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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후기 스크랩 [개인답사] 잃어버린 우리 땅 ‘대마도’ 답사 2부
문차일드 추천 0 조회 247 13.07.07 22:0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잃어버린 우리 땅 ‘대마도’ 답사 2부

 대마도 답사 두번째 날 : 2013. 6. 29(토)

 

이른 아침 쓰시마 리조트(TSUSHIMA RESORT) 앞 해변풍경

 

리조트에서 준비한 아침식사

쌀밥에 무우된장국 맛은 고등어 반마리, 우엉무침, 김 4장, 양배추 사라다, 단무지 두조각

단졸한 상차림이다. 뚝딱 아침상을 비우고~~

일본인들은 주로 소식을 하고 먹고 싶은 만큼만 덜어 먹기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푸짐하게 차리고 남겨야 손님접대를 제대로 한다고하는

식사 문화는 이젠 버려야 할 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기 찍혀 있는 마크는 일본 천황이 왔다 갔다는 기념비 인듯? 맞나!

 

어제밤 묵었던 리조쓰시마 리조트(TSUSHIMA RESORT) 정문을 담아보고

리조트를 중심으로 해안을 비롯하여 주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 같은 바다고 그렇고 제주 용머리 해안 분위기가 있는 해안길 새벽산책도 좋았다.

 

리조트앞 잔디밭에 핀 타래난초 꽃!

기회가되면 한번 더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대마도지역명 보는 지도

 

 대마도 시청 건물

의외로 시청 청사 답지 않으리 만큼 규모가 작아 놀랐다.

 

대마도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대 한국인들이 세운나라이며 나라의 귀족은 신라 및 백제인 이었으며,

구성원은 대마도 원주민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반도에 귀속되지도 않고 일본 본토에 속해 있지않았다.

어중간한 형태로 양국가의 눈치를 보면 살다가 어느 시점에 일본국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마도 귀족들은 한반도에서 넘어간 한반도 인들이 다수여서 임진왜란 등 전쟁의 위기에서

조선에게 그 사실을 알려 방비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대마도는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영험한 곳이다.

부산이 보이는 한국전망대와 조선역관사 순국비가 있으며,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후손이 묻혀있는 와타즈미 신사도 있다.

 

대마도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 시내길은 오가는 사람들이 찾아 보기 힘들만큼 한산하기만 하다.

다만 한국관광객들만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들이 보일뿐이다.

 

하천은 물이 깨끗해 겨울 철새인 청머리오리는 계절을 잊고 토박이가 되고있다.

 

悲運의 덕혜옹주를 만나러 가는길

 

덕혜옹주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강제로 열두살 어린나이에

일본인과 결혼을 해야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녀 悲運이 덕혜옹주의 정신적으로

고달픈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덕혜옹주를 만나러 가는길 해발 558m의 아리아케(有明山)도 슬픈 안개가 드리운다.

 

  이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

열두살 갓 넘은 어린소녀는 간흉들에 의한 을지능약으로 정략적 결혼은 하였는데 이게 봉축할 내용이냐고!

땅을 치고 통곡하며 통탄한들 어찌 하리!! 개탄스럽기가 그지없구나!

'비명을 바꾸고 싶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덕혜 위령비' 이렇게 고치면 안될까?!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12년 5월 25일 고종(高宗)과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 사이의 딸로

태어나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5학년이던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동경 학습원(學習院)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인

조발성(早發性) 치매증으로 와병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1년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 결혼하여

3년만에 딸(宗正惠)을 얻었으나 지병이 계속되어 1951년 이혼을 당하였고,

그의 딸도 결혼에 실패하자 현해탄(玄海灘)에 투신자살하다 실패하여 병세가 악화되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英親王)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창경궁(昌慶宮) 낙선재(樂善齋)와 연결되어 있던 수강재(壽康齋)에 칩거하였다.

계속된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1989년 4월 21일 상오 11시 40분에 별세하여,

그 해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소재한 홍유릉(洪裕陵)

부속림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청수산성(淸水山城)

청수산성은 하단 일부는 일본 전통 석축쌓기 방식인 견치석 쌓기를 하였으나

성곽 나머지부분은 고려나, 조선시대 성곽 쌓는 전통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

 

고려문 가는 길 '청수산성(淸水山城)'

이즈하라에는 청수산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고, 금석성이라 불리는 내성이 있었다고 한다.

금석성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고려문에서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가로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최익현선생 순국비에서 '태산목'을 바라보다.

 

 조선통신역관지비 오른쪽에는 수령이 2백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한줄기에서 두가닥으로 나눠졌다가 중간 부분에서 다시 연리목이 되고

그 위에서 둘로 나뉘어 겹가지를 치고 있다.

마치 불운의 덕혜옹주의 파란 만장의 삶 처럼.....

 

조선통신역관지비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 촬영을 못하고 멀리서 몇 장 담았다.

 

이 자료관은 대마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고고학적 발굴유산, 문화재, 민속자료, 종가 문서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1978년 12월에 개관하였으며,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이 상설전시실이고, 2층이 특별전시실이다.

상설전시실 입구에는 천연기념물인 대마도 살쾡이 등이 박제가 놓여 있었다.

살쾡이는 일본 본토에는 없고 오로지 대마도에만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지질학적으로 한반도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 만 또는

수십 만 년 전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마도의 새는 고려 꿩인데, 이것 역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이 보인다.

토기로는 융기문 토기, 무문토기, 줄문토기 등이 있다.

 

융기문 토기는 8000년 전의 것이고, 즐문토기는 약 6000~5000년 전의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로는 세형동검과 동경 등이 있는데, 한반도의 것과 같은 양식이다.

  또 이곳에 전시된 청자와 불상 그리고 대장경 역시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대마도가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본 특별한 것은 대마도주인 종가(宗家)의 인장이었다.

이는 일종의 관인으로 외교문서, 도항증명서 등에 날인되었다.

 

특히 문인(文引)제도가 시행된 1438년부터 조선으로 가는 모든 배는 종가의 도항증명서을 받아야 했다.

문인 발행의 독점권을 종가에서 얻음으로 인해, 그는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력을 겸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한·일 교류의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로는 두루마리 형태로 된 조선통신사 행렬도

폭이 27㎝, 길이가 16.58m나 되는 대형 채색 두루마리 그림이다.

 

고려문 표석(高麗門 表石)

 

 高麗門 입구

고려문은 금석성(가네이시죠‘金石城’) 성안에 있던 대마도주의 거처인 사지키바라(棧原)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름은 영은문이었으나, 에도시대 조선통신사가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고려문이라는 이라고 불리는데 이 문은 1987년 태풍으로 무너졌고,

198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高麗門 옆면

 

高麗門 내부

 

 고려문 옆에 있는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碑

고려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 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 1668-1755)

현창비가 있는데 여기서 성신지교린이라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이웃끼리 교류한다'는 뜻이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이 교류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어젠다 였다.

이 어젠다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아메노모리 호슈였고,

그 때문에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라는 부제가 붙었다.

1990년 8월 호슈를 기리는 모임인 호슈회에서 세웠다.

 

 한글을 가르쳤네! 교린수지 책 만들어

조선을 알자했고 진실한 믿음 하나로

우의를 다짐 했네 백년 뒤 경복궁에

낭인들이 들이닥쳐 민 황후 시해사건

두 제자 관련됐네! 선생의

성신지 교린을 부끄럽게 만들었네!

아메노모리 호우슈(雨森芳州)

 

Tip : 교린수지는 요즘말로 조선인을 대하는 백서라고 할까?

 

이즈하라 시내 곳곳에서 다양한 신사를 볼 수 있다. 그 중 한 신사!

 일본신사(神社)에 대한 이해

일본에는 가정집이나 마을 골목마다 신단이나 신사가 있다.

거기에는 신사의 오후다(일종의 부적)가 봉안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이 신단을 참배하면서 가미와 조상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하루의 안녕을 기원한다.

입학이라든가 진학, 졸업, 취직, 환갑 등의 날에는 각 가정마다 신단 앞에 가족들이 모여

감사와 축하의 기원을 올리기도 한다. 神社의 기능 역시 제주에 있는 당의 기능과 흡사하다.


이처럼 일본인의 생활문화 속에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일본의 신사는

원래 '모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숲을 뜻한다.

우리가 '절' 하면 산을 떠올리듯이,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신사'하면 숲을 연상하면서 자라난다.

실제로 대마도 지방에도 숲에 둘러싸인 신사를 만나게 된다.

그 숲의 초입에는 신사가 있다.

청정한 숲 내음이 가득한 신사 입구에는 'ㅠ(天)'자 모양의 문이 서 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토리이(鳥居)라고 부른다.

토리이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혹자는 중국의 화표(華表, 왕성이나

능묘 앞에 세우는 문)가 일본에 들어가 도리이가 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한국의 솟대가 그 원형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신사 천국인 대마도는 어쩌면 절오백, 당오백이 제주에 샤머니즘 문화와 비슷하다.

 

답사내내 가는 곳마다 노란열매가 열린 비파나무가 보이는데 가정집에도 한 두 그루가 있다.

과실로도 먹지만 대마도에서는 주로 주스용이나 잼으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이즈하라 시내 우수를 흘려보내는 배수로에 커다란 비단잉어가 발길을 붙잡는다.

그만큼 배수구에 물이 깨끗하다는 증거다.

옛 도심길인데도 길도 깨끗하고 가정집은 깔끔하고 꽃들을 많이 가꾸도 있다.

 

이즈하라 시내 세월이 향기가 묻어나는 가정집

 

하찌만궁(宮) 왼쪽에 설치된 토리이

 

 하찌만궁() 토리이

 계단이 양쪽으로 나 있는데 오른쪽 계단이 ‘하찌만궁’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 계단위에도 수백 년된 녹나무와  여러개의 신사가 있다.

 

와타츠미신사에 세워져 있었던 것처럼 이곳 신사 입구에도

서로 마주보는 삽살개 석상(암과 수)이 세워져 있다.

이는 호랑이가 나타나도 도망가지 않고 대적하는

삽살개의 용맹스러움 때문에 일본 신사에 삽살개 석상을 세워져 있다.

 

 하찌만궁() 입구

커다란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 줄사철마무 덩굴에 소원을 비는 소지가 묶여있다.

 

  하찌만궁() 정문

우리나라 사찰로 들어 갈 때 금강문이 분위기다.

 석등이 늘어서 있는 단아한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저 앞에 신궁 건물과

한 쌍의 삽살개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삽살개 석상이라고 알고 있는 이 사자상을 일본에서는 '고마이누'라 하는데,

여기서 '고마'란 고려 혹은 조선을 뜻하는 말이다.

즉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갔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이 고마이누는  삽살개 석상과 마찬가지로 악귀를 막는 수호자의 의미를 가진다.

 

宮 현판

 

우리나라 사찰 금강문에는 나라연금강 상과 밀적연금 상이 있듯이

하찌만궁에서 그와 비슷한 상이 있다. 들어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고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철창에 가둬져 있어 잡귀들을 물리칠 수 있을지? 아님 말고!!

 

 하찌만궁(八番宮) 안내문

宮이 붙는 신사는 격이 높다.

안내문에는 신공황후를 제사지내는 곳이라 적혀있다.

이 신사는 삼한을 정벌하였다는 신화속의 인물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이다.

여기서 가이드 송상이 설명한 신공황후에 대한 오류를 잡아 보고자 한다.

 

진구황후(神功皇后)는

제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의 황후(皇后)이자, 제15대 오진천황(應神天皇)의 어머니이며,

임신을 한 몸으로 삼한(三韓)을 정벌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현재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한 근거로 내세워지고 있다.

 

 일본 임나본부설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은 일여(壹與)의 후손으로서

성무천황의 후비가 되었던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는 미모가 뛰어나서 성무천황이 천황에서

쫓겨나자 백제 근구수태자인 응신천황을 모시고 아이부인이 되고, 근구수태자를 따라

백제로 가는 길에 신라 정벌을 구경하고 백제에서 침류대왕을 임신하여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다가 큐슈에서 출산을 했다고 기록된다.

 

응신천황에게 몸 바쳤다는 뜻의 신공(神功) 황후의 격상은 이해되지만 신공황후의 독자적인

신라 정벌은 조작된 ‘일본서기’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푸~훗! 그냥 웃지요~~

 

활을 맨 신공황후 상

신공황후가 전투복 차림에 남장을 하고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를 하는데,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하며,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아비인 오키나가노스쿠네(321~384)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라 타당하지 않고

중애천황(仲哀天皇, 328~379)이나, 성무천황(成務天皇, 326~370)보다도 30여세나 많다.

그들의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단언 할 수 있다 .

그래서 신공황후의 조작된 연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 조작을 해도 너무 심한 ‘일본서기’는 중애천황비로 조작해놓았는데

중애천황보다 신공황후가 무려 40세나 연상이 된다.

즉 남편보다 40살이나 연상이라는 뻥을 쳐도 심하게 뻥을 쳤다.

조작자는 중애천황 비문이 밝혀질 것을 몰랐을까?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도 중애천황비가

신라를 정벌한 신공황후라고 역사를 교육하는 일본을 일깨워 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12월에 출산했다.

여름과 겨울,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한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막아낸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서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큐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해야 맞은 것이다.

어째 거나 일본은 일본인이 가장 중시하는 신사에 유래까지도 제 멋대로 조작하고 있다.

이 내용은 우리민족 역사 바로 알기에서 참고 발췌했습니다.

 

 본전으로 길어가는 왼편에 즐비하게 세워진 비석군

이 비석들은 아마도 신궁을 조성할 때 기부금낸 사람들이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다.

 

 신궁에 우물도 신사처럼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신사 건물 앞의 한쪽 귀퉁이에는 약수터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다.

이곳은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불리는데, 사람들은 여기서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의 때를 물로 씻어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사 할 때 관수(?水)의 의미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 해 본다.

 

신사를 참배 할 때 '데미즈야' 매너 알아보기

먼저 참배자는 오른손으로 대나무 국자처럼 생긴 물푸개(히샤쿠)를 잡고 물을 퍼서 왼손부터 씻는다.

그런 다음 물바가지를 왼손에 바꿔 잡고 오른손을 씻은 후 다시 오른손에 물마가지를

옮겨 쥔 채로 왼손바닥을 오므려 물을 받아 그것으로 입을 가신다.

하지만 이때 일본인들은 물푸개에 직접 입을 대거나 물을 마시지 않는다.

이를 모르는 외국인 여행자들은 종종 물을 마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 문화를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실례라고 한다.

어쨌거나 이런 정화 의식을 신도에서는 '하라이'라고 부른다.

 

 수호신인 듯한 용 조각상과 데미즈야(手水舍) 그리고 비석군

 

 석등과 신단

 

 편백나무조각에 소원을 적어 매단다.

이 모습은 제주에 축제 현장마다 볼 수 있다.

이 편백나무 조각이나 부적 등은 신궁 옆 관리사무소에서 판매한다고 한다.

 

 석등과 신단 도 담아보고

 

신공황후가 탓던 말이라는 말상

 

하찌만궁 정전(八番宮 正殿)은 신궁의 맨 안쪽 건물로 옛 일본 장수의 투구모양 지붕이 특이하다.

 

하찌만궁 정전(八番宮 正殿) 

이곳은 열쇠로 잠겨 있으며,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하찌만궁 신전(八番宮 神殿) 

신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본전(本殿⇒神殿⇒正殿)은 그 뒤쪽에 있다.

본전에는 각 신사의 제신과 신체(神體,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로서 구슬, 거울, 검, 방울 등

신사에 따라 다양하다)가 모셔져 있으므로 일반 참배자는 출입을 할 수 없다.

 

가이드 송상이 신궁에서 소원을 비는 순서를 가르쳐준다.

 

헌금함 같은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안에 먼저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넣고

상자 위에는 큰 방울 혹은 종이 달려 있는데 그 줄을 잡아당기면

방울이나 종을 울리는데 그것은 신을 불러내는 의식이다.

그 다음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면서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을 친 후

다시 한 번 절하고는 물러나온다고 한다.

 

창문 틈으로 본 하찌만궁 신전(八番宮 神殿)  내부에 모신 '신체(神體)'

 

 하찌만궁 관리사

하찌만궁 관리사는 신사의 접수처이기도 여기서 오후다는 오마모리라고도 하는

일종의 부적을 가리키는데 그런 것들을 판매한다.

거기에는 신사 이름과 함께 가내안전, 화재안전, 교통안전, 입시합격, 장사번창, 치병, 취직,

연인, 혹은 운수 및 복과 장수 등을 기원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일본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오후다를 사다가 그것을 몸에 지니거나

또는 집안의 신단(神棚)에 안치하거나 문 입구나 기둥 같은 곳에 붙여 놓기를 좋아한다.

 

  하찌만궁 오른편에 있는 대전기념을 봉축하는 비란다.

 

하찌만궁(八番宮) 나오며!!

 

하찌만궁 오른편에 있는 녹나무도 다시 담아 본다.

 

이즈하라 시내 하천에 그려진 조선통신사를 묘사한 듯하다.

이곳에서는 8월마다 조선통신사를 재현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반사경에 비친 내모습도 담아보고..

 

이즈하라 시내  골목 풍경

 

수선사 가는 길

 

슈젠지(修善寺) 표석

 

수선사 입구 경내로 올라가는 돌계단

 

이즈하라 시내 중심가에 백제시대 비구니 법묘스님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작고 아담한 소담스러운 절이다.

절 외부는 바나나 나무를 비롯하여 아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있다.

 

처마 끝에 눈을 부릅뜬 용의 머리를 한 기와가 독특하다.

 

 최익현선생 순국비 앞에서

늙은 몸이 대수더냐 나라가 망해간다

서릿발 그 기상은 젊은이 못잖았네!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킨다.

일제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호송되니


신발 속 흙 넣고 와 조국사랑 실천 했네

더러운 네놈들 땅을 밟기조차 싫구나.


적의 음식 먹지 않고 끝끝내 순국하니

장례 치른 수선사에 가을볕이 따습구나!

만백성 통곡한 사실을 이제 서야 알겠네.

滸山 김 현길

 

대한국인 최익현선생 순국비

그리고 경내 오른편에 구한말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선생의 넋을 기리는 순국비가 있다.

순창에서 의병을 이끌고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일본관헌에 의해 대마도에 유배된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순국비는 1986년 한 일 양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세웠는데, 이 곳에 비를 세운 이유는

순국한 곳이 대마도이고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지냈기 때문이러고 한다.

 

수선사 경내 왼쪽에 바나나 나무가 있는데 작지만 바나나가 달려있다.

 

수선사 안에서 본 불교식 동자상

턱받이를 한 작은 동자석들이 즐비하게 있어 이색적이다.

어린아이들의 혼을 달래기 위한 불상이라고 한다.

 

 수선사 오른쪽에 있는 일본 전통장례 문화를 볼 수 있는 납골묘들

 

호랑가시나무 인지 뭔지 모르겠다.

 

수선사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백제계와 신라계의 대마도 쟁탈전인 카미자카 전쟁터이기도 하며,

또한 고려와 몽고군의 연합군 여몽군사터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넘어간 백제계와 신라계의 대마도 쟁탈전인 카미자카 전쟁터,

고려와 몽고군의 연합군 여몽군사터가 있다.

 

수선사를 마지막 코스로 1박 2일 잃어버린 땅! 대마도 정규 답사는 마치고

점심 쇼핑 및 자유 답사 시간이다.

 

대마도에서 마지막 점심식사 장소로

 

한국 유명 산악회원들은 전부다 왔다간 듯하다.

허기사 대마도를 찾는 관관객중 95%가 한국사람이라 하니 왔다간 기념으로

표식하나쯤 남겨두면 좋을 듯도 하다.

 

마지막 점심식사 간소한 밑반찬 된장국, 밥은 먹을 만큼 덜어먹고 무료로 리필이 된다.

아마도 한국인들을 위함이 아닌가 한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이즈하라 시내 골목을 누빈다.

깨끗한 도로 집집마다 집앞아 작은 화분에 핀꽃!

겨우 차 한대가 지나갈 듯한 도로 중형차는 찾아 볼 수 없고 모두 경차이다.

죽소지향적인 일본인 성향과 우리니라 처럼 과식욕 이 없다보니 그럴 수 밖에..

이런건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즈하라 시내 신사

 

신사명과 제일, 제신 등이 기록 되어 있으며, 기업체에서 모시는 신사인듯 하다.

 

신사 내부

 

청수산성(淸水山城) 관광안내지도 현재 내 위치는 어딘고?

 

이즈하라 시내 신사

 

신사안에는 수령 수백년 된 녹나무를 보며, 옛날 이곳을 지났을 조선통신사 모습을 그려 본다.

 

이즈하라 도심 골목길 풍경

 

좁은 골목길에서 본 신사???

집밖에서 창문을 열어 놔서 볼 수 있어 신기했다.

 

애기동자상과 불상모습을 했다.

의복을 입힌 보습이 제주에 있는 당에 물색을 생각나게 한다.

 

이즈하라정(佐須川)에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2번 정도 일본에 파견된 문화사절단인데 이곳 대마도를 거쳐 갔다고 한다.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하천 바로 이즈하라 바다와 연결된다.

하천에는 황복이 노닐고 있는데 신기해서 한참이나 쫓아가 본다.

 

드디어 황복 한 마리 포착하고!!

 

하천에 그려진 아메노모리 호슈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에서 메모한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이다.

'공이망사 국이망가(公爾忘私國爾忘家)'

공을 위해 사를 잊고, 나라를 위해 가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 아메노모리 호슈 -

 

이즈하라정(佐須川) '하천벽화'

 

일본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면세점

 

이즈하라 시내 화강암으로 포장된 길

 

바닥에 그려진 대마도 상징물들

쓰시마 야마네코(야생고양이)는 일본 본토에는 없고 대마도에만 서식하는

야생고양이로 한반도와 중국에 분포하고 있다.

옛날 대마도가 대륙과 이어져 있음을 반증할 수 있다.

일본 멸종위기 동물로 보호받고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대마도로 건너 왔다는 꿩과 그리고 태산목 꽃인지도 모르겠다.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 하천은 제주시 동문로에 있는 남수각을 연상케 한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에서 최대 인구밀집지역으로 인구가 2만 여명 정도라고 한다.

대마도 전체 인구 중 절반이 이즈하라에 살고 있다.

 

이즈하라항 전경

짧은 여정 못보고 지나온 곳도 많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정이다.

대마도의 계절 변화를 느껴 보는 것도 좋을 듯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곳곳에 산재한 문화 유적들

그리고 아름다운 절경들 제주도만큼이나 숨은 비경들이 많다.

 

부산항으로 돌아갈 '쾌속선 비틀호'

 

다시 출국수속을 마치고 어제 탑승하고 왔던 쾌속선 비틀호에 오른다.

1층 내부를 둘러보고

 

한결 여유 있는 시간과 마음으로 쾌속선 비틀호 둘러본다. 여긴2층 내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돌아가는 배는 한가하다.

 

쾌속선 비틀호는 잔득 흐린 오후 대마도 가속하며 이즈하라 항 뒤로한다.

 

쾌속선 비틀호는 하얀 포말을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대마도! 그 곳은 분명 우리의 땅이었다.

척박한 땅이었고 조선조나 일본에서도 대마도는 버려진 땅이었다.

대마도는 세종때 우리 영토에 편입되었다.

대마도는 막부시대 이전까지 일본 땅으로 속한 적이 없다.

당파싸움에 휘말린 우리 조정의 못난 탓으로 대마도는 관심 밖의 땅이 되어 버렸고

그 틈에 일본은 대마도를 발판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당파에 연연하며 정사보다 당파와 계파와 개인의 이익만을 취하는 위정자들에게 고한다.

작금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독도도 우리 땅임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옛 우리의 땅이었던

대마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대마도를 '국제 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모든 국가 간의 분쟁에서 그러하듯이 그것은 국력이 우선된다.

비록 지금은 일본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을 지라도 국력을 키워 대마도를

우리의 땅으로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대마도는 광개토대왕 비문,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적 근거가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잃어버린 우리 땅! 대마도여 다시 찾을 때까지 good boy~

우리 선조들이 미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땅이었을

잃어버린 옛 땅 작은 섬! 때마도 이틀간에 짧은 여정이 돌아보면 아쉽기만 하다.

 

대마도를 출발한지 4~50여분 반가운 오륙도가 보인다.

이렇게 대마도는 지척에 있었는데 .......

 

김해국제공항에서 본 풍경

 

다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해는지고 석양만이 남아 있네!!

 

하늘에서 담은 일몰을 보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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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7.08 12:55

    첫댓글 잘 다녀 오셨습니다. 몇년전에 갔던 곳들이 새록새록 합니다. 사진 고맙습니다.

  • 13.07.08 15:15

    구경 잘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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