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5.29일 이 병태 카이스트 교수가 올린 글입니다. 미국의 안보 동맹으로 북핵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우리 나라가 최고의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를 심도깊게 정말 잘 짚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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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포비아’ ‘중국 혐오’를 부추기는 글들에 대해 비판하면 내게 ‘친중’ 딱지를 붙이는 국수주의자들이 종종 있다.
나는 지식인이라면 눈앞에 보이는 잠시의 현상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안을 제대로 보려면 시간적 공간적으로 시야를 넓혀서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서구가 생각했던 민주화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권위적인 시진핑 정부는 지금껏 중국이 이뤄온 진전에서 반동적 행태를 보이고 있고, 중국은 강대국이고 그 힘을 과시하려고 할 때 인근에 있는 이웃 나라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미일 동맹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미중 갈등이 정말 중국 탓만이고 미국은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자유 수호의 의지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지금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자국의 국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성격 또한 배제하기 힘들다.
그래서 민주당, 공화당 모두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선거 때마다 흔들리는 주(州)들의 민심을 대변한다. 그 흔들리는 결정적인 주들이 소위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미국 동북부의 과거 제조업 중심 주들이다. 대학을 못 나온 백인 남성들이 희망을 잃고 진통제와 마약,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을 하는, 그래서 미국의 평균 수명이 줄어드는 결과를 만드는 주들이다.
트럼프가 이겼던 이유도 이들 주가 간발로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에 넘어갔기 때문이고, 바이든이 이긴 이유도 이들 주가 트럼프 지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공장이 없어지고 일자리가 없어진 이유가 중국이다.
미국이 ‘자유의 수호자’로서 중국에 대항한 가치 질서를 만드는 것이라면, 동맹국들에게 새로운 질서가 자유진영 공동 번영의 질서라는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이 2차 대전 이후의 소련에 대항하는 자유동맹의 질서를 만들 때 미국이 했던 일이다. 자유교역과 항해의 자유를 보장하고 당시 유일한 큰 시장인 미국 시장을 동맹들에게 개방하고, 동맹들의 안보 비용을 대신 짊어지고, 동맹들의 통화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금융 질서를 만들었다.
지금 미국이 하는 짓은 그것과 너무 다르다. 중국 때리기를 하면서 한국에 지을 공장을 미국에 지으라는 것이고 우리 기업의 이해가 침해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동 번영의 비젼은 없고 ‘Buy America, America First’가 난무한다.
반도체도, 2차전지도, 한국산 전기자동차로, 철강도 미국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고 이익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이 국수주의. 중화주의의 강화로 우리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려고 할 것인가가 반중 논리의 핵심이다. 나는 중국에 대한 보수권의 단순 논리에 많은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공산 국가’라는 인식이다. 중국은 구(舊)소련이 아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즉 경제의 국유화를 포기한 국가다. 권위적인 일당 독재국가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도 믿지 않는 공산주의를 수출하겠다는 나라가 아니다. 그들은 자국민의 민도를 믿지 않는 독재국가는 틀림없지만 과거 소련처럼 전세계 공산화를 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중국에 일당독재 권위주의, 중화주의의 국수주의를 믿는 얼간이들은 많아도 공산주의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적다고 확신한다.
나는 중국이 민주화되지 않았고 독재 국가라서 경제교류를 거부하고 우리가 '반중 혐오'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다 잊은 역사의 망각증세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산업화할 때 민주 국가이고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였는가? 지금의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라였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독재였고, 자유는 질식되었고, 인권은 유린되었다. 사실상 야당이 의미없는 일당독재였고(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의원들), 민도를 못 믿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했던 나라다. ‘중국식 사회주의’와 본질적으로 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싱가포르의 과거도 지금의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 한국이 독재라서 해외에서 물건을 안 사주었나?
칼 마르크스는 산업화 초기의 일시적 부작용,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지독히도 집중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고 경제학자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사회 경제적인 문제에 진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업혁명의 역사적 중요성도, 시장경제와 인류의 적응력을 예측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이런 과거 천재적 지식인들의 실패를 내가 거론하는 이유는 우리는 지금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 때문이다.
지금 중국의 공격적인 모습이 위험해 보이지만, 역사는 국민이 교육받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민주주의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안이 칼 막스가 보았던 그 자본주의의 결정적 결함처럼 역사적 통찰력에 잃은 근시안적이고 시류에 매몰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도, 대만도, 일본도 싱가포르도 그렇게 변화해 왔다. 경제적 풍요는 인간에게 존엄과 품위를 추구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순간적인 반동은 가능해도 이런 인간의 본성은 같은 것이다. 중국의 못 배운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지는 때에 그 역사 운명의 길이 중국만 빗겨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가 공개적으로 ‘반중 혐오’를 표출할 때 중국의 ‘반한 혐오’를 부르는 악순환으로 간다는 점이다. 중국 집권자들과 소수의 중화주의 국수주의자들과 한국을 좋게 보고 한국 화장품을 선망하고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대중을 우리는 분리해야 한다.
내가 만나 본 중국 지식인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우호적이다. 일본을 대하는 태도와도 사뭇 다르다. 그래서 전자를 소수로 하고 후자를 우리 편으로 해야 우리가 경제적 피해를 줄이고 ‘용중(用中)’의 지혜를 지켜가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가 반중을 노골화하면 중국의 자존심은 한국을 혐오하고 적대시하여 13억 인구를 우리의 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민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든 일본 사람들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든 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미국도 호주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친일’ ‘친중’의 딱지를 붙일 때는 한번쯤 뇌세포를 작동시켜보시라. 한국인 중에 한국의 국익을 희생하고 일본의 이익을, 중국의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제정신 갖고 있는 인간이 존재할까. 그걸 말하는 귀하가 생각 없이 멍청한 것이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