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안씨 안장원(安璋遠,1887∼1949)
안장원(安璋遠,1887∼1949)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순부(舜夫)이고, 호는 율은(栗隱)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경상남도 양산(梁山) 상북면(上北面) 소토리(所土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안경훈(安景勳), 조부는 만성재(晩惺齋) 안평중(安平重)으로, 진사인 부친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과 모친 영양천씨(潁陽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천승호(千乘昊)이다. 부인은 김태진(金泰鎭)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타고난 자태가 빼어나고, 남다르게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8세에 공부하러 다니면서 아이들과 놀지 않고, 스승을 번거롭게 하는 일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효성과 우애 또한 매우 깊었다. 세상의 영리(榮利)에 뜻을 두지 않고, 많은 책을 섭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문장(文章)에도 뛰어났으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에 통달하였다. 세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절박한 임무로 삼았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하에서 성학(聖學)과 관련된 것들을 수학하였으며, 경남(慶南)의 유림(儒林)들과 함께 유교협성회(儒敎協成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사우(士友)들은 그의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그를 유현집(儒賢集)의 간행 책임자로 천거하여 간행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도 그는 충효와 의열(義烈) 부분에 특히 신경을 썼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모든 것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하였다. 18세에 큰집 곁으로 옮겨 살면서 자식들과 조카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이 모두 성장한 후에야 사우(士友)들과 술 마시고 시(詩)를 짓고 강호(江湖)를 거닐면서 뛰어난 경치를 두루 유람하며 세상일을 잊고자 하였다.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안종복(安鐘福)과 안종철(安鐘哲)이고, 딸들은 이희동(李熙東)·이수익(李壽益)·이의목(李義穆)·김규찬(金圭燦)·홍기화(洪起化)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양산 읍면(邑面) 영동(英洞)에 자리하고 있다. 문집 《율은유고(栗隱遺稿)》는 4권 1책으로 안붕언(安朋彦)의 서문과 배문준(裵文準)의 발문을 붙여 1976년 간행되었으며, 부록에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1976년 간행된 안장원(安璋遠)의『율은유고(栗隱遺稿)』에 찬자 미상의 안장원(安璋遠,1887∼1949)의 묘갈명(墓碣銘)을 보면, 안방걸(安邦傑) --- 안유(安綏) --- 안몽득(安夢得) -- 안주(安宙) --- 안경훈(安景勳) - 안평중(安平重) - 안효필(安孝弼) - 안장원(安璋遠)의 계통이다.
p. 135 묘갈명(墓碣銘)을 보면 안방걸(安邦傑)이 상조(上祖)이며 상장군(上將軍)이라 하고 安公諱璋遠 字舜夫 自號栗隱 系出廣州 高麗上將軍諱邦傑 爲上祖 屡傳至殿中侍御史諱綏 始居咸安
안장원(安璋遠)은 자는 순부(舜夫)이고 호는 율은(栗隱)이라 자호했다. 본관은 광주인데, 고려 상장군 안방걸(安邦傑)이 상조(上祖,시조)이다. 여러대를 지나 전중시어사를 지낸 안유(安綏)가 함안(咸安)에서 살기 시작했다.
p. 129에 행장(行狀)을 보면 안방걸(安邦傑)이 비조(鼻祖)이며 대장군(大將軍)이라 하고 公諱璋遠 字舜夫 栗隱其號也 安氏廣州世 高麗大將軍諱邦傑 爲鼻祖 傳至侍御史諱綏 移卜于咸之安仁村 p. 124 가장(家狀)의 기록은 안방걸(安邦傑)이 조조(肇祖)이며 대장군(大將軍)이라 한다. 1942년에 후손들이 간행한 광주안씨 안주(安宙,1500~1569)의 『치암선생일고(恥庵先生逸稿)』에 안장원(安璋遠)의 조상이 되는 안주(安宙)의 묘갈명(墓碣銘)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安氏 望廣州者 其原出自中國 以高麗大將軍諱邦傑 爲遠祖 광주안씨는 그 근원이 중국에서 나왔으며 고려 대장군이 된 안방걸이 원조(遠祖)이다. 廣州氏 其先 自中國 來至麗朝大將軍邦傑 因采地 爲氏貫 광주안씨는 그 선조가 중국으로부터 와서 고려조 대장군이 된 안방걸으로 인하여 (광주를) 채읍(采邑, 식읍)으로 받아 본관을 삼았다. 그러나 1976년 간행된 안주(安宙,1500~1569)의 후손 안장원(安璋遠)의 문집『율은유고(栗隱遺稿)』에 실린 안장원(安璋遠,1887∼1949)의 묘갈명(墓碣銘)을 보면 自中國(중국에서 왔다)이라는 기록은 없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