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본 장 5장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구나 텅 비어서 굴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큰 소리를 낸다 많이 들으면 빨리 궁해지니 조화로움을 지키는 것이 낫다. 天地不仁, 以萬物而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槖籥與.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聞數窮, 不若守於中.1)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 天地不仁, 以萬物而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추구(芻狗)'는 짚으로 만든 강아지다. 왕필·하상공은 이것이 풀과 강아지를 가리킨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장자』 「천운」에도 이 말이 나오는데, 제사에 쓰이는 짚강아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짚강아지(추구)가 아직 제사상에 진설되지 않았을 때는 대나무 상자에 잘 담고 수놓은 수건으로 덮어서 목욕재계한 시축(尸祝)이 그것을 옮긴다. 그렇지만 제사가 끝난 뒤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그 머리와 등을 밟고, 장작 때는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태워버리고 만다." 이 증거가 워낙 강력하고 또 뒤의 학자들이 여러 고전에서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설이 없다. 『삼국지』 「주선전」에 따르면 쓰고 난 추구는 마차 바퀴로 깔아뭉갠 뒤 불에 태운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대보름에 제웅을 만들어 동전을 끼운 채 길에 내버려두었다가 동전을 뺀 뒤 불에 태우는 것이 그와 유사한 풍습이다. 오징은 이것이 주로 기우제에 사용되었다고 하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천지(성인)가 만물(백성)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는 것은 구태여 그것을 소중히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으니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따른다. 그러므로 만물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죽는다. 죽는 것은 내가 학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은 내가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소철)." 천지와 만물의 이런 관계는 제사에 쓰이는 짚강아지에 비유될 수 있다. 사람들이 제사 전에 짚강아지를 소중히 다루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때가 그런 것이고, 제사 후에 버리는 것도 미워해서가 아니라 때가 그런 것이다. 반드시 사랑하려는 것은 억지(인위)이고, 때에 맞추는 것이 자연스러움(무위)이다. 대개의 주해가 이와 같다. 이런 생각은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겨울을 거둬 가는 것이 아니다. 땅은 사람이 먼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광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상도(常道)가 있고, 땅에는 상수(常數)가 있다(「천론」)"는 『순자』의 냉정한 사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와는 좀 다르게 천지·성인은 만물과 백성을 사랑해서 태어나게 하고 기르지만 스스로 그 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자식인 만물과 백성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제사가 끝난 뒤 버려지는 짚강아지에 비유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임희일). 역시 통한다. 천지·성인이 너무 몰인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해설을 따를 수도 있다. 이때는 이 문장이 『장자』 「제물론」의 "큰 사랑〔仁〕은 사랑을 내세우지 않는다"라는 말과 통한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구나. 텅 비어서 굴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큰 소리를 낸다 天地之間, 其猶槖籥與. 虛而不屈, 動而愈出 '탁약(槖籥)'은 풀무다. 왕필·성현영은 이것을 풀무와 피리로 보았지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대부분 하나로 뭉뚱그려 풀무로 본다. 이때 '탁'은 바람주머니를, '약'은 바람이 나오는 관을 가리킨다(범응원). "텅 비어서 굴함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굴(屈)'을 '갈(竭)' 또는 '진(盡)'과 같은 글자로 보아 안은 텅 비어 있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굴'을 글자 그대로 보아 안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구부러지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모두 통하지만 전자가 더 일반적이다. 앞에서 『노자』는 천지·성인이 어질지 않다고 하여 심지어는 사랑에도 구태여 마음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에 따르도록 한다는 뜻을 보였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다시 풀무에 비유한다. 풀무는 가운데가 텅 비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그 때문에 뛰어난 기능을 발휘하는 물건이다. 천지·성인이 위대한 것 역시 그 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조화롭고, 조화롭기 때문에 장구하다. 풀무의 쓰임이 그렇다. 초간문에는 앞뒤의 글은 없고 이 문장만 나온다. 팽호는 고전에서는 항상 이 글(5)의 일부분만 인용하고 있으므로 원래 하나의 글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많이 들으면 빨리 궁해지니 조화로움을 지키는 것이 낫다 多聞數窮, 不若守於中 '다문(多聞)'은 대부분 '다언(多言)'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찾아보면 '다문'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선 강사제본 성현영소에 이렇게 되어 있고, 수주비본도 그렇고(초굉), 『문자』 「자연」에서도 '다문'이다. 이 경우에는 이들 판본이 백서와 부합한다. 또 「도응훈」은 이 문장을 '다언'으로 인용하지만 그렇게 되면 고사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명). 왕수(王壽)가 책을 한 가득 짊어지고 가다가 서풍(徐馮)을 만나 책의 무용함에 대해 듣고는 책을 다 불사른 뒤에 기뻐 춤추었다는 것이 「도응훈」에 나오는 고사다. 이 고사는 『한비자』 「유로」에도 그대로 나오는데, 「유로」는 이것을 이 문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를 배우면서 뭇사람들이 지나간 곳을 다시 지나간다(64)"는 문장과 연결시킨다. 곧 배움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 이 고사의 교훈이다. 지금 『노자』의 문장에서 이런 교훈을 이끌어내려면 '다언'보다 '다문'이 낫다. 이 문장의 '중(中)' 역시 앞글(4)에서 설명한 이유로 '조화롭다'고 풀었다. 일부에서는 '중'을 '충(沖)', 곧 '허(虛)'로 해석하기도 한다. '허'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조화로움을 의미한다는 전제 아래서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다문'은 본문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널리 알려진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해도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서는 「도응훈」의 인용을 존중하여 본문처럼 해석한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겨울을 거둬 가는 것이 아니다 땅은 사람이 먼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광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순자』 「천론」 각주 1) * 갑·을본은 서로 일치한다. * 갑·을본으로 서로를 보완하여 완전한 문장을 얻을 수 있다. * 초간문에는 5∼8구만 있다. * 성(姓)은 성(省: 갑본), 여(與)는 여(輿: 이하 갑·을본), 굴(屈)은 굴(淈), 동(動)은 동(蹱: 갑본), 유(愈)는 유(兪: 갑·을본)의 본 글자이므로 모두 이렇게 고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