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를 실천하는 사람들 '재가 수행현장-부산 혜원정사 원돈선원'“참선하면 겸손해지고 삶에 여유가 생겨” |
서산휴정스님(1520~1604)은 〈선가귀감〉에서 “참선을 할 때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큰 믿음과 큰 분심, 큰 의심이 그것이다.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삼발이 솥과 같아서 끝내 쓰지 못할 물건이 된다며 세 가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만이 성불의 길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딱 딱 딱” 입선 알리는 죽비 울리면 ‘너’‘나’ 구별 떠나 서로 서로 이끌어
동안거가 한창인 지난 12월20일 부산 혜원정사(주지 원허스님) 원돈선원에서도 조화를 실천하는 불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명심전(明心殿)에 앉은 30여명의 불자들은 신심을 내 분심과 의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현재 원돈선원에는 초심자부터 20년차 구참 납자까지 30여명이 정진하고 있는데, 5년 이상 방부를 들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수십 년간 사찰을 다니며 기도하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선방.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는 면한다”는 말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단지 우레와 같은 침묵 속에서 참 나를 찾을 뿐이다. 10분간의 방선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울리자 한두 명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포행을 하기 시작했다. “수행을 왜 하느냐, 수행하면서 경계가 올 땐 어떻게 극복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람들은 “할 이야기가 없다”며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저마다 다른 마장을 겪고 경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게 ‘청중’소임을 맡은 묘심화 보살의 설명이다. 굳게 닫힌 그들이 입을 열기까지, 또 한번의 우레같은 침묵을 견뎌야했다. 드디어 사람들이 그간의 수행을 점검받듯 신중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놨다. “오랫동안 기도를 하다보면 선공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기기 시작해 결국엔 선의 길로 들어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유일한 지름길이 참선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공부하게 된 계기를 묻자 선방의 대중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 이번엔 우문을 던진 기자가 침묵한다. “참선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깨달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세계를 들여다보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생기는 걸 느낍니다. 그럴 때 더욱 정진하게 되죠.(법성화 보살)” “자기 자신이 가는 길을 관하는 것이 곧 참선이 아닐까요. 잘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 스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선지식에게 받은 화두를 숙제하듯이 참구하고, 숙제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 점검받으면서 끊임없이 수행해야 합니다.(심우 보살)” 그렇다고 ‘들여다보기’를 선방에서만 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먹고, 차를 타고, 걸어 다니는 순간에도 수행은 계속 된다. 살림살이가 바쁘면 바쁠수록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참선할 때,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잠이다. 방석 위에 앉아있을 때 잠깐만 방심하면 제일 먼저 찾아드는 수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꺼풀이 감기고 망념에 빠져든다. 천하장사도 들지 못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몽산법어〉에서는 “수마가 올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화두를 한두 번 소리 내어 챙기도록 하라. 그래도 물러나지 않거든 땅으로 내려와 수십 걸음을 걸으라”고 했다. 이렇듯 수시로 찾아드는 번뇌나 혼침은 수행을 가로막는 주범들이다. 어떻게든 이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화두를 챙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조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삼매에 들게 된다. 그렇지만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마장이 올 때는 화두를 바짝 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딴 생각이 난다 싶으면 눈을 번쩍 뜨고 이 몸뚱이가 무엇인지 화두를 자꾸 챙겨야 해요. 화두를 놓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장이 따라옵니다.(법계심 보살)”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마음속의 번뇌보다 더 큰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 번뇌와 욕심을 떨치겠다는 각오로 수행을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은 파도는 자신을 시험하는 악마 파순이 돼 수행하는 이를 유혹한다. 몸은 그대로 앉아 있지만, 마음은 허공중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순간이다. “선 공부하면서 업장을 소멸하는데 왜 자꾸 주변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화두를 챙기고 점검받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생각합니다. 흔히들 불교를 자력신앙이라고 하잖아요. 결국 혼자서 힘을 얻어 가야하는 길이 성불이라고 생각해요. 단전에 기를 모으고 좌선하면서 따라오는 마장을 떨쳐낼 힘을 기르는 거죠.(본자심 보살)” 저마다 성불하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성불’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 생에 공덕을 많이 지어 다음 생에는 성불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재가자라고 해서 깨닫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는 확신은 있었다. 마조선사를 만나 깨달은 중국의 방거사(?~808)나, 황벽선사 밑에서 깨달음은 얻은 배휴(491~870)를 보면 깨달음은 출가자를 구별하지 않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아직 시작도 안 한 사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앉아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앉아있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선방에 앉아 있었으니 안 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으면 안된다는 것.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쉼 없이 발밑을 살피듯, 매 순간마다 자신을 살펴야 삿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탁마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지스님이나 조실 고산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지만 매일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기는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반들끼리 함께 공부해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방선시간에도 모여서 잡담하는 것 대신 법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지켜보는 것만도 신심이 절로 납니다(묘심화 보살).”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선 공부를 하며 겪는 경계는 지극히 심오하고 개별적이기에 얘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렇다고 진지한 얘기는 피하고 한담만 나눈다면, 선방을 찾은 목적이 모호해진다. 때문에 지나치게 자신의 견해에 끄달려 상대방과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 구참의 충고를 마음 넓게 받아들이고, 구참은 다른 수행자의 모범이 돼야 한다. 〈원각경〉에서 부처님은 “초학자는 반드시 대중처소에서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다. 도반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외도로 빠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이날 찾은 원돈선원의 불자들도 서로를 이끌어주며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구참과 신참의 경계를 떠나, 이들은 수행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에게 좋은 스승이 돼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