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숭원재 앞에서의 遭遇(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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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연산 입향조 김약채 사당 논산 숭원재
1400년(정종 2) 문하부좌산기(門下府左散騎)로 있을 때에는 훈친(勳親)들에게 사병을 허여하는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자고 역설하여 단행하게 하였으며 그 뒤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404년(태종 4) 충청도도관찰출척사(忠淸道都觀察黜陟使)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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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70이 되어 죽을 때 되니 조상이 생각나는가?
특히 어려서- 중학교때까지 명절때 되어 성묘 다니면
연산 고정터 중시조 할아버지 묘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다는 소리는 귀에 딱지 앉을 만큼 들었던 터라 늙으니 그 생각나서 일삼아 찾아 보자고 하여 찾아 갔다가 만난 사람들.
중년의 남성 4~5인과 젊은 남녀 4~5인 합해 10여인의 일행이 무슨 답사를 한다고 떼져 다니다가 나의 내외와 마주치니 하는 말이 여기 광산김씨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안내를 해주겠냐길래 응했다가 졸지에 가이드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분, 김약채가 처음 이곳 연산면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한 이야기 중에 그가 관찰사가 되었을 때 치소(治所)는 청주였으며 관내를 순시하다 계룡산 남서쪽 연산 땅에 들어서 보니 산세가 순하고 토지가 넓고 비옥하며 인심 또한 순하여 고정리 거정마을이 마음이 들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가문에 전해오고 있으며 '광산김씨 유향'에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공민왕 때의 홍건적난이 평정된 뒤 임금의 파천(播遷)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원송수(元 松壽)의 딸인 원주원씨와 혼인을 하여 낳은 자식 중 첫째 검열공 김문, 셋째 총제공 김한, 넷째 퇴촌공 김열은 큰 파를 이뤘다고 합니다.[출처] [논산여행] 광산김씨 연산 입향조 김약채 사당 논산 숭원재|작성자 논산시
나는 이분의 직계 자손으로 1441년(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중시조 김국광할아버지로 세조의 계유정란을 지지하여 3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가 성종 때 병조판서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찬성이 되었으며, 그 후 예종 때 우의정, 성종 때 좌의정에 오르면서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분이 광산김씨들이 말하는 의정공 할아버지로 그 다음 후손 대의 순조 때의 김갑생 할아버지의 통덕랑공파 직계라고 말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세자의 스승으로 본처가 끌려가 후처인 홍씨 서녀 할머니 후손으로 서자 자손이라고 논산 종친회에서는 우리 연산 김씨를 상종 안하였다고 말하였더니 광김 종친회 사무국장이 전화에서
요새 때가 어느때인데 그런 서얼 차별을 말하느냐고 .....
여기까지 말한 후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정도전이 사농공상을 건국 후의 질서로 삼으면서 조선은 시작부터 이미 망한 나라였던 것을?
조선 건국 년도 1392년의 1400년대에 영국, 프랑스는 이미 중상주의 정책을 폈는데....
나는 1700년대에 나온 중상주의 정책을 300년 사기쳐서 말했다.
상공업을 천시하며 오로지 농업으로만 골인한 조선의 말로는 일본 식민지 아니냐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성군이라는 세종의 치명적인 종모법.
아버지 태종이 거세게 밀어 부쳐 강압적으로 시행한 從夫(종부)법을 신하들의 앙앙, 악악거리
는 불평거리는 소리에 져서 改惡(개악)한 종모從母법.
이는 아무리 세종이 성군이고 별 업적이 많아도 공적 모두를 가려버려 빛을 잃게 만드는 치명타 악법인 종모從母법.
여노비+ 남 양반,양민, 상놈에서 나오는 자식이
종부법에서는 양민, 종모법에서는 노비이니
양반들은 자기 노비녀와 상간해서 나오는 자식은 모두 노비이니 노비는 매매 가능한 재산이라 노비녀와 상간해서 열심히 재산 불리기를 하니 조선 말기에 가면 국방과 세무 부담하는 양민의 숫자는 20%도 안되니 가난한 나라가 되버리니,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국력을 약화시킨 조선만 남았으니 일본 아니라 어느 나라에게 망해도 이상하지 않는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만든 두 악법.
이 둘이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국력을 약화시켜 스스로 망하는 길로 접어들게한 두 악법.
이는 아무리 칭송하는 성군이라는 세종이지만 사려깊지 못한 병신짓으로 말기 고종 때에 가면,
건국 초기 노비 비율이 전 국민의 10%도 안되었던 노비가 80%로 늘어 났으니 500년동안 노비만 새끼쳐 놨다.
재정을 튼실히하여 이룰 부국강병의 핵심인 납세부담지는 종부법의 양민이 아닌
납세 부담없는 종모법의 핵심인 노비만 새끼쳐 놨으니
,
안 망하는게 이상하지 않는가?
이렇게 세금 못 거두는 나라가 되어버리니,
뭘 할려고 해도 재정이 형편 없으니 뭐를 할 수 있어야지?!
군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무장시키는 것이 모두 돈이니,
군함은 겨우 미스비시의 중고 배 광무호 한척 겨우 사고 탱크고 비행기고 엄두가 나겠는가?
돈 먹는 하마가 군대인데.....
또 돈 먹는 하마가 soc설비이고 공업단지이고 기술도 ....
년간 사업 소득세 2000만원여를 납부하던 나도 벌었으면 그만큼 내야지 하는 납세 자부심은 국가가 있어야 나도 사업하니까인데,
이 양반이라는 놈들은 권리만 있고 납세와 국방의 의무는 없는 기형적 국가 통치 층이니,
어찌 안망하고 배기랴?!
일본놈들 탓 할 수는 없기만 하다.
첫댓글 용무아저씨는 무슨파여?
나는 공안공파 종손과는 촌수로 10촌일껴
위 족보를 찍은 사진의 중간 부분 [판군기감사공파] 옆의 의정공파의 옆칸[후손] 첨추공파의 옆 칸중[후손]의 맨아래
통덕랑공파 에서 통닥랑공파임.
그런데 이 [판군기감사공파]부터는 조선 시대의 파이고,
십여세대 위의 파가 고려시대의 양간공파로 갈라져 나온후 [판군기감사공파]로 후계되었습니다.
http://www.kwangsankim.or.kr/ 광산김씨 대종회에서 공안공파를 찾아도 안나오는데 공안공파의 위아래를 알려줘야 찾겠는데....
1시간을 대종회 홈피에서 헤메이다 찾아낸 공안공파는 김약채 관찰사공을 달리 부르는 말이 17세 [판군기감사공파]이고 그 장손이 의정공파 22세손의 아우로서 공안공파인것을 확인해 사진 찍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