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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Oh Danny Boy와 클레멘타인 총결산(全長 원고지 90장)
작가의 변/ 난 우리나라 최고의 인터넷 신문 <실버넷뉴스>의 새내기 기자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도저도 아닌 말하자면 어정뱅이다.
기자는 특종을 발굴해야 한다. 밋밋한 내용은 기사로서의 생명이 없다. 한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하마터면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산 옛 동지가 있다는 사실을 놓칠 뻔했다. 그의 기막힌 역정을 우리 신문에서 다루는 공간(혹은 방법)은 세 개다. ‘기사’, ‘문화예술관’, ‘어떻게 지내세요’ 등. 다른 건 좁아서 한꺼번에 싣기가 불가하다. 해서 ‘어떻게 지내세요’에 소설식으로 꾸며 넣은 지 조금 얼마 됐다.
어디서든 이 두 곡을 부르는 게 버릇처럼 돼어 버렸다. 우리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님들과 한 번 어울려(?) 보고 싶어 여기 올린다. 요람된 짓을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지간히 알려진 게 아일랜드 민요 Oh Danny Boy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만 나와도 이 노래는 안다. 아니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 전부인들 왜 이걸 모를까? 참, 빠뜨렸다. 우선 ‘원어’가 아니고 우리말로 한 번 불러보자. ‘아 목동아’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가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 아아 목동 아 내 사랑아
아니 골치 아프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아무 노인학교에서나 ‘아 목동아’를 흥얼거린다 치자. 학생들 반은 흉내 낼 수 있으리라. 대중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리랑’과 ‘아 목동아’가 어금버금하다고 해도 거의 틀리지 않으리라.
노인학생의 '현주소'는 오래 노인학교에 몸담았었던 허허실(許虛實) 교수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의 이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 보자.
“노인학생들이 ‘아리랑’보다 ‘클레멘타인’을 더 정확하게 부른다는 사실 앞에 경악하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박자며 음정이 어찌나 그렇게 정확한지…. 묘한 함수 관계를 풀어 보겠습니다. 우선 ‘클레멘타인’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람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어디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한숨 돌린 허허실 교수가 다시 말을 잇는다.
“1910년대 초반에 그 노래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노인 학생들이 소녀 시절쯤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물론 클레멘타인의 무대는 미국입니다. 개척 시대 열악한 광부들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어요. 가사가 왜 바닷가로 둔갑(?)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하여튼 매체도 없었던 한일합방 앞뒤 시절이었다. 이 클레멘타인은 선풍(旋風)에 휩쓸려 많은 우리나라 부녀자들의 입과 귀를 통하여 전해진다. 그야말로 국민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가 될밖에.
그에 비해 ‘아 목동아’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직접 악보를 통해 배움으로써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게 허허실 교수의 주장이다. 이게 ‘아일랜드 민요’라는 사실을 알고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엄청난 반향(反響)은 계속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거다. 마침내 원어로 어지간한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지 오래다. 기자는 그가 펼친 아주 오래 되어 낡을 대로 낡은 김해여고 음악 교과서 129쪽을 들여다보며 그와 함께 실창(實唱)해 보았으니 그 가사다.
Oh Danny boy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falling/ It’s it’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ye back when the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It’s I’ll be there in sunshine or in se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교과서 해설 :전장에 나가는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노래임/ Danny는 소년 이름이라더라.)
허허실 교수는 이 My darling Clementine과 Oh Danny Boy와 를 들고 마치 주유천하(周游天下)를 하듯, 먼 곳 가까운 곳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교과서에 실린 이후 ‘아 목동아’에 우리나라 국민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왔던 겁니다. 다중(多衆)이라면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게 이미 멜로디를 익히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해서 말인데, 우리말 가사를 원어로 바꿔 부르는 게 힘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단어도 어려운 게 없어요. 다만 ‘ye’는 고어(古語)라는 것만 기억하면 되겠지요. ‘아 목동아’를 알면 ‘Oh Danny Boy’를 익히는 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허허실 교수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 정체(그에게는 실례지만)를 밝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지 않고선 그 다음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허실 교수의 본래 이름은 허삼천(許三千)이다. 삼천이 어릴 때, 삼천포(三千浦)시의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였다. 그의 집은 워낙 가난하여 뱃일에 종사할 여건이 안 되었다나? 아버지는 모두가 꺼리는 폐결핵을 앓았다. 그래도 어머니가 워낙 억척스러웠다. 초가삼간 뒤의 땅을 마련하여 손바닥 크기의 땅을 개간해 가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한 것이다. 참, 오죽 답답했으면 아버지가 삼천을 낳았을 때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아이고, 고마바라. 마누라가 이번엔 고추 하나 뽑아냈네. 하지만 궝구(眷口) 하나 늘었지만 우째 되겠지. 이름을 ‘삼천리’에서 ‘리’ 자는 빼 버리고 삼천으로 하는 기라. 자갈밭이라도 좋으니, 삼천 평 아니 그 반의반 땅이나 마련해 보라는 아비 소원이다.”
그래도 뼈 빠지게 일한 보람이 있었다. 개간한 땅에서의 소출을 아끼고 아낀 덕분에 소형 발동선을 하나 사서 바다에 일터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도 병세도 조금은 차도 있었다. 하지만 그해 전국을 강습한 태풍으로 인해 산기슭 오두막집도 송두리째 날아가고, 배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유행하던 속담 같은 말을 돌이켜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단다.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어쨌거나 삼천네가 삼천포에서는 더 살 수가 없었다. 야반도주 하듯 어느 날 네 식구는 괴나리봇짐 달랑 하나씩 짊어지고 뱃길로 부산으로 떠나게 된다. 삼천의 나이 열두 살,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때였다.
배 위에서 계속해 멀미를 하면서도 어머니는 청승맞게 노래를 불렀다. '클레멘타인' 말이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틴(클레멘타인이라 정확하게 부르지 못했다.)
초량 산꼭대기에 있는 다 허물어져가는 무허가 판자촌을 찾아가 단칸방을 천신만고 끝에 얻었다. 물론 사글세로. 당장 입에 풀칠하기가 문제였다. 아버지의 병이 설상가상, 심해졌다. 초등학교만 나온 누나는 키만 멀쑥하니 클 뿐 아는 것도 배운 기술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위도식할 수 없는 노릇, 우선 자갈치 어촌계장 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나의 월급으로 식구들의 끼니와 약간의 잡비는 그렇게 해결되었다.
요컨대 삼천이 문제였다. 삼천은 머리가 썩 좋아서, 중학교를 거쳐 상고나 공고에 진학하면 훌륭한 직장 하나 얻을 수 있을 텐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량 역 앞에서 삼천은 구두 통을 멜밖에. 조무래기 깡패들한테 수입을 빼앗기면서도 삼천은 굴하지 않았다.
한여름이 되었다. 아이스케이크 장사가 수입이 쏠쏠하다 해서 귀가 솔깃해져 그길로 나서기도 했다. 할 때는 이런 수모를 당하기도 예사였다.
“아이스케키 사이소오.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왔습니더.”
때맞추어 덩치 큰 학생, 아니 교복만 입은 깡패가 한마디 한다.
“야, 아이스케키!”
삼천이 부리나케 달려간다.
“예, 얼만치 드릴까예?”
“시끄럽다 임마. 조용히 좀 사자. 꺼져.”
그 장본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둘러서서 그걸 바라보며 박장대소하는 일부 또래가 삼천으로 하여금 치를 떨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를 악물고 돌아서야만 했고말고. 그러는 중 삼천을 눈치껏 붙잡고 구석으로 데려가선 통째 아이스케이크를 사 주는 착한 학생도 있었다.
그러던 삼천이 자기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를 맞은 것이다. 항상 <영한사전>을 들고 걸으면서도 외는 고등학생이 신기했다. 물론 그 당시엔 그런 광경이야 흔했다. 특히 이순달이란 이름표를 단 학생은 옷도 단정하게 입고 행동거지부터 남과는 달랐다. 최고의 명문 부산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부산고등학교 전체에서 공부며 주먹이 단연 1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순달을 만났을 때를 재현해 보자.
그 당시의 초량역 앞은 난장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대일로 치고받기, 통학생 상호간 패싸움, 선량한 학생들에 대한 폭력배들의 주먹질, 여학생 성추행, 소매치기 소란 등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런 데서 구두 통이나 아니스케이크 통에 삼천을 비롯한 몇몇 소년들은 생존을 걸고 있었다.
그때도 노동조합 같은 게 있었던 듯 초량역 뒷문 입구 위로 아치를 하나 만들어 거기 적어 놓은 글자 중 ‘韓國勞働組合고저쩌고…’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어느 날 삼천이 그걸 바라보고 고개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동(勞動)인데, 왜 움직일 동 자를 ‘働’으로 썼노?”
삼천은 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워 움직일 動 자 정도는 안다. 어쨌든 그게 운명이었다. 이순달(이름표를 달고 있었다)의 시선에 삼천이 꽂힌 것이다. 이순달이 말했다.
“아하 요 녀석 바라. 야, 니가 이걸 읽을 줄 알아?”
“아니 뭐, 조금은 한자를 알긴 하는데 ‘노동(勞動)’ 아닝가예? 본래는 인변이 없는데….”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만, 같이 쓰는 모양이더래이. 하여튼 똑똑한 녀석을 알게 돼 좋다. 가자, 내 찐빵 사 주꾸마. 가만 있자, 오늘 나도 시간이 좀 있다 아니가? 따라 온나. 오늘 구두 고만 닦아라. 내가 다 물어 주께.”
마다하던 삼천은 이순달의 끝내 권유를 들을 수밖에. 5분만 걸으면 중앙극장이 나온다. 이순달이 걸음을 떼어 놓는 대로 중고등학생들이며 양아치로 보이는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들이 허리를 굽혔다.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례를 올려붙이기도 했고.
정말 찐빵을 잔뜩 얻어먹었다. 돌아 나오려니 이순달이 말하는 것이었다. 밀가루 음식 뒤엔 오뎅(어묵)으로 입가심을 해야 한다고. 오뎅까지 쑤셔 넣고 보니 정말 배가 터질 것 같다. 역까지 따라가면서 들은 이순달의 얘기다.
“난 운동, 특히 태권도를 좋아해. 아버지가 태권도장을 하시거든.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잖아? 그라고 엄마는 재래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신다. 묵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그래예? 어디 사시는데예?”
“음 여기서 세 정거장, 구포 알아?”
“얘기는 들었어예. 구포, 삼랑진, 진영 이 세 군데 역에 ‘가다’(일본말/ 주먹이 센 사람) 많다면서예?”
“예끼 녀석, 모르는 게 없구마. 난 가다가 아니라 스포츠맨이야. 그건 그렇고….내가 싸움하는 거 보기가 염소 물똥 사는 거 보기보다 힘들걸? 너 검정고시 공부해 볼 생각 없어?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안 가도 졸업 자격을 얻는 제도야. 그렇게 성공한 사람 많데이.”
“정말입니꺼? 방법만 갈쳐 주면 해 볼끼라예.”
“우리 고등학교 내 친구 하나 얘기 해 주께. 걔는 집이 가난해서 학비 감당이 힘들었던 모양이야. 2학년 초에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 공부를 해 가주고, 바로 서울대학교로 진학한 기라. 넌 잘 모르겠지만 독어독문학과로 갔어.”
그 소릴 들으니 삼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게 삼천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여느 날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더니 뜬금없이 검정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으니 부모는 처음엔 당황했다. 그러나 이윽고 녀석이 기특해서 등을 도닥거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게 가능하며 공부할 자신과 각오가 있느냐고 삼천에게 반문했다. 삼천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고말고. 엄마는 박수로써 응원했고.
삼천의 피나는 노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강의록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순달을 기다렸다가 물어서 해결했다. 천하의 명문 부산중학교 마지막 입시(이듬해부터 입시가 없어졌다)를 거쳐 부산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순달은 모르는 게 없었다. 실력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그에게서 느꼈다. 이순달은 으스대지도 않았다.
그런 노력이 보람이 있어 첫 도전에서 삼천은 몇 과목 합격을 했다. 나머지도 1-2년 안에 정복하는 것쯤 문제가 없다고 자신감을 가졌다. 과연 그랬다. 통영의 국민학교 동기생들이 졸업장을 받는 해, 삼천은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 전 과목을 통과한 것이다.
삼천포를 떠나기 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채 왁자지껄 떠들며 저 멀리 논두렁길을 걸어가며 희희낙락하던 친구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삼천의 집 울타리 곁을 지날 때는 그래도 조심스러워한다고 눈치였었지. 삼천은 등하교 시간엔 문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중학교 가을 운동회 때의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왁자지껄하는 응원 소리는 얼마나 컸던지.
그 희소식이 있고 나서 두 달 만에, 아버지가 그만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다. 폐결핵이 아닌 희한한 사고로. 무시무시하고 몸서리쳐지는 그 일을 말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그것도 집이라고 화단이 있었다. 몸이 아픈 아버지는 봉숭아며 맨드라미 등을 심어 가꾸어 보려고 삽과 괭이, 호미로 화단 바닥을 파헤치는 중이었다. 한데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발견된 것이다. 기겁을 한 아버지는 갑자기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까무러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한참 만에 겨우 깨어났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자. 그날 밤에 아버지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밤을 새워 그러다가 마침내 날이 밝았는데, 건강한 젊은이도 20분이 걸리는 산 칠 부 능선 밭뙈기-물론 개간한 데다- 한복판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자초지종이나 원인 등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경찰서에서도 단순한 변사로 처리했다. 화장하여 유해를 삼천포 옛집 근처까지 가서 몰래 뿌리며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문딩이 같은 영감, 평생 폐병을 앓아 내 속을 썩이더니….타관 객지에서 와 그래 저승 걸음은 빠르노? 이기 무슨 꼴이고? 하기사 삼천포 여기 옛날 우리 밭에도 뱀이 많긴 했다 아니가. 뱀귀신에 홀낀 기다. 영감 고향 오고 싶덩교? 그래도 입 하나 덜은 셈 아니가. 우리 똘똘 뭉쳐서 살자. 그라고 너거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래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자 엄마는 넋 나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말 모든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했다. 그러나 두어 달이 지나자, 바로 20분쯤 거리의 식당에 주방 일을 하러 나갔다. 삼천의 일터(?) 초량역 바로 맞은편이다. 어느 날 엄마는 이러는 거였다.
“사거리 있재 그자? 거기서 부산중학교 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더래이. 교복 입고 멋지게 손으로 신호를 하는 거, 정말 보기 좋더라. 내 새끼는 인자 그 시기를 놓쳐 뿌렸으니 쯧쯧.”
“엄마 염려 마이소. 나는 순달이 형님 말 듣고 대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 볼라 카는 기라예. 나중에 선생님이 될랍니더.”
“니 무슨 소리 하노? 선생님이 아 장난인 줄 아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범학교라고 있었는데, 인자 모집도 안 한다 카더라. 교대에 간다 말이가?”
더 이상 설명을 해도 엄마가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삼천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엄마 팔다리를 실컷 주물러 드렸다. 엄마는 워낙 피곤한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었다.
1967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삼천은 열심히 구두 통을 메고 초량 옆 앞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다섯 시쯤 되었을까? 이순달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삼천아, 내 구두 좀 닦아라이. 공짜 아니데이? 난 그런 사람 아닌 거 니 알재?”
삼천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순달은 워커를 구두 통 위에 얹었다. 퉤퉤 침을 뱉어가며 워커의 광을 내었다. 순달이가, 요즘도 똘마니들이 자릿값을 뜯어 가느냐고 묻는다. 그런 일 없다고 대답했다. 이순달은 아주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윽박지르기 않아도 똘마니들이 알아서 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리라. 이순달은 삼천더러 자기를 형님이라 부르라고 제안했다.
“니 터불이란 말 아나? 터울이 표준말인데, 앞서 낳은 자식과 뒤의 자식 사이의 햇수를 말하는 기라. 니하고 내하고 터불이 길다고 생각하고 내가 니 형님 하꾸마. 참 여동생이 하나 있긴 하다.”
“지 같은 넘 입에서 우째 형님이란 말 나오겠습니꺼?”
“됐다마, 너무 빼지 마라. 오늘부터 형님 동생이다 알겠제?”
“알겠십니더. 형님이라 부르도록 노력해 볼게예.”
해가 바뀌었다. 이순달은 부산대학교 인문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학생복 아니 신사복으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이순달이 어느 날 저녁 무렵 역 앞으로 삼천을 찾아왔다. 그리고 형님은 기쁜 소식을 삼천에게 전해 주었다.
집 가까운 덕만2동에 재건(再建)중학교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를 목표로 공부시키지만, 졸업생 중 누가 상급학교 그러니까 고등학교 진학을 원한다 치자.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를 해 준다는 것. 실력 있는 대학생이며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가 선생님들이라고도 덧붙였다. 자기도 대학생이니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했단다.
“내가 교무부장을 맡았다 아니가. 그런데 내 이야기 들어 바라. 근처 역이 엄청나게 커졌거든? 거기서 니가 애들 몇몇 데리고 구두닦이 해. 수입도 훨씬 나을 낑이께. 역 직원들에게도 말해 놨어. 니가 어렵게 자라 검정고시 합격한 걸 얘기했어.”
“왔다 갔다 해야 합니꺼? 형님.”
“아니야, 묵고 자고 할 데가 있다. 아직 우리 집에 대해 상세하게 말 안 했다 아니가. 시장에 점포 네 개나 돼. 포목점이랑 떡집, 장국밥집, 인삼 가게 등이야. 떡집이 가게 문을 일찍 닫는데, 거기 방 하나가 있어. 거기서 자라. 가끔 나하고도 밤을 새우며 ‘이바고때바구’ 도 하고. 이바구때바구 아나?”
“정말 오랜만에 듣습니더.…….”
“망설이지 마래이지 마래이. 니 손해 볼 일 내가 안 시키꾸마. 아침저녁은 가끔 내캉 같이 묵자. 점심은 짜장면 사묵으래이. 당분간은 쉬는 시간 재건중학교에 와서 여러 가지 일도 좀 도와 도고. 등사판으로 신문도 만드는데, 니는 맞춤법 잘 맞재? 원고 받아 오고. 줄판에다 등사원지 놓고 긁고 해 바래이. 교정 보고….등사도 하고 말이야. 시험지 등사도 마찬가지다. 수고비는 쥐꼬리만 하지만, 월급 식으로 주께. 선생님들한테 연락하는 거 뭐, 이런 기다.”
자신이 없다고 했더니 형님은 삼천이더러 적임자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라는 거다. 그럼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를 해 주겠다고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애기해 봤더니, 엄마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허락해 주었다.
그로부터 삼천은 또 다른 객지 생활이 시작된다. 틈만 나면 구두 통 없이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다. 특히 재래시장엔 없는 게 없었다. 신바람이 났다. 한마디로 말해, 삼천에게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역에는 아침저녁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잠시 나가면 되었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땐 대합실 안팎을 쓸고 닦고 했다. 덕분에 역무원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칭찬을 받았다. 틈나는 대로 학교로 가서 청소며 정리 정돈, 선생님들의 수업 준비, 학습 자료, 교과서 챙기기 등을 도맡아 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비품이며 시설에 못질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삼천은 학생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들은 삼천의 '인간승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말고. 삼천의 특유의 성실성도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학생들은 부산 시내 제일 먼 곳에서부터 인근 여러 시읍면 등지에서까지 왔다. 물금 원동 삼랑진 등….대개가 20세 안팎이었고, 초등학교를 마치고 진학 못한 한을 품고 있어서 모두들 열심이었다. 40대 후반의 주부도 흔했고말고.
공부가 그렇게 신나는 것인 줄 몰랐다. 처음 검정고시를 시작할 때는 자신이 없었다. 한데 합격하고 보니 훨씬 나이 든 학생들보다 학교 급이 다른(대학입학 자격) 데 도전한다는 성취감에 사로잡혔다. 엄마와 누나 나이의 학생들은 기특하다며 남몰래 용돈을 쥐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모르면 뭐든지 물을 수 있는 선생님(대학생, 학교 교사)들이 20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서 삼천은 드디어 목표 달성에 성공한다. 나이 만 16세 때였다. 우수한 성적이었음은 물어보나마나. 일간 신문에서 그를 인터뷰하는 등 야단이었다.
참, 합격증을 받아들기 무섭게 삼천은 삼천포로 달려갔다. 동기생 57명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친구들 중 더러는 타처로 나가 공장에 다니곤 했다. 아버지와 함께 고깃배를 타거나 그 옛날 삼천처럼 좁은 논밭에서 농사에 매달려 있는 죽마고우도 있었고. 동기생 상당수가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았다.
“니 그라문 고등학교 졸업한 것과 같다는 말이가? 니가 제일 출세했다. 앞으로 우짤끼고?”
“재건중학교에 훌륭한 스승이 많다 아니가. 초등학교 교사 검정고시를 볼란다. 나이가 어려 응시 자체가 힘들다 카던데…. 일단 거기 합격하여 기다렸다가 선생님이 댈라 칸다.”
“교육대학이 생겼다 카던데. 거기 진학하면 어떻노?”
“거긴 솔직히 자신 없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온다 카더라. 2년을 우째 더 고생하겠노?”
“우쨌든 니가 최고다이. 니가 떠날 때 우리 서로 인사도 못했다 아니가. 미안하데이.”
삼천은 그렇게 또 2년을 알차게 보내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초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만다. 만 18세 때였다.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할 때라 서류만 제출하니 진작 발령을 내 주는 게 아닌가? 1970년도 9월 1일자, 김해시 한림서(翰林西)초등학교….
사택에서 자취를 했다.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음악 교실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피아노(육성회장이 기증했다)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면내에 두서너 대 될까말까 할 때라 한 여고생이 가끔 피아노에 앉아 보고 싶어 했다. 어느 날 밤, 촛불을 켜 놓은 채 ‘도레미파솔파미레도’부터 열심히 두드리는 여고생과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촛불 하나만 꺼질 듯 탈 듯 하며 어둠을 밝혀 주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 그러노라니 참 야릇하면서 황홀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장면을 그만 교장 선생님한테 들키지 않았더라면,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순간순간이었다. 그런데 발각이 된 것이다. 다 된통 혼이 났음은 물론이고말고. 비참할 정도였다. 창피 정도가 아니라 모욕을 섞어 교장 선생님은 여학생을 나무랐다. 여학생은 눈물을 쏟고 갔다. 사건(?)은 그걸로 수습되지 않았으니, 다음날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일장 훈시가 터져 나온 것!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물도 다시 보자… 같은 구호가 붙어 있는 20평 공간이다. 한데 ‘한밤중 촛불 하나에 둘이 한 몸이 되어’(교장 선생님 얘기) 있다니 말이 되느냐?”
참, 삼천은 바로 쫓아가 악몽의 흔적을 칼로 깎아 지웠다. 피아노 뚜껑이며 다리, 건반 근 흘러내리다 덕지덕지 굳은 촛농이 흉물처럼 남아 있었다.
한데 여학생이 황망 중에 놓고 간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가 그대로 얹혀 있는 게 아닌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삼천으로서는 참 신기한 보물처럼 여겨졌다. 거기에 원어와 우리말 가사로 된 두 곡이 있었으니, ‘아 목동아’(OH Danny Boy/ 그 책에는 London Derry Boy로 되어 있었다.)와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이었다. 그로부터 삼천은 혼자 있을 때면 이 두 곡을 우리말로 혹은 원어로 부르는 게 습관이었다. 그걸 계기로 해서 삼천은 이 둘을 애창곡으로 삼는다. 여학생은 다시는 학교를 찾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그는 이런 생각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리고 푸념으로 남에게 들릴락 말락 내뱉는 말. 난 다른 과목은 다 가르치겠는데, 미술에 자신과 안목이 없어. 타고났나 봐. 초등학교 교사는 전 과목에 다 능통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게 아니잖아. 그래, 중등학교로 진출하자. 방법은 오직 하나. 국어과 검정고시 전장(戰場)으로 뛰쳐나가는 거다!
그때부터 삼천은 다시 머리를 싸맨다. 가르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난 뒤, 그는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 소지자는 교육 과목이 면제니까, 전공과목 서적과의 씨름에 혼신이 힘을 쏟았다. 첫해는 실패했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두 번째 부산진여중에서 치른 시험에 합격했다. 21세 때였다.
초등학교 동기생들 중 두서넛이 초급이라도 재(大) 자가 들어가는 학교에 다닐 무렵, 삼천은 중학교 선생님이 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래도 군에 가기 전에는 그대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기로 내심 작정할 수밖에.
이순달 형님과는 여전히 연락이 오갔다. 그동안에 형님의 집에 변화가 있었다. 형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다. 한데 구포 역 근처에 사놓았던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거부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네 개의 가게도 엄청난 수입원이었다. 운선사 주지 스님과 합의, 투자하면 사립학교 하나쯤 설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도 형님이 귀띔해 주었다.
그런데 이순달의 건강이 안 좋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도 삼천의 귀에 들려왔다. 이소룡처럼 너무 운동을 심하게 해서, 팔다리 근육에 이상이 왔다는 게 아닌가? 부산대학교 인문대 수석 입학한 형님이었다. 태권도가 워낙 좋아 그걸 가업으로 이어 받을 결심까지도 한 강골인 형님이 아니던가? 그래도 형님은 굴하지 않았다. 76년도에 <현대 문학>인가 어디에서 천료를 함으로써 시인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하게 된 셈이다.
어쨌든 연기하고 있었던 군 입대가 천삼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창원 훈련소에서 기본 훈련을 받으러 떠나는 날 이순달 형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형님이 그러는 것이었다.
“잘 다녀 오거래이. 중학교는 세워질 거다. 니가 제대하면 나이도 20대 중반에 가까우니, 그 학교로 온나. 새 학교엔 젊은 일꾼이 필요한 기라. 그때 일 열심히 해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형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혜련이가 삼천한테 관심이 많나는 것이다. 착한 애라 부연하면서. 삼천이 제대 후 둘이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거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제안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삼천은 돌아 나왔다. 혜련이는 그때 대학 1학년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혜련은 인물은 썩 좋지 않아도 심성 하나가 고왔다. 하기야 둘이서 영화까지 같이 본 적이 있으니, 서로 호감을 안 가졌다고도 할 수 없었고. 하여튼 삼천은 6주간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영천 부관학교를 거쳐 자대 배치를 받았다. 보충중대 소속으로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문자 미해득 병사가 있어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희한한 가르침, 우여곡절을 또 하나 삼천이 겪은 것이다.
32개월 만에 드디어 군복을 벗었다. 일주일이 안 되어 복직이 되었다. 바로 가을 운동회가 열렸는데, 손님 찾기 경기에서 세 번이나 불리어 나갔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큰 대 자로 쓰러졌다, 다른 직원보다 먼저 혜련이가 뛰어 들어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본부석까지 부축해 가는 게 아닌가! 삼천은 몽롱한 중에서도 혜련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2학기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다음해 2월에 이순달 형님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새학기에 중학교로 부임하거래이. 일꾼이 필요하다 캤재? 교감 자리를 맡아 도고.”
“형님, 그게 될 법한 말씀입니꺼? 스물여섯에 중학교 교감이라니요?”
“갠찮다. 니 같은 불굴의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써 애들한테 귀감이 되는 기라.”
솔직히 말해 삼천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엄마도 은근히 걱정하셨다. 그동안에 결혼한 누나인들 어찌 마음을 놓았으랴. 온 집안이 오히려 뒤숭숭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하자. 그래도 재건중학교 선생님들이며 학생들이, 김해까지 몰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래 새 학기에 삼천은 운천리(雲川里) 중학교에 교감 직무대리로 부임하게 되었다. 운천리라니 세 음절인 이름이 촌스럽다고 사방에서 야단이었다. 하지만 노인들이며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말하자면 터줏대감들의 고집도 어지간했다. 운천리 중학교는 그렇게 개교했다. 교사 자격을 가진 형님이 이사장.
아무리 사립학교라지만, 젊디젊은 교감이라니 권위가 아니 설 것 같았다. 삼천은 일부러 두루마기까지 걸친 한복 차림으로 출퇴근했다. 학교장을 깍듯이 모셨다. 대부분의 교사가 자기보다 젊은 아니지만, 그들의 애로 사항을 듣고 관리에 반영했고말고.
연수를 받으면서 근무했기 때문에 곧 자격증을 취득했다. 가을엔 결혼식을 올렸다. 지방의 유지 중 유지인 신부 측 혼주 때문에 예식장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아파트를 하나 구해 엄마를 모신 건 물론이다. 학교에서 교감은 관리직이지만, 어느 정도 수업을 맡는다. 당연히 국어를 가르쳤다. 가끔 음악 교사가 유고 시에 자청하여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O Sole Mio와 My Darling Clementine을 원어로 가르치고, 그 노래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등을 해설하기도 했다.
허삼천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드물다는 건 여기까지의 내용만으로도 누구나가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한데 또 하나의 변곡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주지스님이 부설 노인학교를 하나 만들고 운영책임자로 삼천을 지명한 것이다.
당시의 풍속도. 사이비 노인학교가 부지기수였다. 스무남은 평 되는 공간 하나를 갖고 구청에 신고만 하면 그 대표는 노인대학장이 되는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들 중 몇몇은 시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 자격증도 없는 무명인사, 심지어는 졸부라 손가락질 받는 축도 노인대학장이라는 직함을 그렇게 얻더라. 술과 안주를 팔고 사교춤을 추게 하는 그런 공간 앞에 ‘노인대학생들’ 이라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니나노 노인학교….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고 할 수밖에.
허삼천은 노인 교육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교육과정을 민요며 동요, 가곡 등 노래와 우리 고전 무용, 동화 구연 등 건전한 것으로 골라 편성했다. 중학교와 재건학교 선생님들을 강사로 위촉하였으니, 내실 있는 노인학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음은 물론이고말고. 공군 5672부대 부사관들도 와서 봉사해 주었다. 색동 어머니와도 연계하여 진짜 교육 기관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노인학교를 운영하였다.
어느새 허삼천도 시내에서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어서 자신도 적이 놀랐다. 명함에도 직업 두 개를 나란히 박아 다녔다. 중학교 교감과 노인대학장…. 명함에는 허삼천이란 이름 뒤에 허실(虛實)이란 별명을 하나 적었더니, 받는 사람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이게 ‘허허실 교수’의 탄생 비밀이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는 빠뜨릴 수 없지. 지역사회 인사들이 참가하는 야유회가 있었다. 사회자는 저 유명한 MBC 라디오의 한병창 아나운서. 장기 자랑 순서인데, 커다란 키에 야윈 몸매를 한 젊은 삼천 아니 허삼천 교감을 한병창 아나운서가 좀 얕잡아 보는 눈치다. 한병창이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나, 대학 학장이오.”
“와 몰라 뵈었습니다. 어느 대학이신가요?”
“노인대학입니다.”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그 덕분인지 그날 야유회는 정말 신나고 기뻤을 수밖에. 그로부터 한병창과 허삼천은 정말 가까운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노인학교의 위치가 게리멘더링인가 하는 선거구 조정에 걸려 있어서, 두 국회의원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실명을 밝히겠다. 허태열과 정형근. 둘은 부부 동반하여 부지런히 노인학교에 드나들었고말고. 마침내 학생이 넘쳐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형근 의원이 특별 교무금 1억 3천 9백 만 원으로 분교(分校)까지 하나 화금동에 세워 준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니 그 인기를 더 설명해 무엇 하랴. 경로당 2층에 올린 가건물이지만 34평 큰 공간이었다.
그 무렵 삼천의 고향 삼천포의 행정 구역 변화가 있었다. 1995년 삼천포와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된 것. 인구 10만 약간 웃도는 도시다. 때맞추어 삼천은 사천시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제법 넓은 땅도 샀다. 구태여 평수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다. 말이 산이지 나무는 별로 없는 자갈밭? 잡종지(雜種地), 그쯤하자. 어쨌든 시민들이 출향 인사 중에서 삼천의 이름을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모든 건 공군에 입대하여 사천 비행장 관제탑세 복무하고 제대한,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 이른바 승용차 추돌을 당한 것이다. ‘참척’. 말 자체가 세상에서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난 위로를 건넬지라도 부모에게는 모질기 그지없는 고문이다. 오죽하면 삼천 자신이 그 두 음절로 된 말 ‘참척(慘慽)’ 를 사전에서 아예 없애 버리자며 통탄했을까? 하나 따지고 보면 삼천의 끝없는 과욕이나 지나친 성취감이 그 원인인지 모른다. 뼈저린 반성을 한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랴!
해서 삼천은 부산에서의 모든 걸 처분하고 귀향을 하는 것이다. 삼천포에서 떠나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사천(泗川)으로….교장으로 승진한 뒤 몇 년 되었지만, 4년 남은 정년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넓은 땅이 있으니, 거기에 모든 걸 묻으려 한다. 엄마와 삼천 내외, 중학교 교사로 있는 딸과 사위 그 사이에 난 2남 1녀의 외손자 등이다. 딸 내외의 장래? 교육 가족은 어디서든 환영받는다는 게 삼천의 생각이니 뭐 어찌되겠지.
복지 회관을 크게 짓고, 노인학교나 하나 부설하여 기부 체납했으면 한다. 5층쯤이면 될 게다. 물론 살림집도 넣는다. 삼천에게는 눈감을 때까지 은인인 처남 이순달(몸이 정말 아픈데) 형님(처남)이 따라오는 게 은혜라 여겨진다. 삼천의 장인은 장모는 여든이 넘었지만 정정하니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어촌 계장의 부인이 죽자 그에게 후처로 들어간 누나는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지만, 잘산다. 걱정 없다.
아버지가 생각나면 엄마와 '클레멘타인'을 부른다. 아들이 꿈에서라도 나타날 땐 자다가도 일어나 Oh Danny Boy를 입에 올릴 것이다. 가끔은 그 틈바구니에 '아리랑'을 섞는다. 어떤가?
90장
<창작 후기>
* 은방울 자매 오숙남을 몇 번 만났다. 그의 부군도-.아직 기사화하지 못했다. 노래 배경에 대해 그가 아는 바를 들었으면 좋겠다. '마포종점' 은방울 자매는 출발 당시의 멤버가 아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현재 오숙남은 1947년생이고 원로 가수다. 손자 황혜린이 트로트 가수로 한참 이름을 날린다.
* Oh Danny Boy에 얽힌 사연이 많다. 오래 전 부산 경남여고 신진숙(부산시 교위 의장 지냄) 교장선생님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했다. 한데 어머니 회에서 축하 공연을 하는데, '아 목동아'를 부르는 게 아닌가? 물론 우리말 가사이고, 提唱이었다.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노래가 스승의 정년퇴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아직도 그 의문은 현재진행형
* 이름을 밝히기 무엇한 저명人士가 있다. 그는 지금도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강연을 하는 줄 안다. 강의 직전 청중의 지루함을 달래느라고 기자가 노래를 부른 게 일곱 번이다. Oh Danny Boy를 들은 그와 청중들의 반응이 묘했다. 그가 하는 말이 Oh Danny Boy는 장송곡이라는 거다.
* 부산시 교육감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는 후배 교장이 있었다. '서면 영광도서'에서였다. 거기서도 나는 이걸 열창했다. 장송곡이어서 낙선으로 이어졌을까? 어제도 통화를 했는데, 미안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았다. 삼천의 생각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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