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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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잃어버린 세대 영식이는 나를 부끄러운 기억 속으로 끌고 갔다. 내가 영식이에게 끌려간 곳은 대학 4학년 1학기 캠퍼스, 라일락 꽃향기가 진동을 하던 오월의 밤이었다. 나는 밤 11시에 문을 닫는 학교 도서관에서 나와 교문을 향해 패잔병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장기(臟器)를 팔아 목돈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봤을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그 상태로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장기를 하나 팔아서라도 목돈을 마련하면 불안한 내일이 조금은 안심될 것 같았다. 그 당시 2천만 원이면 정말 큰 돈 이었다. 비록 장기 하나가 적출된 내 몸은 조금 불편해지겠지만, 2천만 원만 있으면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일정기간 유예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기를 팔아 목돈을 마련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지만 그때 나의 상황은 그만큼 절박했다. 사람은 누구나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자칫 어리석은 판단도 쉽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당시 나는 고려대학교 축산학과 4학년이었지만 학과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학점은 엉망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4학년이 될 때까지 학교 응원단에서 오롯이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온 몸을 투신했기 때문에 영어실력도 웃겼다.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열심히 놀 수는 없었을 것 같았던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지만, 덕분에 나는 사회에 나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사회로 나가면 분명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처참하게 길거리에 쓰러질 것이 자명했고, 그렇게 길거리에 쓰러진 나는 적들의 구둣발에 짓밟혀 금방 죽어버릴 것이 확실했다. 나는 친구라고 불리는 적들처럼 나의 뒤를 받쳐줄 돈 많은 부모님도 없었고, 그렇다고 홀로서기를 가능케 할 빵빵한 학점이나 실력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오직 18대 1로 싸워도 절대로 지지 않을 정도로 공중을 날아다니던 젊고 건강한 몸뚱이 하나가 전부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사회에 나가 살아남기 위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밑천은 달랑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공중화장실 문짝에 어설픈 글씨체로 적혀 있던 장기매매 광고에 시선이 꽂혔고, 한번 그것에 시선이 꽂히자 그 길만이 내가 사회에 나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2천만 원만 있다면, 정말 2천만 원만 있다면, 그것을 밑천삼아 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화장실 문짝에 적혀있던 그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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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년들도 30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삶의 무게에 치여 사는 것 같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그 어느 시대의 청년들보다 더 힘들다고 말한다.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치솟은 등록금은 아무리 알바를 열심히 해도 절반을 감당할 수 없고, 운이 좋아 친절한 정부의 혜택으로 융자를 받은 청년들은 빚쟁이가 되어 사회로 나간다. 그래서 이 시대 청년들을 일찍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三抛)세대’를 넘어 인간관계와 내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五抛)세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 세대들이 오포세대 청년의 아픔과 힘듦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청년들이 힘들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청년들은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세대를 가로막고 있는 이해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어른들은 오포청년에게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어려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이겨냈다.”
“옛날엔 밥을 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우린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 견뎌냈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많은 것이 문제다.”
“오늘날 청년들은 남과 비교하여 쉽게 절망하고 밑바닥부터 노력하겠다는 정신자세가 전혀 안 됐다. 그리고 한번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도 없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많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 청년들에게 불만이 많아 보인다.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온 아버지들은 취업도 힘들어하고, 사랑도 힘들어 하고, 사는 것도 힘들어 하는 요즘 오포청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살았던 세상과 작금의 세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아버지 때에는 열심히 노력만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아버지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일자리가 넘쳤다. 대충 대학만 졸업하면 다 취직이 되었고, 그렇게 취직한 아버지들이 오늘날 회사마다 넘쳐나는 부장님들이나 이사님들이다. 하지만 요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서울대 인문대 출신들은 토익점수가 940점이 넘어도 절반이 취직을 못한다고 한다. 왕년의 아버지들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故 노무현 대통령처럼 사법고시를 통해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변호사가 되는 룰이 바뀌었다. ‘억’ 소리 나는 등록금이 있어야만 다닐 수 있는 로스쿨제도로 바뀌었고, 그나마 합격자 수도 대폭 줄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오포청년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비난하기 전에 먼저 미안하여야 한다. 지난 시대에 꿈과 기회를 가지고 살아왔던 아버지들은 그 기득권으로 이 시대 청년들의 꿈과 기회를 박탈한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과 정부가 주장하는 효율성을 빌미로 일자리를 줄이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그 결과, 대규모 공장에는 관리자 몇 명만 필요하게 되었고 로봇들이 각종 일을 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서울대를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지금의 사회는 아버지들이 그렇게 힘들게 일해서 만든 것이다.
아버지들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도 원천봉쇄하였다. 고시를 볼 수 없도록 제도를 바꾸고, 그마저 숫자까지 줄인 사람은 청년들이 아니라 아버지들이다. 공부를 잘 하면 인생역전이 이루어지던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들은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사회를 만들어 오늘날 청년들을 공부기계로 만들었다. 또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들은 결혼은 사랑이 아닌 돈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도 심어줬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면 자신감이나 자존감 없는 청년이 되고, 돈이 없으면 연애나 결혼이나 출산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오포청년들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버지들은 오포청년을 비난하기 전에 미안해야 한다. 아버지들도 비난받기에 충분한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포청년도 아버지의 비난에 기죽을 필요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불평불만을 토로할 필요는 더욱 없다. 아버지를 비난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살아왔던 것처럼 청년은 청년의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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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포청년은 아버지가 더 이상 인생의 보호막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미 성인의 나이를 훌쩍 넘겨버린 청년들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 살벌하고도 냉혹한 세상에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조석으로 변화무쌍한 대한민국의 교육정책 아래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이 살벌한 사회에 내동댕이쳐지기엔 아직 많이 미숙하고 서투르다.
그래서 나는 오포청년들의 불안하고 두려운 눈빛이 충분히 이해되고, 걱정되고, 안타깝다. 혹시 내가 청년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공중화장실 문짝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장기매매 광고 전화번호의 다이얼을 누르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자칫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흥업소의 광고전단지를 뒤적거리는, 그렇게 비겁하게 편한 포기를 할까봐 정말 걱정이다.
나는 신문이나 TV뉴스에서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면서 참담해진다. 질병과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10~30대의 사망 원인의 1위가 바로 자살이란다. 특히, 청년대학생의 나인인 20대 사망자의 10명 중 4명이 자살로 이 세상을 마감한다고 한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팍팍할지라도, 나를 둘러싼 세상의 환경이 삶의 끈을 그만 놓고 싶게 만들어도, 그것이 어떤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포기하면 안 된다. 포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용기 없는 자들의 비겁하게 편한 선택이고, 한번 포기하는 것에 시선이 꽂히면, 그것만이 유일한 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기도 습관처럼 중독이 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 온 날보다 많이 남은 청년의 시기에 포기에 중독된다면, 남아 있는 인생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겠는가?
이제 오포청년들은 자존감을 바로 세우고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미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에 나가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짓밟고 잡아먹을 것 같은 적들로 우글거릴 것 같지만, 사실은 나의 편에 서서 나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나를 도와 줄 우군이 더 많이 있다. 정작 오포청년의 문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자존심에 갇혀 그 우군을 스스로 애써 외면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아라. 나의 포기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나를 당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주셨던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목돈이 필요하다면 당신의 장기를 팔아 마련해주시겠다고 했다. 나의 장기를 대신하여 당신의 장기를 팔아주시겠다는 엄마의 사랑 앞에 나의 자존심은 더 이상 없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2천만 원에 그 사랑을 팔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2천만 원에 팔고자 했던 것은 나의 장기가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미묘한 세상은 나의 그 자존심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금방 가르쳐주었다. 당장 2천만 원만 있으면 세상에 나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2천만 원이 없어도 세상에서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 나가자마자 하나님의 도움으로 1년 만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2천만 원을 벌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간 나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백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길거리를 헤매던 어느 초여름 날, 나는 잠실야구장 관중석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정말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했다. 당시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프로야구는 참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대학 4년 동안 초라하기 그지없는 학점과 맞바꾼 뛰어난 응원실력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응원을 제일 잘한다는 자신감 하나로 무장되어 있던 나는, 그 쓰레기통 위로 올라가 자칭 OB Bears 응원단장이 되었다.
그 쓰레기통 위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입에는 호루라기 하나 물고, 그렇게 나는 돈을 벌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보다 응원을 잘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는 자부심으로 정말 열심히 응원을 하였다. 당시 한 게임 당 내가 받은 몸값(?)은 2십만 원이었는데, 프로야구 시즌 6개월 동안 내가 응원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의 총액은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과 맞먹었다. 2천만 원.
세상은 그런 것이다. 당장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암울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일이 되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당장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이 어렵더라도, 돈을 위해 장기매매나 유흥업소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소중한 자신의 몸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신감을 잃게 하고 자존감을 상실케 하여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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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본주의의 교육을 받은 오늘날의 청년들은 남들과 비교하여 스스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존재로 느끼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어리석은 청년들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킨다고 엉뚱하게도 포기를 선택하지만, 사실 포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비겁하게 편한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아프게 만들뿐이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을 반드시 만난다. 그럴 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고, 사면초가와 같은 현실과 마주하면 누구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현실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매우 쉬운 일이다. 포기는 조금의 노력이나 용기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시대의 청년들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며 살아간다. 시험을 망쳤을 때, 부당한 열정페이를 강요당할 때, 또 취업에 실패하고 101번째 이력서를 쓸 때, 청년들은 삶을 통째로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니 성질이 조금이라도 다혈질이라면 세상을 다 불 질러 버리겠다고 분노하고 절규한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 “오! 하나님!”이라고 소리치며 하나님을 찾으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청년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니 이 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 세상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돌아가는데, 그런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운영하시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면 이 세상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고 삶이 달라진다. 든든한 하나님이 ‘빽’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예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운영하시고 사랑을 표현하신다. 도서관의 공중화장실에서 불법 장기매매 광고를 보고 전화하기까지 절망하게 하셨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셨다. 대학생활 내내 응원단에 미쳐 살게 함으로 학점을 부끄럽게 만드시더니, 그 응원실력으로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게 하시고 자존감을 높여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절망과 마주한 그 어떤 청년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분은 즉각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준비되어 계시며 기꺼이 도와주실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면, 하나님은 즉시 우리의 생각이나 태도를 바꿔주심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찍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의 힘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정확히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청년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와 도움을 청해야 한다. 청춘의 피가 끓는 청년의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면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하나님을 찾으면 쉽게 평안한 심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아들의 미래를 위해 대신하여 장기를 팔아주시겠다는 엄마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격정)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기꺼이 모든 피와 물을 쏟아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진다는 말이다.
그러하니 청년들이여, 지금 세상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직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를 위해 고통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 하나님의 파토스는 언제나 비탄 뒤에 희망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 청년들이 고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청년들은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 앞에 겸손해질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자신감이 회복되고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자기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문제라도 담대히 맞설 수 있게 되고, 불가능해 보여 포기하고 싶은 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분이 힘을 주시고 도우신다는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긴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난 2년간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우리세대가 참 살기 힘든 세상을 맹그렀다는 말인데..
우리의 가정이 부모님 세대처럼 가정교육을 잘 하지 못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캠퍼스 수요예배에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크신 은혜가 부어지기를~~~
우리 세대는 나름 힘들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청년 세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만든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청년부가 차츰 사라지는 한국교회의 미래도.... 그래서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형님이 후원하시고 있는 캠퍼스수요예배가 중요한 이유이고요~~^^;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동 시대를 함께 살아 내면서 이질감을 느낄때가 참으로 많아 때론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작가님도 마찬가지겠지요^^♡
물질이 풍요하나 감성과 배려가 실종된 현실에 기성세대가 어떤역활을 해야 젊은이들에게 먹힐까요 오늘도 고민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필로작가님..
멋집니다^^
그치요, 이질감 많이 느끼지요. 주먹이 요기까지 올라오지요. 하지만 그래요 안고 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
얼래고 달래고 하다보면 언제가 알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먼저 성질을 죽이고 배려하는 것이지요.....주님이 그러하셨듯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