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시작 신인상 당선작
고드름의 기원 / 김광섭
고드름을 쥐여 주고 떠났네.
돌아서면 녹아내리는 울상
얼룩처럼 곡선을 이루었네.
낙원을 떠난 그대,
운명은 서서히 변방으로 흘러갔네.
그대에게 직립을 가르친 세계에서
하강하는 순간순간
붙잡으려 할수록 손금에 그늘이 서렸네.
사과나무 아래서 해빙의 기록을 써 내려갔네.
정수리로 선과 악을 밀어내며
뱀의 허물에서
곧게 서는 척추의 문장을 적었네.
낙하
낙하
내면에서 방울지는 음악.
그대는 걷는 생각에 골몰했네.
발자국은 늑골 안에서 발견되었고
엇갈리는 일은 깍지를 끼는 일.
투명해졌네.
사천 년이 흘러 되찾은 갈빗대
봄의 입속으로 뿔을 감추네.
제10회 시작신인상
글자 만드는 골목외 4편
류명순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처럼 슬픔을 진열한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발걸음을 덮어쓴다
경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켠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한다
바람이 갸웃거리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고문은 진화 한다
불시에 나를 구속한 스티븐 존슨*은 희대의 고문기술자다. 눈을 떠 빛을 데려오면 그는 내 장기마다 하루 치의 수명을 부여한다. 오늘은 그가 되돌이표 그려진 악보처럼 나를 연주 한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음표를 벗어난 신음을 뱉어낸 적이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첼로 현처럼 휜 척추로 연주했고, 십 년 전에는 각막에 펼친 건반을 올려 차며 연주를 했다
그가 내게 배려한 유일한 자유는 목숨이다. 나는 사디스트가 되어 나를 때리고 마조이스트가 되어 고통을 충전했으므로 내 목숨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나는 희열이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통증으로 사정을 완성하던 날, 그는 새로운 고문기술을 접목했다. 손톱이 뽑힐 때 음역 밖의 신음을 연주한 것은 실수였다.
그가 내게서 손톱과 닮은 둥근 각도를 찾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발톱을 뽑아내고 앞니를 뽑아내고 각막을 뽑아내고 결국 양지에서 나를 뽑아 음지에 가두었다.
눈을 떠도 빛을 데려오지 못하므로 나의 하루는 길이가 없다. 열쇠가 없는 안구의 독방에서 내 묵비권이 완성됐다. 내가 내게 종신형을 언도하자 고문이 멎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열쇠를 목숨에 꽂아놓고 사라졌다.
신음을 연주해서 형기를 채워야 하는 내가 고통 없음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을 때,
나는 외로움을 비틀어 고통을 초대한다. 그가 내 장기를 하나 둘 두드려 깨운다. 나는 목숨에 없는 빠른 박자로 신음을 연주한다. 그가 관장하는 하루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존슨: 약물 알레르기로 눈의 점막을 손상시켜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
사람의 품
미루나무 껍질에서 나이테의 파동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손가락 한 마디씩 늘인다
이파리가 그늘의 나선을 돌린다
넓어지는 그늘에 내가 얼룩 하나로 섞인다
내 잠꼬대가 다른 사람 호흡으로 바뀌자 그늘이 확장을 멈춘다
옹이 빛깔의 눈동자가 전생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이 기도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합장의 어둠을 열고 무작정 걸어 들어간다
매일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길 끝에
내 얼룩과 마침맞은 공간이 파여 있다
젖 먹는 자세를 하고서야 꿈을 꾼다
한 사람이 손 그림자로 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품에 안긴 내가 그늘의 속도로 자란다
아기 발길질에 얼룩이 깨진다
내가 서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내 눈동자에 한 사의 얼룩이 고여 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외우려고 하자 그늘이 나를 팽개친다
그늘이 사지를 숨기며 미루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얼룩을 품으로 키워내면 어머니가 된다
형법 제38조
충혈된 눈에 들어온 형법 제38조가 수갑을 채운다
방안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서른여덟을 염탐하는 담쟁이가 방안을 기웃거린다
법전 속에 숨긴 법문이 미궁에 빠져든다
승자독식사회의 알리바이를 밝혀내기 위해
육법전서의 침묵을 몇 년째 추적해 보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제자리 잠복 중이다
그림자를 체포해 가는 그믐달이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머니기도를 의심스레 쏘아본다
잠을 취조하는 시계 소리에
별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또다시 법률사전을 비워내야 하는 공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파산선고를 받은 등골뼈들이
호시탐탐 무릎까지 넘보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 사랑을 수첩에 기록하고
날 선 법과사전에 시선을 책갈피로 꽂아두면
두 눈에 고여 있던 하늘이 빛을 흘린다
법복보다 더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고시촌 하늘엔 별도 법문처럼 뜬다
무덤으로 가는 앤디워홀
나를 버리러 지하로 간다
캔버스와 판화도구 버리러
내가 사랑하던 마릴린 먼로도 버리러
세상의 희롱과 박수까지 버리러
주유소도 편의점도 없는 지하의 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혼자의 길
누구 하나 환호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사물들, 구조는 단순하다
주검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도 없는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나를 다녀간 사람들이 기록해둔 필름처럼
기억이 기억을 물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문득, 까마귀가 울 것 같은 적막이 몰려들고
붓을 든 낯선 손을 따라
무덤속이 밀밭으로 변하고 있다
복제된 그림이 제멋대로 불어나 무덤을 밝힌다
버리는 것은 끝이 아니고
또 하나의 부재를 달고 새롭게 태어난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린 내 몸이 한없이 추락한다
낯선 내가 나를 붙잡아 콜라병에 담는다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류명순 :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재학 중.
저서 : 잃어버린 20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외 4편
김명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나 이제 돌아서려네 고개 숙이고 있던 수은등이 마지막 시선 한 조각을 떨어트리네 당신의 눈길이 차곡차곡 쌓인 골목 내 기다림에 닳고 단 모퉁이 당신의 체온 대신 깨진 벽보 한 장에 기대네 더 이상 당신이 내가 아닌 첫 시간, 눈 감은 수은등 대신 당신의 방을 지키려 하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손을 쥐고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빈손이었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과를 깎는 일과 같더군 손을 베이고 나서야 나를 향해 칼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네 당신을 코르크 마개처럼 빼낼 순 없겠지 하지만 이제 배경이 되어야 할 시간 그동안 고단했을 수은등을 놓아줘야 할 뿐 초승달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네 나와 눈이 마주친 별들이 하나둘 흥건히 떨고 있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이제 당신도 상상이 되려하네
한 짝
신발 밑바닥의 껌 딱지처럼
누구라도 붙들고 싶은 날
인력소개소 앞에서 악수를 청하는
목장갑 한, 짝
길을 베고 때 묻은 얼굴을 붉히며
처음인 듯 서툴게 망설이며
어쩌면 목장갑은 일용직 잡부로 못 박혀
붉은 빨판으로 쇳조각만을 붙잡았을 것이다
만난 적 없기에 더 닿고 싶었을 체온
어느 누구도 왼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관심에 차이는 깡통마저 부러웠을 날들
골판지 상자가 손 잡아 줄 만도 하지만 이미
킬로그램당 백이십오 원이 수거해 갔을 것이다
무관심이 시간당 백오십 미리로 쏟아져
상처난 손가락 끝을 때린다
단물만 뺐기고 뱉어진 내 마지막 퇴근길에
손 내미는 목장갑 한, 짝
그래, 악수
루어
내가 낚싯감이었던 거야
빛살이 되어 파도의 속살을 가로질러 덥석
싱싱한 기대 대신 입술을 꿰뚫은 날카로운 착각
몸부림칠수록 미늘은 깊숙히 박히고
부레를 부풀릴수록 낚싯줄은 긴장
비늘을 움켜쥐는 또 다른 바늘들
빼곡한 통점을 털어 버리고 싶지만
그것마저 놔주지 않는 악력
바다를 배경으로 훌라춤을 출렁이던 여자는
산호도 진주도 아닌 루어*일 뿐
세상을 사냥할 수 있다는 확신은
결국 세상에 낚였다는 관통상이 되지
아가미를 열어 납추 같은 한숨을 떨어트린다
이젠 먹이의 배경에 언제나 바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나인 거야
온몸을 찢어 바늘과 헤어져야지
이젠 루어를 만들어
촉수를 감춰야 할 나인 거야
이젠 내가 세상을 속여야 할 차례인 거지
나는 루어(淚漁)
*루어(lure): 생미끼가 아닌 눈속임용 미끼로 플라스틱이나 금속 재질로 만든다.
아내의 시집
아내는 어느새 셋방살이 같은 잠에 빠졌네요 가게부에 밥풀처럼 납작 달라붙어서요 의류수거함 대신 아내 차지가 된 제 뜨게옷의 보플도, 때 넘긴 파마머리도 투정을 거두고 같이 잠들었네요 아내는 쪽잠 속에서도 흥정을 하는지 깎아 달라고 잠꼬대가 졸린 눈을 비비네요 저는 생활정보지를 접고 말을 걸어 봅니다
-마수걸이라 그렇게는 안 돼요
-그래도 깎아… 주세요
된소리를 발음할 때마다 아내의 눈썹 사이가 구겨져요 아내가 젖몸살을 앓으며 걷던 가계부 속으로 눈길을 피해 봅니다 올 나간 우리 가족을 숫자와 기호로 옮겨 놨네요 북쪽 말로 남편은 '나그네'라던데, 저는 아내의 가게부에서 길을 잃네요 매일 생리통을 앓는 가게부는 아내의 시(詩)네요 한 장 한 편 한 편 이미 아내의 시집(詩集)이네요
-그럼 그렇게 가져가요, 아가씨
미안함에 선심을 써 봅니다 덤으로 싸 준 아가씨란 말에 에누리 없는 웃음이 커져요 비닐 봉다리에 제 것과 애들 것만 담아 꿈길을 돌아올 아내 저는 꿈에서마저 시를 쓰느라 부르튼 아내의 두 발을 주무르네요 아내의 거친 발톱이 오늘 왜 이리도 제 눈을 찌르는지, 왜 이리도 제 가슴에 박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네요
남쪽 말로 아내는 '가시'라고 하데요
생명선 기차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때문일까
빗소리 때문일까
최선을 다해 울어 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누구의 잠도 건드릴 수 없는 물결무늬
몸에 꼭 맞던 잠을 벗어던지고
아이를 건져 올린다
불인한 아이의 손끝이 내 눈을 더듬는
순간, 본다
손바닥을 힘껏 달려야 할 생명선이
시작하자마자 잘려 버린 것을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사이로 아이의 울음이 침목이 된다
창문 너머에서 미안한 듯 서성이는 빗소리
아이도 눈물 자국 같은 생명선을 따라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변명밖에 모르는 처방전에
건널목 차단기를 내린다
나는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
아이의 시든 생명선 끝에
바다를 향해 달릴 철도를
잇고 잇고
또 잇는다
김명호:
1977년 서울 출생. 이후 전주에서 성장.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제9회 시작신인상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외 4편
이문경
생각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미 흘러 내려 높이를 잃은 눈물
엑스레이에는 잡히지 않는 흉통
누군가 움켜잡았다가 놓은 심장
위선의 눈동자는
속눈썹 아래 감출 수 있어도
의미 잃은 말은 벌레에 갉아 먹힌 잎의 그물맥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
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이다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으로
많은 것을 알기 때문,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들어 올리듯
성악가의 성대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 올린다
청동의 아리아는
가장 정직한 호흡,
말을 잃은 기린의 성대는
심장과 교신한다
심장을 통과해야만 목소리는 완성되는 것
목소리는 눈동자보다
정직하다
거리의 발레리나
여자는 하얀 레이스에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요 아무도 몰라요 그녀가 나가는지. 그녀는 이제 교대역에서 사당역까지 걸어도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흰 나비와 새는 그녀를 날아다니게 하는 걸요 그러다 그녀는 가로수에 부딪칠 뻔해요 흰 나비와 새가 연둣빛 잎사귀로 옮겨가려고 하잖아요 글쎄 그녀의 발이 아스팔트에 빠진 줄을 까맣게 모르나 봐요 불온한 봄이 시작되고 있어요
여자는 꽉 막힌 도로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 사이를 날아다녀요 시계를 들여다보며 신경질을 내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쿡쿡 웃어요 그녀는 그 남자가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해요 운전대를 잡고 졸던 여자는 뒷 차의 경적소리에 깨어나 그녀를 보고 웃고 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시간에 다 길 위에 있는 건지, 그녀는 그들이 이상해 보여요 그들도 어쩌면 거미줄에 갇힌 걸까요
거미가 쳐 놓은 그물 속, 그녀는 거미줄에 갇혀버렸어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거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여자는 자신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달고 다닌 이름표는 너무 무거웠거든요 이제 그녀는 이름표 대신 날개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들의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와요 그들도 날개가 필요한가요 그런데 울다 닫힌 동공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 동굴처럼 안전해 보여요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해요 날개가 아파오기 시작했거든요 불온한 봄이, 계속되고 있어요…….
가진 적 없는 돌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계집아이는 혼자였네 돌로 만든 城이 여자아이를 지켜주었다네
혼자라는 건 편안한 불안, 혼자라는 건 자신의 온기로 공깃돌
데우는 것이라고, 다가오는 어둠이 알게 해 주어서 무서웠네
그런 밤이면 풀 먹인 이불홑청을 이마까지 끌어올려도
잠이 오지 않았네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계집아이는 혼자였네 돌로 만든 城이 여자아이를 지켜주었다네
놓쳐버린 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알 수 없는 밤이 지나면
반짝이던 것은 움켜쥔 손 펴기도 전에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다네
너무 많은 것들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네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그러나 그 돌, 버려야만 가질 수 있는 돌이었네
새장 속의 어둠
지금은 밤이야
밤
너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은빛 날개를 만져 봐
아니 날개 말고 그 아래
내 몸을 만져 봐
조약돌 같은 거기
파도치는 내 심장
우린 거기 살고 있었던 거야
한 마리 새와 함께
바지랑대 끝 잠자리 날개처럼
나는 가볍고
불면의 밤을 건너 온
새의 눈꺼풀처럼 나는 무거워
깃털도 무거워지는
밤이야
밤
천칭(天秤) 왼편에는
너의 깃털
오른편 천칭 위에는
나의 심장 25그램을 올려놓는다
내 심장 속, 눈 감은 적 없는 새 한 마리
새장 문을 열어준다
노래하는 새가
그 노래를 잊었기에
인형놀이
1
페달을 밟으며 한강변을 달린다
긴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에 쏟아진다
자전거에는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닦아줄 수는 없어도
내 눈물 닦아주는 자전거
어때요 전 속력으로
내가 달린다면
2
아파트 주차장 구석진 자리
검은 털실뭉치처럼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
실타래 풀리듯 소리 없이
승용차 엔진에 다가가
온기를 끌어안는다
고양이에겐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고양이도 나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3
자동차 시동을 끄고
남자는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인큐베이터 속,
잠든 얼굴을 비추는 할로겐 조명
따뜻한 양수 속에서 밀려 나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든 미숙아는
물속을 부유한다
물속의 집은 고요를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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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경 / 1963년 경북 울진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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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귓속은 겨울 외 4편
남궁선
전나무 숲엔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알전구처럼 빛난다 눈이 내리고 있구나
나는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바라본다
다정한 밤의 풍경
검은 손의 너는 내 어깨 위로 기어오르고
가느다란 팔로 목을 감싼다
우리는 한 번의 겨울도 가져 본 적이 없지,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눈밭 위에 맨발로 꽃잎을 그려 넣을 때
나는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야겠구나
발가락에 닿는 차갑다는 그 감촉은 어떤 느낌일까
발꿈치를 내리고 침대로 돌아와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는다
나는 투명하고 뾰족한 얼음조각에 스며드는
어떤 열기에 대해 상상한다,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내 목을 감싸고 있는 날카로운 손톱을 조금 더 눌러준다면
아주 붉은 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퐁듀처럼 흘러내릴 텐데
하얀 꼬리의 여우들은 볼 수 있을까, 내 방 가득 차오르는 눈물의 깊이
얼음가시에 찔려 빨갛게 터지고 싶은 내 두 발
스테인드글라스
여행자의 일요미사, 성당의 보랏빛 지붕 위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밀떡을 먹으러 신부님께 다가갑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뱀의 혓바닥을 내밀고 사라집니다 조그만 밀떡은 어떤 맛일까요 상처와기적의신부님 구원과은총의신부님 신부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죠
입을 벌렸습니다 신부님이 양미간을 찌푸립니다 너의 혓바닥은 너무 짧아 이곳에선 아무도 너를 모르지 너를 모른다는 것만이 네 존재의 표식 얼굴이 활활 타오릅니다
비쩍 마른 자칼이 사막에서 죽은 것들의 몸을 헤집을 때, 완전하게 침묵할 줄 아는 자칼의 눈과 발톱과 이빨의 탐욕을 알고 있습니까 새로운 굶주림이 너에게 찾아왔으니 너는 속된 것을 내어 놓고 불멸을 약속 받으라 오른손 중지는 왜 자꾸 오른쪽으로 휠까요
햇빛 아래 이글거리며 증발하는 초록빛, 청개구리를 한입에 꿀꺽 삼킨다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거야 불신은 혓바닥의 진화를 가져왔습니다 벼락과 말씀과 보복으로 가득 찬 신부님의 두터운 성대
아직도 비가 오는 날이면 청개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은 습관입니까 하나의 문장을 만 번씩 쓴다면 그 문장이 옷을 입고 사람처럼 걸어 다닌다는 것을 인디언들은 아직도 믿습니까 밀떡은 하얗고 꽃은 아름답습니다 희망의 계획서가 사라진 검은 수첩만이 가장 용감해져갔습니다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
주름 접기
우리는 창의 가운데서 등을 맞대고 흰 커튼에 주름을 접으며 천천히 전진하였다 커튼에 우아한 주름이 겹겹이 쌓여갈 때 창은 여전히 넓고 창백한 입술이 얇아져 갔다
동작대교 아래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강변 공원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다 그대는 왈츠를 추다 마주쳤다 왈츠가 멈추고 노래가 끊겼다 한밤의 어둠을 껴안은 그대의 두 눈이 흔들리고 동작대교 난간에 매달린 분홍 초록 보라의 불빛이 그대의 눈에 맺혔다
그댄 너무 많은 빛깔의 눈을 가진 자
리본
환자복을 입은 창문이여 우리는 병적으로 창을 닦고 병적으로 리본을 부풀렸지 대청소의 날 만족할 줄 모르는 투명한 감독관의 안경알이여, 손에 들린 걸레는 허밍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첫눈
화단의 젖은 흙이 단내를 풍길 때
눈이 온다 왈츠를 추는 그대의 오리털 파카 위로 추리닝 바지 아래로 속눈썹을 스치고 눈이 온다 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어지는 눈이
건기 시대
건기의 밤엔 목마른 나뭇잎이 나를 강간하러 온다
커다란 낙엽이 짐승의 울음 되어 지붕을 덮을 때
나무의 뼈를 핥는 달
낙엽과 대결하는 이 구도는
오래 전,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공포를 계산하던 나의 눈동자
두려운 내 두 귀가 숲속에 날카로운 길을 만들었다
나는 바싹 마른 대지에 이빨을 박고 이 밤을 흡혈한다
고목의 발목 위로 나뭇잎이 수북이 쌓인다
지상의 마지막 물방울을 삼켜버린 구름이 조금씩 계절을 옮겨가고
타오르는 불의 시간,
나는 밤을 지새운 세밀화가처럼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나의 눈을 쉬게 한다
타오르는 무덤
여행자 수첩
강해질 필요가 없는 개
먹을 것을 줘도 살랑대지 않는 개, 그러나
주면 먹는 개와 함께
오직 하나의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곳은 혓바늘이 돋는 건기
중국식당의 중국아줌마는 중국말로 인사를 한다
내 귀에 너무도 익숙해서 나는 내가 중국인인줄 알았다
쌀국수 35바트 물 두 개 20바트
타이마사지 150바트
맥주 30바트 싱글룸 150바트(후불)
주방장이 타이커리를 만들 듯이
몰인정 ․비정․ 무책임과 상관없는 여행자수첩은
숫자만 빼곡하다
짝눈
그는 짝눈을 고치려고 일 년 동안
잘 보이는 눈을 가리고 장님처럼 살았다
삼각플라스크 비이커 메스실린더에
알 수 없는 원소들을 섞으며 놀고 있을 때
그곳은 눈동자가 희어지는 건기
그의 오른쪽 눈을 덮은 교정안대는 떨어져 나갔다
복숭아에 박혀 꿈틀대는 애벌레를 꿀꺽 삼키던 날들이었다
염산과 수소와 헬륨을 섞었을까, 어두운 방 안에서 불길이 솟았을 때
건기의 숲
건기의 숲엔 저절로 불이나기도 한다
타오르는 무덤 위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영혼이 있다
내 혓바닥과 당신의 눈동자가 서로 먼 곳에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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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선 / 1973년 인천 강화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창작기금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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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상 심사를 시작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요즈음의 신인 발굴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신춘문예를 비롯하여 주요 문예지들의 신인상 당선작들이나 당선자들이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공감을 했다. 그 하나는 소위 신춘문예 스타일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로 ‘판박이’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작품은 대개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나 개성적인 표현을 향한 치열한 도전정신이 결여된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문제작보다는 문제가 없는 작품, 즉 무난하고 단정한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당선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성별도 여성 편향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나 남성이 신인 공모에 당선되는 사례가 드문 것은 요즈음 우리 시단이 지닌 문제적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능력에서 남녀나 노소에 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시의 경향에서 편협한 성별의식이나 세대의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고 엄정하고 신중하게 심사를 진행해 나갔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편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너무 단정하거나 그저 무난한 시들은 외형적인 완성도가 높을지라도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신하고 예리한 언어 감각을 도전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남궁선의 「너의 귓속은 겨울」 외 4편, 이문경의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외 5편, 황경철의 「흑백사진」 외 4편, 강민정의 「천사금렵구」 외 4편, 전형주의 「그늘제조법」 외 7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적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창작 경험이 충실히 반영된 것들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매우 고민스럽게 했다. 하여 다시 꼼꼼하게 윤독을 하고 토론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남궁선과 이문경을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머지 세 사람들도 기성 시인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역량을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언어를 장악하는 능력이나 시상 전개의 안정감이 다소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궁선의 시는 비극적 세계 인식을 감각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이 돋보인다. 요즈음 시에서 비극적 세계관 자체도 흔치 않지만,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평범하지는 않다. 비극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은 서로 모순되지만, 이 모순이 오히려 그녀의 시에 개성을 부여한다. 이 모순으로 인해 비극은 더 비극적인 것으로 강조되는 동시에, 단순한 슬픔의 재현을 넘어 삶의 진실을 현현하는 통로의 구실을 하게 된다. 당선작인 「너의 귓속은 겨울」은 “내 방”과 “창밖”의 공간적 대립 구도와 선명한 감각의 언어들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시이다. 삶의 비극성은 “내 방”의 “나”와 “검은손거미원숭이”는 순수성과 야생성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반대로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있는 “창밖”의 “겨울”은 순수성과 야생성이 살아 있는 세계이다. “나”가 지향하는 “알전구처럼 빛나”는 “하얀 꼬리의 여우들”를 소망하거나, “나” 자신의 “아주 붉은” 피가 “퐁듀처럼 흘러내리”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희망의 계획서가 사라진 검은 수첩”이나,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의 “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지는 눈”도 그런 비극성과 관련된 세계를 흥미롭게 형상화한다.
이문경의 시는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정감 있는 언어로 전개해 나간다. 성찰의 대상은 요즈음 시에서 시적 대상으로 직접 취택되는 사례가 아주 드문 편에 속하는 진실, 자유, 순수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관념적인 언어들이 자주 등장하여 고답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참신하고 적실한 메타포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러한 인상을 충분히 불식시켜 주고 있다. 당선작인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에서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너무 멀기 때문”이라는 식의 에피그램(epigram)은 인상적이다.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기린’의 외적 이미지와 생리적 특징을 통해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진 적이 없는 돌」과 「거리의 발레리나」에서도 버림으로써 소중한 것을 얻는다는 역설적 깨달음, 속박당하는 삶에서의 일탈 욕구와 같은 관념적 내용에 맞춤으로 어울리는 형상을 찾아내는 솜씨가 마뜩하다.
이번 신인상 공모에도 경향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응모해 주셨다. 시를 향한 열정과 <시작신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당선자로 선정된 두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가 노래했던 ‘알바트로스’처럼 지상에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날개’를 소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시의 하늘을 향한 비상을 꿈꾸고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 아닐까 한다. 부디 고루한 시와 시단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지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오롯하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심사위원 본심- 김춘식 이형권 홍용희 유성호 // 예심- 박판식 박상수
제8회 시작신인상
화사한 그늘 / 이선균
태양이 이글거리며 쏟아지는 날이면
민박집 노부부 생기가 살아납니다
촘촘히 심어놓은 비치파라솔
싱그런 그늘막 삐져나오는 아기들 웃음소리
옥수수빛 여름 영글어갑니다
태풍 모라꼿에 밤잠 설치기도 했지만 엉겨붙는
늦더위에 여름 한철 그늘농사 모처럼 풍작입니다.
서울 아들도 내려와 옥수수 삶으며
취직 걱정 푸른 파도 위 띄워 보내고
그늘 한 자락에 바람 한 자루 덤으로 얹어주는
이 화창한 음지의 나날,
식당 설거지며 모텔 청소부로 돌고 돌아온
노부부의 고단한 저녁바다
파도가 헛발질로 우회하는 모래톱 솔기 따끔거립니다.
시간의 그늘 화사하게 펼쳐지던 하루가
환한 어둠살로 접혀지고
일기예보에 귀 세운 늦은 밥상 조마조마하지만
화끈거리는 즐거움 이내 곯아 떨어집니다
내일은 몇 채의 그늘막 파도칠 수 있을까요
폭죽 요란하게 쏘아올리는 밤
천개의 별빛 쏟아져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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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 / 1961년생. 경기 포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제7회 시작신인상
구멍에 관한 기억들 (외 4편)
김정웅
1
이따금
추억의 부피가 더욱
커지는 날이 있다 똑, 똑―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 완전히 잠글 수 없는 마음에는
배수구를 낼 필요가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이 더러운 그릇들이 마음이다
싹싹 비우지 못한 그대가 여전히 많다
2
자주 영혼을
엎지르는 사람은
쉬이 타인의 인생을 더럽힌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산다는 거,
나는 나를 벗어
어두운 세탁기 안에 넣는다
세탁기가 돌아갈 때는 소리내어 울어도 좋을 것이다
단번에 울음을 끌 수 있는 전원 버튼이
몸에도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3
이 모든 일상적 불행은
있지도 않은 고기를 찾아 김치찌개를 뒤적대거나
아버지의
작업복을 몰래 뒤져
담배 몇 개비를 꺼내는 것과는 다른
슬픔, 물을 갈다가 깨뜨린 꽃병,
산산조각이 난 외부를
병의
주둥이는 꽉 붙들고 있다
함부로 엎질러진 입구는 견고하다
가장자리의 힘
버림받은 것들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모인다, 지난 봄
꽃잎이 모인 길가로 다시
낙엽들이 모이고, 너의 부드러운 내부로
차마 들어가지 못한 나는, 그대의 생
그 아름다운
가녘을 따라 아주 천천히 걷는다
아무 사연도 담지 못한 빈 소주병이
밀려오는 해변이나, 점점 그늘을 밀어내는
산자락을
따라,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걸어 본 자는 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왜 세상의 경계로만 모이는지,
검은 머리칼
흩날리며 가는 저 황혼은
너의 내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外界의 색이었음을, 내 몸의 끄트머리
손발톱처럼 가장자리는 단단하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내도
다시 자라나는 힘이 있다, 여러 번
사랑에게 버림을 받고도
가장자리계*는 쉬이 망가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모든 버림받은 것들이 모인다
끈질긴 숨을 몰아쉬면서,
―――
*
(대뇌)변연계. 감정, 욕구, 기억 등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핵 근처에
대뇌반구의 가장 안쪽 모서리를 따라 있는 몇 개의 뇌 구조의
집합체.
나는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밤
잠에서 깼을 때 눈가에 물이 고여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내가 낙타를 사랑하기 전에 낙타의 등은
반듯했었다 낙타의 등이 굽은 이유는
나의 사랑이 굴곡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막이다, 뱀이나 전갈처럼
한껏 독을 품지 않으면 추억들은 견딜 수 없다,
미라처럼, 죽은 후에도 차마 썩지 못하고
끝끝내 견뎌내야만 하는 사랑이 여기에 있다,
그 어떤 그리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지독한 내륙에서 길을 잃은 사랑, 매일 밤
사막이 비를 그리워하듯* 그대가 그립다 그러므로
잠에서 깼을 때 비가 내리고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두 번 다시
내 생에 범람하지 못할 그대,
지금은 어느 곳에서 비를 뿌리고 있을까
하늘을 향해 쩍― 입을 벌린
목마름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발자국을 지워도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격정의 밤, 나는 마침내
잎을 모두 뜯어 삼키고 메마른 나무처럼 버려진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나를 견딜 수 없다
―――
* 팝그룹 EVERYTHING BUT THE GIRL의 노래 「Missing」중에서.
** 집회서 6장 3절 중에서.
내 귓속에 도청장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내 귓속 달팽이들이 우,우─
하고 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우─ 하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술을 모르던 어릴 적, 귓속에서 달팽이들이 우는 날에는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나는 내 살을 꼬집어 비튼다. 비틀은 지리마다
스멀스멀
달팽이들이 기어다닌다.
내 고통이 낳은 달팽이들이
너에게 가 닿으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고통에도 모양이 있다면
나선형일 것이다.
사랑이란
맨살에 나사를 조이는 것,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나사처럼 몸을 말고
내 심장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달팽이의 짓무른 살점이
나사처럼 단단해지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손바닥으로 탁─탁─ 귀때기를 때린다.
그녀가 떠나며 박아 넣은
내 귓속 도청장치, 달팽이들이 죽어버리도록…
여전히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저수지의 개들
한여름마다 꼭 시체가 떠오르는
이 저수지는 쉽게 들키지
않는다 뛰어내리기 좋은
절벽들은 낭만적이다, 산등성이에서
달려 내려온 숲의 속도가
짙다, 사람 얼굴을 뒤집어쓴 개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람 얼굴을 뒤집어쓰지 못한
개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올랐지만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천박한 사운드가 너무 커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개들은 취해
버린다
임자 있는 몸이 임자 있는 몸을 희롱하고, 모든 사랑은
개수작이었다
바짓말을 적시며 물가에서 뛰어노는 저 아이들은
속옷이 완전히 젖는 날 어른이 될 것이다
개가 개를 먹고
개 같은 하루가 가고, 저 저수지 속
물고기들에게 살점을
툭툭 떼어 던져주고 싶은,
더 줄 것이 없어지면 마음까지
모두 내던지고 싶은 날들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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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웅 / 1980년 서울 출생. 2007년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주소 : 서울시 금천구 독산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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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 (외 4편)
기세은
아빠는 등푸른 생선을
즐겨 먹다가
바다로 떠났다
그 이후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랄 때마다
파란
물고기도 무거워진다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의혹이 심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루는 미용실에 갔다
파란
물고기가 다치지 않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더니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아빠가 불쌍해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두통이 심해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바다로 찾아갔다
머리를 흔들어
댔지만
파란 물고기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빠 하고 불러 봤더니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들어오라 한다
지느러미가 없다고 했더니
너는 이미 등이 몹시 푸르께하다고 하며
군침을 삼킨다
―――
* 천경자 화가의 그림 제목.
눈부신 방
매트 위에서
나는 혼자였다
뒤꿈치 들고 걸었더니
둘이 되었다
퍽 놀랍기도 했다
서로에게 누구시오 라며 질문을 해댔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심심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그랬더니 셋으로 늘어났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묻는 것은 피차 예의상 그만두었다
앞구르기로 가서
뒷구르기로 되돌아왔다
도무지 부딪히지도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곧 이어 넷, 다섯…
점점 수가 늘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각기
되돌아갈 시간에 사라졌다
퍽이나 고요한 하루였다
도드리*
나는 당신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어른이란 의미를 몰랐다
매일 매일
당신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날이 귀와 눈이 멀어져갔다
반년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똑같은 설명만 반복했다
드디어 모든 감각을 상실하자
나는 어른 흉내를 내었다
당신은 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매일 매일
당신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춤을 췄다
당신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어른에 대한 불신을 키워 나갔다
당신은
반항하기 시작했고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방심한 나머지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당신이 어른이 될 차례다
나는 색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다
―――
* '다시 돌아서 들어간다'는 뜻.
마녀 사냥
그녀는 원래부터 마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비밀 하나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토로하려 했으나 친구들은 외면했다
답답함에 매일매일 가슴을 두들기다
파란 멍이 생겼다
눈물이 났다
파란 눈물이었다
파란 눈물을 병에 담아두고
매일 밤 파란 눈물을 머리카락에 발랐다
그녀가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파란 머리카락의 색다름에 반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병에 담긴 파란 눈물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가슴을 세게 두들겨도
더 이상 파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빈 병만 남았다
파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즉단했다
베스트 프랜드
친구야, 친구야
작년 너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나는 앞날이 막막하다고 했어
나는 다 지나간다고 했어
얼마 전 우연히 너를 보았어
너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
깜짝 놀랐어
눈알이 보이지 않았어
그동안 너에게 무심했던 나는
크게 낙심했어
세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
눈을 감아도 다 보였어
그래서 너의 눈알을 되찾아주기로 했어
먼저 파출소에 신고하고
눈알이 갈만한 장소에
눈알 찾기 포스터를 붙였어
라디오 사연으로 올리기도 했지
방송되자 눈알을 비난하는 댓글이 빗발쳤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눈알을 생각하자
눈알이 빠질 듯 아팠어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알이 네 개나 있었어
너를 찾아갔어
너는 예전보다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줬어
내 덕분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했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너와
헤어졌어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네가 생각나지 않았어
다음 날
나는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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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세은 / 1984년 출생. 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
4학년.
주소 : 서울시 강동구 성내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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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회 시작 신인상 심사평 】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젖힌 채 감탄에 젖게
된다. 그곳에는 신의 영감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 〈천지창조〉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바탕 한 〈천지창조〉의
연작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아담의 창조〉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서로 연속성을 이루고 있으나 완전히 마주치지는 못하고 있다. 연속성과 단절이라는 모순 명제가 미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완전히 합치되지 못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를
지향하고 갈망하면서도 항상 갈등, 분열, 파행의 세속적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마주치지 못한 미세한
거리, 여기가 바로 지상에서 끊임없이 시가 생성되는 자리가 아닐까? 시는 현실과 꿈, 세속과 신성, 하강과 상승의 틈새에서 그 불연속성의 초극을
위해 전전긍긍 고투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정치권의 퇴행적인 행태와 경제적 한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 속에서도 더욱
늘어난 2009년 제7회 《시작》신인상 투고작을 마주하면서 시를 생성시키는 동력은 불화와 고통의 공간이라는 원론적인 명제를 새삼 더욱 깊이
환기하게 되었다. 120여 명의 1,5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 시대의 결핍과 원망의 시적 삶의 현장과 화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김정웅과 기세은의 작품을 2009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기세은의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은 날카롭고 경쾌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진경을 싱그럽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슬픈 전설"의 환정적인 토로나 "모든 감각을 상실"하면서 "어른"이 된 과정을 노래한(「도드리」) 시편들에서 매우 "색다른
혁명"적 언어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 김정웅의 응모작들에서는 그늘 깊은 삶의 언어를 표현하는 숙성된 솜씨를 만끽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 나를 견딜 수 없다"(「나는 사막이다」)와 같은 진술은 "마음까지 / 모두
내던지"(「저수지의 개들」)는 시적 삶의 열정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응모작들의 고른 수준도 믿음직한 기대를 갖게
했다. 서로 시적 성향은 다르지만 문학적 성취도에서 오늘날의 우리 시단을 선도적으로 헤쳐나갈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공동 당선을
결정했다. 거듭 축하하며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 홍용희, 유성호, 김춘식,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