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우리 시를 둘러싼 논쟁과 불협화음
― 하상일 (문학평론가, 동의대 교수)
1. ‘미래파’ 논쟁이 남긴 것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전통 서정의 관습을 송두리째 허무는 새로운 시와 시인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했다. 이들의 시는 ‘환상성’, ‘시적인 것’, ‘외계어’, ‘다른 서정’, ‘서정 바깥의 서정’ 등으로 명명되었고, 한 젊은 비평가에 의해 ‘미래파’라는 매혹적인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화려한 날개를 달았다.
자아 혹은 주체의 절대화로 귀착되어 온 서정의 권위는 미학적 진보, 정치성의 감각으로 유포되는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의 출현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전위의 미학은 표면적으로는 서정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 아닌 성찰과 갱신의 징후라고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낡고 오래된 서정을 초점화한 극단적 부정의 양상을 전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미래파’ 논쟁의 핵심에는 서정의 개념과 위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라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진영론의 성격을 강하게 띤 탓인지 비판의 대상이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생산적인 논쟁이 되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서정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재인식은 서정 내부의 자기성찰적 문제이기도 한데, 마치 서정 내부에는 오로지 동일성의 아집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왜곡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미래파는 서정의 보수성을 넘어서는 진보적 미학의 가능성을 열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권위를 형성하는 모순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몇몇 시인의 시적 경향에 대한 소박한 명명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명명의 매혹에 빠져 점점 집단화되는 경향이 뚜렷했고, 급기야는 우리 시단의 가장 의미 있고 시의적절한 트랜드로 급부상하는 문화적 양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미래파’ 논쟁이 남긴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칫 우리 젊은 시단이 미래파냐 아니냐의 이분법적 구도로 재단되어 버릴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원화된 인식과 평가는 사실상 어느 쪽으로도 귀착되지 않는 수많은 시인들에 대한 평가를 삭제해버리거나 유보시키는 권력화된 언술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또한 두 개의 경향으로 획일화될 수 없는 다양한 우리 시의 지형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평가하는 비평의 다양성을 실종시켜 버리고 말았다.
즉 2000년대 이후 우리 비평은 ‘미래파’라는 과도한 수사 앞에서 우왕좌왕하기에 급급했을 뿐, 미래파로 불리지 않는 여러 시인들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이 많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가령 소위 미래파라는 명명 이전부터 시의 언어와 서정의 권위를 넘어서는 시세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온 김참, 조연호 등의 시는 2000년대에 등단한 시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뒤편에 가려져 있었고,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 김선우 등의 서정적 세계인식이 미래파의 권위에 맞서는 서정적 진실로 호명되기는 했지만, 이영광, 최금진 등을 비롯하여 서정의 새로운 깊이를 열어가는 시인들에 대한 평가가 다소 주변부적이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우리를 슬프게 했던 여러 정치적 사건들을 직시하면서도 정작 민족, 분단, 노동의 문제를 다룬 정치시에 대해서는 재현적 진실의 유효성이 상실했다는 논리를 앞세워 시단의 중심으로부터 소외시켰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미래파’ 논쟁은 2000년 이후 우리 시단에 서정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탐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지금 우리 시대에 도대체 서정이란 무엇인가 혹은 서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지만, ‘미래파’의 지나친 관심과 확대 속에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시의 다양성을 너무 많이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를 미래파냐 아니냐 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우리 시를 둘러싼 논쟁과 불협화음은 이와 같은 경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질병은 특정 에콜로 제도화되는 우리 시단의 권력화된 시선을 답습하려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미래파’ 논쟁을 단순히 미학적 차이의 문제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서정과 다른 서정
지난 1990년대에도 우리 시단은 서정의 위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논란이 거듭되었다. 견고한 모든 것이 소위 ‘문화’로 수렴되어 버렸던 해체와 전복의 탈중심주의는 ‘다시 서정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주의의 확산은 전통서정의 주체중심적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타자성을 주목함으로써 서정의 현실적 의미와 위상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로 나아갔다.
1990년대 중반 ‘서정성의 회복’, ‘신서정’ 등으로 명명된 담론 지형과 생태적 사유나 정신주의에 바탕을 둔 시작 활동이 두드러진 이유도 서정의 본질에 대한 심층적인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90년대의 서정 논의는 서정의 본질에 대한 탐색과 서정의 현실적 자리매김에 대한 의미화의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효한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단은 다시 ‘서정시를 읽고 쓰기 어려운 시대’와 맞닥뜨렸다. 주체의 과잉에 포섭된 전통서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서정시의 위상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의해 '다른 서정‘, ’서정 바깥의 서정‘ 등이 쟁점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작 활동에서 기존 서정시의 위상이 절대적으로 위축됨에 따라 사실상 서정시의 흔적만이 간신히 서정시의 자리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서정시에 ’기원‘ 같은 것은 없다”(이장욱)고 말함으로써, ’다른 서정‘은 기존 서정과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생성된 것임을 강조한다. ’다른‘ 혹은 ’바깥‘의 사유는 결국 서정의 전통에 대한 전면부정과 서정의 재영토화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위치해 있음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들을 향해 ’반서정‘ 혹은 ’탈서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다른‘과 ’반‘ 혹은 ’탈‘의 차이를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 것일까?
문제는 ‘진부한 서정’에 있는 것이지 ‘서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내면화나 선(禪)적 포즈와 같은 관습적 사유에 매몰된 나머지 동일성에 대한 강박과 초월적인 미학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획일화된 시적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서정시가 거의 같은 주제와 제재를 반복하여 재생산함으로써 현재를 의미화하는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도 역사적 문제의식도 담아내지 못하여 전혀 시적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초점화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의 친숙함을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모순된 방법적 탐구가 치열한 자의식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긴장시키지 못한다면 서정시의 질적 깊이를 획득하기 어려울 것”(엄경희)이라는 지적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문제인식이다. 앞으로 서정시는 새로운 시학적 전통과 유산을 재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그것을 부정하거나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많은 시들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전통을 부정하고 기존 형식을 부정하는 등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동안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새로움의 폐허 상태에 도달하게 된 것”(구모룡)처럼, 기존 서정에 대한 비판이 ‘다른 서정’이라는 부정의 양식을 절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전통시학의 완고함에 갇혀 자연을 인간화하는 데 급급한 인공서정의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한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 시단은 서정을 전면적으로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다른 서정’과 ‘진부한 서정’의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을 통해 서정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유효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소통과 불화
최근 우리 사회는 ‘소통’이라는 화두를 주목하고 있다. 그만큼 지금 우리의 현실이 소통의 부재 혹은 단절로 인한 심각한 갈등에 직면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소통’을 화두로 내세우면서도,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 안에서 소통의 의미를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명명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의 의미 안에 내재된 사회성 혹은 정치성의 의미를 간과한 채 특정 언어공동체의 해석적 차원 안에서만 의미 부여를 하는 태도이다. 특정한 집단 안에서만 유포되고 통용되는, 그래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만 과도하게 의미부여 받은 것을 두고 세상과 진정으로 소통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적어도 그 집단 안에서는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내부적 소통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소통을 주목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다양한 공동체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모색하는 외부적 소통의 가능성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특정 집단 안의 원활한 소통이 또 다른 다수 집단과 지독한 소통 부재를 야기한다면 진정으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 집단화의 과정마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거나 소수집단의 창조성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면, 결국 소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제도와 언어의 규칙을 생성해냄으로써 오히려 집단 간의 ‘불화’를 조장하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의 쟁점인 소통의 문제를 단순히 ‘나와 너’의 관계 안으로 축소해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 혹은 ‘나와 사회’의 장으로 의미를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소통의 문제제기는 개인적 소통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소통이라는 관계적이고 실천적인 사유로 더욱 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통을 둘러싼 오해와 잡음이 가장 많은 분야 중의 한 군데가 바로 우리 시단이었다. 특히 미래파로 명명된 젊은 시인들의 시적 혁신은 소통의 문제를 쟁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미래파적 경향의 변화와 혁신은 상당히 문제적이고 시의적절한 측면이 있지만, 독자와의 관계 나아가 현실과의 교섭을 외면한 채 시인의 자의식 확장으로만 전개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환상과 엽기, 그로테스크한 요설과 고정된 시형식의 해체와 같은 새로움(?)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창조적 의미를 생성해내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자기표현의 확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문학으로써 가능한 소통의 공동체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될 것”(박수연)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시가 전위성을 띄지마는 결국 삶에 대한 해석이 갱신의 삶을 위한 차원에서 자기 미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지 삶 자체를 방기해버리기 위해서 추구하는 전위성은, 사이비 내지 속류 전위성”(고명철)이라는 비판이나, “삶의 확충에 기여하는 시가”가 좋은 시라는 견해(이숭원), “‘살이’에 바탕을 둔 시공간적 특수성”을 강조한 견해(이경수), “새로운 삶의 생성에 기여하는 것은 삶의 가장 구체적인 양태”(박수연)라는 주장은 모두 소통 부재의 시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시의 대부분은 ‘시인-시-독자’의 기본적 소통구조를 무시한 채 ‘시인-시’의 관계 안에서 자족하며 소통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의 시 혹은 시인들이 점점 복수화되고 독자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자기표현의 확장을 무분별하게 복제(이숭원)함으로써, 개인적이고 자폐적인 언어의 요설이 시 혹은 시적인 것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시의 언어 역시 언어공동체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그 결과 언어의 고립화를 초래하고 언어의 비민주성은 더욱 노골화되고 만다.
특정한 언어체계와 구조를 습득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창작하고, 이들 언어집단 안에서만 소통되는 시를 쓰면 족하다는 식으로 사고한다면, 결국에는 언어공동체의 파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시는 사회적 공공성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개인의 전유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주체중심적 시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주체, 즉 ‘나’의 의미 전유라는 독재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망각한 채, ‘타자를 향해 열린 나’가 아니라 ‘나 자신에 고립된 나’로 결박된 우리 시의 현재는 또 다른 언어적 독재로 귀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재현과 감각
시를 현실과 인생의 재현(모방, 반영)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이다. 이는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작품이 재현하거나 재현해야 하는 대상들의 ‘재현적 진실’이 시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재현적 진실’은 일상의 세부적 진실을 리얼하게 담아내는 ‘일상적 진실’과 삶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당위적(이상적) 진실’로 구분되는데, ‘당위적 진실’의 경우 단순한 모방의 차원을 넘어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중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상적 진실’의 세계는 왜곡되거나 훼손되어 단순한 모방 혹은 재현의 차원으로는 더 이상 진실을 표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세계 너머의 본질적 세계를 지향하는 ‘당위적 진실’의 재현은 서정시의 뚜렷한 방법적 전략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의 현실은 ‘당위(sollen)’라는 말의 왜곡된 사용으로 인해 ‘재현적 진실’의 진정성이 끊임없이 훼손되고 있다. 원래 ‘당위적 진실'은 재현의 대상을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세계‘(그러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시인의 마음속에서 지향점으로 남아 있는 세계)를 그럴듯하게 모방하는 ’개연성‘을 통해 실현된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으려는 우리 시문학의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세계‘의 재현이라는 ’개연성‘의 내포적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변형될 수밖에 없다.
즉 ’개연성‘이 ’지금 여기‘의 리얼리티를 넘어서 환상이나 초월 같은 비현실적 표상을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재현의 위기 혹은 착란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언어의 재현성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언어의 위기 혹은 언어의 빈곤이라는 심각한 징후로 나타난다. 현대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맺어진 최소한의 언어적 소통체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의적이거나 자폐적인 언어의 재생산으로 새로운 발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시가 ’재현‘이 아닌 ’감각‘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재현으로서의 시쓰기는 점점 우리 시단의 주변부로 내몰리고 있다. 재현의 완고한 체계는 이미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재현의 다양성이라는 전략으로 재현의 위기에 처한 현실과 맞서려 하지만, 재현을 고집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설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현실과 환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의미해져버린 시대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재현의 전략으로 도대체 무엇을 재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과잉실재(hyper-reality)'로서의 '스펙타클(spectacle)'을 가장 의미 있는 표상으로 간주하거나, ’현실에는 없는‘ 혹은 ’현실과는 다르게‘ 현실을 대신하는 ’시뮬라크르‘를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세계를 표상하는 ’개연성‘의 현대적 변형으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시뮬레이션 효과에 불과한 ’과잉실재‘를 ’당위적 진실‘이라는 재현의 원리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일까. 그래서 초월적 언어와 환상적 세계를 재현의 위기를 가로지르는 다양성과 새로움의 차원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 대해 필자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도 오리무중이거니와 이러한 변형조차 재현의 차원으로 인식한다면 사실상 재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재현의 다양성이라는 말 속에는 깨어진 거울을 바라보는 데서 나타나는 감각의 착란 이 재현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알리바이가 내재되어 있다.
결국 재현의 다양성은 오히려 재현의 위기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우회적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깨어진 거울은 파편화된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는 감각으로 빛을 발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로서의 세계의 질서를 온전히 형상화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재현의 다양성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재현의 위기를 넘어서는 서정시의 방향으로 논의하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재현의 다양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관점을 통해 재현의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는 문제의식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대상과 현실을 모사하는 차원으로 재현의 범주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시의 재현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세계마저 재현적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데 비판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의 다양성은 시와 현실의 관계 안에서 리얼리티를 확보할 때에야 비로소 실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00년 이후 우리 시단에서 분단, 노동, 민족 등을 화두로 한 소위 정치시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너무도 주변화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감각이 승한 시대로 인해 재현의 가치가 그만큼 실종되고 만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혹자는 이러한 필자의 입장에 대해 아직도 리얼리즘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역사, 이념, 현실과 같은 무거운 주제로부터 벗어나 내면, 환상, 문화를 통해 새로운 길 찾기를 시도하는 우리 시단의 변화를 지나치게 외면하고 있다고 냉소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비판과 냉소를 묵묵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밤하늘의 별이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이 이제는 낡고 오래되어 폐기되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논자는 아무도 없다. 아직도 리얼리즘은 우리 사회를 읽어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요 정신으로 살아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리얼리즘의 정신만큼은 더욱 굳건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리얼리즘의 종언에 맞서는 시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현실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상일 문학평론가ㆍ동의대 교수
한국작가회의 주최ㆍ민족문학연구소 주관 토론회 시분과 발제문 ‘우리시대 새로운 미학은 탄생했는가 - 2000년대 한국문학 평가와 반성’ 2010년 1월 16일(중부여성발전센터) / 하상일 비평집 『리얼리즘 ‘들’의 혼란을 넘어』(케포이북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