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축복(엡1장 3-14)
성경본문|에베소서 1: 3~ 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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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령 입춘이 되면 대문에 입춘대길이라는 글로 써 붙이기고 하고 시시대문 만복래라. 문을 열 때마다 만복이 들어오라는 글을 써 붙이기도 합니다.
새해를 맞을 때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좋은 인사를 서로 주고 받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무던히 복받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의미로서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복 받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다가도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합니다. 축원합니다 하면 하늘이 떠나갈 듯 아멘 하고 응답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믿는 사람이 말한 복은 그 개념에 있어서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래 살면 수의 복을 누렸다 그러고, 돈 많이 벌면 부의 복을 누렸다 그러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귀에 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의 복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산상복음을 주실 때에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육신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애통하고 슬퍼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다.
이런 말들로 했는데 요사이 믿는 사람 가운데도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그리스도인의 목을 혼동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1장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가운데 특별히 죄 사함 받게 되는 축복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여러 가지 시령한 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죄 사함 받는 축복입니다.
죄 사함 받는 축복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정경을 볼 것이면 모두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환란의 짐, 번민의 짐, 고 통의 짐, 빈곤의 짐, 실패의 짐, 고독의 짐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지친 몸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무거운 짐이 무슨 짐인 줄 압니까?
죄의 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치고 이 죄의 짐을 지지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여러 가지 신령한 축복을 많이 받지만 제일 먼저 받는 축복은 죄 사함 받는 축복입니다.
요한 번연이 쓴 <필 그림스프로 그래스>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혹은 옛날은 <천로역정>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고 요즘은 하늘에 가는 길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는데 거기 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등지고 천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을 등지고 떠나기는 했지만 그 등에는 아주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갑니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 와서 저 멀리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자기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등에 지고 있던 그 무거운 짐이 땅에 떨어져서 굴러져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홀가분한지 그 기분은 무엇으로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악 벗은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하는 찬송가 가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기쁘고 복된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이 진 빚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언제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빚을 갚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합니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세가지 방면에 축복이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우리가 바른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죄를 범하게 되면 한 마디로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 위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어디를 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139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했습니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꼭 받고야 맙니다.
당장 받지 아니하면 나중에 받게 됩니다.
청년 때 받지 아니하면 노년 때에 받게 됩니다.
그 당대에 받지 아니하면 그 후대에 가서 받게 됩니다.
죄의 값은 절대로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제 죄가 너를 찾아 만나리라”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한 후에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무서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숨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는 일입니다.
숨는다고 숨어집니까.
죄의 값은 분명히 사망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 담과 하와를 만나서 가죽옷을 해 입혔습니다.
나무 뒤에 숨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앞을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야 했고 짐승을 잡으니까 피를 흘렸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려면 대신이라도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렸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뱃속에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긍휼과 자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범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었지마는 죄 사함을 받게 되면 그 담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다 아뢸 수가 있습니다.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찬송가189장 뜻을 생각하시면서 함께 부르십시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 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원수가 된 것을 화목하게 합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우리가 죄 안에 있을 때에는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가책을 주고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없고 잠도 편안히 잘 수가 없습니다.
전에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마음에 죄를 토설치 아니할 때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바삭바삭 타버렸다”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맥베드 라는 것을 읽어 보면 맥베드 장군이 그의 정적 라이벌인 맹커우 장군을 그의 연회에 초대하여 거기로 오는 도중에 오경을 시켜 그를 암살했습니다.
정적을 없애 버리고 스코틀랜드의 왕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고관 대작들과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맥베드는 축하를 받습니다.
그러나 맥베드에게는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기가 앉아야 할 왕좌를 보니까 자기가 암살을 한 정적 뱅커우 장군의 선혈이 낭자해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습니다.
죄 범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죄가 우리를 찾아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게 되면 양심의 고통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 속에는 참 평화가 임하게 되고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아마 이런 얘기를 여러분 다 들었을 줄로 압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언니의 이름은 메어리이고 남동생의 이름은 존이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할머니한테서 주 말에 존과 메어리에게 한번 놀러오라고 편지가 왔습니다.
아이들은 흥분해서 하룻밤 뜬 눈으로 새다시피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떠나서 할머니 농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점심을 대접 받고 존은 삼촌한테서 선물로 받았던 고무총이 있는데 이것을 써 먹을 기회가 없었다가 고무총을 쓰기 위해서 조그만 돌을 한 주머니 가득 넣고 여기저기 가면서 고무총을 연습했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도 쏘아보고 전선 끝에 앉아 있는 새도 쏘아보기도 했지만은 오전 내내 한 마리도 쏘아보았지만은 한 마리도 새를 잡지 못했습니다.
맥이 빠져서 돌아오다가 할머니 뜰에 오리 새끼 한 마리가 있는데 이것은 할머니가 애지중지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뒤뚱뒤뚱 하면서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내가 저 머리를 맞춰 보리라 하고 오리 머리에다 겨누고 고무총을 쏘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내내 안 맞던 고무총이 그 오리 머리에 딱 맞아 가지고 그 자리에서 픽하고 쓰러져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맞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할머니의 사랑하는 오리를 죽여 놓았으니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방을 둘러보니 불행중 다행으로 한 사람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오리를 부둥켜안고 저 큰 나무 밑에 가서 땅을 파고 그 죽은 오리를 파묻은 다음에 흙으로 덮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무 떨어진 잎을 자연스럽게 덮어 놓고 한번 다시 둘러보았는데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오리 생각만 하면 겁이 나고 할머니 만나기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준비를 다 해 놓은 자리에 앉아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입맛이 딱 떨어졌 습니다. 밥맛이 없고 할머니 보기가 무섭고 눈길이 맞을까봐 다른 데만 살살 봅니다.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저, 너 아까 낮에는 점심을 잘 먹더니 어찌 저녁에는 밥맛 이 없냐. 어디 아픈 데는 없냐 걱정합니다.
아, 난 아픈 데도 없고 밥 많이 먹었어요, 우물우물 대답을 했습니다.
저녁이 다 끝난 후에 누나가 존을 부릅니다.
존! 왜 누나하고 설거지를 좀 할까?
설거지야 여자가 하는 거지 남자가 하는 건가,
그 때 누나가 와서 존에게 귓속으로 말합니다.
너, 아까 할머니 오리 죽인거 어떻게 했지?
만일에 너 설거지 안하면 할머니에게 일러댈거야.
이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겁이 나서 구질구질한 거 돌아가면서 다 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밤에 잠자리에 잘려고 누웠는데 눈만 감으면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이놈 너 내 오리 죽였지 하고 욕을 하는 것 같지요.
또 나무 밑에 숨겨 놓은 죽은 오리가 살아나는 거 같지요 도무지 싱숭생숭해서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밤새 그러다가 새벽녘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에이 할 수 없지.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두렵게 사는 것보다 내가 사실을 직고해서 할머니한테 말씀을 다 드려 가지고 용서를 받든지 매를 맞든지 내쫓기든지 형편 댈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하고 2층에 할머니 침실이 있는데 2층 계단을 올라가 할머니 방에 노크를 했더니 할머니는 벌써 새벽 일찍 일어나 가지고 침대를 기대고 기도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할머니 하고 불렀더니 어서 들어오너라 그래서 애가 들어가 할머니 보니까 눈물이 앞서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할머니 하고 울고 할머니 하고 계속 웁니다.
할머니는 너 무슨 얘기든지 나한테 다 해라.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하나도 탓하지 않을 테다 해라.
그래서 존이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다 얘기 했습니다.
할머니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할머니 처분만 기다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할머니가 손자인 존을 꼭 껴안으면서 존, 아무 염려마라. 난 네가 이렇게 찾아와서 말하니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사실 어제 오후에 내가 2층 문들을 다 열고 내 방 청소를 하다가 네가 들어오다가 내 오리 쏴 죽이는거 다 봤어. 나무밑에 숨기는 것도 다 봤어. 그리고 너 저녁을 못 먹는 것도 왜 못 먹는지 다 짐작했어. 누나한테 쩔쩔매면서 설거지 하는 것도 사정을 내가 다 알았어.
그래서 오늘아침 내가 일찍 일어나서 우리 존 회개하고 돌아와서 착한 아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이야. 네가 돌아왔으니 되었어.
너 이제 아무 염려마 내가 다 용서했어.
할머니 정말이에요. 용서하는 거예요.
아무렴 내가 약속하마. 맘을 놓아라. 편안히 살아라.
이때 존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할머니 대하기가 그렇게 좋았고 누나가 조금도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누나가 또 부릅니다. 존
왜! 설거지 좀 할까? 못해!
또 와서 귓속으로 말합니다. 너 안하게 되면 할머니한테 오리 죽은 거 일러 바칠거야. 마음대로 해. 죄용서 받으니까 그렇게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공부 많이 한 사람 가운데도 죄의 종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높은 지위를 차지한 분 가운데 죄의 종이 되 어 줄줄 끌려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돈 많은 사람 가운데도 죄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여러분 우리가 모두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아직도 죄의 사슬에 매어 죄의 종노릇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온전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마음의 평화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죄 용서함을 받으면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한다” 고 말씀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장래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때는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왜요?
죄인이 갈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낙망 뿐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장래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에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천국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지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생이라고 로마서6장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오늘 주신 말씀가운데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가 누구의 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하여 주신 객관적인 조건이 됩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도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 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피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시대를 보아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날 때 문설주에 양의 피가 있는 집은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가게 되고 장자를 잃어버리는 재앙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들을 보아도 사람이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을 희생의 제물로 드려서 그
피로 속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서 죽으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 을 수 있는 길을 우리 앞에 환하게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그저 죄를 다 용서해 주면 그만이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 게 할 필요가 뭐 있나 라는 생각을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잘 못된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형벌 없이 하신다고 할 것이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인데 죄를 범하는 사람은 벌하시겠다 하셨는데 그 말씀을 취소하고 그대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하 나님께서 죄를 사하는 것이 없이 그저 용서해 주신다고 할 것이면 이 우주에는 공의가 없어집니다.
이 우주는 상선벌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신다고 할 것이면 이 우주는 도덕적으로 혼란해질 것이고 무정부상 태가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생각은 우리 인간의 양심도 허락하질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너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양심이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를 형벌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시고 또한 독생자를 주시므로 그 독생자가 만민의 죄를 대신해서 받으셔서 은혜의 길을 여시고 공의가 이 우주에 화합하는 동시에 죄인이 죄 사함 받을 길을 열어 놓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도요 죄 사함을 받는 원리가 된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 길은 물론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이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 자체가 은혜요 예수님께서 우리들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부터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 길에 들어와서 순복하게 되기만 하면 이 가장 큰 축복을 누구든지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조건이 꼭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 죄 사함받는 객관적인 조건이라고 할 것이면 또한 우리 죄 사함 받는 주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회개와 신앙은 죄 사함 받는 주관적인 조건입니다.
아무리 대속의 사실 이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이 사실을 믿지 아니하면 죄 사함 받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무슨 말입니까.
성경 말씀대로 대답하면 이사야서 55장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고 했습니다.
한편은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 돌아오는 생각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기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그 전에 걷던 잘못된 길을 버리고 방 향을 온전히 돌이켜서 주님께 돌아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대속하신 구주로 온전히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믿는 그 순간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이것이 유일한 죄사함 받는 길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에 분명히 가르치는 죄 사함 받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통해 보게 되면 종종 딴 생각들이 들어와서 이 진리를 흐리게 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
다.
가령,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선을 행해야 죄 사함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선을 행해야 죄사함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이 나시고 예수님이 자라나신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은 죄를 사해 준다고 하는 예도 있었습니다.
또는 성당을 짓는데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죄를 사해 주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옛날 중세시대 같은 때 보면 십자군에 종사하는 청년에게는 그가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다 사해준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돈을 내고 속죄표를 사게 되면 속죄표 산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 먼저 갔던 그 심령들이 죄 용서함 받고 천당에 다 간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못된 이들은 성경에 어긋난 것이요 잘못된 생각이요 풍습입니다.
여러분 죄 사함 받는 길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받고 회개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온전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기쁨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뜻깊은 사순절 기간에 우리 가운데 회개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온전히 이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아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의 가장 큰 축복 을 다 받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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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