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과의 대화
서 양 순 sys3921@hanmail.net
참 반가웠다. 얼마만인가? 오래도록 소식을 잊고 지내던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다. 손이라도 덥석 잡고 정담을 나누고 싶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 이제 폭염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나무 가지에선 매미들이 녹청을 높 혀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듯 처량하게 울부짖고 있다. 이젠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으니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었다.
베란다에 흩어져 있는 화분을 정리 했다. 난분하나가 내 시선과 마주친다. 한 때 정성을 들여 건사했던 여석이 아닌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별로 높이 평가 받지도 못한 소심(素心) 난분이다. 잎이 튼튼하고 꽃이 피는 모습이 아름다워 아꼈던 난이다. 나도 저 녀석처럼 의젓한 모습을 닮고 싶었다. 추운 겨울에도 베란다에서 덜덜 떨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향기를 내 뿜는다. 꽃대가 쭉쭉 뻗어 오르고 하얀 꽃잎을 활짝 펴고, 의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이야기다. 오래도록 교분을 하고 지내던 친구로부터 난 산채(蘭山菜)를 가자고 연락이 왔다. 초행이 되어 가슴이 설렜다. 산행 준비를 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목적지는 영광이다.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산 입구에서 술 한 잔 부어 놓고 산신(山神)에게 신고를 했다. 산신제를 지낸 샘이다. 우리들의 안전과 좋은 작품을 점지해 주라고 기원을 했다.
난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함부로 난을 해치지 말 것,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서로를 베려 할 것이며, 꽃이 피지 않는 난은 구별하기 어려우니 도움을 청하라고 한다. 잎(葉)가로 노란 줄이 그어져 있으면 복윤, 잎 가운데로 노란 줄이 그어져 있으면 중투, 잎이 뱀 거죽처럼 무늬가 있으면 사피, 야구방망이처럼 잎이 짧고 통통한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꽃이 하얗게 핀 것은 소심, 빨간 꽃이 핀 난은 아주 고급난이라고 한다. 눈이 번뜩 했다. 난초 잎은 모두 똑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복잡하다니---. 사람들이 선호 하는 소심이니 복윤 중투 사피 같은 난은 일종의 돌연변이다. 사람 같으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기형이다.
난은 명산에만 자생 한다. 산 형세가 동쪽을 향하고 80부 능선에 지형이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좋은 난이 있다고 설명을 한다. 나 같은 초심자를 위해서 설명까지 자세하게 해 주었다.
한참을 돌아 다녀도 설명했던 난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어 시간쯤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인가?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는 깊숙한 곳에 하얀 꽃이 눈에 뜨인다. 눈을 의심 했다. 분명 소심이다. 옆에 있는 친구를 불렀다. 소심이라고 확인을 해 준다. 뿌리를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캤다. 작은 흥분이 인다. 신문지에 정성들여 싸서 가방에 넣었다. 난을 캐는 과정에서 눈을 다쳤다. 나뭇가지에 눈을 쑤신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난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간다. 난(蘭)은 변함이 없었다. 30 년 동안 삶의 애환을 함께 해온 여석이다. 좁은 집에서 살면서 난을 키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괄시(恝視)를 받는다. 버리고 가자는 아내의 생각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성들여 건사도 하지 못했으나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인사를 한다.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물을 주는 것이 고작이다. 이년 정도 지나면 분갈이를 해 주었다. 주는 것이라곤 겨우 물뿐이다. 콩나물이 물만 먹고 자라듯 난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신아(新芽)까지 나와서 번식을 한다. 대단한 생존력이다.
난(蘭)은 기다림의 화신이다. 일 년 내내 꽃 한번 피워 주는 것이 전부다. 기다림의 연속이다. 개화도 길어야 한 달 정도다. 한 꽃대에서는 한번만 핀다. 요즈음에는 잎도 크고 꽃도 다양한 난들이 많이 등장 했다. 서양난이다. 서양난이 동양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인공 배양을 통해 많은 종류의 난을 키우고 있다.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 된 물품을 만들어 내듯 대량으로 생산 하고 있다.
인사철이 되면 난분을 들고 오가는 사람을 많이 본다. 사람들은 왜 난을 선물하는 것일까? 난은 척박한 땅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난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고 인내의 정신을 배운다. 일 년에 한 번 피는 꽃의 모습은 의연하다. 청빈과 기다림을 생명으로 삼았던 선비들의 기개가 난과 서로 상통했으리라 생각 된다. 난을 선사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들이 그 참뜻을 알고 주고받는 것일까? 축하의 선물로 많은 난분을 받은 사람이 얼마가지 못해 부정부패에 연류 되어 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내가 난을 알게 된 때는 젊었을 때다. 아무리 심한 운동을 하고 일을 해도 별로 피로를 못 느꼈다. 이젠 연륜이 짙다 보니 그렇지가 못하다. 자세도 흐트러지고 정신도 전과 같이 않다. 꼿꼿한 자세며 의연한 모습을 왜 닮지 못했을까? 난 꽃이 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제부터라도 정성껏 건사하여 눈 빛 보다 더 하얀 난 꽃을 기다리련다.
첫댓글 가을 장맛비가 연일 내리고 있내요.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밤은 찬 바람이 불어 가을을 실감 했습니다. 이제 가을이 오면 쓰지 못했던 낙서를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문학의 대선배님! 난과의 대화잘읽고 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선배님이 키우신 난 처럼 우리선배님은 우리들에게 삶에 용기를 주시고 넉 넉함을 향상 주시는 선배님 감사합니다. 향상건강하십시요.
김시인! 참 오랫만이네. 이제 결실의 계절을 맞아 고생한 보람을 느끼겠네. 지난번 일이 성사 됐음 참 좋았을텐데. 아쉬웠네. 더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네. 알알이 영그러 가는 오곡 백과를 바라 보면 힘이 솟구치겠네. 감사하네.
요즘젊은이들은 만난지 100일을 기념하며 헤어지지 않은것을 기뻐 한다고 하는데 애인인양 일년에 한번 견우와 직녀처럼 소심난과의 만남을 삼심년 이어 오시는 그 삶이 경건하게 느껴 집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멋진 글 감사 합니다 노운서
노운서 원장님! 반갑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청백한 정신, 기다리며너 생각하는 인내의 삶, 구김새 없이 쭉쭉 뻗어 가는 꽃대며 백옥 같은 꽃잎에 매료 되었나 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양순 고문님, 난향이 남도문학에 가득해보입니다. 고문님께서는 정녕 난처럼 순수하시고 의연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박교수님! 칭찬을 듣고 보니 난향이 풍기는 사람처럼 우쭐해 집니다. 하- 하-.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