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炫熙 고려대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 문학박사. 한국현대사연구회 회장, 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한국현대사연구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 다수.
한국광복군의 성립과 정규군의 성격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1919~45) 27년사의 정규 무장 직할군대로서 3개 지대 규모와 부속 특수부대로 구성된 오늘날 한국군의 선구적 뿌리였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오전 7시 중국 사천성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김구 주석, 지청천 장군 등과 중국 국민당 군 고위당국자 등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성립 전례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1945년 8·15 이후 귀국할 때까지 5년여 동안 임정 직할단위 전위군대로 광복투쟁에 앞장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희생적 혈전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사실상 광복군이 창립되었으나 굳이 ‘성립’되었다 함은 그 역사적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국군이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서울에서 강제해산당한 뒤 33년만인 이때 광복군으로 재탄생하였기에 ‘창립’이라기보다는 ‘성립’, 즉 구한국군의 맥을 계승 유지한다는 계속성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에서였다. 이 날 임정 국무위원 조경한의 사회로 성립 전례식을 거행한 광복군은 한국군의 선구적 실체이며, 한말 의병과 독립군의 맥을 이은 당당한 정통국군으로서의 이상과 전술전략을 구비하고 실전에 임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된 이래 민주공화국으로서의 3권분립적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국내외 광복투쟁을 통할, 통치해 왔다. 임정을 수립한 이동녕, 이시영은 이회영 등과 함께 일찍이 서간도에 최초의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설치 운영해온 경험을 가진 무장파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10여년간 3500여명의 튼실한 사관을 양성, 뒷날 봉오동·청산리전투에 실전배치하여 성과를 거둔 애국적 맹장이었다. 그 ‘신흥’ 정신을 살려 상해 프랑스 조계 내 인성학교 교실을 빌려 임시 무관학교를 설치, 100여명에 가까운 고급 무관(사관)을 배출, 내외 광복전선에 배치하였다. 이동휘, 노백린 장군은 군무총장으로 이 무관학교의 인재양성정신을 받들어 1920년을 ‘혈전의 해’로 정하고 충용과 철혈(鐵血)로 군인 되기를 맹세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때 임정의 직할국군은 ‘광복군’이라 하여 성립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내부 사정과 중국 손문 총통의 허가가 나오지 않아 보류되었음이 자료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상해시기(1919~32) 14년이 지난 뒤 이동시기(1932~40) 중 중·일전쟁(1937)이 일어나자 이동녕 주석 등은 그 대응책으로 광복군을 성립시킬 구체적인 기반조직과 작전을 짰다. 그러던 중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이 장개석 총통의 승인 후원하에 조선의용대를 무한에서 창립하였다. 이는 민족혁명당의 당대(黨隊) 성격이므로 비록 광복군이 2년 뒤 성립되었다 해도 나라(임정)의 정규군 규모와 수준에 미달되는 군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광복군은 그 모체가 유주(柳州)에서 성립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와 서안(西安)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등이었다. 따라서 그 연륜이나 규모, 초보 때부터 다져진 항전 결의 등 역사적 의미가 정통사적으로 해석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세계적인 작탄투쟁으로 일제 수뇌 10여명을 살상케 한 의거가 성공리에 마무리됨으로써 장개석 총통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점차 광복군 성립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이동녕, 김구 등은 동삼성을 누비던 지청천 등 10여명을 중국 관내로 오게 하여 낙양군관학교, 중앙군관학교 등에 입교하여 기량과 전술전략을 보강케 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지청천, 유동렬, 김학규, 현익철 등 10여명을 군사위원으로 선발, 직할군대 보유 준비를 수행케 하였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서침(西侵)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도 중경으로 이동, 정착하였다. 임정 역시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등으로 옮겼다가 중국을 따라 중경으로 이동했다. 기강에서 이동녕 주석을 사별한 임정의 김구는 중경에서 광복군 성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대 국가과제로 인식하였다. 이동녕 주석의 광복군 성립의 집념 실현은 백범의 뜻과도 일치하였다. 중경으로 이동, 정착하자마자 임정수립 21년만에 광복군을 정규군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이어 김구는 제4차 개헌에 따라 주석으로서 임정을 강력히 이끌었다. 장개석 총통도 “한국의 광복군이 성립된 것은 임시정부가 빼앗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찾기 위한 자력적인 군대양성의 결과로 우리가 적극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임정의 독자적인 정규국군이 곧 한국광복군임을 피력했다. 공산당의 모택동이나 주은래도 우리 광복군이 출범하여 대일전쟁에 앞장선 것을 크게 환영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광복군은 의병 이래 독립군, 구한국군을 이은 한국군의 정통성을 계승 발전해온 국군의 이념과 전술전략을 지향한 독자적인 우리나라 국군의 맥이고, 또한 그렇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좌·우파가 모두 광복군을 항일전투군으로 높이 평가함으로써 정통성이 인정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군의 맥락 우리 국군은 1907년 8월 1일 강제해산된 이래 그 전통을 이은 한국광복군(1940~45)의 5년 역사를 이어 8·15와 동시에 창군 의욕과 국토방위의 필요성에 따라 국방경비대로 창설되었다. 세계가 공인했듯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건국이 된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미군정 3년이 종료되자 통위부의 행정은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남조선 과도정부의 행정이양’에 의거, 동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면서 9월 5일 육해군이라는 정식명칭이 나왔다. 마침내 12월 15일부터 통위부가 국방부로, 경비대가 각기 육군·해군에 정식 편입, 법제화된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된 다음날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국무총리 겸직)은 국방부 훈령 제1호에서 “금일부터 육·해군 각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입되는 명예를 얻었다”라고 정식 선포했다. 광복군의 지대장, 참모장 등을 역임한 청산리대첩의 영웅인 철기 이범석 장군은 임시정부에도 간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와 국군의 정통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울러 한국군은 광복군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계승 유지하고 장교는 정규 사관학교 출신의 품위 있는 건실한 일가견의 중진을 우선적으로 등용한 것임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군(김석원), 만군(이주일), 광복군(김홍일) 출신 등 군 선임자 30여명이 군의 정규코스를 거침으로써 바람직한 리더십이 정립된 것이다. 그 뒤 공군(1949.10.1), 해병대(1949.4.15)도 각기 창설되어 명실상부한 육·해·공·해병대가 한국군으로 광복군의 영예로운 정통적 독립정신에 따라 국가보위와 국민보호의 전위부대로 ‘충성’의 우렁찬 구호가 전국에 메아리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군의 맥이 광복군이었음을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1980년대 박희도 육참총장에 의해서였다. 이에 생존해 있던 광복군 출신 원로들이 육군본부에 초대되어 노·장층 간 감격과 눈물의 상봉을 하는 엄숙한 전례식이 이어졌던 것이다. 광복군 5년 역사는 형극의 가시밭길 같았다. 중국 국민당군이 광복군을 승인해 주면서 발목을 잡는 9개 조항에 걸친 쇠사슬이 있었다. 임정의 군무부장(국방장관) 조성환은 9개항의 행동준승에 관해 벌컥 역정을 내면서 “기분 나쁘다. 5000년 역사 민족으로서 자존심의 심각한 훼손을 가져오는 것이니 장 총통에게 국군통수권을 달라고 소리칩시다. 안 들어주면 광복군을 해체합시다”라고 자폭론이란 초강경수를 보였던 일화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 고위직에 임명된 민족지사는 20여명에 달한다. 이범석 외에 국방차관 최용덕이 임명되었다. 광복군 출신의 중진으로 김홍일, 박시창, 장흥, 김관오, 유해준, 이준식, 안춘생, 채원개, 권준, 오광선, 김학규, 박영준, 김국주, 장호강, 전성호, 민영구, 김용관, 김영일, 정희석, 박영섭, 노태준, 한철, 고시복, 김동수, 박기성, 이종국 등 다수가 국군에 입대하여 군의 요직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외 위·영관급 장교는 장철부 중령 등 200여명에 달한다. 이같은 인맥의 전통과 함께 국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신봉하는 홍익인간의 이화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울러 전술전략이 광복군 때의 OSS 전술이나 유일한 등의 냅코(NAPKO) 작전 등과 연계하여 일제하 국토수복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광복군의 인맥, 사상, 전략전술이 8·15 이후 한국군으로 계승 유지되는 창군 맥락의 정통성을 보여준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임시정부(1919.4.13)에 있고, 한국군의 정통성은 광복군(1940.9.17)에 있음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국군의 날과 9월 17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선 155마일에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의 기습 불법적인 남침으로 인해 38선 이남이 거의 그들에게 강점당하였다.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비극이 넘쳐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방 16개국이 격분, 군대 파견과 군수물자 보급 등으로 침략자를 응징하고 위무하는 지원이 이뤄졌다.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반전의 계기로 삼아 유엔군의 지원으로 침략군을 격퇴 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둬 남침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한 이때가 10월 1일이었다. 즉, 38선을 넘는 감격이 53년 전 10월 1일이었기에 우리는 너무나 눈물겹도록 감격 흥분 환희 승리에 도취되어 이 날을 영원히 기념하자면서 국군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 감격이나 환희의 승리를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역사와 문화가 있다. 또한 의식과 문명화를 기리는 문화지향적 민족임이 역사에 의해 웅변되고 있다. 한국군의 뿌리와 그 실체가 광복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마당에 그 역사적 의미를 국가행사로 승화시키는 것은 민족 의식을 선양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국 사학계의 여러 학자들도 10월 1일보다는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이 성립된 9월 17일이 가장 합리적인 기념일이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 어떤 이는 국군의 날을 한국군이 갑자기 강제해산된 8월 1일(1907)로 하자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8월 1일이 광복군 창설과도 같은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8월 1일의 의미는 광복군이 성립된 9월 17일의 의미와 같은 개념이되, 성립된 날 자체는 아니다. 광복군은 조선의용대를 합편하여 좌·우익의 전통을 하나의 독립된 국군, 명실상부한 군대로 조직 확대한 것이므로 그 정통성이 온존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군이 대일 선전포고와 대독 선전포고를 과감히 선언하는 등 임시정부의 직할군부로서의 위상과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돼야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광복군을 찾아 장정(長征)했던 김준엽은 “우리의 유서 깊은 광복군이 성립된 9월 17일이 곧 대한민국 국군의 최대 경사로서 정통성이 있다”고 절규하였고, 장준하도 《돌베개》에서 “광복군의 귀국이 비록 개인 자격이라 해서 제약을 받았으나 임시정부가 나라의 법통성이 되어야 할 지금 국군의 맥은 곧 우리가 가담 활동했던 광복군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였다. 명시하진 않았으나, 국군의 날 기념은 광복군의 성립일자로 기준 삼아야 된다는 논리로 인식해도 좋을 것이다. 유해준 장군은 생존시 필자와의 대담 중 “광복군이 큰 실적은 없었으나 중국 국민당군이 우리 임정을 지원하고 외교적으로 응원해준 것은 광복군의 젊은 병사들의 나라사랑의 가련한 정성, 집념, 혈전의 이념과 자세 때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광복군은 3개 지대가 중심이었고, 정규편제 외에도 9전구, 10전구, 3전구, 토교대(土橋隊), 비호대, 특공대가 있었다. 특공대 청년들의 항일전투는 다른 경우와 특이하게 실전에 파고들어 일본군 진지 파괴, 사살, 납치, 응징 등 과감한 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광활한 중국대륙이 무대였던 중·일전쟁 중 한국인 청년들이 광복군으로 현지 입대한 경우가 많았다. 광복군의 김경화는 관내 각처를 다니면서 현지에서 한국청년을 입대시킨 광복군 대위였다. 오래 전 나에게 보내준 그의 친필 현지 입대 성원명단에는 국내외에서 몰려온 200여명에 가까운 광복군 지원자의 신원을 다 적어 그 내용이 밝혀지고 있다. 광복 직후에는 박정희 등도 광복군에 편입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 등 항일전선에는 뜻있는 한국 청년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군 5년의 역사는 매우 짧지만 막강 한국군의 맥을 이은 한국광복군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평가할 때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라, 국군의 날로 기념하는 거국적 행사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나 군사학적으로나 국제관계 등을 고려하건대, 남북 화해·협력시대를 열 매우 미래지향적인 기념일로 적합하다고 그간 광복군의 애국활동을 고증 고찰하면서 이상과 같이 평가할 수 있겠다.
첫댓글광복군 5년 역사는 형극의 가시밭길 같았다는 문장이 있는데 그이후는 더 했죠.국군의 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라는 말이 정말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공감할수 없는 대목이군요.개인적으로 그분이 쓴 책을 읽어보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거랑 차이가 느껴집니다~!!윗글에선 특히 이범석 장군이나 요직 20명.위.영관급 200명의 인맥 정통성..국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신봉하는 홍익인간의 이화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성이란 대목이 참 거슬리는 군요..이런식이라면 일군..만군출신의 요직을 거친자와 엄청난 인맥은 어떻게 설명하려는 건지...참담한 현실을 억지로 갖다부쳐 정통성으로 포장한 글같아요
해병대 는 간도특설단 단원 들이 만든 군대입니다(참고로 저도 해병출신입니다) 말그대로 독립군,조선혁명군,조선 의용군,광복군 출신 중엔 별단 사람 없읍니다 단 일제가 패망후 급조 된 광복군 출신 만있을뿐^^개중엔 박정희 광복군 에 들어 갈려구 했는데 정보부 출신이라 받아주지 않음 ^^
첫댓글 광복군 5년 역사는 형극의 가시밭길 같았다는 문장이 있는데 그이후는 더 했죠.국군의 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라는 말이 정말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공감할수 없는 대목이군요.개인적으로 그분이 쓴 책을 읽어보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거랑 차이가 느껴집니다~!!윗글에선 특히 이범석 장군이나 요직 20명.위.영관급 200명의 인맥 정통성..국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를 신봉하는 홍익인간의 이화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성이란 대목이 참 거슬리는 군요..이런식이라면 일군..만군출신의 요직을 거친자와 엄청난 인맥은 어떻게 설명하려는 건지...참담한 현실을 억지로 갖다부쳐 정통성으로 포장한 글같아요
해병대 는 간도특설단 단원 들이 만든 군대입니다(참고로 저도 해병출신입니다) 말그대로 독립군,조선혁명군,조선 의용군,광복군 출신 중엔 별단 사람 없읍니다 단 일제가 패망후 급조 된 광복군 출신 만있을뿐^^개중엔 박정희 광복군 에 들어 갈려구 했는데 정보부 출신이라 받아주지 않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