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안상근-
낯선 세상은 늘 설렘으로 옵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늘 끌림으로 다가옵니다
호기심은 짜릿함 그 자체입니다
체험은 살 떨리는 즐거움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웜홀로 가는 여행/김길나-
아랫도리를 보면 순수의 나이를 알 수 있다
먼 어제를 안으로만 감아 들였으므로
아랫도리에는 둥근 회로가 겹겹이 새겨졌다 지구의
공전속도를 기록 중인 그의 문헌이 펼쳐지고
침묵 속에서 숙성된 비경이 뒤쪽으로 풀린다
풀리는 시간을 따라 기차 한 대가 회로내선을 달린다
내부 쪽으로 진입한다
감춰둔 그의 날개에는 부화한 새들의 꿈이 얹혀 있다
달이 수없이 다녀간 밀월의 방은 밤으로 봉해져 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한다
기차가 안쪽으로 거푸 백 년을 내리달렸다 침묵의
퇴적층 층층이 쟁여진 꽃들이 긴 잠을 털고 차례로 깨어난다
어제와 내일이 겹친 모든 오늘이 살아나는 이곳에서는
어제의 꽃이 내일의 꽃을 들고 걸어 나온다
다시 백 년을 달렸다 당도한 곳은
회로내선의 종점이다 그 마지막 내부인
‘본원지’에는 특이점 한 알 찍혀 있다
거기, 종착과 시발의 합류인 장대한 시공간이
원형으로 돌돌 말려 있다
신기한 세계는 그러니까 씨앗이었던 것!
꽃은 죽고 꽃은 살고,
이 역설의 동력이 집합되고 압축된 몸체는
눈곱만한 씨앗이었던 것!
종점에서 하차한 나는 티끌만큼 작아져서
말을 잃고 손발을 잃고
시푸른 구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아득한 씨앗우주의 웜홀로 빨려들었다
다른 우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이병률-
어느 골목 창틀에서 집어온 대못 하나
집에 가져다 컵에 기울여 꽃아놓았더니
뚝뚝 녹가루를 흘리고 있다
식당에서 먹다 버린 키조개 껍질
뭐라도 담겠다 싶어 가져왔는데
깊은 밤 쩌억쩌억 소리가 들려
집 안을 두리번거리다 안다
공기 중이라 조개의 몸이 갈라지는 것을
나를 털면 녹 한 줌 나올는지
나를 공기로 쪼개면 나는 쪼개지기나 할런지
녹가루를 받거나
갈라지는 소리를 이해하는 몇일을 보냈을 뿐인데
머리카락을 남기고 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마음이 어질어질한 것이 나로 인한 것인지
기어이는 숙제 같은 것이 있어 산다
끝나지 않은 나는 뒤척이면서 존재한다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나를 이토록 옮겨놓을 수 있다니
그러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6-풍경의 그늘/휘 민-
불 꺼진 브라운관에 얼굴 하나 떠오른다
리모컨을 손에 든 채 살짝 입꼬리를 올려본다
언제쯤 버릴 수 있을까
폐허 속에서도 웃음을 연습하는
이 지독한 습관의 잔상을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고 아이들은 유치원에 등원하고
나는 어두운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본다
방송 3사의 아침 드라마를 순례하고
케이블 채널 들락거리며 한물간 막장 드라마를 다시 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홈드라마의 문법에 코웃음이 나지만
점심때까지는 이 안락한 소파를 지켜낼 것이다
이 먼 길을 오려고 예감도 없이 털레털레 걸어왔던가
비전 없는 환상을 좇으며, 리모컨이 가리키는 대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쳤던가
광고주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스티브 잡스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잡지 매대에서 내가 쓴 칼럼들을 뒤적일 때는
퓰리처상 수상자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차라리 저 무료한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키면 좋겠어, 아니 시계 따위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
리면 좋겠어,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이 게으른 소파 위로, 밥그릇에 말라붙은 점액질의 통증 위
로, 시원한 소나기 한바탕 쏟아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 몸속, 내 모든 신경세포들과 이백여섯
개의 뼛속까지 흠뻑 적셨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진실이 궁금하지 않다
오늘도 유폐당한 기억은 브라운관에서 굴절되고
텅 빈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사이렌이 울어댄다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리는 이 슬픈 진공관
아무리 초점을 맞춰도 매직아이는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사람도 관계도 사라지고 풍경의 이미지만 남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웃고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에만 아름답던 음소거의 풍경
온종일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막다른 계절의 골목에서
모두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플라스틱 해바라기들
저 흔들리지 않는 풍경 위에 나의 별이 찾아오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견뎌야 할까
-아름다운 동행ㆍ21-내장산 가을로의 여행/이순희-
일상의 익숙에서 벗어난
입동 하루 전 내장산은
불꽃놀이 터뜨리고 있었다
타올라라
단풍이 서러운 아픔의 꽃이라는 걸......
눈이 시린
마지막 불꽃놀이는
화려하다 못해 서러웠다
땀으로 오른
675m 연자봉 정점에 서서
내려다 본
저 봐라, 극한상황에서 태우는 사랑,
따뜻한 눈물 꽃 되어
만추의 서정을 빚지 않는가
더 타올라라
아직 가시지 않는
단풍 냄새 묻어난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동행은
영혼의 불씨 되어 시작되고 있었다.
-사막여행/구석본-
그대가 걸으면
세상의 길은 모래로 변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지니,
그대의 배후에는 오래 쌓아올린 성벽과 사람들의 우상이
하얗게 모래로 부서져 내릴 뿐,
물이 강을 이루고
강이 그리움처럼 흐르는 건너편
그대가 뚜벅뚜벅 닿는 순간,
어느 새 모래밭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대의 길은 앞만 있을 뿐,
뒤를 돌아보지 말지니
시간은 반대 방향을 가지지 않는 법
그림자를 삼켜버린 햇살 아래의 휴식은 시간과 몸 말리는 일이다
스스로 모래가 되는 휴식 끝에
낯선 곳에 닿는 순간,
누군가가 지나간 모래밭, 그대가 지나온 모래밭이다.
더 낯선 곳에서 부는 그대의 휘파람소리는
모래와 모래가 부딪는 소리였다
이윽고 해가 지면
그대의 쓸쓸함과 지평선에 홀로 서 있던 나무와
허공에서 날개를 접은 새가
거대한 모래의 세상으로 환하게 다시 열린다.
그대의 생은 처음과 끝이 모래로 이어진 길이었다.
-여행/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색채여행/권기만-
수묵은 강이다 나는 그걸 하늘이라 읽는다 내 눈에 번지는 것으로 강을 만드는 수묵, 그 침묵
의 흘림은 영감이다 수묵으로 꼬리를 감춘 구름 흘러간다 그 왁자한 묵상에 귀가 번진다 바람도
제 살 풀어 흐름을 보탠다 흐르지만 불기도 하는 건 그 때문, 소리가 번지지 않으면 하늘을 얻은
게 아니다 수묵의 잎에 옮겨다놓은 굵직한 물살을 나는 굳이 잉어라 읽는다 커다란 물살을 덮어
눈을 감고 있는 건 그냥 흘러가는 것, 번지며 밀려오는 잔물결 안으로 돌려놓고 분주한 입질이
다 박쥐란처럼 날개의 내면을 다 덮은 구름 이파리들이 밖을 잠그고 벽 속으로 강을 풀어 놓은
다 잎으로 번진 영감의 꼬리가 흔들린다 지나가던 별똥별 무리가 성운인가 싶어 맨몸으로 뛰어
든다 묵상의 귀가 한 번 더 번진다
-침실이라는 우주여행/장인수-
아내와
침실에 누워있으면
어느 날은
몸도 영혼도 아닌
우주의 다른 에너지가
둘 사이에 흐른다
아내의 몸에는
문도 없고
출렁임도 없는
암흑물질
부부로 만나서
몇 시간 전
닭도리탕을 함께 먹고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고독의 혀를 적시고
영혼의 입술에 닿았던 사이
입술을 연다
부부가 아닌 생명체로 만나고
어느 때는
모래알로 서로를 부비거나
지구와 달의 관계처럼
인력이 존재하고
끌어당기지만
운행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이
어느 때는
손길로
꿈결로
서로의 내부를 들여다보지만
밤은 쓸쓸히 깊어만 가다가
서로의 가슴을 찾는다
한 몸처럼 가깝다가
어느 날은
남남처럼 멀다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몸의 고유 영역은
먼 우주를 향한 이끌림
밤의 탐닉
불끈 솟아오른
성기는
긴 꼬리의 혜성
우주여행을 떠나는
너와 나
-아빠 찾기 여행/김은정-
아빠를 찾아 떠난 그 길에서 난 거룩해지거나 타락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이탈리아 소렌토 작은 성당에서 산타마리아를 부르거나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 몸
을 씻거나 유타의 모르몬 교회에서 대리침례를 받거나 사우디아라비아의 하지 순
례를 하거나
그렇지만 아빠는 내 침실의 천정을 폭우로 뒤덮고 벼락으로 땅을 가르며 불길을 일
으키고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더욱 나를 내몰고
아, 아빠 난 아빠의 잃어버린 여행 가방이거나 쓰다 버린 기행문이거나 쪽지에 휘
갈겨진 시이거나
*그래서 내가 가는 길엔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고 올리브나무에는 딸 것이 없고 밭
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하고 우리에서는 양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어지고
까마득히 먼 아빠와 나의 거리에서 난 또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빼곡한 경전이거
나 백지이거나 빛이거나 어둠이거나
* 성경의 하바쿡서 구절 인용
-불면여행/김송포-
한밤중 맨살을 두드려 보네
꿈의 문을 열어 고향으로 여행을 떠나네
고양이는 골목을 휘저으며
먹다 남은 생선가시 들고 귀퉁이에서
기억을 발라먹다
목에 걸린 가시가 끄럭거리네
파도를 씹은 혀가 벼랑에 부딪혀 바람이 일다
사막에 떠밀려가네
어디론가 먼지 날리며 도망을 가네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네
돌아보니 놓친 것은 뱀이었어
뱀을 찾으러 바다로 들어 가 보자
바닷속엔 하얀 머리와 고운 얼굴이 보이고
젖내가 나기도 했어
떠오른 몸은 수초처럼 흐느적이고
푸른 기억에 휘날린 것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이었어
붙들고 따라 가 보니
흔적을 먹으며 베어 문 자국이 아파지네
깨어 보니
맨살은 멀쩡하게 살아 있네
-여행/전원책-
강변길 달리는 트럭
소나무 한 그루 길게 누워 간다.
아마도 평생 단 한 번일
꿈같은 여행
찬 강바람을 맞으며
덜컹대는 짐칸에
무슨 형벌처럼 단단히 묶여가면서도
너른 정원에 멋들어진 삶을
여태 꿈꾸는 이가
어디 소나무뿐이겠느냐.
잘 뻗은 가지들 제 흥에 겨워 흔들대며
세상 어디엔가 마련할
그늘 드리울 곳
강바람을 가득 품고 간다.
-나비 여행/박우담-
나비의 길은 곡선이다.
선과 선은 짧게 때론 길게 맥박의 떨림처럼
신은 인간을 빚을 때 꿈을 불어 넣었다.
인간들이 꿈길을 통해 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지는 시간
나비가 밤의 악장을 관통하며 비뚤비뚤 날아간다.
밤마다 미완성 음계를 맞추다가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악보를 살아온 노인
링거에서 이어진 가느다란 튜브 속으로
밤의 거친 숨 몰아쉬며
꿈길에서 영혼의 천사라도 만나면
원래의 템포와 박자로 내려앉는 나비
영혼이 환상과 상상과 떨림으로 빚어지는 꿈길
애처롭게 숨을 내뱉은 나비가
박자와 템포를 훌쩍 넘어버린 나비가
지문마저도 벗어놓고 떠난 나비가
몽환의 시간을 걸어간다. 밤의 색채와 리듬 속으로.
꿈은 여백이고 환상이며 곡선이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