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혼자서 집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 설교문을 편집했습니다.
이것으로 혼자 예배를 드릴 때 귀한 은혜들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또 그럴 줄로 믿습니다.
성경과 찬송가를 준비해주세요.
스마트폰 안의 성경과 찬송가 앱도 좋습니다.)
<다음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사도신경 암송(읽기)
찬송(자신이 부르지 못하는 찬송가는 가사만 소리내어 읽습니다):
19장 (구, 통일찬송가 44장) 찬송하는 소리 있어 사람기뻐하도다
참회의 기도: (지난 한 주간을 돌아보면서)
성경본문읽기: 시편 113:5-8. 빌립보서 2:5-11
설교문 읽기: (제목) 하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우리를 우리 수준에서 상대하신다. 그래서?
(반드시 소리내어 천천히 읽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잠시 멈추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설교 중간에 나오는 찬송가는 꼭 찾아서 부릅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위엄과 지혜와 무한한 권능을 가지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우리를 우리수준에서 상대하십니다.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무한한 능력, 무한히 사려깊은 계획으로 우리를 다루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무한히 신뢰하고 아주 마음 푹 놓고 아주 평안하게 살아도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수준까지 낮추어 우리와 함께 놀고, 함께 사귀고, 함께 일하고자 하시므로
우리가 마치 좋은 사람과 사귀듯, 주님과 편안하게 사귀면서, 우리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집안에서 편안한 옷을 입고 지내면서 집안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찬송 369장 1-3절까지 (구, 통일 487)
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1.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실 때 자신을 인간의 수준까지 한없이 낮추시는 이유와 목적.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겸손에서 우러나온 행동인데요,
그처럼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하나님께 버금가는 수준까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수준까지 우리를 존귀하게 높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5.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우리 수준까지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극도로 좋아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수준으로 영화롭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을 정도로 존귀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수준으로 낮추셔서 우리를 상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높여서,
우리와 함께 사귀며 함께 놀고 함께 지내시고 함께 살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수준에서 우리를 대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추셨는가요?
자신이 평범한 인간처럼, 전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능력이 무한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처럼 보일 정도까지 낮추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사셨으며
인간과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하고
인간들과 사귀고 대화하고 울고 웃고 행동하셨습니다.
인간과 똑같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망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입증해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탄생과 삶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그 때만 인간으로 낮아지셨나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수준까지 낮아지신 주님은
오늘도 항상 자신을 낮추어
우리를 자유로운 인격자로서 대우하시며 우리에게 자신과 함께 편안하게 사귀며 지내자고 요청하십니다.
어떻게 지극히 비천한 인간이 만왕의 왕과 친구로 사귈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어떻게 미천한 노예가 대왕과 친구로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극히 높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주신 것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 우리 주님의 놀라운 겸손이여! 우리 주님의 놀라운 자기 비하卑下(낮추심)여!
비천한 죄인들을, 하찮은 우리들을 이토록 귀히 보시다니 !
찬송 368장(구 486) 1절만.
주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곧 충만케 하옵소서
2.
하나님의 자기비하를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인간 수준으로 낮추시므로,
인간의 미래에 대해 마치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측면의 자기비하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창세기 6:6.
하나님이 이럴 줄 모르셨던가요?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이스라엘의 왕 삼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5:11
사울이 타락할 것을 모르셨던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에게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계명을 지키는지 아니지키는지 알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2.
그들이 번번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할 줄 모르셨던가요?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신 것은, 이스라엘이 계명대로 사는지 어쩐지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사기 2:21-23
그들이 계명을 지킬지 안지킬지 모르셨던가요?
"그들이 돌이킬 듯하니라." 예레미야 36:3.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통치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잘 모르고, 헛된 기대감을 품으셨던가요?
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실까?
그래서 외국의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은 스스로가 인간의 미래를 모르기로 작정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래에 대해 꿰뚫는 지식을 하나님의 머리 속에서 아예 없애버리기로 했다는 거죠.
성경을 볼 때, 거기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실 때,
항상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은 듯,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상대하시므로,
우리가 미래에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며,
성경에 의하면, 어떤 정해진 운명이나 숙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0:15-18.
생명과 복, 사망과 화, 두 길이, 두 개의 운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그 운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신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
인간의 구원을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 완전히 일임하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힘써 구원을 완성하라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고 명하십니다.
(기독교와 유사하게,
예수님 오시기 훨씬 전에 무차별적 사랑을 주장했던 중국의 사상가 묵적도
운명과 숙명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운명이나 숙명이나 예정이란 말로,
자기 죄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의탁하기만 하면 우리를 억만죄악에서 구원하실 무한한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찬송 368 (구 486) 2절만.
주예수 죄에서 풀어주사 날 정결케 하옵소서.
3.
하나님의 자기 비하 가운데, 지극히 놀랍고도 기이하고 신비한 것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어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고난에 동감하시고
어떤 의미에서는 거기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고난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 오는 것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런 고난 동참도,
마치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고난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뇌하십니다.
히브리서 2:18, 4:15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빠져 들어가
고난당하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친히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성령님도 역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고뇌하시며
우리의 아픔에 동참해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기도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홀로 초연해계실까요?
아닙니다!
아름다운 이름, 그리운 이름, 애틋한 이름, 애달픈 이름, 가슴 미어지는 이름, 아버지 !
이 땅의 아버지들은, 하늘 아버지의 그 아픔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찬송(복음성가) 아버지
채수련 작사, 김동국 작곡
아버지 불러만 봐도 그 사랑에 눈물 나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아버지
온종일 울어 봐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아버지 아버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불러 보는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실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 생각만 해도 그 은혜에 감사해요, 날 위해 십자가 대신 지신 그 사랑
아버지 그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넘쳐요,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하리
아버지 아버지 간절히 두 손을 잡고 불러 보는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동행하며 인도하실 신실하신 나의 아버지
우리의 형편과 처지까지 낮아져서
우리가 울 때 우리 안에서 울고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불가사의한 비밀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내 사정과 내 고난과 내 아픔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더 깊이 공감하십니다.
내가 아픔 가운데 무덤덤하게 있을 때도 성령님은 심히 깊이 아파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 사정과 우리의 원통함을 알아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사야 40:27-31을 봅시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순전히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 주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를 3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우리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시며,
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행복과 형통을 위해,
오늘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2) 주님이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한없이 공감하며 동참하시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품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3) 집안에서 편한 옷을 입고 집안일을 하듯,
한없이 낮아지신 주님과 함께 편안하게 놀고 편안하게 사귑시다.
찬송부르기: 290장 (구 412) 1절 - 3절.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 널 위해 비네
통성기도 하기: (기도제목)
1. 나의 부족한 수준에서 나를 상대해주시는 주님과 항상 친하게 지내게 하소서.
2. 질병, 가족, 자녀를 위해
3. 나라와 민족을 위해(이 땅에 참된 의인들이 많이 일어나 우리민족이 21세기부터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소서).
4. 기타 개인적인 기도제목
축도(소리내어 읽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시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위로, 충만하심이, 그리고 우리와 항상 교제, 교통하심이,
지금 예배하는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심령 속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샬롬.
2023. 7. 23.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