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따시고 배부른 게 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를 말하죠.
이런 시대나 세상을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통치자는 성군으로 칭송받는 임금이었습니다. 태평성대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통치하던 요순시대(堯舜時代)와 동의어로 사용되곤 합니다.
요임금은 어질고 지혜로웠으며 또한 매우 검소하여 띠집에서 채소국으로 끼니를 때우
면서도 백성들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요임금이 자신의 통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얻기 위해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순행합니다. 요임금이 순행 중,
어느 마을에 가니 한 노인이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손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면서 행복한 노래를 부릅니다.
배를 두드리고 땅을 구르며 흥겨워한다는 뜻의 ‘고복격양(鼓腹擊壤)’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격양가(擊壤歌)〉라고
합니다. 마을 노인이 불렀다는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日出而作[(일출이작)
해가 뜨면 일하고
日入而息[(일입이식)
해가 지면 쉬네
耕田而食[(경전이식)
밭을 갈아 먹고
鑿井而飮[(착정이음)
우물을 파서 마시니
帝力何有于我哉[(제력하유우아재)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만족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만족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착안해서인지 ‘노자(老子)’는 리더의
단계 중에서 최상의 단계를 ‘太上下知有之[(태상하지유지) :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임금이 존재한다는 것만 아는 것이다]’고 규정했습니다. 노자는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임금의 존재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 듯합니다.
혜택을 받을 때는 존경하고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두려워하는 그런 임금보다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임금이 좋다는 것이 백성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존경할 만한 임금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임금의 존재는 몰라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 백성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생각을 알았기에 요임금은 태평성대를
열 수 있었나 봅니다.
요임금은 후계자를 물색합니다.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추천됩니다. ‘허유’는 품행이나
지혜가 탁월하기로 소문난 현인(賢人)이었습니다. 요임금은 허유에게 왕위를 맡아 주기를
간청합니다. 허유는 이를 거절하죠. 오히려 세속의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며 흘러가는
계곡물에 귀를 씻었습니다. 소를 몰고 오던 ‘소부(巢父)’라는 사람이 허유를 나무랍니다.
영수(潁水)의 깨끗한 물에 귀를 씻어 물이 더러워졌으니 소에게도 먹일 수 없다고 하면서
상류에서 물을 먹였다고 합니다. 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허유세이(許由洗耳)’와 소부가
소를 옮겼다는 ‘소부천우(巢父遷牛)’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허유와 소부는 왕위보다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삶을 최상의 행복으로 본 것입니다.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 고복격양의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編)’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장자(莊子)가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보낸 두 신하가 와서 ‘나라의 일을
맡기고 싶다’는 왕의 뜻을 장자에게 전합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죽은 지 삼천 년 된 신령스런 거북이가 있는데, 왕께선 그것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제단에 모신답니다. 이 거북은 죽어서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그러자 두 신하가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었을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장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돌아들 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소.”
장자는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마음의 생명인 영혼의 자유를
잃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이 장자의 행복관입니다. 고복격양의 다른 이름이지요.
물론 장자의 관점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장자의 관점이 일리(一理)가 있다는
겁니다. 왕을 해야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이 있고, 허유(許由) 소부(巢父), 장자(莊子)처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이 있는 법이죠. 왕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자연의 삶이 괴로움[苦]의 삶이 될 것이고, 자연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왕의 자리가
괴로움[苦]의 삶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등 따시고 배부른 고복
격양의 행복이 아니겠는지요.
행복의 조건으로 돈, 건강, 시간, 재능 등을 들 수 있겠지요. 드물게는 독서, 음악감상,
인문학적 사유 등도 들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행복의 조건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등에
따라서 행복의 조건이 달라지니까요.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주인공 ‘아름이’는 빠른 속도로 신체나이가 늙어가는 조로증(早老症)을 앓고 있습니다.
열일곱 살 아름이는 마음은 17세이지만 신체나이가 80세쯤 되었습니다. ‘아름이’는
동갑의 여학생인 ‘서하’를 메일을 통해 알게 됩니다. 메일을 주고받으며 사랑이 무르익어
갑니다. ‘언제 가장 살고 싶어지냐?’고 서하가 묻습니다.
‘푸른 하늘의 하얀 뭉개구름을 볼 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 ‘맑은 날
오후,엄마와 함께 햇빛을 머금은 포근한 빨래 냄새를 맡을 때’, ‘저녁 무렵, 골목길에서
밥 먹으라고 손주를 부르는 할머니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초승달이 뜬 초저녁에
아빠와 함께 초롱초롱한 금성을 볼 때’ 등이라고 답 메일을 보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을 10배속 빠르기로 진행해 본다면 아름이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름이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재봉 시인은
‘행복’이란 시를 우리에게 선물했습니다.
특별한 것을 찾지 마세요
행복은 천국처럼 커다랗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것에 있습니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다가오듯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듯
일부러 찾지 않아도 행복은
손에 닿는 곳에 있습니다
-이재봉, ‘행복’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뜻이지요. 어떤 대상이 더럽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깨끗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요임금이 마을의 노인에게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
했다면 그 노인은 행복했을까요?
자기 삶에 대한 간섭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편(存心篇)’에 ‘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인무백세인 왕작천년계) -
사람들이 백년을 살지 못하면서, 부질없이 천 년의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란 영화의 주인공 ‘아름이’가 그토록 소망하던 것을 우리는 늘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행복이 아니겠는지요?
나태주 시인은 ‘행복’이란 시에서 행복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행복’
누구나 집은 있습니다. 집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집은 있습니다.
행복이 집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공부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는 겁니다.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고,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부를 노래가 있다는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 등 따시고 배부른 고복격양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그리고 이런 고복격양의 행복관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지 않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