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포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관중(關中)의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송의 영초 연간(420~422)에 북서(北徐) 지방을 유행하였다. 황산정사(黃山精舍)에 들어가 다시 정(靜)ㆍ정(定) 두 스승을 찾아가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어 그곳에서 21일간의 보현재참(普賢齋懺)을 행하였다. 7일째 되던 날 흰 고니들이 날아와, 보현보살의 자리 앞에 모여들었다. 중간에 이르러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치자 고니들이 떠났다. 21일째 되던 날 해가 저물 무렵에, 또 노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탑을 몇 바퀴 돌더니 문득 사라졌다.
승포는 어려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더욱이 상서로운 일까지 감응한 까닭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더욱 굳세졌다. 날마다 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우고, 항상 수백 배씩 절을 올렸다.
그 후 동쪽 서울로 내려갔다. 때마침 기원사(祇洹寺)에서 강론을 여는 시기를 만났다. 법도들이 운집하고 선비와 서민들이 강석으로 달려왔다. 승포는 처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이라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서 강론을 보았다. 의복은 더럽고 해어지며, 용모는 바람과 먼지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법당 안은 이미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의 안장에 앉아 문 밖에서 강론을 들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가 강론을 끝내자, 승포가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하려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객승의 이름은 무엇인가?”
“포(苞)라 하오이다.”
“무엇을 모두 꾸러미에 쌌는가[苞]?”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도 꾸러미에 쌀 수 있소이다.”
이어 몇 차례 다른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앞서 다다른 뛰어난 이의 생각과 힘인지라, 법사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는 그의 말에 대항할 길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났다.
당시 왕홍(王弘)과 범태(范泰)가 승포가 논의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재치 있는 생각에 감탄하여 더불어 말을 나누기를 청하였다. 이에 기원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의 강론을 열고, 불법의 교화를 이어나갔다.
이에 진군(陳郡)의 사령운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승포를 만났다. 그의 정신과 기개를 보고 더욱 깊이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포에게 물었다.
“사령운은 어떤 사람인가?”
“사령운은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식견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몸에 닥치는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승포는 길을 가다가 여섯 명의 도적들이 관리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 승포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를 권유하였다. 여러 도적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하자, 간절히 염불하고 또 염불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송치하던 관리가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도적들은 족쇄를 풀고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법화(法和)
당시 와관사(瓦官寺)의 법화도 논리를 따지는데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 시대에 명성을 이루어, 전송 고조(高祖)황제의 존중을 받아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