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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폭력 트라우마'와 '미군도 윤 일병 사례가 있을까'의 소개에 앞서
군대폭력으로 야기된 윤 일병 사건이 터져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마침, ‘군대 폭력을 경험하고 생긴 트라우마’ 라는 글과 이러한 군대폭력에 관하여 우리 군대와 비교할 수 있는 '미군도 윤일병 사례가 있을까'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가 군 복무하던 시절(1972.10∼1975.8)에도 군대폭력이 있었지만, 군복무 3년 동안 점차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 일병 사건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군대폭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오히려 40년 전보다 군대폭력이 더 심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제가 현역으로 군 복무 시에 자대근무 1년차는 무척 군기가 세었습니다. 걸핏하면 야간집합이 반복되었었고, 줄빠따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2∼3주 빠른 동기가 페치카 불을 잘못 관리한다고 고참들에게 얻어맞아 골병이 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군대폭력이 2년차부터는 점차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3년차는 고참이 되었으므로 예외로 감안하더라도 군대 3년간의 세월이 지나면서 군대폭력이 눈에 띄게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기에서 소개하는 글을 쓰신 분이 저보다 10년 이상 나중에 군 복무를 하신 것 같은데, 군대폭력이 제가 제대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군대폭력은 사이클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졸병이었을 무렵에 고참들 얘기로는 자기들이 졸병이었을 때가 훨씬 군기가 세었다고 하던데, 과장된 측면도 있겠지만, 그 때는 월남파병 자원을 모집하던 시기라서 어느 정도 수긍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군대폭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40년 전보다 폭력이 더 악독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40년 전은 통신이 발달되지 않고 현재처럼 개방된 사회가 아니라서 군대폭력이 사회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부대에 따라서 폭력의 형태나 크기가 다르겠지만, 하여간에 군대문화가 40년 전보다 후퇴한 것 같아 마음이 언짢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극히 일부이고 전체적으로는 군 문화가 건전할 것이라고 위안도 해 봅니다.
‘군대 폭력을 경험하고 생긴 트라우마’ 라는 글과 '미군도 윤일병 사례가 있을까'란 글을 소개하면서, 윤 일병이 폭력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庚寅 生 서사범
고마리
트라우마
국어사전에는 ‘트라우마’에 관하여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이라고 적혀있다.
군대 졸병시절에 해안가 매복조에 편성되어 매복을 나갔다. 훈련소에서 막 부대배치를 받아 채 내무반 관물대조차 배정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군장도 지급되지 않은 채로 안면도 끄트머리 영목항이 가까운 어느 해안가로 군용트럭에 실려서 동기생 세 명과 함께 뭐가 뭔지도 모르게 어떨떨한 매복 작전에 투입이 됐다
깜깜한 그믐밤이었다. 바닷가 모래사구 언덕 뒤편에 매복비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철모쓴 고개만 내밀고 함께 매복한 상병 고참은 초저녁에서부터 줄창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내리 잠을 잤고 나는 해안가를 뚫어져라 초긴장 상태로 크레모아를 해안가로 향하게 깔아 설치해놓고 격발기와 소총 방아쇠를 양손아귀에 걸고 손에 땀이 나도록 초긴장 상태로 전방주시만 밤새하며 경계근무를 했다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바다 파도가 무시무시한 슬기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마치 흰 발광물체가 해안가로 길게 눕듯 모래사장과 만나는 해안을 따라 나타났다가 없어지곤 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그런 밤바다를 바라봤다면 낭만이고 별천지였을 그 풍경이 으스스한 공포였다.
바로 얼마 전에 광천으로 무장공비들이 침투하여 내륙 깊숙이 후방까지 교란을 시켜놓고 경계진지 모두가 뚫린 상태로 다시 해안선으로 보란 듯 유유히 북쪽을 넘어간 직후의 비상사태 같은 흉흉한 분위기였다. 마치 금방 북한 무장공비가 해안가로 침투하여 내 매복진지 코앞까지 다가오는 듯한 작대기 한 개 햇병아리 같은 이등병으로써 공포의 엄습은 잠을 통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고참병 상병은 밤새 코를 곯아가며 새벽이슬이 내릴 즈음까지도 잘도 잤다. 문제는 소대장이 한 밤중에 매복진지 순찰을 왔다가 상병이 교대근무도 없이 독판 잠을 잔 것을 눈치를 채고 간 것이 사단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매복진 지에서 철수를 하고 중대본부 천막막사에서 조식을 기다리며 배식식기를 옆구리에 끼고 날밤을 새운 머릿속이 어질어찔 마치 깡 소주 한 잔 마신 사람마냥 몽롱한 지경에 빠진 나를 그 놈의 상병고참이 으슥한 골짜기로 나를 끌어다가 45도 경사가 넘는 비탈지고 후미진 곳에서 철모를 벗어 대뜸 내 가슴팍을 밀치듯 강하게 후려갈겼다.
당연 급경사지에서 뒤로 벌러덩 쓰러지듯 몇 미터를 굴러서 뒹굴다가 일어서서 다시 상병 가까이에 비틀비틀 다가서서 무조건적인 "시정하겠습니다."를 외쳤다. 그러면 또 "말로만?"하며 또 철모로 내 가슴팍을 사정없이 밀치듯 린치를 가했다. "시정하겠습니다." "어떻게 시정할건데?"
또 철모로 맞고 뒹굴듯 벼랑 같은 비탈진 급경사지로 주루룩 뒤로 밀리며 고꾸라지길 몇 차례 제 놈 철모가 굴러 떨어져 내려가자 이번에는 내 따귀를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어찌나 손이 맵고 야무진지 정신이 하나도 없이 얼얼했다. 왼편에 불이 번쩍했는가 싶은 순간 또 아래로 굴러갔다. 다시 매를 맞기 좋은 사정거리로 접근하여 부동자세를 갖추면 또 이번엔 오른쪽 따귀를 때렸다.
그리곤 군화발로 사정없이 내리깠다. 예수님께서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고 성경에 적혀있는 것을 읽었지만 이건 그침이 없이 조식도 굶어가며 못 먹고 지옥불 같은 폭력 앞에 이등병 군기 하나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따구니 양쪽이 남의 살같이 감촉이 없었다. 귀 딱지까지 마구 때려 귓속도 웅웅 거렸다.
얼굴이 마치 말(馬)상으로 길다랗게 하관이 빠른 얼굴 살 하나 없이 광대뼈가 불거진 인상으로 고약스러운 놈이었다. 뱀눈 같이 작고 쭉 찢어진 듯한 양 눈은 치켜 올라가 첫눈에도 매섭고 무지막지한 놈으로 보였다. 눈은 교활함이 가득 배인 번뜩임으로 힛딱힛딱 거리는 광기가 잔뜩 서린 놈. 처음에는 술을 먹고 그러는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닌 맨 정신이었다.
부대 내에서도 소문이 난 악랄함의 극치를 이루는 그런 놈과 군대 첫 매복 작전의 한 진지 구덩이에서 2인 1조의 매복조가 되었던 것이었다. 사회에서는 한 번도 누구와 싸우거나 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전혀 없었는지라 나는 군대라는 특수집단임을 감안해 각오는 어느 정도 단단히 했지만 큰 충격에 빠졌다.
매복 진지에서 잠을 자기 전에 근무 중에 소대장 순찰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소대장이 오면 깨우라는 지시사항도 전혀 한 마디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사단을 만들어 나를 초주검 상태의 패닉상태에 이르도록 무시무시한 폭력을 가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기생 셋 중 나를 찍어 한 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중학교만 졸업한 것에 대한 일종의 학력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그것을 군대라는 계급장을 빌려서 사회에서는 풀지 못할 자신의 한을 내 이력 하나만 가지고 처음 본 졸병인 내게 맘껏 풀었던 고의적 사건이었다.
나중에 내가 대대본부 정보작전과 행정병으로 올라가 그 놈에게 제대특명 직전의 빡센 유격훈련을 통상은 대접하여 빼주는 불문율의 관례를 깨고 제대말년에 *뺑이를 치게 만들고 제대날짜까지 뒤로 밀리게 행정조치를 했다.
그 이후로 그 놈에게 따귀를 맞을 때 머릿속까지 흔들리는 듯한 둔탁한 충격의 메스꺼움을 동반한 트라우마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그 막가파 같은 상병 놈의 폭력과 폭언은 나이 오십을 넘어서기까지도 지워지질 않고 오히려 더욱 생생하고 선명하게 순간순간 내 마음 안에 독사같이 똬리를 틀고 나가질 않고 마구 헤집고 엉클어놓았다.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까지 무자비하게 짓이겨 놓고 군홧발로 함부로 마구 밟아버려 다친 내 영혼. 싸닥빡지를 연이어 따귀를 맞고 또 맞던 그 상황과 내 얼굴이 풍선같이 부풀어 부어오른 거울 속 내 모습과 입안이 다 터져 식사조차 못하고 앓던 모포 속에서의 분함이 동반된 억울함의 눈물. 요새 말로 묻지 마 살인자와 흡사한 놈이었다.
그놈의 광기어린 매서운 눈매가 자주 내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마치 급행열차가 엄습하듯 달려와 나를 덮치듯 했다
지옥 같은 한 시절이 지나 어느덧 제법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비중대에서 전투중대로 바뀌면서 우리중대가 매복을 나가 지형숙지를 미리 해둔 태안반도의 아래쪽인 안면도 방향의 길다랗게 뻗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다른 중대와 교체투입이 완료되고 중대본부는 안면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 근처 신막사가 중대본부가 됐다.
나는 거기서 혼자 다리를 건너는 시외버스를 타고 삼봉해수욕장이 있는 분초막사로 재배치를 받아 분초장의 지시로 경계근무에 투입되는 전투병이 아닌 상급부대와 교신을 주고받는 상황병으로 내무반 끝 작은 공간에서 참 군인이 되어갔다.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첫 신고식은 험악하게 시작되었지만, 한적한 바닷가 상황병으로 최종 배치를 받고부터는 말 그대로 만고강산이었다. 마을 아이들 과외공부를 시켜가며 그 아이들과 바닷가로 나가 굴렁쇠도 굴려가며 동요도 함께 부르고 전망대 초소에 올라 턱을 괴고 먼 바다 수평선만 바라보는 나날들에서 험악하게 린치를 당했던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잦아들어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한 철이 지나고 중대본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전달사항이 떨어졌다. 군기가 잔뜩 들어 중대본부에 도착해서 행정반을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신고를 하니 나무판자에 페인트를 칠하여 조악스럽게 만든 엉성한 책상들의 배열이 양옆으로 있고 그 책상에 행정병 몇이 앉고 걸터앉고 하면서 바둑을 두다가 다들 하던 일들을 멈추고 동작정지가 되어 내 얼굴을 일제히 바라봤다.
잠시의 정적. 병장 계급장을 단 고참 둘이 나를 맞이했다. 한 사람은 서무계, 한 사람은 교육계라고 했다. 서무계는 무언가 까탈스러운 인상인 반면 교육계는 선하디 선한 눈매에 코끝에 가서 걸친 안경테를 연신 끌어올려가며 나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부사수를 둬야하는 말년병장인데 여태껏 후임을 세우지 못하였던 차에 나를 호출한 것이었다. 서무계의 위압적인 말투보다 교육계의 부드러운 눈빛에 마음이 기울었다. 무슨 장날 소를 팔러 나온 농부가 흥정을 하듯 서로가 밀고 당기길 몇 차례. 교육계 부사수가 되었다.
그리고는 내무반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 모두가 내무반 정리로 부산스러운 중에 모든 부대원들에게 주목을 외치며 큰소리로 “앞으로 누구든 얘를 건드리지 말라! 오늘부터 내 부사수가 되었으니 다들 그리 알아라!” 모두가 힘차게 “옛!!~” 하며 복창을 하였다. 내무반 구석진 곳에 그 독사 같은 놈 얼굴도 보였다.
중대장은 저녁 늦게 들어왔다. 교육계가 나를 옆에 세우고 “후임입니다.” 라고 신고를 하니 아래 위를 쓱, 흝어 보고는 가죽장갑으로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듯 치면서 “잘해봐.” 하며 검정색 나이방을 거울 앞에서 멋지게 갖춰 쓰고는 행정실 공터에 세워둔 군용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중대장은 짚차와 오토바이, 두 대의 교통수단을 갖고 있었다.
그날부터 일석점호며 일조점호에서 열외가 되었다. 온종일 업무 인수인계를 받아 자잘한 서류들의 필사를 끝도 없이 시켰다.
어느덧 계급장에 작대기 하나가 보태지고 일등병이 됐고 그 악마는 막 병장계급장을 새로 달았다. 나와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마주칠 것이 전혀 없이 간혹 행정반으로 들어오면 건성으로 인사를 부쳤을 뿐 인간 같지도 않은 악마기질에 대한 무언의 무시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중대장이 대대에서 최고참 서열인 대위인고로 대대 작전관으로 인사발령이 나면서 예기치 않게 나를 데리고 가려고 파견형식을 빌려 모든 소지품을 챙겨 짚차 뒤에 올라 급히 대대본부로 올라가 정작과에서 작전병에 배속되었다.
작전병의 역할의 첫째는 무슨 작전명령만 하달되어지면 눈코뜰새가 없이 밤을 새워가며 차트글씨를 써대야 했다. 그곳에서 처음 사단장 별판을 봤고 상급부대의 연대장과 보안사의 민간인 복장으로 머리를 기르고 계급이 뭔지도 모르는 이상야릇한 군인들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그러던 일요일 어느 날 내가 속해있는 신임 8중대 중대장이 짚차를 대대본부 앞에 대더니 다짜고짜 나를 태우고는 “너 임마, 왜 여기서 근무해 당장 우리 집으로 가야지. 네가 여기 본부중대 소속이야? 어서 따불빽 챙겨 타!!” 안면도 중대본부로 막 출발하려는 찰라 작전관이 연락을 받았는지 나타나 제지를 하니 서열이 낮은 중대장은 포기를 하고 돌아간 며칠 후 8중대가 예비중대로 대대로 병력교체가 되어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 악마를 다시 만났다. 그 예의 휘딱휘딱 거리는 독사같이 위로 쭉 찢어져 올라간 뱁새눈을 바삐 움직여가며 중대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눈치였다. 자기보다 고참에게는 한없이 아양스러움으로 밑 졸병들에게는 그 예의 악마로,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밑으로 약한 사람에게는 군림하여 악독함을 떠는 그런 야비한 기회주의자 내지는 야누스 같은 놈이었다.
어느 날 동기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놈에게 이천 원대의 알량한 봉급 중 이천을 매달 빼앗기고 몇 백 원만 달랑달랑한다는 하소를 들었다. 부대 내 PX에서 그렇게 먹고 싶은 보름달 빵 한 조각을 돈이 없어 사먹지를 못한다고 엄청 억울해 했다.
나는 결심했다. 그놈과 마주쳐 불의에 대한 바로잡음과 동시에 내 동기들의 금전적 갈취를 중단시키기로.
휴일이면 연병장에는 축구시합이 연일 벌어졌다. 대대본부 작전과가 있는 막사는 지대가 높아 전 부대 연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씽 안경을 창가에 비치해놓고 운동장에 나오는 그 놈을 예의주시하며 그놈이 보이면 영내화 바람으로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가 일부러 그놈 앞을 지나치며 경례를 무시했다.
처음에는 어이상실 표정으로 움찔하였다. 그러다가 두 번 세 번 반복되어지는 내 의도된 행동거지에 어쩌질 못하고 대대 행정반 파워에 밀려 휘딱 거림이 역력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동기를 통해 부대 내 뒤쪽 시멘트 등의 허드레를 쟁여놓고 방위병들이 내무반 형식으로 쓰는 콘센트 막사로 나를 오라고 전해왔다. 내가 각오했던 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놈과 단 둘이서 맞짱을 틀 순간이 닥쳐온 것이었다.
군대를 거의 3년 늦게 입대한고로 엄격히 그는 나보다 나이로는 아래인 셈이다. 콘센트 막사에 막 들어서니 곡괭이 자루를 준비하고 모자를 거꾸로 쓰고는 쭉 째져 위로 올라간 눈으로 휘딱휘딱 살기를 품고 나를 꼬나봤다. 아무도 없는 단 둘의 공간이었다.
"야, 이 새끼야. 인사부터 부쳐!" "......" "엎드려뻗쳐!" 곡괭이 자루로 허벅지와 엉덩이를 패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나둥굴러져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워 그 예의 싸닥박지를 갈겨댔다. 매체인 곡괭이 자루로 빠따를 맞는 일에는 수긍을 하겠는데 손으로 따귀를 올려 부치는 것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신체적인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그 자존심과 굴욕감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야, 이 새꺄!! 이래도 경례 안 부쳐?" "당신 모자를 침상에 올려놔라. 계급장에는 경례를 부치마." "어? 이 새끼 봐라?" "난 당신에겐 제대하는 날까지 경례란 없다." "뭐? 인사를 안 한다고?"
곡괭이 자루가 무거운지 아님 흥분한 탓인지 그만 구석쟁이에 진열된 방위사병용 M16 총을 거꾸로 들고 패려고 달려들었다. 엎드려 엉덩이를 들이댔다. 총목이 부러져 나뒹굴었지만 그는 눈이 뒤짚혀서 다시 곡괭이 자루를 들고 패기 시작했다.
잠시 기절을 했나보다. 깨어 일어나니 그는 없고 고요한 정적만 감돌았다. 군복 위로 피가 올라왔다. 아마도 곡괭이 자루 옹이부분 때문이었으리라. 살이 뭉개지고 터져서 군복과 맞붙어 끈적거렸다. 동기들이 들어와 나를 부축했다.
나는 뿌리치고 홀로 침상을 딛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 그 놈이 있는 8중대 내무반으로 갔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놈을 직시하여 한참을 바라보곤 말없이 돌아서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의무대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에 행정병 고참들이 그에게 어떤 보답성 조치를 가했는지 휘딱위딱 빛을 발하던 눈빛이 수그러짐이 관찰됐다. 물론 동기들 봉급을 갈취하여 막걸리 사먹던 못된 짓거리도 멈췄으며 설치고 다니는 그 예의 중대 분위기 주도하는 독기 또한 멈췄다. 우선 동기들이 엄청 좋아했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기를 꺼려하며 먼발치에서부터 나를 피해가며 길을 바꾸는 것이 역력했다. 나의 보복성 행정조치로 군대 말년에 총기파손 죄로 영창을 보냈다. 제대하는 날까지 그는 알게 모르게 내 행정적 조치로 고생 꽤나 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며칠 후에 엽서가 왔다. 발신주소가 없는 엽서였다. 개발새발 갈겨쓴 그의 글에는 사과성 글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내게는 그의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독사처럼 마음 안에 똬리를 틀었다.
각목이나 곡괭이 자루는 견딜만 했다. 하지만 손으로 뺨을 내 갈기는 그 것만은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용서가 되질 않았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직접적인 매를 들지 않고 회초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따끔하게 훈계를 했던 이유가 신체와 심체와 접촉되어지는 그 어떤 체벌도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기 때문일 터.
문득 문득 치오르는 군대에서의 모멸적이고도 굴욕적이던 손독으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거울 속 내 모습으로 각인되어진 그 트리우마가 줄창 따라다녀 오십 줄에 이르도록 잔재로 불뚝거리며 없어지질 않았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고 의사를 찾지만 정작 몸의 상위기관인 정신과적 아픔의 치료에는 이상하리만치 간과를 하면서 살아들 간다.
내가 정신병자라고?
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정신병자들이 먹는 약을 먹어?
에이.. 심리치료가 뭐여?
그게 돈을 치르고 치료를 받을만한 실존가치가 있어?
그 효과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게야?
10년 전 귀향을 하면서 시골병원에는 어디에도 정신과목이 없었으며 정신과 전문의 또한 존재치 않았다. 나는 정신과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의 필요성을 스스로 인지하였다.
허면, 내 스스로 그 학문을 배워서 스스로를 치료하자, 그런 결심을 실행으로 옮겨 서울 신촌까지 오르내리며 2년여의 심리학을 공부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 트라우마는 봄눈 녹듯 치료되어 없어졌다.
뿐이랴?
자라나는 청소년인 아이들에게 내 학문을 대입시켜 진심어린 자세로 사춘기적 아이들의 마음속을 어루만져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학교 짱인 아이가 퇴학 위기에 처해 퇴학 직전 교육청까지 찾아가 이론적으로 차분히 또는 고성이 오가면서까지 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그 아이를 무사히 졸업시켜 멀리 부산의 모 미용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하나의 학문으로 나를 치료하고 많은 어린 영혼을 치료한다는 보람된 자긍심. 살면서의 진정하고도 귀한 인간적 가치가 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정신과적 심리치료에 대해 과소평가 내지는 간과치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면 좋으련만 무언가 뒤틀리고 엉클어져 삶의 가치관이 혼돈되어진 이 어지러운 사회분위기에선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 자명한 일이기에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히, 제일 가까운 가족에게서 가까운 부부라고 함부로 내 자식이라고 함부로 그 가족 또는 배우자에게 받은 트라우魔,
몸에는 암 덩어리가 무서운 것이지만 영혼을 갉아먹는 마귀 같은 魔
트라우魔
왜 이를 간과하며 살아가야만 하는가?
화병이라고만 무식하게 치부하고 평생 가슴에 폭약을 장착하고 그 화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병魔
그로 인해 온 나라 위아래며 안팎들 모두 이 사회 전반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간다. 너나없이 이기적으로 마음의 빗장을 꼭꼭 닫아걸고 인정심이며 동정심조차 메말라 겉은 풍족하나, 속은 텅 빈 상태로 이게 절대 비정상인지조차도 전혀 모르고들 사회적 전반을 따라 마치 정상적인 것인 양 살아들 가는 풍요 속의 절대적 빈곤인 행복지수 최하위로 곤두박질치는 나라의 병폐와 적폐,
내 스스로의 몸 건강은 물론 더 상위인 정신건강을 지켜내는 트인 생각,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점진적인 아름다운 사회로의 회귀.
몸의 건강만 쫒을 것인가?
영혼의 맑음도 따라가며 정신건강도 重히 여길 것인가?
영혼이 무너지면 육체 또한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정한 이치.
너무도 촌음같이 흘러가는 인생사.
무엇이 잘사는 일이며 행복일까 라는 가치관,
각자의 절대적 몫이다
[펌] / 매양이 좋은 날 / 좋은날 / 2014.08.08 05:17
고려엉겅퀴
미군도 윤 일병 사례가 있을까?
한국인들은 사고가 발생하면 세계 최고를 달리는 우리의 우방국 미국이라면 어떠하였을까 하고 궁금해 하고 비교를 한다.
천안함 사태 시에는 미국 해군이라면 북한 잠수함의 잠입을 사전에 포착할 능력이 있었을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이 미국의 여객선에서도 발생하나?
윤일병 사건과 관련해서도 미군들도 고참 병사 1인이나 다수에 의하여 하급자에 대한 괴롭힘이 있을까하고 의문을 갖고 이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필자가 미군들과 용산 기지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과 미국에 군사 유학을 하면서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미군 사회에서 윤 일병 사례와 같은 가혹행위가 있는지 아는 범위 내에서 소개드릴까 한다.
어느 나라 군대나 상급자에 의한 하급자의 괴롭힘 현상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미군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괴롭힘의 양상이나 그 방법, 강도(强度), 빈도에서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다를까?
1. 미군은 지원병 제도이다.
지원병이란 자발적으로 군대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내가 군대에 왜 들어왔는지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사병도 잠재적인 직업 군인이다.
한국군에서 사병들은 징집병이다. 병사들은 병역 의무를 필하려고 들어왔을 뿐 천직으로 장기 복무를 할 의사가 애초부터 없는 사람들이다. 사병으로 직업 군인이 되려면 하사관 학교(부사관 학교)에 입교를 하여 소정의 훈련을 받아서 하사로 임관해야 비로소 직업 군인이 된다.
반면에 미군은 직업 군인을 양성하는 부사관 학교가 따로 없다. 직업 군인이 되려면 이등병부터 올라가야 한다. 병장이 되면 계속 복무를 희망하고 진급을 원하면 지원을 하여 근무 평정, 진급 시험, 부대장(통상 중대장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직업군인(부사관)이 될 자격 조건을 갖추게 된다.
분대장, 소대장을 포함하여 동료, 심지어 하급자 중에서 누구라도 특정인의 장기 복무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공개, 혹은 비공개(통상은 비공개)로 대대장이나 인사 참모에게 보고하면 장기 복무가 허가되지 않는다.
부하를 괴롭힌다면 자신이 희망하는 직업 군인이 되는 길이 막히게 되고 이는 진급과 그에 따른 반대급부(급여의 인상, 나아가서 군인 연금 기회)를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 이유 없이 하급자를 괴롭힐 수가 없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된다.
한국의 군 사회에서는 장기 복무자를 비하하는 말로, 소위 '말뚝 박는다' 는 냉소적인 표현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여 사회에 나가도 번듯한 직업을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이 직업 군인이 된다는 경멸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미국은 대통령의 자녀들도, 엘비스 프레스리 같은 유명 연예인(가수)도 사병으로 복무도 하고 잠시나마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었다. 자기의 개성에 맞으면 소위 재벌들의 자식들도 가업을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 군인의 길을 걷는다.
누가 이들을, 다이야 몬드가 아니라 깡통 계급장을 달았다고 비웃겠는가? 안 가도 그만인 군대를 제 발로 자랑스럽게 들어왔는데................
애국심과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입대한 미군 병사들의 프라이드가 다른 병사에 대한 가혹 행위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2. 전선에 임시로 설치한 숙영 시설이나 텐트가 아니라 평시에 군인들의 본진이 주둔하는 부대의 병사숙소는, 훈련소가 아닌 한 한국군처럼 여러 명이 공동으로 숙영하는 내무실 구조가 아니라 이등병도 독립된 격실이나 2 인 1실 구조이기 때문에 고참병과 신병이 일과 후에 접촉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
일과 후에는 개별적으로 사병 클럽에서 술을 마시거나 TV를 시청하고 컴퓨터를 하거나 당구를 치는 등 개인 생활을 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넓은 공간에 여러 대의 침대가 있는 내무실 형태의 숙영 시설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이런 시설들은 2000년 이전에 대부분 개별 숙소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 2000년 이후에는 일반적인 미군 사병 숙소의 표준은 아니다.
독실이나 2인 1실을 사용하는 데 따른 문제점으로는, 젊음이 넘쳐나는 병사들이 애인이나 배우자, 심지어 매춘부를 숙소에 몰래 데려와서 동침을 하는 풍기 문란 행위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병 숙소에는 이성을 데려와서 동침하는 것은 복무규율 위반인데 부자 나라 군인들에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국가 예산을 퍼부어서 쾌적한 숙영 환경을 마련해 준 결과 엉뚱한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3. 평소에는 점호가 없다. 특별한 경우 부대장의 지시가 있는 경우나 1 년에 1회 정도 점호를 하지만 통상은 점호도 없고 간섭하는 당직사관도 없다.
당직 제도 자체는 있지만 당직 사관은, 비상 연락망 유지나 부대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있는 것이지 병사들 신상을 감독하기 위하여 있지 않다.
병영내의 군기는 당직 사관이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헌병 순찰조가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전에 지휘계통에 신고하고 비상 연락망을 유지하면 이등병이라도 평일에 외출이 가능하다. 고참이라고 하급자의 외출에 대한 허가, 불허 권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급자가 외출 나간 사실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보고 받을 권한이 없으니까...................
4. 소대장이나 선임하사급 이상 상관이 아닌 한 일과 후에 병사들을 호출할 권한이 없다. 일과 중이나 전쟁터에서는 일과 후라도 분대장 이상은 휘하 부하 사병을 호출할 권한이 있다. 물론 그 호출이란 것은 전투나 작전, 부대 운영과 같은 공무에 국한하도록 되어 있다.
분대장이 아닌 한, 병장이라도 하급자를 부를 권한 자체가 없다. 불러도 안 가도 문제될 것이 없다.
5. 장교나 선임 하사관, 주임 상사를 제외하고 존대를 할 필요가 없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데 영/미인들은 상대방이 존댓말을 쓰는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까?
가. Sir가 들어가는 표현을 사용하면 존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Yes에는 알았다. 알았네, 알겠구먼, 알았어요, 라는 다양한 뉘앙스의 긍정 의미가 있지만 Yes sir는 '알겠습니다!' 는 명백한 존칭이다.
이등병이라고 해도 같은 부대 병장이나 하사, 중사에게 Yes sir라고 안하고 Yes만 하면 된다는 의미다.
나. 사병들은 직속상관(소대장 이상)이나 장교가 부를 경우가 아니면 부동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
직속상관이나 장교가 부르는 경우가 아닌 한 상급자라도 부른다고 해도 앉아서 편한 자세로 대답해도 된다.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
6. 참전 기회가 유독 많은 미군 세계에서 전우애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우는 내 생명을 지켜줄 은인이라는 인식과 유대감이 강하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적이 나를 사살하려고 총구를 겨눈 순간 적병을 제거해 주거나 위험을 알려주는 사람도, 총에 맞은 전우를 둘러매고 안전지대까지 부축하고 지혈대를 매 줄 사람도 전우뿐이다.
전우를 혹시라도 평소에 괴롭혔다면, 사막의 전쟁터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나에게 전우는 물을 나눠 주지 않을 것이며,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나를 외면하고 철수해버리거나 심지어, 적이 쏜 것처럼 가장한 아군 후배의 총을 쥐도 새도 모르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절대로 전우를 괴롭힐 생각을 못한다.
7. 상급자가 물리적 폭력을 가할 경우, 맞서 싸우는 것은 정당방위이다. 이 경우는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힘이 강하다면 주먹으로 맞서면 되고, 힘이 약하다면 대검이나 총기로 맞설 수도 있다.
정당방위가 되거나 과잉 방위라고 하더라도 정상이 많이 참작된다.
상급자라는 계급의 위력으로 하급자를 정당한 이유가 있건 없건 물리적으로 폭행하려고 하다가는 죽거나 큰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군 세계에서는 어떤 괴롭힘이 존재할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골적으로 괴롭히거나 폭행은 불가하다. 괴롭히는 것도 직접 지휘 계통, 즉 휘하에 있을 때나 가능하다.
가령 분대장이 부하를 괴롭히는 방법은, 각 분대별로 헌혈병이 2 명씩 배정되어 있다면, 보기 싫은 하급자를 지명하거나, 적진으로 행군하여 나갈 때 위험한 척후병 임무를 부여하는 행위, 차량 이동시에 맨 앞 차량을 운전하거나 앞 차량에 탑승하도록 배정하는 행위와 같이 교묘하게 괴롭히는 경우가 없지 않다.
매목한 적병에게 가장 먼저 출발하는 차량이 피격될 가능성이 높고, 설령 중간 차량이 공격받은 경우에도 파괴된 아군 차량으로 선두 차량은 퇴로가 막히거나, 지뢰나 IED(급조 사제 폭발물)에 가장 먼저 피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미군은 징병 제도의 차이, 의식 수준의 성숙함, 사병 진급 및 병영 시설 및 제도가 한국군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한국군과 같은 상급 병사에 의한 하급 병사의 괴롭힘, 폭행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미군의 진급 제도에서 재미있는 현상은, 미군의 진급은 능력, 공적, 인간성 등 다양한 평정 요소에 의하여 이뤄지기 때문에 나보다 졸병이었던 병사가 훈장을 받고 특진을 한 반면에 말썽을 부리는 병사는 진급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어제의 상급자가 영원한 상급자일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즉 인생이 새옹지마인데 누가 누구를 괴롭힌단 말인가?
아무도 내일을 모르는데................
[펌] / 심진 / 조약돌 / 2014.08.07 21:47
흰고마리
우리 軍이 우리다
윤일병 사건 軍 대응, 국민 분노 당연하지만 정치・언론이 호통만 치면 軍紀 士氣 人權 해결될까 포퓰리즘적 접근, 군 상황 악화 우려
병력 줄이고 복무기간 단축 경쟁, 사고 강박증에 훈련도 소홀
弱軍 만드는 정치・사회풍토 더 걱정
윤 일병 구타사망 사건으로 뭇매를 맞고 있는 군(軍)은 북한군이 아니고 바로 우리 군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바로 우리 군이다. 이 군이 오합지졸이면 북의 국지(局地)도발에도 우왕좌왕, 안보판 세월호를 낳으리라. 이 군이 지리멸렬하면 북한 유사시나 통일 상황에 천추의 한을 남기리라. 우리 군의 대응 대상은 북한만도 아니다. 미중이 용호상박하고, 일본은 극우 색채를 더해간다. 군사적 충돌을 배제할 수 없는 풍운이 우리 머리 위를 떠돈다.
군이 사건사고를 은폐하고 거짓말을 일삼으면 국민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다. 윤 일병 사건을 놓고 여당 실력자, 여야 정치인, 언론 할 것 없이 군을 통타한다. 군 통수권자인 박근혜 대통령도 가해자와 방조자를 일벌백계하라며 서슬이 푸르다. 그렇게만 하면 복잡한 요인이 얽히고설킨 사고를 근절할 수 있을까. 정치가 사법 영역까지 건드리면서 군을 주눅 들게 하고, 군 지도층이 동네북의 비굴을 감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우리 군은 평시 안전만 지키는 약군(弱軍)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길 강군(强軍)이어야 한다. 그런데 군기(軍紀)를 둘러싼 정치적 포퓰리즘이 오히려 군의 위기, 안보의 위기를 키우지는 않는가.
어느 김 병장이 이 상병을 “형!”이라고 부르고, 소대장이 부사관을 “아저씨!”라 부르며, 중대 인사계가 신참병에게 “아가야!”라고도 한다면 그런 군은 위기다. 장교들이 휘하의 안전사고 때문에 진급을 못할까봐 사격훈련을 줄이고, 탄피 반납용 소모사격을 시킨다면 그런 군은 위기다. 2등사수 자격을 명중률 60%에서 50%로 낮추고, 명사수가 많은 부대보다 안전사고가 적은 부대를 지향한다면 그런 군은 국가안보의 위기를 키운다.
첨단무기 시대에 소총 명사수가 무슨 소용인가 한다면 딱한 일이다. 저들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보다 더 무모해져서 서울 어딘가 안보・민생의 급소에 잠입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는 지상군, 특히 정예 소총병이나 저격수들에게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서울 남성대의 특전사를 헐어 아파트를 짓기로 했고, 이명박 정부가 이를 실행해 특전사는 경기도 이천으로 밀려났다. 그 덕에 20만 병력의 북한 특수부대는 서울 심장부 타격의 골든타임을 최소 1∼2시간 더 벌게 됐다. 작전은 10분이면 ‘상황 끝’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복무기간이 10년인 북한 병사와 이미 21개월로 짧아진 우리 사병의 일대일 전투력은 프로와 아마추어 차이가 아닐까. 훈련도 부족한 채 단기간에 일병 상병 병장까지 달아주니 계급값을 못하는 미숙련병(未熟練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사관으로 끌어올릴 자원도 연쇄적으로 모자란다.
저출산과 복무기간 단축이 맞물려, 장기적으로 50만 병력이라도 유지하려면 병력자원이 남아돌던 과거처럼 우수자원만 골라 입대시킬 수도 없다. 문제병사, 이른바 관심병사가 끊이지 않는 한 토양이다. 결국 북한군은 프로 11명이 뛰고, 우리 군은 아마추어 8명이 뛰는 축구를 연상케 한다. 무기를 아무리 첨단화해도 군의 핵심전력(戰力)은 강한 병력이다. 수(數)의 중요성은 세계 전사(戰史)가 웅변한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예외적이기에 그가 불세출의 영웅인 것이다.
군기와 병사의 사기(士氣), 그리고 인권(人權)은 다 중요하다. 높은 사기와 확립된 군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부대 간에 체육대회를 해도 사기가 높은 팀이 보통 이긴다. 흐트러진 군기에서는 승리에 대한 집단 자신감이 나오지 않는다. 훈련을 제대로 해서, 힘은 들었지만 더 강해졌음을 느끼는 군인이 늘어날 때 그런 군대는 사기도, 군기도 좋아진다. 군기 세우기와 인권 침해는 별개의 차원이다. 군기가 무너졌다면 이순신의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군대 문화는 사회 문화의 연장이다. 군대 밖에서는 온갖 강력・인신범죄가 끊이지 않는데, 군대만은 그런 것이 전무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구조적 요인들을 살피지 않고 그저 무사고만 강요하면 상급자가 하급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군기가 더 해이해져 군기사고의 위험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각급 지휘관이 사건사고 예방 노력을 배가해야 함은 물론이다.
스무 살 조카가 그제 머리 깎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씩씩하고 단련된 병사가 되어 야무지게 복무한 뒤, 더 사나이다운 모습으로 가정과 학교로 돌아오길 빈다.
[펌] / 동아일보 / 배인준 주필 / 2014-08-06 18:07:15
사마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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