. 빨리 나타나라! 알았제~~~~
물론 그 당시 억울하게 그네를 빼앗긴 후배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정말 댓길로 미안하구.........................
그네 위쪽으로 벽을 따라 가면, 본관 옆 화장실보다는 반정도 작은 또 하나의 화장실이 있었다. 이 곳은 주로 1호 교사에서 공부했던 1학년들이 사용했다.
1호 교사! 1층으로 된 목조 건물인 1호 교사가 후문(지금은 정문 쪽) 앞에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옥산초등학교가 칠성초등학교에서 분가해 개교(56년 7월 4일)하면서 최초의 건물이어서 1호 교사라고 이름 붙인 것 같다.
.
.
.
.
.
(계속!!)........................................다음 글: 빛 바랜 사진첩[2-2] "학교 교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