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이야기-송파구④] 삼전도비와 석촌호수
일요서울 2023.06.30
장마를 앞둔 6월 24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최고 기온이 30℃를 넘었다. 잠실의 빌딩 숲은 찜통이었다. 지표면은 태양광판이다.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서 석촌호수는 멀지 않았다. 석촌호수로 들어갔다. 나무 그늘과 바람 그리고 물이 있는 석촌호수는 별천지였다.
시원했다. 울창한 나뭇잎을 비집고 들어 온 햇살이 반가울 지경이다. 석촌호수 서호 산책로로 들어갔다. 산책로 입구에 ‘삼전도비’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눈앞에 철재 가림막 지붕이 있다. 그곳에 굴욕의 역사, 아픔의 흔적을 세긴 삼전도비가 ‘모셔져’ 있다.
석촌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의 아픔
- 석촌호수 인공호수? 오류의 산물. 한강의 줄기 송파강
1636년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왔다. 청나라 기마부대는 16일 만에 인조가 항쟁의 사령부를 이끌고 있던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대치하길 45일. 무력했던 조선은 결국 항복했다. 인조는 1637년 1월 말 혹한을 뚫고 남한산성에서 삼전나루(三田渡)까지 걸어 내려왔다.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한민족은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았다. 하지만 왕이 다른 나라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한 일은 없었다. 당시 수항단이라는 단상에 앉아있던 홍타이지는 조선의 국왕이 고개를 조아린 장소에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청과 조선이 군신 관계임을 공포하고 그것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639년 삼전도비는 완성됐다.
삼전도의 공식명칭 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비의 공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의 ‘전승비’다. 조선으로서는 있어서는 안 될 아픈 유산이다. 그 치욕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공덕비’가 있던 장소의 지명을 따라 삼전도비라고 불렀다. 그럼 청나라가 우리나라에 어떤 ‘공덕’을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비석 내용의 골자는 ‘청의 조선 침략은 의로운 행동이다’, ‘청나라에 대항한 인조를 용서한다’, ‘백성을 불쌍히 여겨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 태종의 은혜로 조선을 청에 복속시키지 않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삼전도비는 컸다.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큰 비석은 없다. 단단한 거북 받침돌 위에 세워진 비석의 높이는 3.9m(전체 높이 5.7m)다. 너비 1.4m다. 두께 0.39m다. 전면에는 몽골어와 만주어, 뒷면에는 한자로 글이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몽골어와 만주어 비석은 이것이 유일하다.
비석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의 빼어난 예술 감각을 보여주는 조각이다. 실은 비석의 재료와 크기, 장식 그리고 비문 내용까지 청나라 요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전승비는 승전국에서 세우는 것이 아니었던가. 교활했다. 조선의 자발적 칭송과 맹세로 위장하기 위한 술책인 셈이다.
높이 3.9m 너비 1.4m 두께 0.39m 조선후기 예술 조각
삼전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런데 이상하다. 삼전도비 옆에 비석 없는 거북받침(귀부)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최초의 삼전도비 귀부였다. 청나라는 느닷없이 본래 요청했던 것보다 더 크게 만들라고 요구했다. 이 때문에 비석도 세우지 못한 귀부가 생겨난 것이다.
필자는 석촌호수 숲에 숨어 있는 ‘삼전도비’ 앞에 서 있다. 400년 전의 치욕을 감추려는 것일까. 글자도 알아볼 수 없다. 거의 지워져 있다. 그래도 이 비석이 없다면 필자가 석촌호수에서 병자호란을 떠올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픈 흔적이지만 남겨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삼전도비가 여기에 서 있기까지는 참 많은 곡절이 있었다. 1895년 일이다. 고종은 삼전도비를 파서 한강에 던져 버렸다. ‘굴욕적인 비석을 보고 싶지 않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3년 삼전도비를 찾아냈다. 조선의 치욕적 역사를 들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광복된 뒤에도 수난은 이어졌다. 고종과 같은 심정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삼전도비를 땅에 묻었다(1956년). 그러나 수모의 증거는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았다. 1963년 홍수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년이 지난 1983년 국가 사적(제101호)으로 지정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수난은 이어진다. 한 남성이 ‘치욕 역사’를 붉은 페인트로 지워버렸다. 삼전도비를 없앤다고 수난의 역사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암울한 역사로 보는 한 병자호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삼전도비 옆 벤치에 한 중년 여인이 앉아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듯하다. 그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필자와 같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하다.
삼전도비. 옆 귀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장하고 매장해도 사라지지 않은 삼전도비
석촌호수 서호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성 모양을 한 매직 아일랜드는 모노레일과 구름다리로 롯데월드 어드벤처와 연결되어 있다. 맑고 푸른 석촌호수와 주변의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잘 가꿔진 도심 속 쉼터다. 석촌호수 동호 산책길로 들어섰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젊은이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혜성특급, 자이로드롭·스윙·스핀, 바이킹 등 극적인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즐거운 비명도 들린다.
2.5km의 산책로를 돌았다.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게 있다. 동호와 서호 한가운데에 각각 하나씩 있는 분수다. ‘한 줄의 분수’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마치 잠실의 욕망처럼 느껴졌다. 동호로 접어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롯데월드와 이미지가 겹친다.
석촌호수는 인공호수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틀린 얘기다. 원래는 한강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한강의 본류로 송파 일대를 지나는 강을 송파강이라고 했다. 자양동을 지나는 작은 강은 신천강이다. 그 사이에 잠실도, 부리도라는 두 개의 섬이 있었다. 1676년 겸재 정선이 그린 ‘삼전나루’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애초 삼전도비도 삼전나루에 있었다.
17세기의 ‘삼전나루’의 모습은 1925년 홍수로 완전히 바뀌었다.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 역사상 최대의 물난리(을축년 대홍수) 때문이었다. 1일 강수량이 600mm였다고 한다. 이런 강우가 4차례나 이어졌다. 한강 수변의 모든 것을 쓸고 갔다. 심지어 한강의 물줄기를 바꿨다. 송파 일대를 지나던 한강 본류인 송파강은 좁은 강으로, 대신 샛강이었던 신천강이 한강의 본류가 됐다. 두 개 강 사이에 있던 잠실도와 부리도는 졸지에 강북에서 강남으로 지리가 바뀌게 됐다.
선유산흙.연태재 매운 송파강에 생긴 호수
석촌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럼 한강이라는 석촌호수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1970년대 본격화된 강남개발과 함께 좁아질 대로 좁아진 송파강을 메꿨다. 무려 공유수면매립지 면적이 83만 평이다. 여의도 면적의 1/4이다. 송파강의 매립을 위해 지금 선유도가 된 본래 선유산 흙을 파서 매웠다. 그것도 모자랐다. 그래서 서울시민이 태우고 버린 연탄재로 송파강을 매웠다.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게 석촌호수다.
어떻든 84만 평의 강을 메워서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현재의 잠실이 탄생하게 됐다. 그 이후 잠실의 변화는 가히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독자들도 잘 알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잠실대교가 생겼다. 1978년부터 미성아파트와 주공아파트, 시영아파트 등이 속속 들어서면 대규모 주택단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뽕밭 섬이 아파트 숲으로 바뀌는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