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작에 있어서의 창작 발상법 연구
류철균
(이화여대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 문제 제기
이 논문은 한국 현대소설 창작론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소설 창작에 있어서 창작발상법의 성격과 의의를 살펴보고 작가의 가치관을 반영할 수 있는 바람직한 창작발상법의 이론을 탐구하는데 목표를 둔다. 이러한 과제는 크게 보아 문예 창작에 대한 일반이론적 연구에 속하지만 문예 창작론 자체의 개념 규정에도 관련되는 문제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창작발상법이 문예창작론을 기존의 전통적인 문학 연구와 변별되게 하는 독특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문예창작론은 창작 활동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작가의 창작 활동을 학문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대학에서 문예창작론을 연구하고 또 가르치고 있다. 이같은 현단계의 문예창작론, 특히 소설창작론은 학문적 자기정체성의 결여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의 연구들이 지적하듯이 현행 소설창작론은 한 학기의 강의 끝에 소설 한 편을 제출하도록 하여 평가해주는 과정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 내용이 기존의 소설론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주제와 구성과 문체로 나누고, 구성을 다시 인물과 사건과 배경 등으로 나누어 그런 구성 원리에 맞게 창작을 유도하는 현단계의 소설창작론들은 이미 실제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같은 소설의 공학적 구성 원리들은 현실 인식과 소재의 발견, 허구적인 구상과 소설 쓰기, 자기 비평과 자기 교정 등을 아우르는 창작 행위의 전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씌어진 작품들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한 소설의 구성원리는 앞으로 씌어져야 할 보다 독창적인 소설 창작을 억압할 위험이 있다. 소설창작론에는 소설론이 다루지 않는 고유한 연구 주제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창작발상법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이 만들어져 독자가 그것을 읽고 감동받는 문학 현상은 작가의 창작 체험과 독자의 심미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창작 체험은 다시 작가가 상상하는 과정과 상상을 객관화하는 과정으로 대별된다. '창작발상법'은 전자의 상상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기법적 원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예술적인 소재를 착상하고, 거기에 결부된 연상들을 끌어모으고, 실재를 넘어선 차원까지를 상상하여 새로운 의미론적 세계를 구상해내는 방법들이 창작발상법이다. 이같은 창작발상법에 대한 연구는 문예창작론의 고유한 과제이자 보다 본질적인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A make B"라는 연구 대상이 있을 때 전통적인 문학 연구는 A나 B, 즉 작가나 작품 같은 <존재>의 영역을 탐구한다. 그러나 문예창작론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A에서 B로 넘어가는 순간인 'make'의 영역, 즉 창작(creative writing)이라는 <생성>의 영역을 탐구한다.
이같은 생성의 영역은 전통적인 문학 연구가 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광수가 {유정}을 썼다"는 사건에서 이광수라는 작가와 {유정}이라는 작품은 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존재하지만 '썼다'라고 하는 사건 자체는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에만 존재하고 곧 사라져버린다. 전통적인 문학 연구가 창작론을 소홀히 했던 이유도 창작이라는 것이 이처럼 본질적으로 일회성(一回性)을 속성으로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기존의 문학 연구는 논증 가능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문 일반의 지향성을 따라 비교적 지속적으로 존재해서 확인할 수 있는 연구 대상을 갖는 작가론, 작품론에 주력했던 것이다.
'창작'이라는 사건의 영역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고무시킨 것은 20세기 후반 생성(生成)을 가장 중요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후기 구조주의의 출현이었다. 질 들뢰즈와 미셸 푸코로 대표되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자연에서의 생성이 아니라 주로 사회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는 생성, 즉 소설 창작과 같은 문화적 차원의 생성을 탐구한다. 당겨 말하자면 이같은 변화는 후기 구조주의가 '작가'라고 하는 <주체> 대신 '언표 출현의 장(場)'이라고 말하는 창작 경험의 논리적 <구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창작하는 과정의 세부사항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의 논리적 구조는 알 수 있고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이다.
본 논문은 이같은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과 방법론을 수용하여 소설창작론에 있어서의 창작방법론의 성격과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같은 방법론의 연장선상에서 이제까지 실제 창작에 종사한 바 있는 작가 교수의 경험칙에만 의존하고 있는 창작발상법 연구를 보다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먼저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는 한국현대소설창작론의 전개과정을 창작발상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기로 하겠다.
2. 한국 현대소설 창작론의 전개과정과 창작발상법 문제
2.1. 전후 소설창작론에 나타난 창작발상법의 관념적 강조
해방 이후 대학에서 최초로 문예창작론이란 교과목을 설강한 것은 1953년 개교한 서라벌 예술대학이었다. 2년제 과정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당시 소설창작론 전임교수였던 김동리를 중심으로 자체적인 교재 편찬에 착수하여 1956년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창작론 논저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연구}를 간행했다.
이광수부터 유주현까지 총 29인이 집필한 이 책은 전후 소설창작론의 전개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전쟁 직후의 이념적 경직성으로 인해 개재가 불가능한 문인들을 제외한,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거의 모든 중견문인들의 개성적인 소설창작론들을 수록하고 있어 대학 제도에 편입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자생적 소설창작론의 면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연구}는 이후에 출간된 정비석의 {소설작법}(서울:문성당,1957), 김동리, 박영준 대표집필의 {소설작법}(서울:청운출판사,1965) 등의 논저보다 더 포괄적인 시대적 대표성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예시하면 아래와 같다.
1. 小說家가 되려는 분에게 - 李光洙
2. 小說의 精神 - 李無影
3. 小說의 構成 - 崔仁旭
4. 短篇小說論 - 廉尙燮
5. 中篇小說論 - 金光洲
6. 長篇小說論 - 鄭飛石
7. 歷史小說論 - 朴鍾和
8. 大衆·探偵小說論 - 方仁根
9. 新聞小說論 - 鄭飛石
10. 歷史小說은어떻게써야하나 - 朴鍾和
11. 少年小說論 - 李元壽
12. 主題의 意義와 方法 - 白 鐵
13. 表題의 意義와 方法 - 金光洲
14. 主觀的 表現 - 安壽吉
15. 客觀的 表現 - 朴榮濬
16. 素材의 選擇法 - 郭鍾元
17. 心理的 表現 - 金利錫
18. 性格의 表現 - 金東里
19. 誇張的 表現 - 李鳳九
20. 寫實的 表現 - 郭夏信
21. 省略的 表現 - 朴容九
22. 感覺的 表現 - 李璇求
23. 人物의 表現 - 朴淵禧
24. 自然의 表現 - 崔泰應
25. 會話의 驅使法 - 金 松
26. 形容詞 驅使法 - 林玉仁
27. 說明詞 驅使法 - 柳周鉉
28. 序頭와 結尾의 要領 - 朴啓周
<作家硏究>
29. 세르봔테스 - 桂鎔默
30. 빠이론 - 盧天命
31. 단테 - 金顯承
32. 복카치오 - 田榮澤
33. 괴테 - 金東里
이 목차에서 보듯이 전후 소설창작론은 제도적인 문학 연구에서 요구하는 학문적 체계화가 매우 미흡하다. 소제목 위주로 정리한다면 이 책의 창작론 33편은 <사실적 표현> <감각적 표현> 등의 묘사론과 <주관적 표현> <객관적 표현> 같은 문장론, <소설의 구성> <허두와 결미의 요령>과 같은 서사구조론, <단편소설론> <중편소설론> 같은 장르론, <소설가가 되려는 분에게> <소설의 정신> 같은 창작 일반론, <소재의 선택법> <주제의 의의와 방법> <역사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 같은 창작발상법 논의, 그리고 결미의 작가론 등 7개 분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최초의 시도였던 만큼 이들 논문에는 각각의 논제에 충실한 체계적 설명보다는 각 작가 나름의 창작 체험을 논리화한 개성적인 문학론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개성과 논의 수준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창작론들은 일정한 문학사적 맥락과 지향성을 공유하고 있다.
{소설 연구}의 필자들은 김동리를 비롯하여 정비석, 김광주, 계용묵, 곽하신, 김이석, 박계주, 박영준, 안수길, 임옥인, 최인욱, 최태응 등 주로 3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이다. 이 가운데 김동리, 정비석, 김광주, 계용묵, 박영준, 최태응 등은 6.25 사변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자신들의 작가 수업기를 담은 경험칙 위주의 소설창작론을 한번 간행함으로써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한 바 있다. 30년대 말 유진오와의 논쟁에서 김동리가 주장했듯이 이 세대들은 선배 세대의 이념지향성과 객관적 현실 우위의 리얼리즘 문학관에 대해 일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 연구}는 바로 이들의 세대론적 공감대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연구}의 창작론들은 한결같이 객관적 현실의 인식 보다 작가의 창조적 개성의 발현을 더 우위에 둔다. 그리고 그같은 개성의 근저에 작가의 독자적인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이 근대 소설의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는 작가들 가운데 시점을 강조한 김동인의 소설창작론을 배제하고 이광수의 소설창작론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태도의 반영이다.
이광수의 [소설가가 되려는 분에게]는 <① 소설은 왜 쓰나? ② 구상 ③ 기교>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기교를 동원하여 소설을 형상화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작가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소설을 쓰느냐의 문제와 그같은 가치관을 어떻게 구상으로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광수에 따르면 "一篇의 小說을 構想할 때" 가장 중요한 요건은 "어찌하면 내 속에 먹은 생각을 가장 逼眞하게 그리되 가장 힘있게 표현할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속에 먹은 생각"이라는 말로 표현된 작가의 주체적인 가치판단이 가장 먼저 있고 이같은 가치판단을 작품의 구상과 연결시키는 창작발상법이 있으며 마지막에 실제적인 소설 쓰기에 적용되는 기교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작가의 가치관 → 창작발상법 → 기교>의 가치론적 서열이야말로 {소설 연구}의 필자들이 선배 세대로부터 가장 인용하고 싶었던 창작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독자적인 가치관과 그것을 작품의 구상으로 연결시키는 창작발상법이 창작의 핵심 요소가 된다는 생각은 작가의 창조적 개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의 의의를 극대화했던 그들의 사상을 지지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설 연구}의 편찬을 주도한 김동리의 경우 그 문학론의 명칭은 '新世代 精神' '純粹文學' '本格文學' '第三 휴매니즘' '本領正系의 文學' 등으로 계속 변해가지만 그것의 실질은 <작가의 창조적 개성의 절대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관되고 있다. 그의 문학론은 문학을 '창작-작품-비평'의 전체적인 공간으로부터 작가의 창작 공간만으로 축소하여 문학 주체로서의 작가의 의미를 절대화한다. 그에게 "眞正한 創作 精神이란 作家의 主觀(個性, 運命)에서 빚어진 倫理的 要素와 神秘的 要素를 일컫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주관적인 '창작 정신'에 일종의 유사종교적인 신성성까지를 부여하는 문학관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주관과 실제 작품 사이를 매개하는 창작발상법을 강조하게 된다. 실제로 {소설 연구}에 수록된 창작론들은 그 주제와 필자를 막론하고 형상화의 기교보다 창작발상법의 설명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장편소설론}과 같이 외견상 장르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논문도 실상은 장편소설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동일한 모티브를 단편으로 전개시킬 것인가, 장편으로 전개시킬 것인가에 대한 발상법의 설명이다. 또 {심리적 묘사} 같은 묘사론의 표제 아래 인물을 설정하고 심리적 묘사를 창안해내는 방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작 정신의 강조에서부터 출발한 이같은 창작발상법은 어쩔 수 없는 논리화의 한계를 내장하게 된다.
便宜上 나의 얕은 經驗에 비추어 小說의 生成過程에 대하여 言及하고자 한다.
먼저 한 作家가 있어 그 作家의 資質과 思想과 感覺이 宇宙 現象에 對峙하고 있다. 이러한 때 作家는 두 가지 面으로 分裂된다. 하나는 宇宙 現象을 神의 位置에서 觀照하는 藝術家의 面이오. 또 하나는 自身도 宇宙 現象의 한 部分으로 人間作用에 加擔하는 生活人의 面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面은 常時 서로 密接한 關聯을 맺어 藝術家의 面은 生活人의 面에 影響을 주고 生活人의 面은 藝術家의 面에 資料를 提供한다.
小說이 처음으로 胚胎되는 地帶는 바로 이곳인 것이다. 이곳에서 作家의 一分身인 生活人이 形言키 어려운 煩惱 가운데 宇宙 現象에 휩쓸려 生活하는 가운데 어떤 思想의 一片이 또 하나 그의 分身인 藝術家의 純白한 心魂 가운데 烙印된다. 그리하여 烙印된 思想의 一片은 神秘한 靈感이 되어 作家의 마음 가운데 隨時로 괴로운 波動을 일으키며 싹이 돋고 가지를 쳐서 무럭무럭 자라간다. 이것이 小說의 胎兒인 것이다. 이 때부터 作家는 內部에 潛在하는 小說의 胎兒에게 形式을 附與하려는 熾熱한 血鬪를 開始하는 것이다.
{감각적 표현]이라는 논제에도 불구하고 창작발상법의 문제를 정열적으로 개진하고 있는 이 글은 전후 소설창작론의 성취와 한계를 잘 보여준다.
논자의 논리를 빌리면 남성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을 갖는 생활인의 <번뇌>가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 예술가의 <심혼>과 결합함으로써 창작의 발상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의 태아"가 나타난다. 이것은 창작의 발상을 우주의 기본적인 에테르(氣)인 음과 양이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를 산출한다는 동아시아의 유기체적 설명 모델을 통해 이해한 것이다. 데이비드 홀과 로저 에임스의 지적처럼 이 모델은 끝없는 '사이비과학'을 산출하게 만드는 1차적 우연성(linear causality)을 숙명적으로 내장하고 있다. 최초의 발상 상태를 음양의 결합으로 설명해버리면 소설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경험해야 하는 모든 발상과정이 객관적으로 진술하기 어려운 우연성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 놓이게 된다. 윗 글의 논자는 "소설의 태아에게 형식을 부여하려는 치열한 혈투"를 <감흥>을 추구하면서 <풍속>과 <시대의 색채>와 <인간의 전형>에 흥미를 가지는 과정으로 제시하지만 왜 그런 과정이 그런 요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윗 글의 논자에게만 국한된 논리적 결함이 아니다. 이러한 관념성의 원인은 작가의 주관적인 창작 정신을 강조하는 전후 소설창작론의 전제에 있다. 전후 소설창작론은 작가의 창조적 개성을 절대적으로 옹호한 결과 창작발상법과 작가의 가치관이 뒤섞인 논리적 착종 상태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가 무엇을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무엇을 생의 원점으로 삼고 살아가는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소설창작론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 영역을 각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면 전후 소설창작론에서는 창작발상법의 영역 또한 구체적인 설명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같은 관념성은 논리에 의한 객관화가 어렵다는 점에서 쉽게 "치열한 혈투" "사색과 집필과 고뇌" 등의 에피세트를 강변하는 근성(根性) 제일의 정신주의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식의 경험지상주의로 빠질 위험을 안게 된다.
2.2. 제도화 단계의 소설창작론과 창작발상법의 私事化
전후 소설창작론에 내재되어 있었던 논리화의 한계는 70년대와 80년대의 소설창작론들에서 상당 부분 극복된다. 이 시기에 문예창작론은 대학의 교육 제도 속에 확산되었고 중등교육에서도 적용 가능성이 타진되었다는 점에서 '제도화 단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예창작교육을 정규수업시간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되는 가운데 고등학교 교육에서도 '문예창작교육'의 문제가 거론되는 문교부의 3차-4차 교육과정기(1973-1987)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출간된 소설창작론으로 정한숙의 {소설기술론}(1973)과 구인환의 {소설 쓰는 법}(1982)을 들 수 있다. '문예창작론' 혹은 '창작 실기론'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논저들이 많았지만 특히 이 두 권은 한국소설의 풍부한 예증을 담은 이론의 내면화와 창작론의 논리적 체계화라는 관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또한 두 저자들이 각기 영향력 있는 대학들에 봉직하면서 대학 제도 속에 편입된 소설창작론을 연구하고 교육했다는 점도 이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먼저 정한숙의 {소설기술론}을 살펴보자. 기술(craft)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이 이 책은 소설 창작을 필요한 모종의 수공업적인 숙련을 요하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실제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이 "(현재의 소설 장르에 관한) 實態의 보고인 동시에 어떻게 하면 小說을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小說을 잘 쓸 수 있는가 하는 未來指向的 方法論"을 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소설 기술'의 의미를 직접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기술론}은 <Ⅰ. 소설기술론의 환경 Ⅱ. 소설기술의 정면(正面) Ⅲ. 소설기술의 측면(側面) Ⅳ. 소설기술의 현장(現場) >이라는 4부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본론에 해당하는 Ⅱ부와 Ⅲ부의 구분이다. 저자는 소설 기술에 있어서 보다 더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를 <정면>으로 규정하고 보다 부차적이고 세부적인 요소를 <측면>으로 구분한다. 주제, 인물, 플롯를 전자에서 다루고 시점, 거리, 배경, 패턴, 스케일을 후자에서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같은 구분은 1943년 브룩스와 워렌이 써서 한 세대 동안 전세계 대학의 초급 학년용 문학 교과서의 대명사가 되었던 {소설의 이해(Understanding Fiction)}의 구분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구조적으로 읽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플롯과 성격 등을 통한 구조 분석을 먼저 행하고 자연스럽게 주제가 극화되는 과정을 설명했던 {소설의 이해}와는 논의의 순서를 달리했다. 즉 소설에 있어서 가장 먼저 존재하는 것은 주제의식이며 어떤 주제를 발견하는 능력이야말로 작가의 기초적인 재능이라는 퍼시 러보크의 {소설기술론(The Craft of Fiction)}의 견해를 받아들여 주제를 최우선적으로 다룬 것이다.
이처럼 정한숙의 {소설기술론}은 50년대부터 수용된 미국 신비평(뉴크리티시즘)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창작론에 응용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책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소설문장론}(1973)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지하다시피 신비평은 작품을 어떠한 외재적 요인의 고려도 없이 '내재적'으로, 작품 자체로 이해한다는 문학이론이다. 이같은 신비평의 방법론은 문학사회학이 등장하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는 70년대에 이르면 순수한 문학 연구의 영역에서는 퇴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소설창작론에서는 이 {소설기술론}을 필두로 오히려 신비평의 방법론이 더욱 적극적으로 응용되고 확산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학 제도 속으로 편입된 문예창작론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경우 문예창작론은 애초부터 학문적인 고려에 의해 연구되고 그 뒤에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여 교육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청, 즉 문예창작학과의 설강이 먼저 있고 그것이 문예창작의 연구를 이끌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연구자들은 최대한 가르치기 쉽고 분석 항목이 많은, 즉 가시적인 지침이 많은 문학 이론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작품 자체의 분석적 읽기를 강조하는 신비평의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정한숙의 {소설기술론}은 이같은 신비평의 위험, 자칫 소설 창작의 실제적인 과정과 괴리되어 소설론으로 흐르기 쉬운 방법론적 한계를 실제 창작사례의 풍부한 예증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예증을 통해 신비평이 제시한 소설의 공학적 구성원리를 최대한 소설 창작의 전과정에 응용하고자 했던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애초에 독서 훈련을 통한 교양 교육을 위해 개발된 신비평 방법론의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설창작론에 응용된 신비평 이론은 이 책에서 창작발상법의 사사화(私事化)를 조장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저자는 주제의 선택과 관련된 창작발상법의 요체를 "主題는 動機에서 잉태되며 素材의 再構成 속에서 分娩된다"고 압축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 '동기'와 '소재의 재구성'은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가치관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작품의 구성요소에 연결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作品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이미 <고가(古家)>의 主題는 胎動했다고 봐야 옳다. 필재와 태식과 길녀라는 구체적인 人物을 설정하고 背景을 榮州 고을의 壯東 金氏 宗孫家로 잡고 6.25사변을 그들이 겪게끔 한 것이 主題의 設定과 더불어 온 플롯의 根幹이다. 空間的인 背景은 榮州 고을의 어느 古家요, 시간적인 배경은 6.25사변인 셈이다. 氏族 社會의 封建的 悲劇의 구현이라는 主題를 效果的으로 表出하기 위한 수단으로 6.25라는 충격적인 時間的 背景을 導入한 것이다. 이처럼 作品의 主題는 평범한 素材를 取捨하여 하나의 單一한 點을 中心으로 再構成하는 데서 비롯되어, 이것이 人物의 設定과 플롯의 조직과 三位一體가 되면서 비로소 定立된다.
위의 인용은 주제의 설정을 중심으로 저자의 작품 <고가>의 창작 발상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여기에서 제시된 것은 막 발상된 이야기가 아닌 이미 고착화된 이야기다. 저자는 어떻게 <고가>의 주제가 플롯과 인물과 배경과 연결되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소설 쓰려는 사람에게 궁금한 것은 왜 그런 이야기에서 "무슨 작품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느냐이며 왜 그런 세 인물을 설정하게 되었느냐이다.
다시 말해 주제를 구체화해야 하기 때문에 맞이하는 억제할 수 없는 의문의 순간, 주제가 막 플롯과 인물과 연결되려는 고뇌의 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유동의 순간으로부터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작가는 결정을 내리게 되고 펜을 들게 된다. 그리고 글을 쓰고 또 고치면서 점점 더 분명하고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창작발상법 논의는 바로 이같은 작가의 가치관과 충동과 주제 자체의 내용성이 상호작용하는 의문의 순간에 대한 해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신비평 이론을 응용한 소설창작론은 이런 의문에 대해 비(非)자각적이다. 여러 작가에 나타난 주제와 플롯과 인물의 결합 양상을 나열식으로 설명하는 {소설기술론}에서 이런 의문을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로 사사화한다. 그래서 작가에 따라 주제가 행동이나 설명이나 어조에 연결되어 표출되거나, 혹은 배경이나 분위기에 연결되어 표출되거나 모든 경우가 다 타당할 것이라는 감상적인 승인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입장을 더 밀고 나아가면 결국 최후의 결정은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감과 우연의 지배에 맡겨진다는 논리 무용론(無用論)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소설창작론은 별도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금방 걸작의 소재와 주제를 발견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천재에게 그 이후의 문학적 장치들을 조언해줄 때는 유용하겠지만 창작론의 학문적인 일반화와는 거리가 멀다. 전후의 소설창작론이 창작발상법을 작가 쪽으로 수렴했다면 {소설기술론}은 창작발상법을 작품 쪽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구인환의 {소설 쓰는 법}은 신비평의 방법론이 학계에서 충분히 비판된 뒤에 나타난 논저로서 이와 같은 한계에 대한 대안적인 모색을 보여준다. 저자 자신이 공저 {문학의 원리}(1969)에서 신비평을 소설 분야의 연구방법으로 수용 소개했던 주요한 연구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에 대한 남다른 이론적 각성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Ⅰ부에서 "왜 소설을 쓰는가?" "소설은 인생에 무엇을 발언하는가?" 등을 고찰함으로써 창작론의 고유한 영역에 다가간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소설가의 눈으로 현실을 체험하고 허구적인 상상을 통해 체험을 해석해야 한다. 이 책은 소설의 의미가 아니라 소설 창작 행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평 방법론의 단순 응용을 극복하고 있다.
이같은 검토는 Ⅱ부 소설의 장르적 성격 고찰에 의해 소설의 기능과 인식구조에 대한 연구와 만나면서 신비평이 결여하고 있던 사회적, 사상적 영역으로 심화된다. Ⅲ부의 작법론에서는 이같은 준비작업 위에 창작과정을 도표화하는 등 창작발상법에 대한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저자에 의하면 창작발상법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작가의 철학적 측면>이라 표현된 '주제의식에 의한 제재의 선택'이며 하나는 <미적 구조화의 측면>이라 표현된 '제재를 구조화하여 문체화하는 구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가지 측면 자체의 연구로 나아가지 않고 이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엽적인 습작능력의 설명으로 나아간다. 주제의식의 심화를 위한 "체계적인 독서에 의한 사상의 확립"이나 제재의 선택에 의한 "작가 노우트의 사용" 구상 과정에 등장하는 "플롯-시점-인물-배경의 선택" 등이 그것이다. 이는 신비평의 한계를 자각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대학의 초급 문학 교육에 주력했던 신비평의 이론적 스펙트럼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모처럼 창작의 철학과 소설의 장르론까지를 포회했던 저자의 체계화는 창작발상법의 영역에서 이론적인 심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창작 과정 자체의 연구가 아닌 창작을 위한 소양에 대한 훈계가 개입되면 그것은 단순한 '교본(敎本)'의 영역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같은 교본은 그것을 교수하는 작가에 따라 유효한 교육적 자산이 될 수 있겠지만 창작발상법의 영역을 결국 도제식 수업 속에서의 자연스런 깨달음에 맡긴다는 점에서 똑같은 사사화의 한계를 노정한다고 할 수 있다.
2.3. 제도 개편기의 소설창작론과 창작발상법 연구의 문제
정보화와 세계화가 진행된 90년대는 대학의 인문학 전반에 커다란 제도 개편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문예창작론은 확산과 위기의 양면적인 변화를 대학 제도로부터 받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양상은 문예창작론과 상보적 관계에 있는 기존의 문학 연구, 특히 국어국문학과의 현대문학 연구가 겪게 된 학문적 이념의 동요였다.
전통적으로 국어국문학과의 현대문학 연구는 자신의 정체성과 학문적 과제를 한편으로는 국학(國學)의 민족주의 이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사학 철학을 포괄하는 학제적 학문인 인문학의 인문주의 이념에서 찾고 있었다. 그런데 90년대의 시대적 변화는 이 두 가지 이념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영상 문화와 인터넷 네크워크의 발달이 만든 지구촌 환경과 그로 인한 민족주의 이념의 퇴색이다. 맥루한이 지적했듯이 인류의 관심을 부족 사회에서 근대 민족국가 사회로 전환시킨 것은 활자 문화의 세계,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였다. 인쇄된 책은 인류의 사고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까지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사물을 이해하던 인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문장을 따라 읽는 시각만의 선조적(線條的) 사유에 길들여졌고 콤마와 피리어드가 만들어내는 사유 과정의 분절(分節)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같은 단일 감각(시각)만의 새로운 사고는 인류에게 직접적인 대면 접촉에서 벗어난 추상화된 세계의 꿈을 대중화된 형태로 자리잡게 했다. 국가와 민족, 민족문화를 향한 꿈은 바로 이같은 변화의 산물이었다.
맥루한은 60년대 텔레비젼의 출현을 목도하면서 영상문화가 인류에게 청각, 촉각, 시각이 복합된 공감각을 부활시킬 것이며, 이것은 사고의 혁명을 불러와 인류를 민족국가로부터 부족사회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매체결정론이라는 편향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상당한 수준에서 현실적인 실현을 보게 되었다. 지구촌(Grobal Village)이란 말의 강조점은 '촌락'에 있다. 인류는 근대 이후의 민족적 이상을 포기하고 부족촌락 시대의 의식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민족국가는 그 사회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세계화된 시장의 일개 관리자로서 '전자군중'이라 불리는 투자자들의 유치를 주임무로 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민족주의 이념의 퇴색과 더불어 인문주의 이념 역시 비슷한 의미 박탈에 직면하고 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정부의 위촉으로 공동연구에 참여한 7명의 연구자들은 현재의 제도적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인문학은 인문학 본연의 보편주의와 연결될 학문적 필연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제출했다. 이들은 그 이유로 다섯 가지 위기 조건을 들었다.
첫째 외부적 조건으로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둘째 내부적 조건으로서 문(文), 사(史), 철(哲)의 전문화는 학문적 내용의 파편화를 가져와 스스로의 사회적 적합성도 인간적인 매력도 잃게 되었다. 셋째 지성논리의 변화가 거대이론의 종언으로 예시되었다. 넷째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훌륭한 저자들에 의해 인문과학 이상으로 인문화되었다. 다섯째 전반적인 학문 경향의 계량화, 분석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문 사 철의 질적 언어보다 심리학과 사회학의 양적 언어에 의해 구성하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대학 개혁'은 이같은 인식의 정책적 반영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시대 인식은 90년대 문학 연구의 안팎에서 진행된 제도 개편의 논리를 살펴보기 위한 편의상의 요약에 불과하다. 영상문화와 인터넷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에 대해 가해진 매체 결정론 내지 기술 결정론이라는 비판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 민족국가가 무력화되고 민족문화가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그같은 세계화를 떠받치고 있는 금융자본주의가 계속 확대될 것이라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인문학의 위기 역시 단순하게 주장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대학은 본래 교육 목표를 달리하는 여러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는 멀티버시티(Multiversity)이다. 지식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며 자유롭고 폭넓은 인생관을 옹호하는 인문학이 없다면 대학은 또 하나의 영리기관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 역시 강력하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바와 같은 90년대의 위기 담론들은 전통적인 문학 연구의 영역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이해인문학에서 표현인문학으로>라는 구호는 90년대 대학 인문학 교육의 자구 노력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이제까지의 문학 연구는 작품 읽기 중심의 '이해'에 치중한 인문학이었다면 앞으로의 문학 연구는 쓰기 중심의 '표현'에 치중한 인문학이어야 한다는 입장이 문학이 아닌 철학쪽에서 먼저 제기되는 형편이다.
90년대 제도 개편기의 소설창작론은 이같은 상황 속에 나타났다. 아직 진행형에 있는 이 논의들을 정리하여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창작발상법의 영역에서 앞서 비판했던 작가중심주의의 관념적인 강조와 작품중심주의의 사사화를 극복한 성과들이 많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송하춘의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1993), 현길언의 {소설쓰기의 이론과 실제}(1994)는 그동안 소설창작론의 전개과정에서 이루어진 연구성과들을 온축하고 있는 중요한 논저라고 여겨진다.
두 논저는 문학이 제도 교육의 차원을 넘어 사회에서의 역동적인 자생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창작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작가와 창작에 대한 지나친 신비화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당대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때문에 이 논저들은 여러 가지 개념들을 동원하여 창작발상법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화를 시도했다.
먼저 송하춘은 '실제로 소설을 써나가는 사람의 실질적인 관심'을 강조함으로써 신비평의 영향으로 기법을 강조하던 전대의 창작발상법 논의를 극복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 인물이나 사건이나 배경과 같은 세부사항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며 적절한 예화(例話)를 미리 제시하고 그 예화와 결부시켜 창작 발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발상법의 첫 단계로 제시하는 것은 <심리적 긴장을 동반한 관찰>이다.
어떤 화가, 내 유년의 추억, 눈 내리는 도시, 외사촌누나, 내 아내와 같은 대상들은 나로 하여금 소설을 쓰고 싶도록 생각을 일깨워주었으므로 참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놓고 보면, 그것들이 나한테 어떤 생각을 불어넣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소설적인 생각을 찾아 헤매던 끝에 우연히 그것들과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 점에서 그것들은 내 심리적 긴장과 만났으니까 비로소 나한테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중략) 발상이란, 이와 같이 나와 대상과의 특별한 만남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만남을 통한 상상의 불씨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사물 앞에 긴장하고 또 긴장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같은 긴장을 동반한 관찰을 통해 소설을 창작할 수 있는 동기(모티브)를 발견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최초의 모티브가 또 다른 모티브를 낳는 동기화의 과정이 나타난다. 작가는 소재의 객관화와 소재의 내면화를 반복하면서 동기화 과정을 확대하고 부풀려서 마침내 하나의 구상을 완성해간다는 것이다. 채만식, 박경리, 황석영, 그리고 저자 자신의 예화를 통해 해설되는 이같은 설명은 창작발상법의 논리적 일반화라는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송하춘의 창작발상법 연구는 이같은 논리적 일반화를 위해 창작 발상의 중요한 문제들을 축소 내지 배제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은 창작 발상의 보다 근원적인 단계인 <창조적 충동>의 문제이다. 창작의 발상은 항상 지극히 모호하며 작가 스스로도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일종의 육감, 내지 예감에서 출발한다. B. 기셀린의 설명을 빌리면 낱말의 소나기로 응결되어 있는 희미한 관념의 구름에서 시작하여 혼란된 상상의 서스펜스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적절한 귀납적 정의가 찾아오는 것이다.
창작 발상의 과정에는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조정되는 <의식적 창작>과 자연발생적이고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창작>이 동시에 작용한다. 관찰과 동기의 발견, 동기화, 구상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송하춘의 창작 발상법 이론은 전자에 대한 해명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윤리와 관습, 터부 등 이미 확정된 영역을 고집하는 의식의 보수적인 성격에 지배되며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기피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창작을 단순한 형식적 완성으로부터 낡은 방식을 초월하는 새로운 예술적 질서의 창조로 이끄는 것은 주관적인 심층 심리에 의지하는 후자의 영역인 것이다. 창작 발상법의 연구에서 이같은 무의식적 창작의 영역은 논리화되기 어렵지만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현길언의 연구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자각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현길언 역시 신비평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전대 소설창작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재 발견과 선택, 주제의 구상과 제재의 재구성에 이르는 창작발상법의 영역을 자세히 탐구하면서 소설 쓰기의 계획과 실천에 풍부한 지침들을 정리해냈다. 이같은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무의식적 창작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소재의 선택은 애초부터 의도적이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것은 창작이 작가에게는 논리 이전의 충동이나 영감을 동반한 욕구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략) 이 경우에 작가의 세계관은 이미 의도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 의도하기는커녕 의식하지도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세계에 대한 그 나름의 안목이 잡혀 있음에 틀림없다.
현길언에 따르면 무의식은 창작 발상의 모든 단계에 작용한다. 선택한 소재에 대한 자기 비평의 과정, 체험의 내면화 과정, 나아가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무의식의 도움을 받아 소설의 구상을 수행한다. 창작 발상에 수반되는 이같은 자연발생적인 무의식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기법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던 전대 창작론의 수준을 극복한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현길언의 연구는 이같은 인식으로부터 곧바로 창작의 기교적인 차원으로 넘어간다.
'소설 구상하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장은 < ① 개요 만들기 ② 에피소드와 예비적인 플롯 정하기 ③ 인물 설정 ④ 이야기를 전하는 틀 전하기 ⑤ 문체 >로 이루어진, 철저히 실무적인 지침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런 지침들은 주제를 구체화하는 단계적인 작업들을 이론화했다는 점에서 초보적인 습작에 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소설가들이 이런 창작발상법을 수행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창작발상법의 실무 지침화는 시나리오 창작을 중심으로 한 영상서사문학에서 널리 채택되는 방법이다. 위의 구분은 그대로 < ① 시놉시스(synopsis) 만들기 ② 장면 배열표(S#-arrangement) 만들기 ③ 인물분석표(character analysis) 만들기 ④ 개요대본(treatment) 만들기 ⑤ 세트 스케치(Set sketch) >라는 시나리오 창작의 단계를 연상시킨다. 수십명이 모여 만드는 영화에서 시나리오는 그 자체가 작품의 밑그림이다. 감독에 의해 첨삭되고, 조감독 등에 의해 콘티로 만들어지고, 촬영감독에 의해 간섭받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창작 발상 단계의 생각들이 확인되어야 하기에 이같은 단계마다의 기술적인 메모가 필요했다.
그러나 영상서사문학과는 다른,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장르인 소설의 창작발상법에 이런 단계화를 시도하여 카드를 만들고 메모를 모으는 것은 자칫 소설 창작의 본질적인 면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소설은 작가의 인생관과 가치관, 좌절된 욕망 등이 서사의 형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영상서사문학에서는 지워지기 쉬운 창작 주체의 실존적 존재를 훨씬 더 크게 반영하게 된다. 소설 창작론은 특정한 선택과 구상을 하게 되는 작가의 가치관/인생관/욕망의 논리적 구조를 탐구해야 하며 발상의 순간 사건의 형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언어들의 장(場)을 연구해야 한다는, 그 쟝르에 고유한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매 단계마다 저자가 권하고 있는 카드화 방식의 자유작문(free writing)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의 발상은 이미 씌어진 글을 통해 귀납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설사 자신의 글이며 자신의 창작 체험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씌어져버린 작품(사실)과는 다른,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사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건(event)은 단순한 사실(fact)과도 사고(accident)와도 다른 사건 자체의 의미작용이 있다. 창작발상법 연구는 이같은 의미작용의 논리적 구조를 밝혀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송하춘, 현길언의 연구는 현 단계에 이르는 소설창작론 연구의 성과를 온축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창작발상법 연구의 통시적 고찰 위에 기존의 연구가 결여하고 있는 '창작에 있어서의 무의식의 개입'과 '의식적 창작과 무의식적 창작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같은 검토로부터 일정한 이론화를 의도하면서 작가의 가치관 및 인생관, 욕망 등과 긴밀히 연관되는 바람직한 창작발상법의 모델을 모색하게 되겠다.
3. 창작 발상법에 있어서의 의식과 무의식
3.1. 영감의 질서화 - 창조적 의식화의 논리적 구조
자신의 창작 과정을 회고한 개별 작가들의 논문, 수필, 서간문, 작품의 서문 등을 검토하면 창작발상법은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존 피일 비숍처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정신이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기 전에 곧장 책상 머리로 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프란츠 카프카처럼 자신은 한밤중의 불면증이 만드는 병적으로 과민한 기억력 때문에 소설을 썼다는 사람도 있다. D. H. 로렌스처럼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세 번이나 전체적으로 수정해서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P. B. 셸리처럼 작품을 씀과 동시에 영감이 사라지기 때문에 수정한 작품은 생명력이 없는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는 이런 천차만별의 진술들에서 공통적으로 증언되는 창작 발상의 두 가지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영감' '창조적 직관' '창조적 충동' 등의 말로 표현되는 무의식의 영역과 '창작 의지' '계획적 구상' '목적의식' 등의 말로 표현되는 의식의 영역이다. 모든 창작의 발상에는 자동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전자와 의식적이고 조작적인 후자가 동시에 작용한다. 낭만주의 문학이 전자를, 사실주의 문학이 후자를 강조했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작가들이 창작 발상에서 이 두 영역의 공존과 상호협력을 확인해주었다.
창작의 발상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의식 없이 순전히 영감만으로 이루어진다면 작가의 의식은 정신병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창작의 발상이 순전한 의식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외견상 정상적인 것에만 판단을 작용시키려드는 의식의 보수적인 성격이 자유롭고 무정형한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새로움과 독창성을 억압하게 될 것이다.
기존의 소설창작론이 창작발상법의 논의를 사뭇 어렵게 만들었던 것은 이같은 두 가지 영역 가운데 하나에만 편의적으로 주목했다는 사실에 있다. 전후의 소설창작론이 전자의 영감과 직관, 창조적 개성을 강조하여 논리적으로 보편화되기 어려운 개념들을 남발했다면, 제도화 시기와 제도 개편기의 소설창작론들은 후자의 구상 방법, 관찰과 동기화, 발상의 지침 등을 강조하여 '새로움을 향한 모험'이라는 창작 본연의 자유로움을 억압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창작의 이론화를 위해 요청되는 자세는 이같은 편의주의적인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기존의 소설창작론들은 학습작가들로 하여금 빨리, 그리고 자각적으로 훌륭한 소설을 창작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 결과 모든 이해관심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한 이론적 엄밀성이 미흡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창작과 연구 양면에 걸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소설창작론의 가능성이 약화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반성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연구자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적 창작과 의식적 창작이 한 작가의 창작 발상에서 어떻게 공시적으로 결합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며 동시에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감의 창작에 의한 질서화, 무의식에 대한 창조적 의식화가 어떻게 통시적으로 발생하는가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구조화는 정신분석학과 후기구조주의를 결합시키는 거대한 방법론적 탐색으로 말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다. "작가의 창작력은 그 인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의 힘이 의식의 매개를 통해 문학작품 속에 드러나는 과정 전체에 대한 해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구체적인 양상이 아닌 논리적 구조의 형식적인 요건에 한정시키고 그것의 검증 또한 '이광수의 {유정} 창작'이라는 극히 제한된 사례에 한정시키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창작 발상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그 창조적 의식화의 논리적 구조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창작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사건의 영역에 속한다면 머리 속에서 작품이 구상되는 창작 발상은 특히 더욱 순간적인 사건이다. 이렇게 순간적인 사건은 전통적인 문학 연구의 관점에서는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문학 연구는 기존의 다른 학문 활동과 마찬가지로 진리 이해를 목표로 하는 명제 체계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왜 C인가?"의 물음에 대해 A라는 법칙과 B라는 상황 조건에 의해 법칙 연역적으로 C라는 결론 명제를 추리하는 설명의 체계인 것이다. 여기에 비해 문예창작학에서 창작 발상법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수행적 표현학의 성격을 갖는다. 즉 A라는 표현 주체와 B라는 상황 조건에 의해 형상 유출(abduction)적으로 C라는 창작물을 산출하는 수행적 지식의 체계인 것이다.
<문학 연구> <문예창작 연구>
A
/ │ \ a1 a2 a3
a1 a2 a3 (수평적 동일성)
(수직적 유사성)
소문자 a로 표시된 전통적인 문학 연구들에는 탐구해야 할 결론 명제를 검증할 수 있는 원래의 연구 대상, 대문자 A가 존재했다. 그것이 작가이든 작품이든 문학 연구자는 자기가 탐구하는 대상을 얼마나 실제에 가깝게 추리하여 설명하느냐를 자기 학문 활동의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나 창작발상법의 연구에서는 연구 대상의 실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창작이라는 사건 자체는 연구하는 시점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연구자는 원래의 연구 대상과 자신의 연구 결과가 갖는 유사성(ressemblance)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창작 행위들이 갖는 상사성(相似性, similitude)에 의해서, 즉 그들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척도로 연구를 진행한다. 때문에 창작발상법 연구는 모두 참조해야 할 원본이 없다는 점에서 소문자 a만이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창작 발상법의 연구는 특정한 작가에게 실제로 나타났던 창작 발상의 실재성이 아니라 각각의 창작 발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창조적 의식화의 논리적 구조에 집중된다. 이같은 탐구의 방향성은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창작 행위의 실제적인 과정과도 일치한다. 앞서 말했듯이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유정}(조선일보 1933. 10. 1. - 1933. 12. 31.)의 예를 들어보자.
창작의 발상은 실제로 그것이 나타날 때, 예를 들어 '1933년 9월의 어느날 밤' '이광수'라는 작가가 자신의 서재에서 팔짱을 끼고 {유정}이라는 소설을 구상하고 있을 때는 현실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쓰고 있는 {유정}을 잠시 잊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신문사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즉 특정한 시공간에 구현되지 않는 순수 사건으로 존재한다. 이같은 순수 사건으로서의 창작 발상이야말로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에 내재하는 논리적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광수가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유정}의 이야기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순수사건이다. 매우 자전적인 주인공 '최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제의 현실에서 작가 이광수가 시베리아의 눈벌판으로 달려가 병들어 죽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창작 발상의 대상 역시 특정한 시공간에서 구현되지 않은 순수 사건인 것이다. 이같은 창작과 창작 대상의 존재론적 성격을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창작 주체
창작
창작의 대상
① 작품을 구상하지 않을 때
순수 사건
순수 사건
② 작품을 구상할 때
사건
사건
③ 작품을 집필할 때
사건
사물
④ 작품을 다 썼을 때
순수 사건
사물
창작발상법은 이처럼 순수 사건으로,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창작과 창작의 대상을 실제의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문학 비평에서도 널리 승인되어 왔다. 정신분석비평 혹은 원형비평의 관점에 설 때 작가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무의식 또는 원형의 샘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다른 일상인들이 감지할 수 없는 심리적 기제와 민감한 감수성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 시대 그 사회의 구성원 전체의 의지와 선택을 자기 개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바꾸어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학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향하는 꿈"이며 그같은 꿈과 정신의 결합은 현실의 사건 이전에 이미 논리적 구조로서,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소설이 열어 보여주는 세계는 실재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실재 세계의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경험에 질서와 해석을 부여한 하나의 '가능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한 시대의 무의식이 한 작가를 통해 그 시대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대적 모순과 이율배반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각과 무의식적인 해결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예컨대 이광수의 {유정}에 대한 창작 발상은 실제의 창작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그 시대의 가능성의 장(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 발상법 연구는 바로 그같은 가능성의 논리적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광수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유정}의 여주인공을 24살의 여학교 선생으로 설정할 수도 있었고 20살의 아름답고 순결한 기생으로 설정할 수도 있었으며, 30살의 혁명가의 아내로 설정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설정들은 이광수가 그런 인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메모지에 아무 생각없이 끄적거리는 순간, 기호로 전환되는 그 순간 각각 가능성1과 가능성2와 가능성3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같은 가능성들은 각각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미셸 푸코는 이같은 가능성들의 장을 '언표 출현의 장' 혹은 '언표장'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런데 작가 이광수는 이 모든 가능성들을 배제하고 가능성4를, 즉 동경 유학을 하고 있는 19살의 여학생이요 최석의 집에서 기식하고 있던 고아인 남정임을 여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이같은 인물의 설정은 작가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던 많은 심리적 요소들의 순열 교환과 결합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즉 작가가 자기 개인의 복잡한 딜레머와 자기 시대의 해결불가능한 이율배반에 맞서서 이야기라는 양식을 통해 하나의 가능한 서사적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때문에 소설 속에 하나의 인물이 출현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사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연계되고 계열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이같은 인물이 설정되고 나면 그 때까지 존재했던 구상과 앞으로의 소설 쓰기, 그리고 소설의 결론까지 전부 의미를 달리한다. 남정임의 선택은 애초에는 완전히 계산되지 않은, 우발적인 발생을 통해 솟아난 사건 즉 <우발점>이었지만 일단 선택된 후에는 하나의 <구성점>이 된다. 그것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 계열 안의 어떤 자리에서 사건으로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창작 발상의 논리적 구조를 이루는 이상의 개념들을 학습작가들을 위한 창작 교육의 지침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언표장 전체의 이해.
창작의 발상은 아직 사건화되지 않은 순수 사건들의 영역, 논리적 가능성의 장인 언표장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이 때문에 작가는 먼저 자신이 떠올린 언표장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작가 이광수는 주인공 최석의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가 왜 24살의 여학교 선생이나 20살의 기생이어서는 안되며 자신이 양녀처럼 길렀던 19살의 여학생이어야만 하는가를 가장 먼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작가는 박식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언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적 담론 행위들이 조직되고 배제되는 그 가능성의 장 안에서 박식해야 한다.
2) 특이성
창작의 발상 과정에서 선택되었든 무시되었든 모든 가능성들은 그 하나 하나 특이성을 갖는다. 사건은 물질을 통해 이 특이성을 구현한 것이다. 에피소드를 선택하고 재구성하는 창작발상법은 그 창작 체험을 미리 지배하는 이 특이성들의 논리적 체계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작가는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작가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이 작가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작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특이성(가능성)의 장 안에서 그 논리적 체계의 지배를 받으며 창작을 한다.
이러한 특이성들의 체계는 개별적인 경험을 넘어서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갖는다. 창작발상법을 배우는 학생들도 현실의 재현이나 반영으로서의 창작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을 가능케 하는 특이성의 장 안에서 그 논리적 체계에 따라 수많은 작품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3) 계열화
모든 사건은 반드시 다른 사건들과 연계되어 있을 때만 사건이 된다. 여주인공 남정임이 설정된 것은 최석을 아버지인 동시에 연인으로 사랑하는, 즉 부성 고착(father-fixation)의 절대적 애정을 남자에게 바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 남정임은 그녀의 과거에 존재하고 있는 기나긴 사건의 계열과 함께 선택된 것이다. 남정임이 선택되면서 최석과 그녀의 진짜 아버지인 남백파 사이의 우정,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남백파의 죽음, 정임을 조선으로 데려온 중국인 어머니의 죽음, 정임의 최석의 집에서의 기식이 함께 선택된다. 즉 작가의 머릿속에만 있었던 "19살의 여주인공"이라는 순수 사건은 다른 사건, 즉 3.1운동 이후의 식민지 지식인들, 그 몰락과 잔존, 식민지 체제 아래 교육받는 새 세대의 생장, 새 세대의 금욕주의 등과 계열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선택되었고 사건화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소재의 재구성(再構成)이란 순수 사건과 사건 사이의 재구성인 것이다.
4) 우발점
계열화에서 보았듯이 사건이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 계열들 안의 어떤 자리에서 사건으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 안에서 완전한 의미를 부여받은 솟아오름이 아니라 우발적인 발생을 통해 생겨난 사건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의 우발점이 솟아오르면 그 때까지 존재하던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인생 전부가 의미를 달리한다. 이같은 우발점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소설적인 긴장을 부여할 때는 흔히 서사구조론에서 말하는 구성점(plot point)이 된다. 구성점은 이야기의 여기 저기를 옮겨다니며 구조를 역동화시킨다.
3.2. 창작 발상법의 의의 - 해결불가능한 모순의 서사적 해결
우리가 창작 발상법 연구의 예화로 이광수의 {유정}을 든 것은 이 작품이 작가의 무의식과 그것의 창조적 의식화라는 관점에서 매우 두드러진 예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유정}은 작가인 춘원이 자기 일생일대의 걸작으로 자부하며, 가장 집요한 애착을 보였던 작품이다. 이 점 {유정}은 작가와 후대의 연구자들이 갖는 관점의 불일치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무정}(1917) {흙}(1933) {사랑}(1939)을 고평하는 후세의 연구자들과는 달리 춘원은 {유정}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무정}이나 {흙}보다 훨씬 훌륭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외람한 말이지만 만일에 내 작품 중에서 후세에 남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정}일게요. 그리고 또 외람한 말이나 외국어로 번역될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유정}이라고 생각해요"하는 술회도 그 하나의 예이다. {유정}이 완결된 지 4년 뒤, 냉정한 시간적 거리를 가지고, 그것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하나 하나 거론하면서 비교하여 말한 이같은 언급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유정}을 자신의 고유한 내면적 진실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유정}은 그 내용부터가 문제적이다. 죽음이 아니면 자신의 애정을 다스릴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자기 파괴의 테에마는 비단 {유정} 뿐만이 아니라 {재생} {개척자} {사랑의 다각형} {애정의 피안} 등에 두루 보이는 현상이다. {재생}의 순영, {개척자}의 김성순, {사랑의 다각형}의 송은희, {애정의 피안}의 강진표와 김혜련은 모두 종국에 죽음을 선택한다. 이것은 춘원 소설에 나타난 애정이 주인공, 특히 남자 주인공들의 계몽적인 도덕률과 양립하기 힘든 운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정}은 남녀 두 주인공 모두를 철저히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어 사회로부터의 완전히 절연시키고, "백설이 애애한 시베리아"의 오지 삼림속까지 몰리고 붸긴 끝에 죽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 격렬하고 처절한 자기 파괴의 양상이 다른 어느 소설과도 변별되는 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유정}의 배경에 깔린 작가의 절박한 심정적인 위기의식과 창작동기의 순수함을 의미한다. {유정}의 문학적 가치를 의심하는 김윤식 교수도 {유정}이 작가 춘원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한 작품",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1933년 후반기 춘원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동북사변, 상해사변으로 치닫는 일촉측발의 동북아 정세에 따라 민족운동의 입지는 매우 협소해졌다. 도산까지도 4년 언도를 받아 복역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춘원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룰 사업이라고 생각하던 동우회운동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뚜렷한 방향성이 잡히지 않았다. 또 춘원은 이 무렵 몸담고 있던 <동아일보>를 나와 <조선일보> 부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함으로써세간으로부터 '배신행위'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 유학에 학비를 대주고 상해에서 귀국 직후 사회적으로 역경에 처해있던 춘원을 다시 등용시켜준 인촌 김성수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이라는 것이었다. 문화계 전체가 동네 골목만 하던 이 시절엔 이 역시 춘원에게 강한 부담으로 작용한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엔 여자관계에 대한 세상의 오해도 심했던 것 같다. 박계주 등이 증언하는 여류시인 모윤숙을 둘러싼 연문(戀聞)이 그것이다.
특히 중년에 찾아온 사랑과 수양동우회 운동을 통해 자신이 강조해왔던 도덕 사이의 모순이 해결불가능한 고통으로 춘원을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까지 춘원은 "소극적으로는 반성으로 자기의 정신을 타락하지 않게 주의하며, 적극적으로는 수양으로 우리의 정신을 발전케 하는 것"이라는 수양론을 주장해왔다. 개인이 이같은 자수자양(自修自養)의 윤리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역설했던 준비론 사상이었다. 그러나 민족 내부의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이같은 준비론 사상의 모랄은 전세계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결 국면으로 치닫는 30년대 중반의 시점에선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양이며 누구를 도덕인가는 질문에 대해 근대적 시민의식으로의 고양을 기대할 수 없는 노예의식의 수양, 노예의식으로서의 도덕이라는 비판이 돌아올 수 있다.
이같은 모랄 감각의 동요 위에 결혼생활의 동요가 겹쳐졌다. 그를 스승으로서 존경하면서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명민한 20년 연하의 애인이 생긴 것이다. 춘원은 모든 사회적 명망을 버리고 이혼을 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애인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유정}을 탈고한 직후에 있었던 아래의 대화는 {유정}을 창작하던 싯점에도 계속되었을 번민의 일단을 보여준다.
"전 선생님을 햄릿으로 알았는데 오필러 같은 연약한 분이시군요. 오필러는 절간으로 가라고 햄릿이 그랬거든요. 햄릿이 지금 선생님을 만나신다면 그 바이칼 호숫가 움막으로나 어서 피신하라 할 거예요."
춘원 선생은 소리를 내어 웃으셨다.
"{유정}이 실패했군."
"그럼요. 그까짓 모함을 못 이겨서 죄도 안 지은 사람이 바이칼의 눈 벌판으로 왜 달아날까요? 너무 비겁해요. 그리고 말입니다. 전 여주인공 남정임이가 보기 싫어요. 자기가 무슨 순교자나 되는 듯이 최석의 시체를 안고서 울고불고."
"남정임 같은 여자가 하나 있었으면 해서 써 본 거지. 그래도 내 일생에 속임없는 소설을 하나 써 보았다면 {유정}일 거야. 그 소설은 아마 약한 사람의 참된 고백인지도 모르지. 윤숙이 마음이 후련하도록 말을 해 봐요."
"선생님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또 무슨 무서운 말을 할지 몰라요. 이제 가 보겠습니다. 저도 더 나이 들고, 선생님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더 하겠어요."
이처럼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신(處身)의 막다른 골목, 시대의 모순과 맞물린 자신의 모순 위에서 {유정}의 창작 발상이 이루어졌다.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해결불가능한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을 찾는 인간의 잠재의식은 현실속에서는 하나의 문제로 존재하는 요소를 창작의 언표장 속에 분리시켜 하나의 가능한 해결방식을 찾는다.
이희춘이 분석했듯이 {유정}의 주요 갈등은 최석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도덕을 지향하는 초자아(Super-ego)와 정임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본능(id)의 사이의 대립이며 이같은 대립은 최석과 정임 사이에 부녀에 준하는 관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석을 향한 정임의 애정 역시 부성(父性)에 대한 갈망과 이성(異性)에 대한 갈망 사이를 동요한다. 이렇게 볼 때 {유정}의 주제는 외디푸스적 상황 속에 놓인 <도덕>과 <애정>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딸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남정임의 변화는 외디푸스적 상황에 근접되고, 이같은 근접은 최석과 정임 양자에게 죄의식을 낳아 시베리아행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자기 파괴를 결과한다.
<이항대립 1> 아버지의 의무 < > 남성의 사랑
(도덕) (애정)
이같은 <이항대립 1>은 그 둘 모두가 작가가 자신의 존재 근거로서 지켜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의 대상과 결합되어 있기에 해결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다. <도덕>의 항은 교육자, 소설가, 언론인이라는 존경받는 공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춘원의 현재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다. 한 편 <애정>의 항 역시 평생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살고자 했던 '정(情)의 인간' 춘원의 자기정체성과 맞물린, 강렬한 욕망의 대상으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유정}은 <유정(有情)함> 자체가 얼마나 인간적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묘사하는 대신 <유정함>을 곧장 <선인가, 악인가>의 문제로 환치시켜버려 이야기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심각하게 비약한다.
작가 현실의 이율배반을 이루고 있는 이같은 <이항대립 1>은 창작 발상의 과정에서 각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분리를 통해 하나의 가능한 서사적 해결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즉 <도덕>의 항은 긍정적인 가치의 요소와 부정적인 현실의 요소로 분리되고 <애정>의 항 역시 긍정적인 가치의 요소와 부정적인 현실의 요소로 분리되는 것이다. 이 때 <도덕>의 항은 인격자로서의 시민적 윤리가 표상하는 '사회적 선(善)'와 부르조아적 신분이 조장하는 퇴폐적 위선적 속물적 속성의 '이기주의'로 분열된다. <도덕>의 반대항인 <애정> 또한 그 각각의 부정항으로서 '정직한 사랑'의 가치와 사랑의 일방적인 추구가 결과하게 될 '자기 파괴'의 현실로 분리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항대립 2>에서 각각의 항목들은 춘원이 욕망하는 서로 다른 가치들을 시사하면서 원칙적으로 4가지 주요한 논리적 결합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항대립 2>
S < > -S
사회적 선 ↖ ↗ 정직한 사랑
↙ ↘
-s < > s
이기주의 자기파괴
이렇게 분리된 각각의 소인들은 {유정}의 서사 전개 과정에서 구체화되며 가능한 이상적인 결합을 추구하게 된다. 주인공 최석의 내면은 대문자 S와 대문자 -S, 즉 사회적 선과 정직한 사랑의 이상적인 종합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상적인 종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이 아니라 가능한 해결의 서사적 세계인 소설은 그 대안으로 대문자 S와 소문자 S의 종합, 즉 사회적 선과 자기 파괴의 종합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심층 심리 속의 이기주의가 작품 속에서 도덕적 영웅주의로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정}의 결말은 최석이 죽고, 정임은 최석이 머물렀던 시베리아의 여관에서 소식이 끊어져 죽음이 암시되면서 끝난다. 두 사람의 삶은 결국 '도덕적인 자살자'의 이미지로 마감된 것이다. "깨끗한 교인이요 청렴한 교육가"를 자처하던 최석에게 애정은 곧 극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연애감정은 곧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인간적인 애정의 감정이 곧 죄의식으로 통할 때 주인공이 택할 수 있는 궁극적인 선택은 자기 파괴밖에 없다.
이같은 죄의식은 정신적 귀족주의와도 통한다. H. 오글러는 도덕적 죄악감의 표현은 상당 부분 "나도 고귀한 인간이다"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죄의식의 표명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에게 부과하는 처벌의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죄의식 표명자의 영웅성도 커지는 것이다. {유정}에서 그같은 영웅성의 표출이 시베리아로의 도피이다. 최석이 시베리아로 도피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정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도덕과 양심을 지키려는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딸 같은 정임에 대해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작품의 미적 가상을 통해 승화된 이같은 도덕적 영웅주의는 실상 그 심층심리에 깔려 있는 이기주의의 변형이다. 춘원의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남정임과의 결합을 피한다. 왜냐하면 '남정임'이라는 여주인공의 심층적 의미는 바로 춘원이 과거의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의 인격화였던 것이다. 40대 중반의 최석이 사랑하는 20대 초반의 남정임은 1930년대의 춘원과 1910년대의 춘원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대립의 미적 가상(假像)이다. 젊은 춘원(남정임)은 늙은 춘원(최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동화되고 싶어한다. 후자는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 안정을 다 이룬, 꿈에도 그리는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반면 최석은 남정임을 사랑하지만 동화되기를 회피한다. 전자는 향수 속에 추억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난과 병고와 외로움이 낱낱이 아로새겨진 몸서리나는 고통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같은 논리적 가능성 때문에 도덕과 애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내면의 혈투를 치르던 최석은 결국 죽음의 충동을 쫓아 백설이 애애한 시베리아의 삼림지대로 들어가서 죽는다. 춘원은 옴짝달짝할 수 없는 현실의 곤경과 피로에서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완전한 휴식의 서사를 통해 상상적인 해결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것을 다루지만 문학 창작은 가능성의 체계를 다룬다. 이광수의 {유정}을 통해 제시한 이 모델은 객관적인 현실에서 인식되는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라 작가의 욕망이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한계점을 드러내주는 분석장치이다. 바람직한 창작발상법은 작가에게 가능한 언표장의 모든 사물이나 기호 속에 논리적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특이성들을 최대한 역동적으로 조직화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창작발상법은 더 이상 한갓된 기법의 차원이 아닌 작가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드러내고 그 작가로 하여금 가능성의 장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되게 만드는, 진정한 자유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4. 결론
지금까지 본 논문은 해방 이후 한국현대소설 창작론의 전개과정을 창작발상법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바람직한 창작방법론의 이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 결과 이론화의 시도가 많지 않았던 한국현대소설 창작론에서도 선학들의 고심이 잉태한 소중한 연구성과들이 축척되어 있음을 깨달았고 창작발상법 연구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소설사에 있어서 창작론은 작가의 창조적 개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했던 전후 소설창작론에서 시작되었다. 이같은 전후 소설창작론은 그 사상적 기반의 취약성 때문에 모처럼 강조한 창작발상법에 과도한 관념성과 비논리성을 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제도화 단계의 소설창작론은 신비평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창작론에 응용하는 양상을 띄었다. 그러나 대학 교양 교육의 독서 훈련을 위해 개발되었던 신비평의 분석적 방법론은 소설창작의 발생론적 단계에 대한 설명에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 결과 창작발상법 연구가 해명해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작가의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돌아가게 되었던 발상법 논의는 전반적인 사사화의 경향을 보였다. 90년대 제도 개편기의 소설창작론은 전 시대의 연구가 간과했던 창작발상법 문제를 깊이 다루어 창작에 실질적인 지침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은 일천한 연구사의 한계 때문에 충분한 이론적 검토를 시도하지는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논문은 새로운 학문관에 의해 문예창작의 연구가 기존의 문학 연구와 변별되는 지점을 살펴보고 연구의 실질에서 갖는 유사성과 상사성의 차이점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본 논문은 창작발상법이 순수사건, 논리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창작 행위를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고 가능한 창작발상법의 이론적 유형으로 언표장 전체의 이해, 특이성, 계열화, 우발점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이같은 논리적 가능성의 장은 비단 작품과 창작 행위만의 영역이 아닌 작가의 가치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창작발상법의 대상임을 알게 되었다.
묘사론, 서사구조론, 주제론 등 소설창작론과 결부되어 연구되어야 할 분야들이 많은 가운데 본 논문은 가장 이론화가 시급히 요청된다고 여겨지는 창작발상법 논의를 검토하게 되었다. 창작발상법 논의를 비롯한 소설창작론의 고유한 영역들이 시급히 보강되어 완전한 학문적 조건을 갖춘 창작론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당위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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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I. Friedman, {The Lexus and the Olive Tree} Farrar, Straus & Giroux, 1999.
출처 : 사랑스러운 하랑이 될 테다!
출처: 두이노의 悲歌 원문보기 글쓴이: 다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