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출신 李鐘澤씨의 딸,
李春美(都はるみ미야코 하루미)는 美空ひばり(미소라 히바리)와 함께 일본 여성 엔카의 쌍두마차이다.
李春美(都はるみ미야코 하루미) さん,
한국 사람도 아닌 일본 사람도 아닌 운명적인 삶과 설움은 마음속에 얼마나 고독한 외로움과 슬픔으로 응어리져 쌓였을지,,, 동시대를 산 향우로서 한없는 연민의 정 감출 길 없어 마음 아파 하오니다.
34세에 돌연 은퇴를 선언해야만 했던 그 아픔은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서 그 누가 제대로 알아나 줄까요.
끝내 이루지 못한 조국 공연의 꿈,
그 한은 어이하셨을지요...
옹색한 세상 사람들의 비좁은 마음을 님의 향우는 원망하면서
부디 당신의 세상에서 자유와 평화,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1963年 15세에 第14回 콜롬비아 全国歌謡 콩쿠르 우승하여 . 1964년 16세에《곤란해요 (困ることヨ)》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발표한 《아가씨 동백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恋の花》이 일본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일본 가요계를 대표하는 대 스타가 되었다.
1984년 '보통의 아줌마가 되고싶다.(普通のおばさんになりたい。)'는 말을 남기고
NHK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나, 1987년 음악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89년에는 일본에서 데뷔한 김연자의 곡을 프로듀싱 하는 등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989년 NHK 홍백가합전을 통해 가수로 복귀하여 지금에 이른다.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인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에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총 29회 출연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NHK 홍백가합전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은
1984년 제 35회 NHK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미야코 하루미가 눈물로 불렀던 노래 '부부 고갯길(夫婦坂)'이 방송되던 시점의 88.4%라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1980년 '제22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가창상 수상작
大阪しぐれ
(오사카 시ㅇ구레; 오사카 가을비)
미야코 하루미의 82번째 싱글 곡; 발매 : 1980년 2월 1일
작사 : 吉岡治(요시오카 오사무) 작곡 : 市川昭介(이치카와 쇼스케) 편곡 : 斉藤恒 夫(사이토 츠네오).
80~81 밀리언 셀러 곡.
4
1.
히토리데 이키테쿠난테 데키나이토
ひとりで 生きてくなんて できないと
혼자서 살아가는 건 할 수 없다고
나이테 수가레바 네옹가 네옹가 시미루
泣いてすがれば ネオンが ネオンがしみる
울면서 매달리면 네온이 네온이 젖어
기타노 신지와 오모이데 바카리
北の新地は 思い出ばかり
키타 신치는 추억뿐이죠
아메 모요우유메모 누레마수
雨もよう 夢もぬれます
비가 오려나 꿈도 젖어요
아아 오오사카시ㅇ구레
ああ 大阪しぐれ
아아 오오사카 가을비
2.
히토츠야 후타츠쟈나이노 후루기즈와
ひとつや ふたつじゃないの ふるきずは
한 두가지가 아니에요 지난날의 상처는
우와사 나미키노 도오지마 도오지마 수즈메
うわさなみきの 堂島 堂島すずめ
뜬소문 가로수에 도오지마 도오지마 수다쟁이
곤나 와타시데 이이나라 아게루 나니모카모
こんな私で いいならあげる なにもかも
이런 저라도 좋으시다면 드릴게요 무엇이든지
다이테 구다사이
抱いてください
안아주세요
아아 오오사카시ㅇ구레
ああ 大阪しぐれ
아아 오오사카 가을비
3.
시아와세 소레도모 이마와후시아와세
しあわせ それとも いまは ふしあわせ
행복한가요 아님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가요
욧테 아나타와 소네자키 소네자키 아타리
よってあなたは 曾根崎 曾根崎あたり
취해서 당신은 소네자키 소네자키 근처에
츠쿠시 타리나이 와타시가 와루이
つくし足りない 私がわるい
잘 받들지 못한 제가 나빠요
아노 히토오 아메요 가에시테
あのひとを 雨よかえして
그 사람을 비여 돌려다오
아아 오오사카시ㅇ구레
ああ 大阪しぐれ
아아 오오사카 가을비
첫댓글 성주출신..?
향우.!!
생각이 남 다르게 느낌이 옵니다
그래도
일본에선 인기가 많았던 최고의 가수였군요
얼굴도 이뿌고??
김연자와 활동하였군요
아무튼
좋은 음악정보 듣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교토 태생 이춘미는 일본 가수이지
아무도 한국 가수라고는 하지 않겠지요.
최고의 가수임에도
아버지가 한국인이니
어떤 가요잡지 기록에는
일본인이 아니라고 그 이름을 빼기도 하더군요.
국수주의자들의 방해 등 등
이런 저런 차별을 박차고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니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신의 은총과 가호가 있기를 빈답니다..
혼열인
그때는
그런 시선이었으나
지금은 다문화
세계적으로 나라를 알리는 활동을 하겠지요.
우수한 재능과
우수한 DNA로
일제시대 일본 본토니까
조선인도 숨기고 산 사람도 있는데
일단 조선인이나 2세는
사실 천덕구러기였지요.
당시
일본이 일찍 개방정책을 편 나라지만
종교와 종족 문제는 상당히 국수주의적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하루미는
일본인으로 살았지요
조선인의 딸일뿐...
일본여성의 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에서 발 붙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 든 생활!
안보도 비디오 이지요.
특히 일본은 한국과 안 좋은 관계는
불문률로 돼 있죠, 인종차별은 한국인에겐 심했죠.
다른 나라보다 유독 일본은 다들 아시다 시피 ~~~
여행은 가겠지만 ( 6번은 다녀 왔답니다. )
가서 살고 싶지 않은 나라 중 하나랍니다. ㅎ
좋아요님 께선 오늘도 고향 생각 하시면서
글을 쓰셨군요. 잘 읽었네요 .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하루미가 향우인 셈이라
성주에나 한번 가 봤을까요.
한국 공연은 또 한국이 거부해서....
하루미의 어머니는 일본여성인데
일본여자가 자기 딸은 일본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데...
하루미도 일본 사람으로 살았는데
조선아버지 딸이라고...
그렇게나 차별 받고 천시당하고...
일본 순종이 아니면 동서양 구분없이 천시했어요.
일본의 자연환경은 지진 아니면 참 좋지요.
바람온냐는
일본통이시네요.ㅎ
이춘미... 한국에서도 공연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창나인인 34세에 은퇴....
가슴에 어린 한이 얼마나 컸을까?
그녀의 목소리에 그런 호소가 깔려 있는듯 합니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우리 나라도 정치가 지나친 반일로
국민감정만 냅다 더 사납게 만든 점도 없지 않지요.
지금까지도...
특히 재일교포를 따 안지는 못해도
받아주고 안아는 주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북한 한테 선수를 빼앗기고....
당시야 여력이 없었다지만 노력을 안 했군요 지나고 보니....
늘 건강하세요.
일본 최고의 가수임에도 한국인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군요
얼마나 서러웠으면 한창 나이에 은퇴
했을까요
하루미 아버지가 동향인이라
연민이 더하신듯요
조아요님은 애향심이 남다르신것 같아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