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목요일에 만나요」, 『목요일에 만나요』, 문학동네, 2014, 59-81쪽.
32182903 윤선영
-필타
1
통곡의 의자는 도시의 한가운데, 높은 계단 끝에 있다 했다. 그 의자에 앉은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고해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 나라에서는 수도에 사는 중산층에서부터 지도에는 잘 표시되지도 않는 아주 작은 섬의 최하층 주민들까지, 그 통곡의 의자에 앉아 모든 죄를 고한 후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삶의 위대한 이유이고 가치라고 믿었다. 여자는 상상하곤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 자기 차례가 되면 덜덜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는 사람들, 점점 더 절박해지는 고백의 목소리,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젖이 보이도록 울부짖는 일그러진 표정, 온 도시를 울리는 통곡의 메아리, 그리고 아무런 미동도 없는 그저 푸른 하늘. 고하면 고할수록, 의식하면 할수록 죄는 선명해지고 커진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도 고백의 목소리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또다른 죄의 목록에 포함된다. 어디까지가 죄이고 어디부터가 부주의한 실수인지 혼란스러워지기도 할 것이다. 연유나 과정은 망각된 채 다만 되돌릴 수 없는 어떤 행동만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무한히 확대되면 그 모든 것이 현실적인 재앙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혹은 마음속 간절한 염원이 무참하게 좌절될지도 모른다는 병적인 불안감을 키우면서 또다른 고백을 불러오게 되리라. 이상한 반복, 선의가 없는 순환. 의자에 앉은 이의 고통은 점점 더 날것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서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료한 얼굴로 하품을 하거나 사소한 고민에 잠긴다. 실제로는 본 적 없는 그 의자가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고문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꿈같은 이야기다.
여자는 눈을 부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이 든 소년이 잠에서 깨어나자 노인이 되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사위는 어두웠다.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어두운 방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여자는 힘없이 날아다니는 나방을 가만히 건너다보며 오래전 중국에서 살았던 어떤 현자가 나비를 거론하며 남긴 잠언을 떠올려봤다. 목이 말라왔다. 잠이 덜 깬 탓에 조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여자는 천천히 거실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2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지난주 홍천으로 가기 전, 냉장고 안에 들어 있던 음식을 모두 내버린 뒤 플러그까지 빼놓은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주섬주섬 플러그를 찾아와 콘센트에 꽂으니 늙은 냉장고는 쿨럭, 큰 기침을 한 번 하고는 금세 청년으로 변해 위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쭈그리고 앉아 목마름도 잊은 채 조명이 들어온 텅 빈 냉장고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든 품어줄 것 같은 가슴이 아주 넓은 이 사물에게 여자는 단 하룻밤 사이에 진짜 노인이 되어버린 어떤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 애한테는 빼버릴 플러그도 없었는데 말이야, 아무도 이렇게 시작될 이야기를.
그전에 이 냉장고 안을 조금이라도 채워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하던 여자는 문득 걸음을 돌려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5단짜리 옷장 속에 어머니의 옷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여자는 어머니가 즐겨 입던 감색 치마와 수국이 그려진 면 셔츠, 보라색 조끼를 꺼내 입었다. 어머니의 양말을 신었고 어머니가 들고 다니던 하얀색 양산과 벽돌색의 가방도 손에 쥐었다. 어머니의 물건에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여자는 거울 앞에 서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으며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구두를 찾아 신고 아파트를 나왔다.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로 가려면 일반버스보다는 마을버스가 편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름의 끝을 알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달콤한 바람이었다. 양산 안은 아늑했고 감색의 긴 치마는 기분 좋게 맨다리에 감겨왔다. 어머니가 걸치거나 들고 다녔던 옷과 양산에선 외부의 미세한 위험까지도 막아줄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마침 초록색 마을버스가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자는 가장 먼저 버스에 오르기 위해 주먹을 꼭 쥐었다. 어머니는 마을버스가 오면 언제나 가장 처음으로 버스에 올라 기사 바로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어느 순간 벌어진 다리를 의식도 못한 채 끄덕끄덕 졸곤 했다.
월요일 오후의 대형 마트는 한산했다.
한 시간여 장을 본 뒤 여자는 대형 마트 로고가 찍힌 두 개의 종이봉투와 하드를 손에 쥔 채 다시 마을버스 정류장에 섰다. 어렸을 적 질리게 먹었던 상어 모양의 이 하드는 색소가 너무 많이 들어간 탓에 다 먹고 나면 입안이 쌉쌀해졌다. 입술 근처에 회색과 빨간색 색소를 잔뜩 묻히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마른 수건으로 여자의 입가를 박박 문질러주곤 했다. 곁에 서 있던 K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트로 칠칠맞지 못하기는. 어머니는 가볍게 짜증을 냈지만 그래도 다음날이면 여자와 K의 손을 맞잡아주면서 꼭 함께 다녀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마을버스는 곧 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여자는 이번에도 기사 뒷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구식 옷을 입고 하드를 빨다가 돌연 알아들을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여자를 기사는 룸미러로 흘끗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조금 남은 하드를 한입에 다 깨물어 먹었다. 색소로 물든 입가는 보라색 조끼에 닦았다.
대형 마트에서 네 번째 정거장을 지날 때 마을버스는 급정거를 했다. 작은 횡단보도 앞이었다. 비명이 들려왔다. 횡단보도 옆으로 자전거 하나가 나뒹굴었고 기사는 운전대에 고개를 파묻었으며 신호등은 여전히 빨간색이었다. 횡단보도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제야 기사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운전석에서 나와 승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자는 젊은 버스 기사의 건강한 두 다리가 맥없이 흔들리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온몸을 떨고 있던 기사는 한참 후에야 울먹이듯 소리를 내질렀다.
“분명히 빨간불이었어요!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사고 직후, K도 가장 먼저 저렇게 외쳤을까.
그 일 이후, K는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했다. 어딘가에 중요한 가방이나 서류를 놓고 온 사람 같았다. 떠나지 못한 K는 소파에서, 장롱 안에서, 심지어 욕실의 거울 속에서 자주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호전되지 않지? K는 절망했다. 절망의 크기만큼 기도의 시간도 길어졌다. 아무래도 진짜 기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 K가 그런 말을 했던가. 여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죄의 목록을 고치고 또 고치고 있을 K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K는 오래전 보았던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고백으로 빽빽한 노트 한 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리가 꾸부정한 노인의 자세로 시도 때도 없이 그 노트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적고 지우고 다시 적는 K를 여자는 상상의 영역에서 본 적이 있었다. 상상의 입구에는 거대한 문이 있어서 힘겹게 문을 옆으로 밀면 K가 있는 곳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황량한 사막이나 거미줄처럼 이어진 허름한 골목, 험한 계곡 사이의 산길 등이 번갈아 보였다. 마음이 지옥인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긴 줄을 만들며 서 있었지만 어딘가에 꼭 있다고 여겨왔던 통곡의 의자는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불가능한 기대를 이제 그만 버려. 열린 문에 고개를 들이밀어 나직이 속삭인 적도 많았다. 분명 속삭임이었는데도 문을 지나간 여자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려퍼졌다. 놀란 K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여자는 한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너는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거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럼 K는,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악을 쓰며 울었고 그러다가도 문득 자세를 고치고는 이것만은, 이것만은 제발, 하며 기계적으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공포로 흐려진 눈동자,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맹렬히 휘젓는 고갯짓. K를 고문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늘 K 자신이었다. 내가……
“내가, 다 봤어요, 다아!”
여자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의도와 다르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버승 안에 앉아 있던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일제히 여자 쪽을 쳐다봤다. 여전히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던 기사가 여자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문장인가가 목에서 가시처럼 걸렸다. 기시감이 밀려왔다. 늘 가슴에 품고 다녔지만 K 앞에서도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한 문장이었다.
“빨간불이었어요. 맞죠? 그렇죠?”
이어지는 기사의 다급한 질문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풀린 눈동자에는 순간적으로 축축한 물기가 고였다. 희망이란 부질없어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K는 어땠을까. K도 그 새벽의 인적 드문 국도에서 희망을 찾았을까, 저렇게 한 방울의 누누물이 배어나오도록 간절하게?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오기 전까지 뒤집혀진 승용차 안에서 철철 피를 흘리며 의식을 상실해갔을 조수석의 어머니를 꼼짝없이 지켜보면서도 K가 희망을 품었다면 대체 그 희망이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끔찍한 배반을 이미 품고 있던 미래를 감히 예상도 하지 못한 채 K가 그렇게 가짜의 방식으로 위로받은 게 사실이라면, 정말 그랬다면, 진실에 눈멀게 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불허한 그 부질없는 위로의 순간을 여자는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서에는 버스 기사와 여자, 그리고 사고를 당한 아이의 부모와 보험회사 직원들이 모였다. 아이는 의외로 크케 다치지 않았다.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 정도였다. 여자는 몇 번에 걸쳐 신호등에 대해 진술한 후 밤이 되어서야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허기가 졌다. 부지런히 걸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201호 우편함에 끼워져 있던 엽서 하나가 여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자는 우편함 앞에 선 채 한참 동안 그 엽서를 들여다봤다. 주황색 승복을 입은 동자승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인쇄된 엽서였다. 엽서에는 이번에도 단 한 줄의 문장뿐이었다.
3
동자승이 인쇄된 엽서를 가방에 넣고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자꾸만 꺾였다. 지난주 홍천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아니, 그날 새벽에 보았던 고독한 외길이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 아침 의사로부터 인공호흡기 제거에 대한 제안을 들었을 뿐이다. 선례가 있으니 절차가 복잡하진 않을 거라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자는 의사 뒤편의 달력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무심한 목소리로 K가 돌아온 후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몹시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며 얼버무렸고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여유가 느껴지는 인상 좋은 의사였다.
홍천에 도착해서는 펜션에 방을 얻어 밀린 숙제를 하듯 이틀 내내 잠만 잤다. 3일째 밤에 꿈을 꾸었다. 롱숏을 잡는 카메라 같은 시선은 먼 곳에 있었지만 그 시선이 향한 곳엔 여자 자신이 있었다. 여자의 시선은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던 자신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초점에 맞춰보니 이미 자줏빛 시반이 불길하게 퍼져 있는 시체였다. 여자는 황급하게 카메라를 끈 뒤 단박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동이 터 있었다. 펜션의 창문을 여니 뿌연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산등성이를 향해 뻗어 있는 외길 하나가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냈다. 외길 중간에 목이 꺾인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삶의 뒤편에도 길이 있다면 꼭 저런 분위기일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숨은 쉬고 있으나 의식이 없는, 장기는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까맣게 어머니는 지금쯤 목 꺾인 나무가 서 있는 지점 정도를 걸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한번 수화기를 잡으면 한 시간은 너끈히 수다를 떨어야 하고 구멍 난 양말을 신고도 태연하게 신발을 벗고 고깃집 룸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일주일에 한 번은 찜질방에 가서 허락 아플 때까지 잠을 잤고 소주를 들이켠 후에도 아멘이라고 외쳤으며 보험에 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부산이든 해남이든 가리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갔던, 너무도 구체적인 인생을 살았던 나의 어머니는. 대학 때 처음 연애를 한 남자애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고 돌아와 되지도 않는 술주정을 부렸을 때 그녀를 매서운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내리치며 “오줌 싼다” 한마디의 말로 여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K도 “그래봤자 폼 안 잡히거든?” 비아냥거리며 여자의 화를 북돋았다. 그래도 그날 밤, 세 사람은 거실에 마주앉아 나쁜 놈, 미친 새끼, 패 죽여도 성에 안 찰 놈, 세상의 온갖 놈들을 찾아가며 밤새도록 맥주를 마셨다. 웃음이 났다. 그런 시절이 분명 있기는 했을 텐데 너무 까마득했다.
웃음이 걷히자 여자는 순수하게, 그 어떤 거짓된 상념도 없는, 오로지 명쾌하고 단순한 욕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너무도 생생한 욕구여서 오랫동안 예행연습을 하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자 그 욕구는 더 맹렬해졌다. 알싸한 국화향, 울먹이는 소리, 생전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지인들의 모습, 여자의 영정사진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 그리고 빈소를 향하는 모퉁이에 서서 뒤늦게 여자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K…… 준비해간 알약을 복용하지는 못했다.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았는지 홍천행 버스를 탈 때부터 병 속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던 알약들은 약통을 열자마자 뛰쳐나와 짓궂은 정령들처럼 방안을 날아다녔고, 여자가 잡으려고 하면 장난스럽게 웃으며 유유히 여자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여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알약들에 곧 지치고 말았다. 펜션을 떠나기 직전에야 힘이 빠져 유순해진 알약들을 허공에서 하나하나 낚아챌 수 있었다. 손안에 들어온 하얀 알약들은 나무 열매처럼 앙증맞았다. 누군가의 살아 있음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유해한 화학성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알약들을 변기에 쏟은 후 다시 서울행 버스를 탔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후에 쓴 것일까. 이곳의 개들은 영물 같다, 라고?
4
이곳의 개들은 영물 같다. 방콕에서 K. 여자는 뿌연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책상 위에 엽서를 내려놓으면 방콕에서, 아니 방콕이 아닌 어떤 곳에서 날아온 문장을 다시 한번 중얼거려보았다. 지난번에 바라나시였고 그 이전엔 도쿄였다. 도쿄 사람들은 패스트푸드점에 혼자 앉아 만화책을 읽으며 햄버거를 씹는다. 갠지스 강 화장터에는 타다 남은 시체를 노리는 하이에나가 있다. 도쿄와 바라나시에서, 아니 도쿄나 바라나시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도착한 엽서들에도 그렇게 단 한 줄의 문장만이 씌어 있었다.
오래전 방콕에 가보긴 했다. 세 번째로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K는 그 좋은 곳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다며 잔뜩 화를 냈고 여자가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부터 말을 섞으며 하지 않았다. 나도 대학 때 내가 돈 벌어서 여행 다녔어. 너도 가고 싶으면 아르바이트해서 내 돈으로 가. 여자도지지 않고 K의 뒤통수에 대고 훈계를 늘어놓았다.
방콕에는 실제로 주인 없는 개들이 많았다. 불교를 믿는 태국 사람들은 개들을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았고 개들 역시 그 누구에게도 적의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건들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무해한 종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그저 긴 혓바닥을 내민 채 폭염 아래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다녔고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단 음식을 의심 없이 주워 먹곤 했다. 그러다가 졸리면 사원이든 백화점 앞이든 가리지 않고 아무 그늘에나 자리를 잡고는 태평하게 낮잠을 잤다. 산다는 건 환멸과 권태뿐이고 인간도 다를 것 없을 터이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거나 목청을 울리며 컹컹, 짓는 건 모두 무의미하지 않은가. 개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가탔다. 인간의 언어도 터득했으나 귀찮아서 발설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오만한 태도마저 느껴졌다. 엽서를 코르크 메모판에 압정으로 고정시키다 말고 여자는 큭큭 웃었다. K라면 어쩐지 영물 같은 개들과 이 세사에는 없는, 아무도 멜론 향이 나는 초록빛의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코르크 메모판에는 이제 세 개의 엽서가 모였다. 도쿄와 바라나시, 그리고 방콕으로부터 왔다고 밝힌 엽서들이었다. 마트에서 사온 식료품으로 대충 저녁을 해 먹은 뒤 여자는 어머니의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이 울린 건 막 잠들 무렵이었다.
마을버스 기사에게서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그는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고가 크지 않았고 여자 덕에 보행자의 과실이 인정되어 보험 처리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하필 목요일을 거론했다. 목요일에 비번이라고 했다. 목요일에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여자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는 불쑥 마을버스를 모는 건 직업이 아니라 취미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이 일 저 일 하며 사회 경험을 쌓아야 사업을 물려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며 쑥스럽다는 듯 웃기도 했다. 여자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수줍은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기사는 그럼 기다리겠다고 한번 더 다짐을 둔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목요일에는 농구를 해야 하는데…… 기사에게 하지 못한 말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맥없이 흘러나왔다. 목요일 저녁의 농구 게임, 그건 여자와 K 사이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탕, 탕 울리는 농구공 소리가 좋았다. 농구공이 골대 그물에 척 감기는 소리도 여자는 좋아했다. 정신없이 공을 쫓다보면 어느새 온몸에 적당히 땀이 차왔다. 농구대가 있던 오래된 교정의 빈 운동장은 투명한 물방울 같은 두 사람의 숨소리로 촘촘해졌다. 톡, 톡 손가락으로 때로는 발가락으로 물방울을 터뜨렸다. 몇 번이나 말해? 드리블 후엔 슛을 할 게 아니라면 양손으로 공을 잡아선 안돼. 또 공을 들고 세 발자국 갔잖아. 그럴 땐 정면돌파를 하지 말고 중거리 슛을 쏘아야지.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K의 잔소리. 패배가 확실해지는 게임 막판엔 꼭 K에게서 막무가내로 공을 뺏어와 끌어안은 채 주저앉곤 했다. 무어라 명명할 수도 없는 치사하고 저급한 반칙이었다. 그럼 K는 게임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며 여자에게 동점이 될 때까지 자유투를 던져도 된다는 이상한 규칙을 마련해줬다. 가까스로 동점이 되면 K는 어느새 잽싸게 나타나 리바운드로 공을 가져갔다. 점수의 간격은 금세 넓혀졌다. 어느 날 여자는 역시나 농구공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다. 날숨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고 그저 뜨겁기만 했다. K가 여자의 어깨를 치자 여자는 공을 놓친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5년 동안 결근도 없이 다녔던 은행으로부터 해고에 대한 이메일을 받은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구체적인 해고 사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딱 한 번 마음을 굳게 먹고 은행을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해고 사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만 사용하던 팀장은 여자가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존댓말을 써가며 윗선의 결정일 뿐이라는 애매한 해명을 했다.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찾아야 했다. 회식에 자주 빠져서일까. 개인용 머그컵을 제대로 씻지 않고 퇴근한 날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나사가 빠져 삐끗거리던 의자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탓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사소한 실수들도 치명적인 해고 사유가 되어갔고 그 세부사항들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그날 K는 인내심을 갖고 여자 곁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뜨거운 날숨을 모두 내뱉은 뒤 힘들어, 속삭이자 K는 다시 공을 주워와 제법 아프게 여자 쪽으로 던지며 뭘, 대꾸했다. 16 대 5야. 이제 다섯 개만 더 넣으면 게임 오버라구! 저쪽에서 K가 드리블을 하며 악을 쓰듯 외쳤다. 여자는 먹이를 잡기 위해 오랜 시간 잠복하는 영리한 동물처럼 한동안 잠자코 웅크리고 있다가 K가 다가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K에게서 순식간에 공을 뺏어왔다. 농구는 이렇게 하는 거야!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고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엽서를 한 장 꺼냈다. 단 하나의 단어도 슬 수 없었다. 빈 엽서를 다시 책상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언뜻 본 벽시계는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여자는 신발장에서 스니커즈를 꺼내 신고 무작정 아파트를 나왔다. 준비, 땅, 속으로 외치며 계단에서부터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를 나와 몇 개의 신호등을 건너 계속해서 뛰다보니 어느새 어머니의 병실 앞이었다.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병실 문 손잡이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심장이 손바닥으로 옮겨간 듯 손안에서 쿵쾅쿵쾅 힘센 박동 소리가 났다. 새벽 당직을 맡은 간호사들이 간간이 어두워진 복도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지금 열지 못하면 어쩌면 영원히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여자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병실 문을, 열지는 못했다.
무력하게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세상은 갑자기 겨울이 됐다. 여자는 추위로 몸을 떨며 병원 복도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았다. K가 궁금했다. 상상의 입구는 이번에도 잘 열리지 않았다. 그 안으로 숨을 한번 불어넣어주고 싶었는데…… 숨을 불어주면 K는 갑자기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그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아주 잠깐, 목요일 저녁의 농구 게임을 그리워할지도 몰랐다.
저녁식사 대신 농구나 한판 할까요?
5
식사 말고 농구 어때요? 병원 복도에서 생각해본, 어차피 보내지 않을 그 문자 메시지를 여자는 목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이렇게 고쳐봤다. 휴대폰 통화 목록에는 마을버스 기사의 번호가 남아 있었다. 식사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농구나 할까요? 문자 메시지를 여자는 목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이렇게 고쳐봤다. 휴대폰 통화 목록에는 마을버스 기사의 번호가 남아 있었다. 식사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농구나 할까요? 문자 메시지는 금세 바뀌었다. 여자는 문자를 작성하고 지우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침대를 빠져나와 청소를 했고 세탁기를 돌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속옷까지 정성스럽게 다림질을 했지만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너무 많은 시간이, 너무 많은 의문부호를 달고 집안 여기저기에 어질러져 있었다.
오랜만에 여자는 K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문 맞은편에는 K가 사용하던 초록 테두리의 하얀색 장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뇌가 회생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K는 종종 그곳에 숨어들었다가 있곤 했다. 나와. 여자는 장롱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말해야 했다. 밥 먹어, 빨리! 절규하듯 소리도 질렀다. 하지만 장롱 속에 한번 들어가면 K는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롱 속에는 어떤 세상이 있었던 걸까. 여자는 조심스럽게 장롱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K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모래바람처럼 황량하면서도 사이사이 축축한 습기가 밴,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었다. 장롱 속 어딘가에 K가 이 도시를 빠져나간 출구가 있을 것만 같아 여자는 티셔츠와 청바지, 겨울 코트와 재킷 등이 차곡차곡 걸려 있는 장롱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거기 있니? 여자는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알을 씹으며 애원하듯 물어보았다. 저마다 램프 하나씩을 물고 있는 새들이 날아올랐다. 한참을 무릎발로 기어가다보니 문 하나가 손에 잡혔다.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문 너머로 방콕의 거리를 걷는 떠돌이 개들의 무력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혹은 인도 갠지스 강 근처의 하이에나들이 달빛을 받으며 노래하는 소리, 도쿄 사람들이 고독하게 햄버거를 씹는 소리. 여자는 언제나 혼자 여행을 다녔다. 일본도, 인도와 태국도 여자는 혼자 떠났고 혼자 돌아왔다. 여행지에서는 늘, 어머니나 K를 데려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은 뒤엔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채 거리를 걷다가 서울에서처럼 혼자 저녁이나 먹는 싱거운 여행이었는데도 떠나기 전엔 대단한 모험을 할 것만 같아 은근히 동행을 원했던 그들을 외면했다. 램프를 곧 꺼졌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너무 멀었다. 완벽한 어둠이 밀려들어 왔다. 손으로 느껴졌던 문의 감촉도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는 K의 장롱 속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아 눈앞의 어둠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깨어났을 때는 저녁 6시 30분이었다. 마을버스 기사가 정한 약속 시간은 아마 7시였을 것이다. 여자는 장롱 속에서 K가 즐겨 입던 후드티를 집어 대충 껴입었다. 후드티에서는 어머니의 병실에서처럼 나프탈렌 남새가 났다. 아니다. 어머니의 병실에서 깜짝깜짝 놀라며 맡아야 했던 그 냄새. 죽음을 거부하는 노인의 냄새였다. 여자는 후드티를 다시 벗은 후 아파트를 나올 때 의류수거함에 버렸다.
기사는 대형 마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었다. 마침 마을버스가 여자 앞을 지나갔다. 여자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마을버스가 대형 마트 앞을 지나갈 때, 그러나 여자는 내리지 않았다. 대형 마트 앞은 사람들이 많아서 만나기로 한 기사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여자는 대형 마트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한 뒤 길을 건너 다시 똑같은 번호의 마을버스를 탔다. 이번에도 기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색 옷을 입고 올 거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긴, 옷 색깔을 알았어도 기사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기사의 풀린 눈동자만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 그의 얼굴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 번째로 마을버스를 탔을 때, 청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는 딱 세 번 울린 뒤 끊겼다. 쉽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문득, 마을버스 기사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사업한다고하면누가좋아할줄알았어요남의목요일을망쳐놓고젠장날좀제발내버려둬지긋지긋해진짜. 혹시라도 식사를 하게 되면 후식으로 커피나 녹차를 마실 때 아무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뇌까리려 했던 말들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 지워버린 문자 메시지만큼 공허한 문장이었다.
다섯 번째로 마을버스에 탄 이후엔 더 이상 대형 마트 앞을 관찰하지 않았다. 마을버스는 S은행에서 회차하여 여자가 사는 아파트 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버스 내 안내방송이 C중학교 앞이라고 알려줄 때에야 여자는 차리고 벨을 누른 뒤 버스에서 내렸다.
6
C중학교로 가기 전 여자는 아직 문을 연 문구점에 들러 농구공 하나를 샀다. 바닥에 튕겨보았다. 소리가 좋은 공이었다.
C중학교 운동장에는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야구를 하고 있었다. 농구 골대가 잇는 곳에서도 서너 명의 아이들이 파울, 나이스 슛! 등을 외치며 뛰어다녔다. 여자는 축구 골대 근처에서 조용히 드리블을 하다가 패스, 나직이 속엣말을 한 뒤 아무도 없는 정면에 휙 던져보았다. 떠난 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스탠드 구석에서는 버려진 새끼 고양이가 비를 맞은 새처럼 연약하게 울고 있었다. 여자는 무언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연갈색의 고양이를 노려보다가 공을 챙기지도 않은 채 큰 걸음으로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우편함에는 또다른 엽서가 와 있었다. 엽서를 보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이미 거기에 적힌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나무들에는 입이 있다. 시엠레아프에서 K.
캄보디아는 은행에서 해고된 후 간 곳이었다. 여자는 시엠레아프에 있는, 연초록빛 아이스 애플티가 기막히게 맛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시엠레아프의 앙코르와트는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어둠이 내리면 무법천지가 되는 곳이었다. 그럴 줄 알면서도, 여자는 밤 9시 즈음 오토바이 택시를 불러 앙코르와트에 들어갔었다. 새들이 입으로 나르던 씨앗이 무심결에 떨어져 거대한 나무가 되었고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었다 했다. 낮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밤에 자세히 보니 나무들 하나하나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그 구멍이 나무의 입이라고, 여자는 그날 밤 믿기로 했다. 오랜 세월 침묵한 나무들에게도 못 견디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터였고 그 간절한 염원이 견딜 수 없는 통증을 감내하면서까지 제 몸에 구멍을 내게 한 거라고. 나무의 입, 여자는 그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바닥까지 손으로 잴 수 있었다. 네 번째 엽서를 코르크 메모판에 고정시킨 뒤 주방에서 뜨거운 커피를 끓이고 있는데 휴대폰이 또 울렸다. 머그에 물을 붓던 여자는 경직된 자세로 뒤를 돌아봤다. 휴대폰은 침대 아래 바닥에 놓여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와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K니?”
“……”
“K, K지?”
“…… ”
“여보세요? 여! 보! 세! 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고는 통화 목록을 들여다봤다. 마을버스 기사의 전화 이후로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여자는 흉측한 벌레를 만진 듯 기겁하며 휴대폰을 내던졌다. 거실엔 나방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나방인지, 아니면 새로 여자의 집을 방문한 나방인지 알 수 없었다. 나방은 현실의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꿈의 출구를. 너의 꿈속은 어떠니. 너도, 가끔씩 악몽을 꾸니. 여자는 나방과 마주앉아 오랫동안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순간에 사람을 녹슬게 하는 그 엄청난 위력에 대해, 순진할 만큼 솔직해질수록 더더욱 가혹한 아픔을 느끼게하는 그 유치하고 악의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함부로 바닥에 던져버린 휴대폰을 여자는 다시 집어들었다. 번호 하나를 찾아내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7
밤 10시에 전화를 걸어온 환자의 보호자를 의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유가 느껴지던,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따듯한 미소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금세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쨌든 전화를 한 용건은 밝혀야 했다. 호흡기 제거는 하지 않겠다고. 여자는 떠듬떠듬 말했다. 의사는 귀찮은 목소리로 그렇군요, 대답했다.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의사에게 여자는 다급하게 물었다.
“저희 어머니가 사후 장기 기증에 서약했다는 걸 알고 계셨죠?”
“네?”
“동생과 함께 인터넷으로 서약을 했었어요. 저는 사실 반대했는데, 그렇잖아요, 가족의 시선에 칼을 댄다는 게…… 그런데 교회 목사인지 장로인지가 설득해서 넘어가고 말았죠. 두 사람 다, 교회에 다녔거든요. 저만 서약을 안 했는데 그것 때문에 한 달 내내 구박을 받았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그랬습니까?”
“그래도 오늘 같은 목요일이 낫겠죠?”
“죄송하지만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시겠습니까?”
“호흡기 제거를 만약 한다면 말이에요. 목요일엔 K가 돌아올지도 모르거든요. 하긴, 이렇게 대단한 일에 K 하나 빠지는 게 무슨 문제겠어요. 방송사나 신문사도 오고 그렇겠죠? 그럼 병원도 유명해지는 건가.”
“이봐요.”
이봐요, 이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는 말들을 속닥거리는, 이미 자신의 귀와 삶에서 멀어진 휴대폰을 여자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는 미련 없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엽서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새 엽서를 책상 한쪽에 밀어놓고 여자는 오랜만에 K가 사는 그곳을 들여다봤다. 이번에도 문은 잘 열리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열어봤지만 뿌연 안개 탓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늘 그래왔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검은색 차도르를 쓴 여자들이 새벽마다 물을 길어 나르는 곳, 그런 곳일까. 황홀한 에메랄드빛 해변이 있는 태평양의 이름 없는 섬은 아닐까. 혹은 낮에는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밤에는 홍등가의 화려한 조명이 흥건한, 멸망하기 직전의 어떤 대도시일지도 모른다. K는 진짜 일본과 인도, 태국과 캄보디아를 다녔을 수도 있다. 확실한 한 가지는, K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엔 통곡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을 거라는 것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의자 하나씩을 착착 접어 옆구리에 끼워놓은 채 어머니의 피 흘리는 다리 사이로 순진한 얼굴을 내미는 것일 테니. K의 의자라면 고동빛 오크로 멋지게 짜여진, 팔걸이에는 섬세한 조각도 새겨져 있는 고급스런 의자였으면 좋겠다.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면 의식도 못한 사이 한숨 깊이 잠들 수도 있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재질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니, 반드시 그런 의자여야 한다.
고개를 들어 코르크 메모판을 올려다봤다. 도쿄, 바라나시, 방콕, 시엠레아프…… 이제 더 이상 여자가 여행을 한 도시는 없다. 못한 말이 있어. 여자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만약 다섯 번째 엽서를 쓸 수 있다면, 그때에도 단 한 줄에 지나지 않을 그 문장은 ‘못한 말이 있어’ 이후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
8
빈 엽서를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 책상에 귀를 대고 눈을 감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K의 장롱에서 듣던 바람 소리도 이랬던가. 지금 집을 빠져나가 한없이 걸어가다보면 언젠가 바다가 나올 거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파도의 흔적이 밴 바람 소리. 여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목요일은 끝나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K와 함께 사용하던 농구공을 가져왔다. 농구공에 스며 있던 K의 땀과 체온이 손안에 들어왔다.
고양이를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C중학교 운동장 모래에 묻어 있던 폐타이어에 앉아 한 손으로는 농구공을 튕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어 모양의 하드를 빨고 있을 때 그 연갈색 새끼 고양이가 조심성 없이 여자 옆을 기웃거렸다. 여자는 농구공을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야옹아, 불러보았다. 고양이는 느리게 여자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고양이를 안았다. 내장을 감싸고 있는 작은 뼈가 손가락 끝으로 느껴질 만큼 굶주린 고양이었다. 어디 갔다 왔니? 고양이의 등에 볼을 부비며 여자는 울먹이듯 물었다. 고양이는 이내 야옹, 고양이다운 소리로 대답했다. 여자가 해석할 수 없는, 여린 분홍빛의 언어였다.
K가 돌아오면 이 고양이를 보여줘야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K는 분명 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어느 햇살 좋은 날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고양이 등에 얼굴을 묻으며 ‘좀 걸었어’라고 뒤늦은 대답을 해줄 것이다. 저녁식사 후에는 여자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희한하고 신비로운 여행지에 대해, 파도를 싸우고 맹수로부터 도주하고 금발의 아가씨와 뜨거운 키스를 나눴던 모험과 추억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통곡의 의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리.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이 되어버린 여자와 K는 식탁에 마주앉은 채 서로의 주름과 휘어버린 등허리와 반백의 머리칼을 질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끄덕끄덕 졸게 될 것이다. 아마도, 목요일 저녁마다. 물론 그전에 다섯 번째 엽서를 써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본과 인도, 태국과 캄보디아 외에도 여자가 짐을 푼 곳이 한 군데 더 남아 있었다. 엽서에 쓸 한 줄의 문장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K 앞에만 서면 번번이 목에서 가시처럼 걸리곤 했던 바로 그 문장이었다. 엽서를 완성하면 여자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어머니의 양산을 쓴 채 동네 우체국에 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 엽서는 병원 근처 우체국에서 보냈고 두 번째 엽서는 기억나지 않으며 세 번째 엽서는 홍천에서 돌아오는 길 소읍의 우체통에 넣었다. 네 번째 엽서는 마트 옆 우체국에서 발송했었다. 우체국에 가기 전, 여자는 전등 하나를 켜놓고 책상에 앉아 허리를 굽힌 채 오래오래 쓸 것이다. 이번만큼은 K에게 향하는 진짜 엽서를. 못한 말이 있어, 속삭인 뒤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 나서. 너의 잘못이 아니야. 서울에서 누나가.
-분석문
인물관계
-여자: 여자는 엄마의 사고 이후로 집을 떠난 동생인 K의 엽서를 자주 받지만 엄마가 사고가 났던 차를 몰고 있었던 K를 쉽게 용서해주지 못한다. 여자는 사고가 난 버스기사를 돕는 과정에서 K를 회상하고 그 이후에도 자신이 힘들었을 때 K는 늘 곁에 있어주었지만 자신이 K가 힘들었을 때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더 괴롭게 했던 것을 깨닫는다. 뇌사 판정을 받은 엄마의 호흡기를 떼자는 의사의 제안에 동생인 K가 와서 같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결정을 미룬다. 여자는 끝내 K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답장을 보낸다.
-K: 여자의 남동생으로 엄마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외진 곳에서 사고가 나서인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눈앞에서 엄마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무력하게 봐야만 했다. 죄가 없는데도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끝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혼자서 여행했었던 여행지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쓴 엽서를 누나인 여자에게 보내지만 진짜로 K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줄거리
대형마트에서 되돌아오던 여자는 자신이 탄 버스가 붉은 불에 지나가던 자전거를 치는 사고에 자신의 동생인 K를 떠올린다. 여자는 당황하여 두려움에 떠는 버스기사를 위해 붉은 불이었다는 진술을 해준다. 그러며 K 또한 버스기사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을까 생각한다. 여자는 K가 여행지에서 보내오던 엽서들에 대한 답장을 한 번도 써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뇌사판정을 받은 엄마의 호흡기를 제거하자는 의사의 제안에 동생이 돌아온 후 결정하겠다고 한 후, 여자는 K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적은 답장을 써서 보낸다.
3S
-situation
사고가 난 마을버스 안에 있던 여자는 남동생 K를 회상한다. K는 엄마와 함께 사고가 났을 때,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엄마가 다친 것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K는 집에서 나가 홀로 여행을 한지 꽤 됐고, K가 보내온 엽서에 여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여자는 병원에서 엄마의 호흡기를 제거해야한다는 말에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와 K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처음으로 답장을 쓴다.
-space
main space: 마을버스 안
“분명히 빨간불이었어요!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사고 직후, K도 가장 먼저 저렇게 외쳤을까.
그 일 이후, K는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했다. 어딘가에 중요한 가방이나 서류를 놓고 온 사람 같았다. 떠나지 못한 K는 소파에서, 장롱 안에서, 심지어 욕실의 거울 속에서 자주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호전되지 않지? K는 절망했다. 절망의 크기만큼 기도의 시간도 길어졌다. 아무래도 진짜 기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 K가 그런 말을 했던가. 여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죄의 목록을 고치고 또 고치고 있을 K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K는 오래전 보았던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고백으로 빽빽한 노트 한 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리가 꾸부정한 노인의 자세로 시도 때도 없이 그 노트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적고 지우고 다시 적는 K를 여자는 상상의 영역에서 본 적이 있었다.
조해진, 「목요일에 만나요」, 『목요일에 만나요』, 문학동네, 2014, 63쪽.
여자는 대형마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어릴 때 엄마와 동생 K와 함께 있던 일을 회상한다. 마을버스가 사고가 나면서 두려움에 떨며 도움을 요청하는 버스기사를 보고 여자는 K가 사고가 났을 때도 저렇게 외쳤을까, 생각한다. K가 여자 곁을 떠나 여행을 다니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부분이며, 여자는 마을버스에게서 K의 모습을 보고 도와주는 면에서 여자가 K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ub space: 여자의 집
오랜만에 여자는 K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문 맞은편에는 K가 사용하던 초록 테두리의 하얀색 장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뇌가 회생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K는 종종 그곳에 숨어들었다가 있곤 했다. 나와. 여자는 장롱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말해야 했다. 밥 먹어, 빨리! 절규하듯 소리도 질렀다. 하지만 장롱 속에 한번 들어가면 K는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롱 속에는 어떤 세상이 있었던 걸까. 여자는 조심스럽게 장롱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K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모래바람처럼 황량하면서도 사이사이 축축한 습기가 밴,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었다. 장롱 속 어딘가에 K가 이 도시를 빠져나간 출구가 있을 것만 같아 여자는 티셔츠와 청바지, 겨울 코트와 재킷 등이 차곡차곡 걸려 있는 장롱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거기 있니? 여자는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알을 씹으며 애원하듯 물어보았다.
조해진, 「목요일에 만나요」, 『목요일에 만나요』, 문학동네, 2014, 72-73쪽.
여자는 집안에서 K가 없는 K의 방문을 열고 K가 있었던 방안을 회상한다. K가 자주 들어가 있던 장롱 문을 열고는 거기 있니? 하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여자는 K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가 K에게 엽서를 받는 곳도, K에게 답장을 쓰는 것도 모두 여자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K와 여자가 교류하는 장소이므로 sub space로 뽑았다.
-stage
엽서에 쓸 한 줄의 문장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K 앞에만 서면 번번이 목에서 가시처럼 걸리곤 했던 바로 그 문장이었다. 엽서를 완성하면 여자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어머니의 양산을 쓴 채 동네 우체국에 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 엽서는 병원 근처 우체국에서 보냈고 두 번째 엽서는 기억나지 않으며 세 번째 엽서는 혼천에서 돌아오는 길 소읍의 우체통에 넣었다. 네 번째 엽서는 마트 옆 우체국에서 발송했었다. 우체국에 가기 전, 여자는 전등 하나를 켜놓고 책상에 앉아 허리를 굽힌 채 오래오래 쓸 것이다. 이번만큼은 K에게 향하는 진짜 엽서를. 못한 말이 있어, 속삭인 뒤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 나서. 너의 잘못이 아니야. 서울에서 누나가.
조해진, 「목요일에 만나요」, 『목요일에 만나요』, 문학동네, 2014, 81쪽.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자는 죄책감을 안고 집을 떠나있던 K에게 오랫동안 이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여자는 병원에 전화해 엄마의 호흡기를 제거한다면, K가 돌아올 목요일에 하자는 말을 한다. 그런 후, K에게 답장을 보낸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남매의 화해를 그린 장면으로 이 소설의 main stage다.
다른 장면을 하나 더 뽑자면 이 소설의 제목인 “목요일에 만나요.”의 목요일을 강조시킨 이유를 알려주는 이 장면일 것이다.
어느 날 여자는 역시나 농구공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다. 날숨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고 그저 뜨겁기만 했다. K가 여자의 어깨를 치자 여자는 공을 놓친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5년 동안 결근도 없이 다녔던 은행으로부터 해고에 대한 이메일을 받은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구체적인 해고 사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딱 한 번 마음을 굳게 먹고 은행을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해고 사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만 사용하던 팀장은 여자가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존댓말을 써가며 윗선의 결정일 뿐이라는 애매한 해명을 했다.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찾아야 했다. 회식에 자주 빠져서일까. 개인용 머그컵을 제대로 씻지 않고 퇴근한 날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나사가 빠져 삐끗거리던 의자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탓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사소한 실수들도 치명적인 해고 사유가 되어갔고 그 세부사항들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그날 K는 인내심을 갖고 여자 곁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뜨거운 날숨을 모두 내뱉은 뒤 힘들어, 속삭이자 K는 다시 공을 주워와 제법 아프게 여자 쪽으로 던지며 뭘, 대꾸했다. 16 대 5야. 이제 다섯 개만 더 넣으면 게임 오버라구! 저쪽에서 K가 드리블을 하며 악을 쓰듯 외쳤다. 여자는 먹이를 잡기 위해 오랜 시간 잠복하는 영리한 동물처럼 한동안 잠자코 웅크리고 있다가 K가 다가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K에게서 순식간에 공을 뺏어왔다. 농구는 이렇게 하는 거야!
조해진, 「목요일에 만나요」, 『목요일에 만나요』, 문학동네, 2014, 71쪽.
K와 여자는 목요일마다 농구를 했고, 여자가 직장에서 잘린 후, 괴로워하고 있을 때 K가 곁에서 위로해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K가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장면인 지금과 상반되는 장면으로 여자가 K에게 답장을 쓰게 될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자도 K의 곁에서 K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 도구 및 특징
-엽서: K는 소설 속에서 회상장면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여자로 K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K와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K와 여자가 소통을 나누는 매체는 엽서인데, K는 여자가 이전에 혼자서 여행을 갔었던 여행지를 혼자서 여행하면서 여자에게 엽서를 보낸다. 여자는 K가 엽서를 보낼 때마다 답을 보내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K에게 답장을 보내 둘이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특징: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며 모두 여자, K, 버스기사처럼 익명 처리되어 나온다. 소설에 깊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작품 주제
부모의 사고로 인해 찢어지게 된 가정의 회복.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음에도 서로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가족의 모습. 남동생인 K와 여자의 화해, 용서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