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이토 준지의 만화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신체에 대한 끊임없는 변형과 훼손일 것이다. 그는 인간 육체의 각 부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작가다.
일본 공포만화가 이토 준지는 섬약해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길창덕 만화의 주인공 ‘꺼벙이’를 닮았지만 명랑만화의 말썽꾸러기 주인공이라기보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내성적인 소년 같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99년 부천국제영화제에 <토미에 리플레이>가 상영되었을 때 영화제 게스트로 참석했던 그는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고 했다. 좀처럼 햇빛을 쬐지 않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비명을 내지를 것만 같은 모습이다.
63년 일본 기후현 출생인 그는 누나가 즐겨 읽던 공포만화에서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나고야의 치과 기공사 전문학교에 다녔다. 87년 2년 공포만화 전문잡지 ‘월간 할로윈’에 <토미에>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연재를 시작했다. 실질적인 데뷔작인 이 만화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그는 70년대 일본 공포만화 붐을 일으킨 우메즈 카즈오를 이을 기대주로 부상했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각종 만화잡지에 단편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주간 빅 코믹 스프리트’에 연재된 <소용돌이>. 이 두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이토 준지의 만화들은 게임과 캐릭터 상품으로도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은 그 어떤 공포영화도 보여주지 못한 기괴한 상상력, 그리고 엽기적인 내용에 비해 다소 의외인 세밀한 그림체로 유명하다. 평범한 학교와 가정,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그의 만화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대부분 정신나간 살인마가 저지른 일이라기보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토미에>의 살인사건은 여자의 몸 속에서 나온 또다른 여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소용돌이>의 배경인 마을 근처 호수가 뿜어내는 음산한 기운은 사람들을 반 미치광이로 만들어간다. 이토 준지는 또한 일상적인 공포의 근원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숨어 있다고 보는 듯하다. 소년 소녀의 우정과 사랑은 늘 어긋나고 뒤틀리며, 그로부터 상처받은 누군가는 학교 전체를 공포의 수렁에 빠뜨린다. 가족관계도 비정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부모들은 언제나 실종되거나 기이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아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자신의 뿌리를 잃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토 준지의 만화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신체에 대한 끊임없는 변형과 훼손일 것이다. <소용돌이>의 인물들은 수시로 몸이 비비 꼬이며 달팽이로 변하거나 머리카락이 치솟아 둥글게 말리기도 한다. 얼굴에서 돋아난 붉은 실이 온몸에 바늘땀을 만들거나 머리가 잘려나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일도 일어나며, 피부가 완전히 벗겨진 채 근육 상태로 돌아다니는 인물들도 빈번히 등장한다. 이토 준지는 인간 육체의 각 부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작가다.
이번 ‘이토 준지 공포 컬렉션’에서는 이미 영화화된 <소용돌이>와 <토미에 리플레이>를 포함해 모두 10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베타로 상영되는 중편영화들은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이 그의 단편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다. 국내 번역된 단편집에도 수록돼 있는 ‘다락방의 긴 머리’ ‘목매다는 풍선’ ‘얼굴도둑’ 등이 어떻게 실사로 옮겨졌는지 두고 볼 일이다. 상영작 중 <케이조쿠>는 이토 준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해 개봉돼 좋은 반응을 얻었던 영화다.
상영작 소개
일정: 2001년 7월 14일부터 약 3주 간
상영시간: 매일 밤 9시, 1회 (금, 토 밤 9시, 11시 2회 상영)
장소: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
오시키리
감독 사토 젠보쿠 | 출연 토쿠야마 히데노리 | 84분 | 35mm
항상 악몽을 꾸는 오시키리 토오루는 초능력에 관심을 갖게 된다. 초능력 현상연구회 친구들로부터 ‘무지개빛 빛나는 저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는 꿈과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곳을 찾아간다. 막혀 있는 벽을 부수고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오시키리는 살인범으로 오해 받아 쫓기다 또다른 자신의 모습과 만난다. 이토 준지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세계 최초의 HD(High Definition) 시네마.
토미에 리플레이
감독 미츠이시 후지로 | 출연 야마구치 사야카, 구보즈카 요스케 | 92분 | 35mm
병원 원장 겐조의 딸 유미는 갑자기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다. 이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연이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응급환자로 실려온 한 소녀의 몸 속에서 눈 밑에 점이 있는 살아있는 여자목이 나온 뒤, 수술에 참여한 의사들이 전부 행방불명된 것. 병원 지하에서 목을 배양하던 원장 겐조의 노트에는 ‘토미에’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겐조는 유미에게 돌아오지만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유미는 토미에와 결투를 결심한다.
소용돌이
감독 히구친스키 | 출연 하츠네 에리코, 신은경 | 90분 | 35mm
‘검은 소용돌이’를 뜻하는 쿠로우즈 마을에 사는 키리에는 남자친구 슈우지로부터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말을 듣는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긁어모으던 그의 아버지는 세탁기 안에서 비비 꼬인 시체로 발견된다. 이후 마을에서는 소용돌이 모양과 관련된 갖가지 기괴한 사건이 전염병처럼 발생하고, 점점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악마의 이론
감독 시미즈 타카시 | 출연 이시카와 신이치로, 타치바나 미사토 | 28분 | 베타
오카모리는 여자친구 카즈미를 믿지 못해 교복에 도청장치를 설치한다. 그가 자신을 몰래 좋아하는 ‘나오코’와 카즈미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자 갑자기 카즈미가 비명을 지르며 옥상에서 떨어진다. 나오코는 카즈미에게 소설 ‘파우스트’를 이야기하면서 신과 악마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들려줬던 것. 이를 듣고 있던 오카모리는 무엇에 홀린 듯 사라진다.
다락방의 긴 머리
감독 미야케 류타 | 출연 마부치 에리카, 키타하라 마사키 | 30분 | 베타
치에미는 의대생을 사칭하는 애인 코이치의 제안대로 머리를 길게 기른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코이치는 번번이 치에미를 배신하고 사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코이치가 치에미에게 이별을 선언하자 그녀는 집에 돌아와 머리를 잘라버린다. 결국 치에미는 머리가 없는 시체로, 그녀의 머리는 코이치 집 천장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목매다는 풍선
감독 오타 이세이 | 출연 타치바나 미사토 | 22분 | 베타
베스트셀러 ‘목매달기 기구’의 영향으로 아이돌 스타 테루미가 목매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책을 읽으며 길을 걷던 4명의 여자아이들은 자기 얼굴 모습 그대로인 거대한 기구가 하늘에서 쫓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한편 학교 궁도부원 미유키는 사귀던 코치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평소 그에게 마음을 품은 치하루와 데이트를 하라고 한다. 미유키를 거부하지 못하는 코치는 치하루 얼굴 모양을 한 기구를 활로 쏴 일그러뜨린다.
얼굴도둑
감독 나카니시 겐지 | 출연 안도 노조미 | 72분 | 베타
카메이는 반에서 가장 예쁜 사야카와 타카후미의 관계를 질투하면서 타카후미에게 접근하나 그는 번번이 외면한다. 사야카와 똑같아지기로 결심한 카메이는 그녀 주변을 계속 맴돈다. 마츠다 유미가 전학을 온 뒤 카메이는 그녀의 얼굴을 훔치는 데 성공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마츠다가 떠난 뒤 다른 학생들의 얼굴을 훔치려 한다. 공포에 질린 타카후미는 카메이에게 옛 모습대로 돌아오라고 애원한다.
장몽
감독 히구친스키 | 출연 츠구미, 츠다 켄지로 | 58분 | 베타
나날이 긴 꿈에 시달리는 무로다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지만 이미 그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 잠깐 꾸는 꿈이 8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긴 고통으로 느껴져 제정신이 아닌 상태다. 담당의사 쿠로다는 비디오로 무로다를 관찰하지만, 그는 점점 변하여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무로다가 사라진 자리에 의문의 빨간 결정체가 남고, 이후 병원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소용돌이>의 감독 히구친스키가 촬영, 편집, 시나리오를 맡았다.
발광하는 입술
감독 사사키 히로히사 | 출연 미와 히토미, 나츠카와 히지리 | 85분 | 베타
머리 없는 여중생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되자 미치오는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는다. 그의 무죄를 믿는 여동생 사토미는 점장이를 찾아가 미치오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죽은 혼을 부르는 점장이는 목 없는 소녀들을 심부름 귀신으로 만든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조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한 사사키 히로히사는 일본 시나리오 작가 베스트 10에 꼽히는 재능있는 감독이다.
케이조쿠
감독 츠츠미 사치히코 | 출연 나카타니 미키, 스즈키 사리나 | 58분 | 35mm
정년퇴임을 10일 앞둔 나노무라 계장은 퇴직금을 받아 이혼한 뒤 아내에게 위자료로 지급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계장 대우로 강등당하자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한편 새로 계장에 취임한 시바타는 15년 전 의문의 섬 ‘액신도’로 향하던 중 침몰한 배의 생존자 이소야마의 딸 아키고를 만나게 된다. 당시 배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 이들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액신도로 떠난다.
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 같은 2001년, 시원하고 짜릿한 여름밤을 나다의 호러 영화제를 통해 만끽하십시요. 호러 만화의 귀재인 일본 이토 준지 원작外 일본내 유명 호러 감독의 작품들을 매일 저녁 1회씩 만나실 수 있습니다.
색다른 공포와의 만남을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