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입학
1954년 전쟁이 시작된 지 4년 후, 눈물 콧물 닦는 하얀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수선한 혼돈의 시절이라 입학 연령도 어린 학생에 언니 같은 아이들도 있다.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月謝金(월사금)이 없는 가난한 아이들과 남의 집에서 살기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 못 다녔다. 아버지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셨다.
나는 등에 매는 사각 가죽 가방에 예쁜 구두를 신고 입학했다. 아이들은 낯선 나를 보고 서울내기, 다마(양파)내기, 서울 깍쟁이, 고향이 없는 아이라고 놀렸다. “너네 아버지 목소리는 간지럽다”며 흉도 보았다. 戰後(전후)라 아이들이 산이나 들에서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크게 다쳐 부모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있었다.
교실 마룻바닥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겨울엔 찬바람이 숭숭 들어와 판자(나뭇조각)로 때웠다. 울퉁불퉁한 책상은 앉은키에 맞으면 다행이고, 키가 큰 아이들은 발을 옆으로 두고 앉아서 공부했다. 우리는 그런 교실 바닥을 양초를 발라가며 손에 나무 가시가 박혀도 열심히 닦고 쓸고 청소하고 광을 내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12열차 같은 화장실은 그야말로 국민학생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칙칙한 시멘트 바닥에 투박한 나무문은 어둡고 깊어 무서웠다. 잘못하면 발이 빠져 사고가 난다. 겨울에는 ‘펌프’ 물을 퍼 올려 떠온 물로 청소하는데 청소가 끝나면 젖은 신발을 신고 단정히 서서 선생님한테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품’인 가루우유는 물에 타서 학교 가마솥에 사정없이 팔팔 끓여 나눠줬다. 사카린을 넣어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허기도 달래주었다. 가루우유 자루 속에는 다양한 색깔의 머리핀이 들어 있어 여자아이들을 기쁘게 했다. 한 학급이 70명 정도였으니 콩나물 교실이 따로 없었다.
교실 정면 철판 위쪽 좌측엔 태극기가 우측에는 級訓(급훈)이 걸려있었다. ‘애국’, ‘성실’, ‘정직’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 년 동안 어린 마음들은 성실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맏딸들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던가! 농번기엔 동생들을 데리고 와 옆자리에 앉혀 놓고 공부를 했다. 월사금이 밀리면 집으로 돌려보내 가져오게 했다. 나도 등에 동생을 늘 업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우리 때까지도 일본 교육의 잔재가 남아 있어 더우나 추우나 사계절 운동장 조회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긴 말씀 때문에 여름엔 더워서 털썩 쓰러지는 아이들이 많았고, 칼바람 부는 겨울엔 제대로 된 속옷이 없어 추위에 떨었다. ‘구호물품’ 담았던 棉(면)자루를 양잿물에 삶아 만들어 입던 시절이라 얼마나 추웠는지 상상만 해도 덜덜 떨린다.
새학기엔 새로운 교과서를 주는데, 몇 권은 새책이지만 어떤 과목은 헌책을 물려받아 사용했다. 흰 종이는 무엇이나 공책(노트)이 되었다. 全科(전 과목 지침서) 한번 빌려 보려면 10리 밖 친구집에 걸어가야만 했다. 새학기 새로운 기분으로 노란 플라스틱 필통 하나 가지려면 며칠을 졸라야 살 수 있었다.
여름엔 창문 열고 공부를 하고 겨울엔 ‘火木(화목)’ 난로‘를 오전만 피워 공부했다. 난로 위에 점심 도시락은 데워 밥과 반찬을 섞어 흔들어 먹으면 꿀맛이었다. 입는 것, 먹는 것, 생필품이 부족한 시절이지만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소풍 가는 날엔 나일론 새 원피스를 벽에 걸어두고 쳐다보며 날을 새워 기다렸다. 사이다, 삶은 계란, 과자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는데, 친구보다 많아 보이게 하려고 꽤 허세와 요령을 부렸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길로 20리를 걸어가면서 뜸북새 논에서 울고 ‘오빠 생각’을 불렀다. 즐거운 날에도 명랑한 노래보다는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소풍날 맛있는 과자, 계란, 사이다는 오로지 나만 먹을 수 있었다. 손수건 돌리기, 보물찾기를 하며 우리는 세상 모르게 즐거워했다. 국민학교 졸업 여행지 경주 불국사에서는 온종일 비가 내려서 만들어 입은 곤색(남색) 세라복의 시퍼런 물이 빠져 두들겨 맞아 멍든 아이 같았다. 참 웃지 못할 추억이었다.
부모님은 전쟁의 상처로 후유증이 남아있어 엄마는 서울로 다시 안 간다고 하고, 아버지는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셨다. 모내기 철엔 모도 심어주고 들판 새참도 얻어 잡수시고 가을엔 메뚜기 잡아 쪄서 말려 반찬도 했다.
세월은 흘러도 보이지 않는 양반 상놈의 편견은 남아 있었다. 친척이 없는 피란민, 옛날에 소외당했던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 시장에서 사는 사람들을 상스럽다고 은근히 멀리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삼촌. |
명절에 외롭고 쓸쓸하고 삼촌이 살아 계셨으면 너희도 작은 집 사촌들과 어울려 다닐 텐데 하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門中(문중)이 있는 아이들은 명절에 집성촌을 돌며 세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고, 家風(가풍)도 익히며 천자문도 배우는 것이 부러웠다. 나는 친구 따라 ‘풍양 조씨’ 문중에서 한문을 익혔다.
세배드릴 곳이 없는 나는 외국 수녀님 계신 곳을 찾아 정원의 꽃도 구경하고 유치원 수녀 선생님을 만나면 배고픈 우리 자매에게 큼지막한 사과를 주시면서 꿈도 심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멘토(Mentor)’이셨다.
중학교에 진학 못 하는 아이는 목 놓아 울어
1959년 초등학교 졸업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친구들과 이별도 아쉽지만,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목 놓아 울었다. 가난해서도 진학을 못 했지만 男兒(남아) 선호사상이 남아 있어 여자아이는 한글만 깨우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상급학교 진학은 남자 수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校文(교문) 청소를 하다가 하얀 칼라에 검은 교복 입은 언니들이 지나가면 빗자루를 세워두고 넋을 잃고 부럽게 쳐다봤다. 그 멋진 언니들을 매일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학교에 입학했다. 하복 준비하기 전 3개월 정도는 하얀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었는데 학교에 못 간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후 뜻있는 청년 언니들이 夜學(야학)을 세워 진학 못한 친구들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다. 산업화되면서 그 친구들은 도회지(도시)로 하나둘 떠났다.
태어난 곳에서 편히 사는 사람도, 피란민으로 사는 우리도 늘 배고픈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겨야 했다. ‘춘궁기’엔 쌀이 귀해 보리가 한 되면 쌀은 두 홉 넣고 밥을 지어 아버지와 남동생은 밥에 쌀이 좀 들어가고 나머지 식구들은 보리밥을 많이 섞어 먹었다. 여동생은 유난히 보리밥을 싫어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창피해서 꽁보리 점심 도시락을 안 가져들 왔다. 점심시간에 책도 보고 수돗물도 마시고 놀면서 점심시간을 때웠다.
젊은 아빠들은 생산적인 일거리가 없으니 원정 도박꾼이 돼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예쁜 부인들은 아이를 업고 빈둥빈둥 놀면서 동네 참견하고 말을 만들어 내며 그냥 놀았다. 농한기엔 낮이나 밤이나 술, 담배, 화투로 날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새까만 증기기관차를 진종일 타고 친인척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왔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 놀랐다. 효자동, 필동, 혜화동, 명륜동을 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그때까지도 한옥들이 많이 있었다. 창경원에 구경하러 가서 아이스케키도 사 먹고 용두동을 돌아 밤엔 언니들과 자하문 성곽도 올라가 보았다. 지금은 ‘갤러리’가 많아졌다. 학교 마당에서는 미국에서 만든 위생 계몽 만화를 보여줬고, 조미령 씨가 주연한 ‘시집가는 날’도 상영했다. 내가 투박한 사투리로 말을 하면 신기하게 쳐다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친척들은 ‘오라버니, 언제까지 여자아이를 시골에 둘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서울은 낯설고 불편했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가 갇혀 살면서도 꿈이 있는 소녀였듯 우리도 가난했지만, 배우들 사진을 벽에 붙여 두고 그들과 동일시도 해보고 도시를 동경하고 꿈도 키웠다.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나 계몽할 때는 상부의 지시가 학교까지 내려오면 학생들을 동원했다. 나라를 위해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비행기 기름으로 사용한다고 풀씨를 따기 위해 산과 들로 몰려다니며 각자 할당량을 채워 제출했다.
위안부였던 영자네 새엄마
내가 살아가는 마을은 작지만 해방부터 6·25전쟁까지 별별 사연이 모여 있어 어린 눈으로 가까이서 봤다. 우리 가족은 피난 와서 기차역에서 제일 가까운 영자네 집에 세 들어 살았다. 영자의 새엄마는 일본 전쟁의 희생자인 위안부였다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고 조용하고 단정한 옷매무새에 알뜰한 살림 솜씨는 물론이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설탕이 귀한 시절 물엿을 집에서 고아 우리에게 주셨고 영자의 옷도 언제나 깔끔했다.
해방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인 그는 비만 오면 빗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고 아들은 창피하다고 말리고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이 없지만, 아들의 밥은 꼭 챙겼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남매는 언제나 자기 남동생 손을 꼭 잡고 늘 밖에 나와 있었다. 남매 엄마의 모습은 행주치마 두르고 알뜰살뜰 살림만 했을 평범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매춘’을 하며 두 남매를 먹이고 학교 보내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훌쩍 떠나고 없었다. 흔히들 3일만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는다고 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도덕의 잣대냐 먹고 사는 것이 먼저냐? ‘병아리와 닭의 논리’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 70이 되어 세상이 조금 보이니 어딘가에 나이 들어 살아가는 남매를 생각하면 슬픈 눈물이 난다. 그 어머니는 殺母蛇(살모사) 어미다. 살모사는 새끼를 낳으면 자기 몸을 자양분 삼아 새끼를 먹여 살리고 자신은 죽는다고 했다. 강한 우리 어머니들은 살모사 어미처럼 전쟁통에도 자식을 업고 뛰었고 가슴에 품고 살았다. 장터 피난민촌에는 선하고 정다운 이모 같은 꽃다운 여인들이 아이를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개울 건너 외딴곳에 사는 자매는 姓(성)도 모르는 아이를 키우며 동네와 단절된 생활을 했고 소문만 무성했다.
먼 친척은 늦은 나이에 업둥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에게 줄 쌀죽이 식을까 봐 끓인 쌀죽을 가슴에 넣고 장사해 가면서 길렀다. 그 업둥이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돼 엄마에게 효도했다.
전쟁터에서 남자들은 팔다리가 잘려 고향으로 돌아왔고, 여자들은 가난을 이기며 가정을 이끌어야 했다. 장터 장날에는 어김없이 술에 취한 상이(부상자)군인들이 몰려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 병신 돼서 왔다 어쩔래! 어쩌란 말이냐!”고 하며 허탈하게 울고 웃었다. 동서남북 시비를 걸어 싸우고, 義手(의수)가 없어 ‘쇠갈고리’ 팔을 휘두르며 물건을 찍고, 깨고 행패를 부리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욕을 했다. 사람들은 놀라 달아났을 뿐 절망하고 절규하는 그들을 위로하는 ‘賢者(현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위로하고 감싸기엔 너도나도 지치고 고달팠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학교도 결석하고 기가 죽어 다니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리면서 가난의 악순환이 대물림됐다. 바라보는 가족들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나라가 폐허가 됐으니 누가 무엇으로 그들을 달래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겠는가?
부모의 애정에 굶주린 수많은 전쟁고아의 애절한 눈빛들을 보며 꽁보리밥을 먹어도 부모님 울타리 속에 산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남자들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인들은 슬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전쟁이 남긴 슬픔
바이올린을 켜는 아버지 (1941년 4월 경) |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고, 팔자 고치라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떠밀려 떠난 엄마와 조부모 밑에서 아빠 엄마를 그리워하며 기죽어 살아가는 遺腹子(유복자)들…. 교문 모퉁이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자기 아들을 훔쳐봐야 하는 그림자 엄마! 살아있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결혼 풍습에 처가에서 식을 올리고 1년 묵는 풍습이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새신랑이 전사해 시댁에 신행도 가지 못하고 아이와 친정에 살아가는 가련한 새색시뿐인가! 어릴 적 북에서 남쪽으로 외갓집에 왔다가 38선이 생겨 집에 못 돌아가고 살아가는 동갑내기 매점 아가씨. 눈물 흘리며 나에게 꿈같은 이야기를 한다.
부자들은 4代가 조부모 밑에서 살던 대가족이 많았다. 결혼하고도 分家(분가)하지 않고 부인과 자식을 두고 서울로 유학을 갔던 친구의 아버지가 북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큰집 눈칫밥을 먹으며 공부하던 친구는 공무원이 돼 어머니를 모시고 분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좌제’에 묶여 절망했던 친구였다. 이산가족 찾기에도 끝내 안 나타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원망했었다. 운전기사를 하며 엄마를 모시고 살았다. 어떤 말로도 그 친구를 위로할 수 없었다.
기예를 닦은 기생들도 큰 기와집에서 세상 변화에 힘겹게 살아갔다. 이름도 예쁜 매화 도화 아주머니들이 있었는데, 남의 집 소실(작은 부인)로 들어가 자식에게 희망을 걸며 큰집, 작은집 사이좋게 살아갔다.
산속 마을에서 내려온 깽깽이 할아버지는 시끄럽다고 면박을 해도 동냥을 얻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깽깽이는 우리 고유 악기 ‘해금’이었다. 배고픈 시절이니 ‘해금’도 무시를 당했다.
장독 속에 쥐가 빠져 죽어 있어도 건져내고 본인이 먼저 마시고 장터에 내다 팔아서 먹을 것을 장만했다고 한다. 잘생긴 움막집 거지 패거리는 매일 이 동네 저 동네 옮겨 다니면서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며 대문이 큰 부잣집이나 잔칫집을 돌며 밥 달라고 소리치며 구걸했다.
지금은 ‘품바’로 인기도 있고 향수도 달래지만 그땐 밥을 얻어먹기 위한 최소한의 재주였다. 그것이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부엌 칼소리(난타)가 예술 속으로 들어왔듯이….
장터 끝자락 청소를 도와주며 밥을 얻어먹는 삼팔따라지(거지)는 술 한잔 걸치면 연극배우처럼 어머니! 부르며 신세 한탄을 땅이 꺼지도록 하며 울어댔다.
일본징용에 끌려갔다가 살아온 ‘지게꾼’ 아저씨는 술에 취해 저녁나절 집에 들어가면서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르는데 다음날 비가 온다고들 했다. 어딜 가나 일제잔재와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애처롭게 했다.
고아원 제도권 안에도 못 들어간 아이들은 밥 얻어먹다가 여자아이는 식모로, 남자아이는 머슴으로 들어가 노예처럼 일만 해도 두들겨 맞곤 했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불행했다. 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그땐 비일비재한 日常(일상)이었다. 그들은 친구도 없고 자기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살았다. 옷은 남루하고 손은 언제나 퉁퉁 부어 있었다. 너무 불쌍했다.
4·19가 일어나다
4·19가 일어났다. 어른들 말로는 라디오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한다고 했다. 어릴 적 연애편지 심부름시켰던 언니, 오빠들이 大處(대처·도회지)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오고 시끌벅적했다. 시골 우리 학교도 하늘 같은 선배 언니들이 교실에 들어와서는 “이리로 나오라, 저리로 가라”고 하면서 줄 세우고 친구들의 언니들은 그 와중에도 결연 맺은 동생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나라가 위기인데, 안일하게 공부하느냐”고 하면서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돌도 던지고 물도 뿌리고 신발을 내다 버리고, 시비도 걸며 싸움도 해 야단법석이었다. 선생님도 속수무책 살벌한 상태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신문에는 부상 학생과 죽은 학생도 있다고 전했고, 아직도 세상은 어수선했다.
일본과 수교 전, 密船(밀선)을 타고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들이 있어 재일교포들은 친척들에게 옷, 학용품, 돈을 보내줬다. 일본 물건은 모양도 좋았지만, 품질도 월등했다. 가계에도 큰 도움을 줬다. 일본과 수교가 되고 엄마의 작은 아버지도 마음 놓고 ‘88올림픽’도 구경하러 오셔서 서울에 오시면 롯데호텔에 묵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셨다.
5·16 때는 부산 수학여행 중이었다. 또 전쟁이 난 줄 알고 놀랐다. 라디오 아나운서 목소리는 낮고 간결했고 우렁찼다. 그야말로 비상시국이었다. 학교 규율도 엄격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학업에 열중했다.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군대도 가고 國費(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었지만, 여자들은 없었다. 몇 년 후 간호사관학교가 생겼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4H클럽이 생겨 청년들은 농촌계몽운동도 하고 마을길도 넓히고 우리도 잘살아 보세! 하며 생산적인 활동이 전개됐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도 줄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