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물건값을 올리는 것을 언론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반면, 물건값을 내리는 기업에게는 암묵의 압력이 가해진다.’
다소 보기에 어색한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말이며, 실제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연초에 올랐던 컴퓨터 가격이 일제히 다시 다운됐다. 서
민생활에 관계가 깊은 기름값도, 햄버거값도 내림세다. 물론 서민들 입장에서야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게 됐으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일본 언론들의 시각은 어둡기만 하다.
올 3∼4월 컴퓨터 업체들의 컴퓨터 가격인상을 즐겁게 바라볼 때와는 정반대다. 결국 일본의 소비자들은 오른 가격을 감당할 만큼 소비지출 능력이 없었던 것이며, 일부 경기지표 호전에도 불구, 디플레와 불황은 좀더 오래 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반기 벽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일본의 컴퓨터 가격 하락에는 일본 경제가 안고 있는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다. IBM컴퓨터는 7월 10일부터 발매한 데스크탑 가격을 동급기종 대비 최대 27%, 평균 15% 낮춰 잡았다. 컴팩 역시 8일부터 발매한 데스크탑 가격을 10% 낮췄으며, 델컴퓨터 등도 모두 가격을 낮췄다. 일본 컴퓨터 메이커들은 지난 4월만 하더라도 주요 제품 가격을 10∼20% 정도 인상했었다.
물론 일본 컴퓨터 기업들의 가격인상과 하락은 주로 컴퓨터 부품가격의 등락에 의한 것이다. 작년 4분기에 2달러 아래서 맴돌던 128메가D램 반도체 가격은 올들어 급상승, 3월과 4월에는 5달러를 넘어섰다. 작년 3만엔대 미만이던 15인치 액정 디스플레이 가격도 4월에는 3만4천엔이었다. 그러나 반도체 가격은 올 6월에는 다시 2달러까지 떨어졌고, 액정 디스플레이 가격도 3만1천엔 전후로 낮아진 상황이다. 수치상으로는 완전히 작년과 같은 수준까지 복귀했다.
소비도 없고 투자도 없다
일본에서는 지난 4월의 컴퓨터 가격 인상이 ‘불황탈출’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일본은 그동안 물가가 자꾸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걱정이었다. 물가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가지고만 있으면 가치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반대로 돈을 꾸었을 경우엔 갚을 때 큰 부담이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소비가 늘어날 수가 없다. 가격이 더 떨어질 때까지 참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소비가 늘지 않고, 돈을 꾸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다보니 투자도 할 수 없다. 투자가 없으면 불황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불황이 깊어지면 소비는 줄어들고 소비할 사람이 없으니 가격은 더욱 떨어진다. 이른바 디플레 악순환 구도다.
이 때문에 컴퓨터 회사들이 가격을 올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 악순환 구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만들었다. 컴퓨터 가격이 올라가고, 이에 자극 받은 다른 기업들도 조금씩 상품 가격을 올리게 되면, 더 비싸지기 전에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이고, 이런 소비들이 다시 한번 ‘선순환’을 만들어 주기를 일본 언론들은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반대로 컴퓨터 업체들은 부품가격이 떨어지자마자 가격인하를 단행했다. 높은 가격으로는 판매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물론, 업체들간의 가격경쟁도 당연히 가격 인하의 한 원인이다.
4월에 반짝 올랐던 제품가격이 다시 곤두박질한 예는 비단 컴퓨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솔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솔린은 지난 4∼5월에 리터당 가격이 3∼6엔 정도 올라 평균 100엔 정도에 거래됐지만, 7월 들어서는 다시 95엔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솔린의 경우 아예 4∼5월의 인상시에도 실제로는 가격을 올리지 않은 주유소들이 많았다.
햄버거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일본 맥도널드는 7월 들어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세트 메뉴 가격을 20∼30% 가량 내렸다. 일본 롯데리아 역시 일부 지역에서 세트메뉴 가격인하경쟁에 뛰어들었다. 물론 가격인하의 원인은 판매부진이다.
일본 맥도널드는 1990년대 말부터 일부 메뉴를 평일에 반액세일 했다. 반액세일 메뉴인 햄버거와 치즈버거는 세일가격이 65엔과 80엔에 불과했고,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맥도널드는 역시 초저가로 인기를 모은 덮밥집 ‘요시노야’, 중국에서 생산한 의류를 싼 값에 팔아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한 ‘유니클로’와 더불어 불황기에도 꾸준히 사세를 늘리는 ‘디플레 3강’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본 맥도널드는 올 2월 그 동안의 반액세일이 어느 정도 고정손님을 끌어오는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 세일제도를 없앴다. 그러나 반액세일을 없애자, 일본 맥도널드의 매상고는 순식간에 20%가 줄어들었다. 싼값에 익숙했던 소비자들이 가격이 오르자 한꺼번에 이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경기상승 준비 멀었다
역시 ‘디플레 3강’의 하나인 요시노야는 가격인하에 인하를 거듭하다가 일정일에 추첨해서 무료권을 주는 방식으로 추가 실질 가격인하를 단행했다.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도요타가 1조엔의 경상이익을 거두는 등 상대적으로 상태가 좋다는 평가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엄청나게 고전하고 있다. 팔리는 것은 일부 차종뿐이라는 지적이다. 도요타도 일본 국내에서는 ‘캐쉬백’ 서비스를 도입, 실제로는 판매가격을 인하했다.
결국 이런 가격 하락 분위기에 힘입어, 일본의 6월 소비자물가(2000년 기준)는 전년도보다 1% 하락했다. PC, TV, 비디오카메라 등의 ‘교육오락용 내구재’ 가격은 전년 대비 14%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PC가격은 전년동기 대비 21% 하락했다. 냉장고·에어컨 등 ‘가정용 내구재’도 8.9% 가격이 떨어졌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년보다 훨씬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지만, 반면, 앞으로는 더 싸게 살 수 있다는 기대도 가능한 셈이다.
그다지 가격하락 요인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생산자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또 결과적으로는 장기적인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 최악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
물가가 상승하는 듯 하다가 다시 하락하는 현상은 결국 아직도 일본이 경기 상승 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가격상승을 무릅쓰고 까지는 소비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이며 아직 소비심리가 살아나고 있지 않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4월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물가가 실제로 오르는 것 같지 않나.’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쑥 들어간 상황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경기회복은 일본이 애초에 상상했던 것만큼 빠르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여러 모로 일본으로서는 어려운 시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