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이 로마에 가서 로마법을 따랐더라면 순교당할 일도 없고 오늘날의 교회도 없겠지요.
그러니 다른 뜻이 있겠지요.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겠지요. 한편 교본에 충실하자는 지당한 말씀도 합니다. 현실과 교본 사이 어디에 선배가 있는 걸까요? 후배는 어느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을까요? 성향에 따라 범위 내 좌표가 각기 다를 수 있지요.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 교회의 정신이 단체에 있겠지요.
교본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를 존중합니다. 권한을 위임받은 선배도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를 존중합니다. 리더가 교본으로 단원을 교육합니다.
그런데 교본의 내용과 선배의 방향이 다를 때 단원은 혼란을 겪습니다. 교본이 선배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인지 교본대로 수행하자는 것인지?
후배는 교본를 근거로 선배에게 질의를 하고 요청을 합니다. 선배는 교본에 더하여 상부지시를 근거로 상명하복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은 선후배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것이 있습니다.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한반도 평화와 냉담자를 위한 기도는 하여도 21시에 시간을 맞추어 하지는 않습니다. 하루 중에 묵주기도 하면서 합니다.)
교본을 근거한 활동도제로 모범을 보이는 선배가 없어 후배가 요청합니다.
회합 때 단가를 부르는 모범을 보이는 선배가 없어 후배가 요청합니다.
후배 단원에게 단가를 들려주시고 함께 부르며 배울 수 있도록 요청합니다.
후배 단원이 교회의 가르침과 교본에 근거하여 단원선서를 준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요청한 것이 단체의 쇄신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와 같지 않다고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다른 단원은 이런 제안 안한다고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있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우리가 성삼위라면 무엇이든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쇄신되어야 할 잡것이라면 성령으로 단체 또는 우리와 우리라고 하는 개인이 새로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