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씨
- “하고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의미 있게 해나가는 것이 목표”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불리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는 ‘치열하다’는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대형 금융기관들이 몰려 있을 뿐만 아니라, 20조 달러(약 2경 6,500조 원)가 넘는 주식이 거래되는 뉴욕 증권거래소도 그곳에 있다. 그 치열한 세계에서 신순규 씨는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설 자리를 만들고 활동해왔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씨를 만났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A. 안녕하세요? 30년 가까이 뉴욕에서 애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신순규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투자회사인 브라운브라더스해리먼 투자은행에서 이사로 재직하고 있어요. ‘유 퀴즈 온 더 블록’,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에 출연했지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새벽에 출근길에 나서 회사에서 일하고 하루 한두 시간씩 글을 씁니다.
Q. 애널리스트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A. 애널리스트는 국내외 경제·증권 시장에서 기업의 가치를 분석하고, 소속 회사나 투자자 등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기업 분석을 통해 투자할 만큼 견고한 기업들을 찾고, 견고한 기업의 신용질 대비 채권 가치를 비교하는 일을 합니다. 견고한 기업의 채권이 비교적 저렴하게 시장에 나올 때 매입하고, 시가가 비싸졌다고 판단되거나 기업의 견고함이 의심될 때 매각을 결정합니다. 저는 의료 분야 채권 애널리스트입니다. 과거 회사에서는 병원 채권을 사지 않았는데 저의 설득으로 매입을 시작했고, 약 8억 달러의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되었어요. 이때 고객들이 많은 이윤을 얻었습니다. 경제 소식에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에 미국의 스크린리더 프로그램인 JAWS로 월스트리트저널과 블룸버그 뉴스를 봅니다.
Q.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
A. 9살 때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인해 시력을 잃었는데요, 어머니의 권유로 배운 피아노가 저의 진로 탐색 영역을 넓혀주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웠기에 교내 중창단 반주를 맡아 미국 투어를 가게 되었고, 필라델피아 오버룩 맹학교에서 공연하는 중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유학 제안을 받았습니다. 낯선 곳, 더욱이 외국에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시각장애 학생에게 장학금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어 놓칠 수 없었지요.
Q. 진로를 변경한 계기가 있을까요.
A. 음악적 재능의 한계가 있어 학업으로 진로를 변경해 보려 했으나, 당시 맹학교는 공부보다 취업을 우선해 여의치 않았습니다. 선교사님 소개로 인연을 맺은 가정을 찾아가 고민을 상담했는데 흔쾌히 지원을 약속해 주셨고, 이후 일반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그분들이 제 두 번째 부모님인 미국 부모님입니다. 시각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것이 처음이기에 저도, 선생님들도 도전의 일상을 지냈어요. 화학 분자 모형을 만들기도 하고, 양궁을 시도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표적 앞에 앉아 활시위만 놓으면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도록 배려해주셨죠. 즉 시각장애가 있다 해서 못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할 수 있다는 전제로 방법을 찾아간 것 같아요. 그러한 환경 덕에 ‘시각장애가 있음은 받아들이지만 그 장애에 연연하지 않는 법’을 자연스레 익혔습니다.
Q. 애널리스트의 어떤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나요.
A. 시각장애 정신과 의사의 사례를 접하고 하버드에 진학했으나 의료법 관련 규정이 개정되면서 의사의 길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이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영학과 조직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 연구 프로젝트로 뉴욕 월스트리트 사람들과 연락을 하게 되면서 기업 분석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교수님의 권유로 월스트리트 최고의 투자은행인 JP모건 인사 부처에 인턴이 되었지요. 애널리스트는 주관적인 의견보다 그가 이룬 성과를 통해 객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평가받습니다. 나이, 외국인, 시각장애 등 외적인 요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기업을 하나씩 분석하다 보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돼요. 어떤 한 조각(기업)을 통해 큰 그림(경제 전망)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애널리스트가 갖춰야 할 자질로는 끊임없는 궁금증과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자신감을 들 수 있습니다. 기업 분석을 위해 수백 개의 질문을 던져야 하고, 혹 투자자의 의견이 자신이 측정한 가치와 다르더라도 “내 의견이 맞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각장애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비칠 때에도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만 깔아 준다면 무슨 일이든 자신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Q. 업무상 도표나 차트 등을 많이 접하진 않는지요.
A. 표와 그래프 등 시각적 자료들은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한 것일 뿐이기에 없더라도 기업 분석을 할 수 있어요. 엑셀 파일에 저장된 데이터로도 충분하지요. 저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블룸버그 터미널이나 관련 웹사이트를 통해 기업 보고서 및 신용등급 기관이 발행하는 리포트 등을 다운로드해요. 자료를 읽은 뒤 다른 전문가들과 대화하고, 경쟁사 직원과도 연락해서 문답을 하죠. 간혹 기업이 공개하는 자료에 보안이 걸려 있어 접근이 어렵기도 한데, 그럴 땐 기업에 연락해 보안을 풀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브라운브라더스해리먼 투자은행에서는 점자 디스플레이와 스크린리더, 한소네 등을 지원해줍니다.
Q. 지금까지 책도 두 권이나 내셨습니다.
A.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합니다. 종종 “자서전을 써 보십시오”라는 연락을 받곤 했는데, 자서전을 쓸 만큼의 연륜·경력이 부족하다며 고사했어요. 하지만 에세이는 출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어떤 영웅적인 성공기가 아니라 한 개인이 살면서 느낀 감상이나 생활하며 겪은 경험 등을 풀어내고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한 출판사 편집장님과 인연이 닿았고, 2015년 첫 책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에세이 출간을 계기로 매일경제와 조선일보 등에 칼럼을 쓰기도 했고, 2021년 두 번째 책 <어둠속에서 빛나는 것들>도 펴낼 수 있었지요. 두 권의 에세이 모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감사한 한편 쑥스럽기도 해요. 제 이야기가 고단한 일상에 작은 격려나 이정표, 더 나아가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거예요. 현재는 칼럼보다는 세 번째 책 출간 준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Q. 자선단체 ‘야나 미니스트리’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A. 저는 두 배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한국의 부모님과 15살 때부터 버팀목이 되어주신 미국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거죠. 우연한 계기로 2008년 한국에 부모 없이 아동양육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약 2만 명이나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부모님은 네 분인데 그 아이들에게는 그런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런 서류나 절차 없이 저를 아들 삼아 돌봐주신 미국 부모님처럼 저 또한 그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 한 젊은 목사님과 함께 한국 아동양육시설의 아이들에게 교육·자립 지원을 제공하는 ‘너는 혼자가 아니다(You are not alone)’라는 의미를 담은 비영리단체 야나(YANA) 미니스트리를 공동 설립했습니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야나 유학 프로그램이에요. 이 프로그램에 처음 초대된 아이가 바로 제 딸 예진입니다. 예진이는 10년 전 초등학교 졸업을 한 지 두 달 만에 저희 집에 왔어요. 유학생 신분이지만 저희 부부에게는 딸로, 아들에게는 누나가 되었지요. 지금은 미국 오하이오주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며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목표를 들려주십시오.
A. “Doing the best I can, as long as I can.(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이것이 제 좌우명입니다. 야나 미니스트리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의 가족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아울러 글과 강연으로 많은 이들에게 MICE(Motivate 동기부여, Inspire 영감, Comfort 위로, Encourage 용기)를 알리고 싶습니다. 많은 것을 받고 여기까지 왔으니 많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도서출판 점자 협력 월간 간행물 <손끝으로 읽는 국정> 198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