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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당 스크랩 밀리터리 갑옷의 종류, 역사, 무게 계산, 방어력
제국의명장 추천 0 조회 3,006 13.01.09 19:46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인터넷을 조사하다 서양 갑옷의 역사에 대한 글을 읽었다. 물론 서양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히는 서유럽이며 그리스/로마와 게르만과 노르만 족의 역사이다. 동유럽의 역사나 갑옷에 대해서는 또 모른다. 동양 갑옷 역사를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외에 아랍이나 중앙 아시아 초원 민족의 갑옷도 역사를 알긴 어려울 것이다. 갑옷도 옷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다양하여 분류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고, 기록이나 기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역사를 정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갑옷이 존재하던 시대에 어떤 전쟁이 있었는지 함께 정리해야 이해가 쉽다. 또한 공격용 무기가 어떤 것이 있었는지 함께 정리하는 것이 맞겠지! 그리고 동시대의 상대편의 갑옷도 함께 비교해야 좋을 것이다. 또한 기준이 되는 우리 나라의 갑옷 역사도 함께 비교해야 옳다. 또한 당대의 전술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 그래서 대략 정리하여 본다. 일단 갑옷의 무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갑옷의 무게를 대략 계산해 본다. 측정이 아닌 계산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해 볼 수 있다. 여러 갑옷의 무게를 직접 측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직접 측정을 원한다면 100원짜리 동전을 모아서 자신의 몸에 붙여 보아라.

 

 

 

 
위의 그림과 같이 계산하면 대략 전신 갑옷의 경우 두께 1mm로 하였을 때, 약 10~20kg정도 된다. 갑옷의 두께가 1mm에서 3mm로 다양하고, 청동이냐 철이냐에 따라서 무게가 다를 것이다. 또한 계산 오차에 의해서 약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무게면 백병전을 하기에는 그렇게 무거운 무게는 아니다. 계산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다. 2mm의 두께로 하면 2배로 무게가 증가하는데 이 정도면 무거운 무게다. 40kg에 가깝게 된다. 전신 갑옷은 주로 말을 탄 기사들이 하였던 것이고 말의 힘으로 돌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거운 무게가 가능하다. 이 무게가 엄청 무거울 것 같지만 보통 육군 보병 군장 정도 된다. 단순 비교는 어렵다. 팔과 다리에 무게가 증가 되는 갑옷은 더 움직이기 어렵다. 과거 동양에서도 대략 보병의 갑옷(투구와 흉갑)과 무기(석궁), 개인 보급품(식량) 등을 합하면 20kg 무게는 된다. 석궁이 소총처럼 사용되던 때도 있었나 보다. 즉, 보병 행군을 할 수 있는 무게다. 물론 말도 마갑을 착용하기 때문에 말 입장에서는 사람 몸무게 약 80kg에 갑옷 약 20kg에 마갑까지 합하면 거의 100kg ~ 200kg 사이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된다. 말을 탄 기사가 마갑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말은 쉽게 죽을 것이다. 그러면 말을 탄 기사는 뭐가 되겠는가! 땅에 떨어져 무거운 갑옷을 입고 도망도 가지 못 하여 사로 잡히고 말 것이다. 20~40kg 군장으로 구보를 하면 멀리 못 간다. 갑옷의 무게가 40kg이라면 거의 한계라고 보면 된다. 2mm~3mm정도가 되겠다. 고로 전신 갑옷은 돌격 기사들이 착용한 것이며 마갑도 함께 착용 한 것으로 보겠다. 보병들인 경우는 투구와 흉갑만 착용하였을 것이라고 보면 약 5kg 미만의 무게가 된다. 물론 여기에 방패를 들게 되면 약 10kg정도 될 것이다. 철을 어떻게 강하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두께가 달라질 것이나 대략 1mm를 최소로 보면 지금까지 계산과 같다. 참고로 현대 보병의 소총 무게가 약 5kg정도 된다. 물 1리터가 1kg이다. 5리터 물통을 지고 백병전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물론 무기의 무게는 뺀 것이다. 그 무게만큼 방어력이 있다면 좋을 것인데...(^^) 청동이 철보다는 더 무겁다. 그리고 철은 매우 흔하여 전군을 무장시킬 수 있지만, 청동은 귀한 편이라 왕, 귀족, 전사, 무사 등 전문적인 군인들만 입었다. 동서양 모두 모든 병사들이 갑옷으로 무장했다고 생각하지 말자. 왕, 귀족, 전사/기사/용병 등 직업 군인들만 입었다.

 

 

 

 

 

 

 

갑옷의 패션이 너무 다양하여 종류를 나누면 무척 많겠으나 쇠를 어떻게 이어 붙였냐로 보면 4가지 종류로 나뉜다. 판갑은 몸의 형상을 따라 하나의 철판으로 만든 것으로, 장점이라고 하면, 외부에서 압력이나 충격이 가해졌을 때, 갑옷이 거기에 버틸 강도가 되면 그 속의 몸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말에 깔린 경우 판갑 형태만 몸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말에 깔리면 빠져 나오지 못 한다. 대신 송곳과 같은 화살이나 창에는 쉽게 뚫린다. 충격을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만들기도 어렵고, 방어력도 낮은 것이 된다. 물론 두껍게 만들면 되는데 무게가 증가한다. 판갑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처음에는 부드러워야 몸에 맞게 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중에 형태가 완성되면 단단하게 변해야 하는데 그런 기술이 없다면 쉽겠는가? 유럽에서 열처리 기술을 개발하여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되어서 판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차라리 처음부터 단단하게 만든 쇳조각을 사람 몸에 맞게 이어 붙이는 것이 쉽겠다. 이런 것을 찰갑이라고 부른다. 현대 스프링과 같은 재질의 강철판으로 판갑을 만든다면 가장 좋은 갑옷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철로서는 이 정도가 가장 이상적인 강도를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스프링 재질의 강철은 매우 강한 철이다. 판갑은 몸에 맞게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드러운 천과 같이 휘어야 하지만, 나중에는 스프링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이것을 열처리로 했다고 한다. 스프링 재질의 갑옷이라면 스프링처럼 충격을 흡수 했다가 튕겨내게 된다. 만들 수 있는 가장 강한 갑옷이 될 것이다. 물론 티타늄이나 탄소섬유 같은 재료를 사용하면 또 다르겠지만!(^^) 그런데 주철은 중국에서 황토를 이용해서 제련하는 방법으로 먼저 개발한 것으로 되어 있고, 서양의 철 기술은 단조(두드리기) 방법이다. 즉, 두드려서 철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강도를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두드려서 철의 강도를 조절하는 방법은 주철보다 생산성이 낮다.

 

찰갑인지 편갑인지 하는 것은 작은 쇳조각을 사슬처럼 이어 붙인 것이다. 장점이라고 하면 판갑보다는 유연하여 몸이 편하다는 것이고, 내부에 입은 두꺼운 옷이 완충 역할을 해서 외부에서 오는 화살을 튕겨 내기 좋다는 것이다. 단점은 외부에서 강한 타격을 가하면 그대로 몸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판갑과 달리 공격이 몸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특징 때문에 충격을 흡수하는 것이다. 물론 말에 압사 당하는 경우 질식사를 피할 수가 없다. 찰갑은 조각 쇠를 사슬처럼 이어 붙여 몸의 곡면을 따라 가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활동에 그렇게 편한 옷은 아니다. 허리를 돌리고 굽힐 수 있어야 편하다.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둥근 동전 같은 단추를 서로 연결하여 옷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활동에 편한 옷은 아니다. 직접 만들어 입어 보면 느낄 것이다. 쇳조각을 서로 연결하는 방법과 천이나 가죽에 못(리벳)으로 고정하는 방법이 있다.

 

 

 

 

비늘/미늘 갑옷은 찰갑과 매우 비슷하다. 한자로는 린갑이라고 부르더라. 물고기 비늘이나 용의 비늘을 닮게 만든 것이다. 역시 찰갑과 비슷한 장점을 제공한다. 이것은 찰갑보다는 활동에 편할 것이다. 쇠와 쇠를 사슬처럼 연결한 것이 아니라 속의 옷이나 가죽에 쇠를 반만 연결한 형태이다. 고로 허리를 돌리거나 굽히기 쉽다. 찰갑, 비늘갑옷은 주로 기마병들이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갑옷이다. 작은 쇳조각을 대량 생산해서 이어 붙이면 되기 때문에 제조도 쉬웠을 것 같다. 또한 작은 쇳조각을 강도 높게 제작하기도 쉽다. 단지 약점이 있다면 비늘 틈을 거슬러 찌르면 뚫린다는 것이다. 비늘 갑옷과 찰갑은 약간 다른데 대충 비슷하다. 같은 것으로 취급하자! 이것은 둥근 동전 같은 단추를 반만 옷에 연결해서 붙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직접 만들어 입어 보면 활동이 편함을 느낄 것이다.

 

사슬 갑옷은 동그란 쇠사슬을 엮은 것으로 역시 입기 편하고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더운 지방에서 입기 좋다. 하지만 방어력을 보면 최악일 것이다. 그냥 찌르면 뚫린다. 화살이나 창 끝이 살에 닿기 전에 먼저 사슬의 쇠가 살에 닿는다. 이 갑옷도 안에 충격 흡수 솜옷을 추가로 입어야 한다. 또한 만들기 가장 어려운 갑옷일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갑옷이다. 둥근 동전 같은 단추 대신에 고리를 연결하였다고 보면 된다. 대충 이런 종류의 갑옷이 있다. 판갑과 쇠사슬 갑옷은 약간 더운 서양이나 아랍에서 주로 입었고, 찰갑이나 비늘 갑옷은 약간 추운 동양에서 주로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슬 갑옷처럼 입기 편하며 강력한 판갑처럼 단단하게 보호하는 갑옷을 만들어 입고 싶을 것이나 쉽지 않아서 그 중간 형태를 만든 것이 찰갑/편갑/미늘갑/비늘갑이라고 보면 되겠다. 나중에 강철 기술이 발달하면 판갑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대에는 날씨가 더웠는데 한 반도는 밀림 비슷하고, 만주는 지금 한반도와 비슷하다. 지중해 로마나 그리스는 바지를 입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앙 아시아 초원은 의외로 살기 좋았던 곳일 수도 있다.

 

두정갑이라고 부르는 것은 철판을 옷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못(리벳)으로 천이나 가죽과 그 사이의 철판을 함께 고정한 것이다. 주로 북방 계통인 몽고, 청나라가 조선의 두정갑과 디자인이 비슷한 것으로 봐서 북방 계통의 갑옷이다. 이런 갑옷이 나타난 것은 날씨가 추워진 시대이다. 원래 날씨가 따뜻한 삼국 시대에 입던 갑옷은 일본의 찰갑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북방 스타일로 바뀐 것 같다. 이 두정갑은 요즘의 방탄 조끼와 비슷한 구성이다. 총알을 잡기 위한 강력한 섬유로 된 천이 밖에 있고 마지막에 철판이 휘면서 총탄을 정지 시킨다. 여하튼 혹시 갑옷 만들어 보고 싶다면 철사로 사슬 갑옷을 만들고, 알루미늄 조각을 구해서 오리면 찰갑이나 비늘 갑옷 같은 것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물론 판갑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루미늄이 가볍지만 약해서, 쉽게 휘어 버리겠지만 모양은 예쁠 것이다. 아니면 더 값 싸게 플라스틱을 이용해서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기타 고대 사용하던 천이 있는데, 뽕 잎을 먹는 누에라는 벌레가 번데기가 되기 위해 뽑아내는 실을 비단이라고 한다. 아주 질긴 실이다. 그리고 식물인 솜에서 뽑아낸 실을 면이라고 한다. 식물성 질긴 섬유이다. 나중에 화학이 발달해서 만든 섬유가 나일론인데 역시 질기다. 그리고 기타 식물 섬유를 그대로 이용한 섬유들도 있다. 마(대마초)에서 뽑은 섬유는 그대로 식물의 몸통에서 뽑은 섬유이다. 대나무 줄기를 엮어서 바구니를 만드는데, 이 방법으로 갑옷을 만들 수도 있다. 즉, 섬유를 엮어 두껍게 하면 역시 화살에 대한 방탄 효과도 있고, 칼로 베는 것에 대한 저항력도 있다. 천연 동물 피부인 가죽을 적당히 말려서 딱딱한 플라스틱처럼 만들어 입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동식물성 갑옷을 플라스틱 갑옷이라고 하자! 왜냐하면 모두 고분자 탄소 사슬로 이루어진 섬유로 되어 있어서 탄소 섬유와 같은 계통이다. 철보다 가볍지만 적당한 강도를 지닌다. 그래서 보조 갑옷으로 속에 많이 입었다. 요즘의 방탄 조끼들은 이런 재료를 사용한다.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절에도 갑옷을 해 입었다. 물론 그 이전 석기 시대도 가죽 갑옷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역사는 불분명하지만 최초의 문명은 지금의 이라크 지방의 수메르였다. 이 수메르인들은 유럽 백인 계열인 아리안 인종도 아니고, 아랍 셈족(노아의 후손들) 계열의 인종도 아니다. 동방에서 간 인종인 것으로 보인다. 도시, 군대, 바퀴(전차/마차), 농업, 문자, 청동기 등을 사용했었다. 주변 민족들은 여기에 비하면 석기 시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최초의 전차(당나귀 같은 말이 끄는 작은 바퀴의 마차)를 타고 전쟁을 했었는데 재미 있는 점은 고조선의 갑옷과 닮은 갑옷을 입었다는 점이다. 동그란 청동 단추 같은 것을 부착한 형태이다. 고조선의 단군이 약 BC 2000년 쯤에 나타나고 동쪽 문명의 청동기가 이 시점에 시작되기 때문에 서쪽의 수메르 문명보다는 동쪽이 많이 늦다. 동서 교류가 있었다면 단군 쪽이 수메르의 문명을 받아 간 것이 된다. 고조선이 생길 때 서쪽에서는 히타이트가 건국 되는데 이들은 최초의 철기 무장을 한 사람들이다. 서양에선 철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동양에선 청동기 시대였다. 유물을 보면 히타이트는 찰갑이나 비늘 갑옷 형태의 갑옷을 이미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는 유럽 백인계 인종인 것으로 보인다. 유럽 백인계 인종을 아리안 인종이라고 하며, 언어적으로는 인도 유럽 어족이라고 부르며, 현재의 유럽에서 이란, 인도까지 퍼진 인종이다. 원래 터키 지방도 이들이 들어가 살았으나 동방에서 온 투르크 족에 의해서 혼혈이 된다. 지도를 보면 북쪽은 유럽형 백인들이 침투한 곳이고 남쪽은 아랍계 백인들이 살던 곳이다. 수메르는 이 둘과 다른 인종이다. 이 지역에 최초 문명을 가져온 동방의 어느 민족이다. 여하튼 아리안 민족, 이들은 흑해 넘어 초원에 살았는데 무슨 이유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증명하긴 어려우나 동부 초원 유목민들의 압박이 있지 않았을까? 기후 변화라든가! 그런데 BC1000 쯤에 지중해에 해양민족이라는 알 수 없는 종족에 의해서 지중해 문명이 모두 파괴된다. 아마도 이 때가 모세가 탈출할 수 있었던 때일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알기 어렵다. 히타이트는 이들에 의해서 망했다. 이집트는 이들을 막아 냈다. 그래서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 로마는 이 사건 이후 재건된 문명이다. 이 사건 이후로 유럽에 군대 개념의 전투가 나타나며,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방진 형태가 나타난다. 그 전에는 전사들의 싸움이었는데 아마도 해양 민족이 군사 기술 면에서 앞섰던 것 같다. 이 해양 민족이 히타이트보다 강했다면 엄청난 세력이다. 단순 야만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청동기 시대에 서양 갑옷은 판갑 형태인데, 동양 갑옷은 두정갑(못으로 철판 조각을 고정한 갑옷)과 비슷한 형태이다. 이런 못을 서양에선 리벳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히타이트의 철갑옷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의 우리가 아는 찰갑과 비늘 갑옷과 같은 형태다. 아무리 봐도 이런 종류의 철 갑옷 기술은 히타이트로부터 온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히타이트의 뛰어난 군사 기술이 어찌해서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왔냐는 것이다. 수메르의 갑옷은 또한 어찌해서 동쪽의 것과 비슷한 것인가? 가까운 그리스와 로마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히타이트는 기마가 아닌 전차를 사용했지만 이미 이 때 뛰어난 갑옷을 입었고, 합성궁을 사용했었다. 이 기술이 왜 서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합성궁은 그리스나 로마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사용하던 무기다. 그리스/로마는 갑옷과 방패로 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활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던 것 같다.

 

 

 


 

 

서양이라고 하면 역시 그 뿌리가 그리스와 로마이다. 로마는 정복 국가였고, 진짜 유럽 문명의 시작은 그리스라고 해야 하겠다. 지중해 항해를 통해 유럽에 문명을 전파한 것은 원래 그리스이다. 아리안 민족 이동 전에는 지중해 인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안 민족 이동 후 유럽은 백인계 인종으로 바뀌었고, 지중해 해양 민족의 침입 후에 그리스 문명은 다시 복구 된다. 유럽에서 암흑기라고 하면 이민족의 침입으로 문명이 혼란스럽게 되어 역사 기록이 남지 않는 바로 그런 때다. 여러 번 있었다. 바로 해양민족의 침입도 이런 시대다. 이 시대 이후의 갑옷인데, 판갑 형태의 흉갑과 방패, 정강이 보호대, 투구가 특징인 시대로 로마는 이들의 갑옷 유형을 그대로 사용한다. 원래는 전신 갑옷이었는데, 앞에서 계산 해 본 바와 같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가벼운 무장으로 변한다. 그리스 시대 그림을 보면 남자들이 불알 다 내놓고 투구, 방패, 정강이 보호대만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스타일이다. 흉갑은 가벼운 천으로 만든다. 알렉산더의 장창 방진이 활약하던 시대가 바로 이 시대다. 로마의 포에니 전쟁이 있던 시대도 바로 이 시대다. 청동은 철기보다는 무거운데 철기는 로마 제정시대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원 후의 일이 된다. 카이사르가 예수가 태어났다던 시점과 거의 비슷한 시대의 인물이다. 카이사르 이후 제정시대가 되니 기원 후의 일이다. 동양에선 진시 황제가 통일을 한 후 한 나라 때의 일이 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철 주조 기술은 세계 최초였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고조선이 망하고 3국이 시작하던 그 시점에 철기가 시작하는 것이다. 동과 서가 비슷한 시점에 철기를 사용하는 셈이 된다. 그 이전의 공화정 로마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청동 갑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는 동양에선 주 나라 춘추전국 시대에 해당될 것이다. 우린 고조선 시대이다. 그런데 로마 시대 영화에서 자주 본 판갑 형태의 청동 흉갑은 무겁고 허리가 굽혀지지 않아서 불편하다. 결국 북방 켈트족의 영향으로 사슬 갑옷을 입게 된다. 켈트족은 기마 유목 민족이었기 때문에 편한 갑옷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판갑과 찰갑의 중간 형태인 영화에 자주 나오는 바로 그 유명한 로마 갑옷을 입지만 다시 사슬 갑옷 형태로 돌아간 것 같다. 왜냐하면 몸의 방어는 방패로 하기 때문에 그리스나 로마 모두 가볍고 편한 갑옷을 입었다. 그리스는 천으로 된 흉갑을 입었고, 로마는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그리스와 로마는 보병 전술이 유명한데 이들이 청동 흉갑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판갑 형태의 흉갑이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제정 로마 시대는 우리 나라의 경우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다양한 국가들이 역사에 나타나던 그 시대이다. 철기와 기마 문화가 함께 들어오는 시대이다. 중국은 한 나라 시대이며 흉노족이 세력을 떨치던 시대다. 우리가 고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양의 갑옷은 중국 갑옷을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의 영화를 보면 병사들 복장이 찰갑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극이라는 꺾인 청동 창을 사용한다. 영화에 보면 신기하게도 중국인들은 방패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진시 황제는 석궁을 소총처럼 지급하였다. 이 시대 이후가 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 나라와 삼국의 갑옷은 비슷했을 것이다. 아마도 흉노의 갑옷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도 동방에서 전래된 비늘 갑옷이나 찰갑의 영향을 받게 된다. 로마와 적대 관계에 있던 동방의 페르시아(이란) 지역의 파르티아(기마 유목 계통)나 사산조 페르시아 등이 기마 문화의 돌격 기병을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도 전신 갑옷을 사용하게 된다. 물론 당연히 마갑도 함께 사용한다. 히타이트의 철기 유물을 보면 이들이 찰갑이나 비늘 갑옷을 입고 이집트와 전투를 했던 것으로 나타나니 그 역사가 깊은 갑옷이라고 하겠다. 이 히타이트의 철기 기술이 동방으로 전해져 한 나라와 고구려 갑옷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 같다. 로마 시대의 중장 기병도 비늘 갑옷과 마갑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의 동방의 고구려 갑옷도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단지 말을 탈 때 발을 끼우는 등자가 서양에는 없다. 찰갑과 비늘 갑옷은 매우 비슷하다. 그러니 편하게 같은 것으로 취급하자. 로마인들 입장에선 그리스 로마 계열의 갑옷이 아닌 비늘 갑옷, 찰갑, 사슬 갑옷을 외래 갑옷으로 구분한다. 사슬 갑옷은 켈트나 게르만 계통에서 영향을 받았고, 비늘 갑옷이나 찰갑은 동방에서 영향을 받았다. 로마 시대 동방에는 페르시아가 있었는데 이들이 동쪽의 갑옷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로 초원을 통해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뜻한다. 전 세계가 비슷한 수준의 갑옷을 입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왜 고조선과 수메르의 갑옷이 비슷하고, 히타이트와 동방의 갑옷이 비슷한 것일까? 바로 옆의 그리스와 로마나 이집트는 왜 이런 기술을 받지 못 했을까? 이들이 동방으로 이주를 한 것인가? 아니면 동방에서 서쪽으로 이주를 한 것인가?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동쪽이나 서쪽이 아닌 중앙인지도 모르겠다. 로마가 상대하던 페르시아는 그리스가 상대하던 페르시아와는 다른 것이다. 후대의 페르시아다. 파르티아는 파르사, 파사와 발음이 비슷하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이 부르던 명칭이다. 아마도 서쪽에서 시작된 문명이 초원 유목민을 통해서 동쪽으로 전파된 것 같다. 그것이 고조선 지역에 도달하고 중국과 한국으로 갈라진 것 같다.

 

 

 


 

 

 

제정 로마가 분열된다. 이를 다시 통합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고, 동서 로마를 분리하게 된다. 서로마는 기존 로마이고 동로마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다. 서로마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가 되고,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정교라는 종파로 분리 된다. 서로마는 흉노족에 의한 게르만족 이동으로 혼란한 상태에 빠졌고, 동로마는 여전히 무사했는데, 이 시대에는 동방에서 온 흉노족과 나중에 온 투르크 족에 의해 동부 유럽의 갑옷도 변한 것 같다. 동로마는 찰갑, 비늘 갑옷 형태의 갑옷을 하고 동방 민족에 대항했던 것 같다. 동방의 민족들이 이런 갑옷을 입고 싸우기 때문이다. 흉노는 한나라와 싸우던 종족이고, 투르크(돌궐)은 당나라와 싸우던 종족이다. 모두 고조선, 고구려 시대의 종족으로 고조선, 고구려 기병의 찰갑과 같은 계통의 갑옷을 하고 있다. 고로 찰갑이나 비늘 갑옷은 동양에서 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동서양 모두 판갑은 사라지게 된다. 원래 동방에는 흉노, 한, 고조선 3강이 있었다. 흉노가 한 나라와 싸운 후에 결국 굴복을 하고, 한 나라가 그 남은 힘으로 고조선을 멸망시킨다. 한 나라는 그 영향으로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고로 흉노는 한 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군사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고조선도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흉노가 동서로 갈라져서 서쪽 부족은 로마로 오게 되는데, 이들이 서로마와 동로마 모두에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서로마가 멸망하며 동로마도 조공을 바치게 된다. 고로 아마도 갑옷에 있어 흉노의 영향이 컸을 것 같다. 돌궐과 고구려의 갑옷을 보고 흉노의 갑옷을 추측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고조선의 갑옷도 이와 비슷했을지 모르겠다. 이후 동부 유럽은 동방 문화와 교류하거나 대적해야 하기 때문에 풍습이 동방적이다. 헝가리는 흉노의 피가 섞인 나라로 이들도 동방적인 색체가 강했을 것이다. 터키는 돌궐(투르크) 계열 인종이 섞이면서 동방적인 색체가 강했을 것이다. 이들과 싸웠을 비잔틴 제국도 같은 기술을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갑옷 형태가 추가된다. 솜을 누벼 만든 패딩 갑옷이란 것인데, 완충(쿠션) 역할을 하는 갑옷이다. 그런데 이것을 철판 뒤에 입지 않고 그 위에 입는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일까? 동방 갑옷을 보면 천이 갑옷 위에 보인다. 천이 찢어지지 않을까?(^^) 여하튼 동방의 갑옷은 역사가 정리 되지 않으니 여기서 그만 정리한다.

 

 

 


 

 

 

서유럽은 흉노의 침입 이후 여기에 밀린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게르만 화가 되는데, 이 게르만족들이 주로 입던 갑옷이 사슬 갑옷이다. 노르만은 바이킹 족속인데 혈통으로 보면 게르만과 다를 것도 없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이며, 언어도 서로 비슷한 계통이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서부 유럽은 모두 게르만과 노르만이 지배하게 된다. 고로 서유럽은 켈트, 게르만, 노르만 계통에서 온 사슬 갑옷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들이 비늘 갑옷이나 찰갑을 입지 않고 사슬 갑옷을 주로 입어서 관습이 그렇게 바뀌었다. 흉노족에 밀린 사람들이라서 군사 기술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 사슬 갑옷은 후대 동방에선 고려시대에도 보인다. 고로 동서양의 교류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몽고족에 의해서 서쪽의 사슬 갑옷은 동쪽으로 전해지고 동쪽의 화약은 서쪽으로 전해진 것 같다. 여하튼 이 시대 이후가 십자군 전쟁 시대이기 때문에 지중해는 거의 모두 쇠사슬 갑옷을 입는 형국이 된다. 동방에선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다. 이 시대 갑옷은 코트 형식으로 반팔에 무릎까지 오는 사슬 갑옷이라서 갑옷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어력이 낮다. 말 그대로 로마 시대의 갑옷 수준 그대로다. 칼로 베는 것은 막을 수 있는데, 창이나 화살을 막기는 어렵다. 칼로 찌르니 뚫린다. 속에 두꺼운 솜 옷을 입어도 창과 화살이 밀고 들어와 몸에 상처를 입는다. 고로 방패가 거의 필수적이었다. 1차 방어를 방패가 하고 그것이 뚫리면 2차 방어를 사슬 갑옷이 하는 것이다. 나중에 이 방패가 그대로 판갑으로 변해간다. 원래 게르만과 노르만은 북유럽에 살았다. 그 동쪽에 슬라브족이 살았다. 서유럽에는 켈트족이 살았다. 게르만족이 남하해서 동유럽에 살게 된다. 노르만은 계속 원래 자리에 남아서 바이킹의 선조가 된다. 이런 상황에 동쪽에서 흉노족과 그들이 지배하는 기마 유목민들이 들어온다. 서쪽으로 밀리는 게르만은 서유럽으로 침공해 들어간다. 켈트는 어디갔을까? 로마에 합병되어 로마인이 되거나, 영국으로 도망간다. 로마 영토였던 프랑스(켈트족)가 게르만 족인 프랑크족의 땅이 된다. 빈 동유럽은 슬라브족이 들어와 살게 된다. 이 상태에서 북쪽의 노르만 바이킹들이 유럽을 침략하는데 이들이 게르만에 이어서 서유럽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까 켈트, 게르만, 노르만 모두 사슬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서유럽은 사슬 갑옷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노르만이란 명칭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침투한 바이킹(덴마크인)에서 온 이름이다. 그래서 그 지역이 노라망디가 된 것이다. 원래 영국의 앵글로섹슨족도 이 덴마크 바로 아래 쪽에 살았었다. 이웃집 애들이었다. 영국과 서유럽의 원주민은 켈트족이다.

 

 

 

 


 

 

사슬 갑옷이 유명한 것은 십자군 전쟁 영화 때문일 것이다. 동유럽에서 동방까지 사슬 갑옷이나 판갑옷은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십자군 전쟁 때 참전을 한 사람들은 서유럽인들인 게르만/노르만족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통풍에 좋아서 더운 곳에서 입기는 좋지만 타격에 약하다. 방패로 몸을 보호했을 것이다. 또한 더운 지방이라서 태양열이 쇠인 갑옷에 그대로 전달되지 않도록 하얀 코트를 위에 입었다. 이것을 서코트라고 한다. 아랍 사람들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과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원래 게르만이나 노르만이나 그 뿌리가 같은데 게르만은 흉노에 밀려 서유럽으로 갔고, 나중에 노르만 바이킹이 유럽 여러 곳을 침입하여 세력을 잡으니 코 가리개가 있는 노르만 헬멧이 유행하게 된다. 그러니까 게르만 시대를 지나 노르만이 대세인 시대이다. 다시 말해서 게르만이 아닌 노르만이 왕이고 귀족인 시대이다.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도 노르만 계통이다. 이 시대에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가 활약하던 때인데 이들도 역시 쇠사슬 갑옷을 입고 있다. 물론 동방에는 그리스 동로마(비잔틴 제국)가 있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얼굴을 전부 가리는 투구가 등장한다. 헬름이나 헬멧이나 발음과 철자가 비슷하다. 하랄이나 헤롤드나 발음이 서로 비슷한 것처럼. 이 쇠사슬 갑옷은 강한 터키 활이나, 몽고 활을 막지 못 했을 것이다. 사슬 갑옷은 왠지 지저분해 보여서 야만인들의 갑옷 같은 느낌을 준다. 서양인들이 모두 이런 갑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유럽의 게르만(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계통과 동로마(비잔틴)의 그리스 계통으로 구분이 된다. 동로마는 동양풍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갑옷을 입었을 것이다. 서유럽의 십자군과, 같은 기독교 계통의 동유럽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고 보긴 어렵다. 왜냐하면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을 약탈하기도 했고, 동유럽 국가들이 약탈자 십자군을 처단하기도 했다. 동유럽은 동방의 기마 유목민들과 접해 있어서 여러 번 전투를 경험한 적 있고, 나름 평화를 유지하는 편이고, 서유럽만 아직 경험이 없어서 이런 무모한 전쟁을 한 것이 아닐까? 출발은 종교적 핑계이지만 사실은 농지가 없는 차남들이 영토를 얻기 위해 참전했다고 한다. 물론 진짜 종교적 광기로 참전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군인도 아니기 때문에 거의 전멸되거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이 시대 중동에서 많은 기독교 유물이 발견되어 유럽 교회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대 기술로 판명하여 보면 모두 중세에 만든 가짜들이다. 오히려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은 선진 아랍 문물을 접하게 된다. 게르만, 노르만인들이 비교적 야만인이고, 여기에 기독교가 세력을 잡게 되니 그리스, 로마의 학문이 힘을 못 쓰게 된 것 같고, 그런 이유로 서유럽이 또 다른 암흑기가 된 것 같다.(^^)

 

 

 


 

 

동서양의 역사를 정리할 때는 항상 그 옆의 기마 유목민들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 역사가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기마유목민들과의 전쟁을 알아야 한다. 여하튼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동방은 당나라의 시대),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동방은 몽고족의 시대), 쇠사슬 갑옷 위에 판갑을 보충해서 입는 형식이 생긴다. "코트 오브 플레이트(철판 코트)"나 "브리건딘"이란 것은 판갑과 찰갑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사슬 갑옷은 충격으로부터 보호에 약하기 때문에 판갑을 덧입은 것 같다. 동방처럼 그냥 차라리 찰갑을 만들어 입지 그랬을까? 대신 무게는 엄청 증가하게 된다. 여기서 단순히 판갑만 입은 것이 아니라 속에 사슬 갑옷을 입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는 동방에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점인데 동방에서도 사슬 갑옷 형태가 보인다. 재미 있다. 이 시대 전 세계를 지배하던 종족이 몽고족이다. 동에서 서로 화약이 넘어간다. 판갑이 다시 부활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사슬 갑옷 때문이 아닐까? 사슬 갑옷은 강한 몽고 활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터키 활도 같은 계통이다. 합성궁 계통으로 기마 유목민들이 갔던 곳에는 모두 남아 있다. 더구나 화살 촉이 탄소강이라면 무른 철은 쉽게 뚫린다. 고구려 시대에 탄소강을 만들었으니 이 시대에 그런 화살 촉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서양에선 무른 철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철판의 두께가 두꺼웠던 것이다. 판갑을 위에 입은 것을 보면 사슬 갑옷의 유연함이나 통풍을 포기한 것이 된다. 허리를 마음대로 굽히기 위해서 허리 위와 아래로 구분을 하여 흉갑을 만든다. 시야 확보를 위해서 얼굴 보호대는 착탈이 가능하게 된다. 팔과 다리까지 보호하는 판갑을 입는다. 다시 그리스 시대로 돌아간 것인가? 백병전을 해 보면 사슬 갑옷이 충격을 막아 주지 못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강이만 한 대 얻어 맞아도 뼈가 부러질 것 같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찰갑이나 비늘 갑옷을 만들어 입지 않고 판갑을 선택했을까? 찰갑/편갑/미늘갑옷을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완충 역할을 해 주는 두꺼운 솜옷이 필요하다. 사슬갑옷보다는 낫지만 역시 충격을 몸으로 흡수해야 한다. 판갑은 충격을 갑옷이 흡수하는 장점이 있다. 단지 강도가 약해서 화살에 뚫려서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마도 동방으로부터 철 다루는 기술이 서쪽으로 넘어간 것 같다. 탄소를 이용하게 되면 철을 스프링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 강도가 높아지면 얇게 만들 수 있어서 가볍게 만들 수 있게 된다. 휘어도 부러지지 않고 펴지는 스프링 칼, 돌처럼 단단한 화살촉, 얇지만 찢어지지 않는 갑옷 등이 가능하다. 그런 기술을 적용한다면 판갑 형태가 장점을 가질 수도 있다. 아마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터키의 강철 기술이 유럽인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닐까? 갑자기 무겁고 방어력도 약한 것으로 알려진 판갑이 부활하는 이유가 뭘까? 동방에선 계속 찰갑/편갑/린갑 형태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대, 즉 동양에선 화약 병기가 사용되는 그 시점에 서양에선 완전히 영화 속의 유럽 기사들의 갑옷이 등장한다. 정말로 판갑으로 온 몸을 가리는 디자인의 극치를 보여준다. 연구할 만한 갑옷이다. 이런 판갑의 방어력보다는 이런 것을 입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연구 대상이다. 이 전신 갑옷은 아마도 약 20kg정도 되었을 것이다. 강도 높은 철을 사용한다면 1mm 두께로 얇게 하더라도 이 정도 무게는 나온다. 가리지 못 하는 부분은 사슬 갑옷을 입었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같은 곳이다. 여하튼 백병전에는 유리하면서도 무척 불리하다. 유리함이란 갑옷의 방어력이고, 불리함이란 기동성이다. 아마도 돌격 기병 전술에서 사용했을 것 같다. 보병들은 이런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웃긴 점은 이런 갑옷이 사용되던 시대에 이런 갑옷을 뚫는 쇠뇌(십자궁/석궁)가 있었다. 이런 무기는 비겁하다 하여 교회에서 금지시켰다. 또한 영국은 장궁의 위력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잔다르크가 전쟁의 끝을 내지만! 장궁이 갑옷을 뚫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장궁을 기리기 위해서 현대 양궁이라는 스포츠를 만들었다. 유럽의 기사도는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제국에서 온 것이다. 원래 아랍 제국의 침공을 막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기사단을 창설한다. 프랑스 기사 팔라딘이란 이름이 여기서 나온다. 기사도가 처음 보인 것은 파르티아인데, 파르티아의 기마 궁술은 동방의 고구려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말 위에서 뒤로 활을 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기마 유목민들의 기마 궁술이다. 이란(파르티아), 한국(고구려/몽고), 헝가리(흉노), 터키(돌궐) 등에 기마 궁술 문화가 남아 있다. 공통 코드인 말, 합성궁, 기사도(봉건제)! 여하튼 이런 판갑이 가능한 것은 철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밀라노 양식은 철통 방어를 추구한 뻣뻣한 형식이라면, 독일 고딕 양식은 활동성을 추구한 실전 형식이라고 한다. 여하튼 사슬 갑옷이 보조가 되고 판갑이 주가 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럼 왜 판갑을 만들게 되었을까? 만약 판갑이 강도가 충분하다면 다른 갑옷이 주지 못하는 장점을 제공한다. 바로 충격과 압착에 대한 저항력이다. 다른 갑옷은 창과 활이 충돌하면 뒤로 밀리며 안에 입은 충격 흡수용 솜옷이 속도를 떨어뜨려서 방어를 하게 되어 있다. 아플 것 같다. 그런데 갑옷의 강도를 충분히 높일 수 있다면 갑옷이 바로 충격을 흡수하여 튕겨 낼 수 있다. 약간 스프링과 같은 재질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기술을 유럽이 개발해서 이런 판갑을 만들었다면 이런 갑옷을 만드는 것은 일리 있는 말이 된다. 이런 갑옷이라면 말 아래 깔려도 압사 당해서 죽지 않을 것이다. 철이 스프링과 같은 특징을 보이려면 탄소가 적당히 섞여야 한다. 탄소가 너무 많으면 주철인데, 주물로 만든다고 이렇게 부른다. 너무 단단해서 깨진다. 탄소가 너무 적으면 연철인데, 엿처럼 휜다. 적당하면 강철인데 스프링과 같다. 아마도 동방에서 탄소강을 처리하는 기술을 흡수한 것 같다. 동방의 탄소강 칼은 서양의 칼보다 단단했는데, 칼이나 갑옷이나 같은 기술로 제작했다고 본다면 서양은 탄소강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과거 서양의 바이킹 칼과 일본도를 대결시키면 서양 칼의 이빨이 다 빠진다. 오히려 후대에 나온 팬싱 검이 스프링과 비슷해서 일본도와 대결을 해도 비슷할 정도이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 이 시대에 유럽 금속 기술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럽 칼이 두껍다는 것은 쇠가 무르다는 뜻이다. 칼이 강하면 칼이 길어지고, 얇아진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과 갑옷을 만드는 기술은 같은 기술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판갑으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확실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갑옷을 입고 칼 싸움을 한다면 유리하긴 유리하겠다. 그렇다고 이런 갑옷을 뚫을 무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송곳이 달린 쇠몽둥이로 치면 구멍이 뚫린다. 갑옷은 항상, 결국 뚫린다.

 

 

 

 

 

십자군 시대부터 중세 갑옷까지 요약을 한 것이다. 십자군 시대에는 아랍인들과 싸움을 했었다. 주로 터키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몽고군이 들어온다. 13세기는 십자군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며 몽고군이 동유럽을 침공하던 시기이다. 몽고군이 상대한 갑옷은 쇠사슬 갑옷에 방패였을 것이다. 듣기로는 몽고군의 화살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탄 조끼로 두꺼운 철판으로 된 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몽고군의 활이나 터키군의 활이나 비슷할 것인데 알 수 없는 일이다. 14세기에 이런 갑옷 변화가 있는데 이 때 몽고는 초원으로 철수한 시점이라 대결할 일이 없었다. 동방의 원나라도 이 시대 망한다. 대결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두꺼운 갑옷을 뚫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하튼 몽고족의 활을 막기 위한 이유라면 아마도 서양에서 철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유럽의 철은 무른 편이었다. 칼이 몽둥이처럼 큰 이유이다. 동방의 칼과 갑옷이 더 단단한 편이었다. 이 시대의 갑옷과 무기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그렇게 단단한 쇠도 아니며 방어력이 높지도 않았다. 동양에선 이런 갑옷 없어도 나름 몽고군과 열심히 싸웠다. 결국 철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 유럽에 유입된 후에 판갑옷이 완성되게 된다. 더 얇지만 질기고 스프링처럼 탄력이 있어서 적당히 튕겨낼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갑옷이 완성된다. 물론 칼날도 그 정도로 단단해지겠지만! 15세기 갑옷은 몽고족의 활로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이 때의 몽고는 이미 망한 후다. 나는 고딕식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예쁘게 생겼다.(^^) 아무리 봐도 사슬 갑옷은 갑옷이 아니다. 어디 맞으면 아프겠다. 차라리 찰갑/편갑(조각 갑옷)이나 린갑(미늘/비늘 갑옷)을 입는 쪽이 덜 아프겠다. 여하튼 팔 다리 판갑으로 가리고 방탄 조끼 같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철판 코트)나 브리건딘 같은 것을 입으니 모양이 예쁘다. 하지만 속에 사슬 갑옷이 있으니 엄청 무겁다. 아마도 임시변통으로 급조해서 입은 갑옷 같다. 동양에선 왜 이런 판갑으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탄소강 기술이나 강철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화약무기나 활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런가? 갑옷에 투자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 같다. 아니면 기동성과 강한 공격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기마 전술을 가진 북방 유목 민족에게 많이 당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어도 이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조선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다. 그런데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 등은 모두 전부 기병인 그런 부대이다. 두꺼운 갑옷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이들은 싸움을 걸다가 불리하면 도망가고 유리하면 다시 와서 싸움을 거는 그런 전법이다. 두꺼운 갑옷으로 이들의 화살을 막아도 군대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이들의 공격을 막고 저지해야 하는데 발이 느리니 도망을 가도 잡을 수 없고, 공격을 해 와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갑옷에 투자하느니 차라리 강력한 원거리 공격 무기나 기동성 있는 말을 확보하는데 돈을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유럽에서 갑옷 만들고 있을 때 조선에선 화약 무기 개발하고 있었다. 고려가 용하게 거란군을 격퇴하였지만 결국 몽고군에 무너진다. 조선도 결국 여진족을 막지 못 했다. 그 좋은 화승총 개발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강한 공격력을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승총만 완성했다면 기병들의 시대는 끝이 났고, 갑옷의 시대도 끝이 났을 것이다. 임진왜란도 없었을 것이다.

 

 

 

 


 

 

동방의 조선 시대는 화승총의 시대다. 화승총은 조총과 같은 것이다. 머스킷 총과는 다르다. 불을 붙인 밧줄이 있어서 화승총이라고 부른다. 이런 불 붙은 밧줄이 없는 총은 머스킷 총이다. 이 시대는 동방에서 임진왜란이 있던 시대이다. 이미 화약 병기가 유럽과 동양에 퍼져 있던 때이다. 이런 때의 갑옷은 총탄을 막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선 파이크라는 장창 밀집 방어를 통해 기병의 돌격을 막고 화승총 사격을 통해 기병을 공격하는 전술이 유행했다. 조선에선 나중에 무예도보통지에서 장창과 방패수를 이용한 접전 기술을 중국에서 들여 오는데 역시 비슷한 것이다. 제일 앞은 방패로 막고, 그 다음이 장창으로 공격을 하고, 그 뒤에선 활이나 조총으로 사격을 할 수 있다. 일본에선 오다 노부나가가 유럽 전술과 비슷한 방식으로 다케다 신겐의 기병을 조총으로 물리치던 때이다. 여하튼 기병의 시대가 가고, 갑옷의 시대도 갔다. 총을 든 보병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시대 갑옷은 방탄이어야 했다. 물론 무른 납탄이라면 갑옷으로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청동이나 철로 된 탄환을 쏘면 전차의 두께가 아니고선 갑옷으로 절대 막을 수 없다. 전신 갑옷이 없어지고, 투구와 흉갑 형태만 남는다. 얇지만 스프링과 같은 튕겨 내는 탄소강이 아닌 좀 더 무른 철을 더욱 두껍게 하여서 휘어지면서 충격을 흡수하는 형태로 바뀐다. 고로 갑옷은 더 무겁다. 탄환은 튕겨 내는 것보다는 잡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리하여 두께가 3mm였다고 하니 그 무게가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투구와 흉갑만 남는 것도 이해가 간다. 또한 나중에 말을 타고 달리며 권총을 쏘는 그런 기병 전술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양식 궁기병 전술이다. 서양에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술이 없었는데 이 권총 때문에 역전을 하게 된 것이다. 기병이 사용하는 작은 총을 카빈이라고 부른다. 카빈 소총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장창 방진에 돌격을 하는 미친 기사는 없을 것이다. 대신 몽골 군의 전술처럼 접근해서 활이나 총을 쏘고 도망가는 방법이 적당할 것이다. 이 시대 동양 갑옷인 명/청 시대 갑옷, 조선 갑옷, 일본 갑옷도 총탄을 막아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 같다. 일본 갑옷은 한국의 삼국 시대로부터 별로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삼국의 갑옷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갑옷은 찰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북방 민족의 영향으로 갑옷이 많이 달라졌다. 북방 민족, 중국, 고려/조선의 갑옷은 디자인이 거의 비슷하다. 일본에서 조총(화승총)이라는 무기가 갑옷을 뚫지만 여전히 갑옷은 입고 전투를 했다. 백병전의 비중도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편전이란 활을 사용해서 갑옷을 뚫었는데 너무 활에만 집착하여 백병전을 준비하지 않아서 전쟁에 진다. 조선 시대 갑옷이 장군과 장교만 입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갑옷이 조총을 막기 위해서 입었던 것은 아니다. 병사들은 흉갑 정도만 입고 전투를 했었다. 아마도 요즘의 방탄 조끼 개념이 아닐까? 유럽 기사의 갑옷도 이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돈이 있는 전문 용병 보병들도 이런 흉갑은 착용했다고 한다. 보병 기병 모두 착용할 수 있었다. 여하튼 갑옷은 비싸다.(^^) 이 시대는 총탄 방어를 목적으로 휘어지는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서 기동성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상체만 덮었다. 양 손으로 긴 창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방탄 방패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체만 덮은 방탄 갑옷이 특징이다. 거기에 나중에 야포가 등장하니 기병도 소용 없고, 갑옷도 소용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기사가 유리하다가, 파이크 방진으로 기사의 돌격을 차단하니, 총기병이 등장해서 파이크 방진을 무너뜨리고, 다시 대포가 나와서 기병, 보병 모두가 접전과 갑옷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서 총과 포만 쏘게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드디어 대포와 머스킷 총의 시대가 되니 갑옷은 많이 단순해졌다. 총탄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해서 착용하게 된다. 이 시대는 멀리서 서로 쏘는 방식의 전투였기 때문에 오히려 기병 돌격에 약할 수 있는 허점이 있다. 총이나 대포를 쏘고 재장전을 하는 시간에 기병이 돌격을 해 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또한 돌격 기병을 총으로 저격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방진을 이룰 장창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세이버(기병의 군도)를 막을 갑옷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시 기병 돌격을 받으면 불리하다. 하지만 총검으로 방진을 만들어도 기병을 차단할 수 있다. 아마 그런 이유로 흉갑 기병이 다시 부활한 것 같다. 오직 투구와 갑옷만 입고 총탄 속으로 돌격하는 것이다. 말을 보면 마갑이 없지 않은가! 즉, 총탄을 막지 못 하니 갑옷을 없앴다는 말이 된다. 대신 기동성과 속도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상대와 거리가 100m라면 단 5초 정도면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전투란 가위 바위 보와 같다. 상대의 전술에 가장 적합한 것이 가장 강한 전술이 된다. 만약 이 시대에 총포를 막을 정도의 엄청 두꺼운 장갑을 입은 전차 기마 부대를 돌격 시켰다면 전투는 아주 쉽게 끝났을 것이다. 1차 대전 후에나 전차가 나오지만 말이다. 이 시대 갑옷은 방어 목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이 시대가 웃긴 것은 총검을 든 영국군이 방패와 칼을 든 스코틀랜드 군에게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니까 총포를 사용하지만 재장전이 느려서 백병전도 통했단 얘기다. 갑옷이 완전히 없어지기에는 어중간한 시대였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대체로 전신 갑옷은 돌격 기병들이나 귀족, 장군, 전문 군인 같은 특별한 층만 입었다. 일반 보병들은 전신 갑옷을 입지 않았다. 대체로 보병은 갑옷은 가볍게 입고 방패로 방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흉갑을 착용하기는 했어도 가벼운 천이나 가죽으로 된 편한 것을 입었다. 아무리 방어가 중요해도 그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행군을 하거나 백병전을 할 보병은 없을 것이다. 발이 가벼워야 도망 친다. 유럽 기사들의 전신 갑옷은 잠시 존재 했던 형태이다. 대부분의 시대에 투구, 흉갑, 방패의 조합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대에 흉갑은 천, 가죽, 쇠사슬 갑옷이었고, 판갑은 오히려 고대나 후대에 나타난다. 후대에 나타난 판갑은 강도가 높아져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총의 시대가 되니 보병들은 갑옷을 입지 않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을 보면 모두 줄을 서서 "날 쏘시오!" 하고 상체를 노출하는 황당한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총의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여하튼 기병들만 장식용으로 또는 돌격을 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 흉갑을 착용했다. 기사의 상징으로...(^^) 하지만 중남미를 침공한 유럽인들에게 이 갑옷은 매우 도움이 되었다. 아즈텍 인디언들의 공격을 총으로만 막았다면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백병전은 최후의 전투 방법이다. 백병전이 있다면 갑옷은 무용지물이 아니다. 총이나 활은 총알과 화살이 바닥나기 마련이니까!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영화를 보면 갑옷들이 마치 일본 갑옷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고 우리 고대 3국 시대 갑옷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진시황제 무덤의 토기 병사들 복장이 이 시대의 복장이다. 한 나라도 이 정도의 갑옷은 해 입었을 것이다. 모두 찰갑인 것을 알 수 있다. 한 나라 이후의 중국은 북방 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후대의 갑옷은 중국만의 갑옷이라고 하긴 어렵다. 유행의 차이는 있어도 동양에선 기본이 역시 판갑, 찰갑(편갑), 비늘갑(린갑), 사슬갑의 변형 조합이다. 동유럽부터 동쪽으로는 찰갑이나 비늘갑옷을 입었다. 아주 고대부터 그런 갑옷이었다. 나중에는 갑옷의 표면이 쇠가 아닌 천으로 바뀐다. 쇠를 옷 속에 숨기는 이유가 뭘까? 이 형식은 현대의 방탄 조끼와 같은 형식이다. 표면에 두꺼운 천이 있어서 총알을 잡고, 마지막에 철판이 총알을 최종 저지한다. 만약 철판이 가장 겉에 있으면 총알이 부서져 튕겨 나가면서 파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천이 제일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어떤 갑옷이 좋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갑옷을 만드는 철 기술이 바로 무기를 만들 때 이용되기 때문에 갑옷의 성능은 항상 공격 성능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전차의 포와 전차의 장갑의 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갑옷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갑옷을 뚫는 화살 촉이나 창촉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사람 힘으로 쏘는 활이 아니라 힘을 축적해서 쏘는 석궁(쇠뇌) 같은 경우는 더욱 강한 힘을 한 점에 쏟는다. 물리적으로 갑옷이 뚫리려면 갑옷보다 단단한 쇠로 송곳을 만들어서 어떤 기준 이상의 힘을 가해야 한다. 아무리 힘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송곳으로 그보다 단단한 바위를 뚫지 못 하듯이 약한 계란을 아무리 빨리 던져도 바위를 깨지 못 한다. 재료가 강해야 한다는 말이다. 총은 힘이 강하지만 총탄이 무른 납이라서 강도가 갑옷보다 약하다. 이 경우 갑옷이 총탄을 막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유럽에나 있던 일이다. 동양에선 납탄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흔히 철갑탄이라고 하는 것은 강철심을 가진 탄환을 말한다. 그래야 강철을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갑옷은 결국 뚫린다. 그리고 아무리 무른 철판이라도 힘이 너무 약하면 뚫지 못 한다. 고로 강한 힘이 필요하다. 활은 보통 20kg의 힘으로 당기지만, 두 손으로 당길수 있는 석궁이나, 특별히 훈련 받은 영국 장궁병은 40kg의 힘으로 활을 당긴다. 조선 편전의 경우 당기는 힘은 20kg 정도이지만 화살의 속도가 빨라서 관통력이 높다. 관통력에는 무게보다는 속도가 더 큰 영향을 준다. 만약 갑옷과 송곳의 철이 같은 강도라면 당연히 송곳이 유리하다. 갑옷은 얇고 송곳은 힘의 방향으로 길이가 길기 때문에 충격 지점에서 보면 엄청 두껍다. 거기에 모든 힘이 송곳의 끝에 집중된다. 고로 사람의 육체의 힘, 화약의 힘, 쇠의 강도 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두께의 갑옷을 설계해야 한다. 갑옷이 무거우면 기동성에 불리하고 백병전에 체력 소모가 많다. 더구나 체온 상승으로 체력을 저하시킨다. 논란이 있는 것이 중세의 유럽 기사의 전신 판갑과 석궁, 장궁, 편전, 총탄의 대결에 관한 얘기다. 조총에 철탄이나 청동 탄처럼 단단한 탄환을 사용하면 당연히 이런 갑옷을 뚫는다. 질문할 것도 없다. 현재 사용하는 총탄도 내부는 납이고 겉만 구리이다. 이런 탄환으로도 속도가 빨라서 중세 갑옷을 뚫는다. 철심이 박힌 철갑탄이면 당연히 뚫는다. 속도가 느린 순수한 납탄이라면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탄환은 갑옷을 뚫는 단단한 것이었다. 같은 일본군을 상대로 사용한 무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철갑탄을 사용한다. 권총 납탄을 막았다고 대단한 갑옷이라고 부르면 곤란하겠다. 총기병들끼리의 대결에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현대 방탄복도 보병 소총을 막지 못 하고 권총만 막는다. 그 정도로 총이 강하다. 문제는 활이 뚫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당기는 사람의 힘이 장사라면 활은 얼마든지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영국 장궁병이 프랑스 기사의 돌격을 저지해서 왕을 무사히 귀국시킨 이야기가 있다. 이 때의 활을 당기려면 한 팔로 40kg의 힘을 내야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당시 영국 화살촉은 프랑스 기병의 갑옷보다는 무른 쇠였기 때문에 갑옷을 뚫지 못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국이 프랑스보다 철 기술이 후진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100년 전쟁동안 영국이 프랑스를 압도하지 않는가! 몽고나 터키 기병이 사용했던 활도 강한 활로 알려져 있다. 물론 궁사의 팔 힘이 좋아야 한다. 조선의 편전도 갑옷을 뚫는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 강철 갑옷인데? 현재 양궁의 당기는 힘은 20~30kg 정도인데 이 활로 권총탄이 못 뚫는 방탄 유리를 뚫는다. 로마는 방패를 믿고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화살 공격에 전멸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갑옷과 방패는 반복 공격에 뚫렸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장갑차도 같은 곳에 반복 공격을 당하면 뚫린다. 전쟁의 승패를 갑옷이 결정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전략 전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든든한 갑옷이 있는데도 적이 공격해 온다면 이미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전쟁은 이겨 놓고 하는 것이라서 누군가 공격을 해 온다면, 분명 수비의 약점을 알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갑옷 기술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몽고군이 갑옷이 좋아서 세계를 지배했을까? 오히려 강한 활과 말의 기동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한중일 국가 간에 갑옷의 기술적 차이가 심각하게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공격 무기와 전술 등을 미리 잘 개발한 쪽이 이긴다. 허나 순수하게 과거 백병전을 하던 시대의 갑옷의 강도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유럽 기사의 전신 판갑이 가장 잘 만든 갑옷인 것 같다. 인간의 피부, 뼈, 근육, 인대를 보조하는 외골격 갑옷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 유럽 갑옷의 디자인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잠시 고대의 전투 방법을 보겠다. 먼저 칼로 쳐서 갑옷을 찢을 수 있느냐? 성경에 나오듯이 삼손이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의 갑옷을 찢을 수 있을까? 뼈가 청동보다 강한가? 강철 날을 가진 언월도(기병들의 세이버, 일본도와 같음)는 베기에 천하무적이나 갑옷을 찢을 수 있을까? 칼날의 강도와 휘두르는 힘과 갑옷의 강도와 두께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단언하기 어렵다. 만약 찢어지면 저런 갑옷을 왜 입겠는가! 만약 찢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칼을 무기로 사용하겠는가! 마치 모순(창과 방패) 논쟁 같다. 칼 외의 송곳이 달린 철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칼로는 찢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TV의 실험을 보니 강철로 된 투구는 청동 도끼로도 못 찢는다. 내가 볼 때 그 투구는 현대 스테인레스 강철로 만든 것 같다.(^^) 그리고 좀 두껍더라. 여하튼 단지 타격을 입어서 정신을 잃을 수는 있겠으나 찢을 수는 없었다. 즉, 칼로 베는 것이나 치는 것으로는 갑옷을 찢기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쇠사슬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으면 타격에 치명적이다. 실험에 의하면 두꺼운 쇠몽둥이 같은 칼로 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휩싸인다. 더구나 뾰족한 칼로 찌르면 쇠사슬 갑옷은 뚫린다. 화살과 투창도 못 막는 것으로 나온다. 뒤에 두꺼운 솜 옷을 입으면 막기는 막는데 약간 아프다. 피부에 약간의 구멍은 난다.(^^) 이런 갑옷을 왜 입는지 모르겠다. 이런 실험을 한 서양 사람들도 너무 약해서 놀랐던 것 같다. 또한 두꺼운 칼이 사실은 쇠가 물러서 그렇게 만든 것이고 오히려 동양이나 아랍의 칼이 더 작고 얇지만 날카롭고 강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사슬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항상 방패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알 것 같다. 판갑의 경우는 어떨까? 판갑은 타격과 압사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방패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통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판갑의 약점은 그 장점으로 인해 뚫리는 것이다. 판갑을 뚫기 위해서 동원하는 무기는 뾰족한 송곳이 박힌 쇠몽둥이다. 이것으로 치면 그 무게와 힘과 속도가 송곳에 몰리며 갑옷을 뚫는다. 실제 이런 무기로 치면 판갑에 구멍이 난다. 앞에 그림 중에 이런 무기가 있을 것이다. 이는 판갑이 충격을 흡수하지 않고 통으로 단단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찰갑이나 비늘 갑옷이라면 유연하여 구멍이 나지는 않겠지만 몸에 타격을 받게 된다. 갑옷은 적당히 타격에도 강해야 하고, 뚫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판갑처럼 너무 단단해도 안 되고, 사슬 갑옷처럼 너무 유연해도 안 된다. 신체의 구조를 보면 팔과 다리와 머리는 판갑 형태가 적당하고, 굽히고 돌리는 몸통의 허리는 유연한 비늘 갑옷이 적당하다. 그 뒤에 충격 흠수용 두꺼운 천옷을 입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는 찰갑이나 판갑이나 비늘 갑옷의 형태를 적당히 조합하는 것이 더 낫다. 가슴 부위와 골반 부위는 판갑으로 하고, 허리 부위는 비늘 갑옷 형태를 하는 조합형도 좋다. 이렇게 하면 유연함과 강함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찰갑보다 비늘 갑옷을 선택하는 이유는 더 유연하기 때문이다. 공격을 잘 막는 방법은 우리가 야구 공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약간 뒤로 밀리면서 속도를 저하시켜 멈추게 하는 것이다. 또는 표면을 매끄럽고 둥글게 만들어 튕겨 내는 경사 장갑의 효과를 노리는 것도 좋다. 정통으로 맞지만 않으면 옆으로 튕겨 내게 된다. 총탄을 막는 갑옷이 배가 볼록 튀어난 이유도 이와 같다.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 곡면을 주어 둥글게 만든다. 이미 강한 석궁이나 총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옷으로는 부족하고 차라리 방탄 방패를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낫다. 앞에 방탄 방패를 들고 돌격하거나 접근한 후에 근접하여 일단 투창을 던지거나, 석궁을 쏘거나, 총을 쏘고, 그 다음 칼을 뽑아 들고 마구 난도질을 하는 것이 더 낫겠다. 백병전에는 갑옷을 입은 쪽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뚫느냐 뚫리느냐 어느 쪽인지 판단할 수 있는 실험 내용이다.

 

영화에 보듯이 칼과 칼이 부딪혀서 칼이 부러질 수 있을까? 대답은 상대적이다. 정상적으로 잘 만들어진 현대적인 강철 칼로 싸울 경우 아무리 사람 힘이 강해도 칼은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의 딱딱하거나 무른 칼이라면 부러질 수도 있겠다. 서양의 얇은 펜싱 검이 나타난 것은 강철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얇은 칼로 싸워도 칼이 부러지지 않는다. 물론 갑옷을 입지 않은 상대를 빠른 속도로 처리할 때 사용한다. 갑옷을 입은 상대에겐 이런 칼은 무용지물이다. 여하튼 쇠는 사람 힘보다 강하다. 사람 힘으로는 쇠를 자르거나 뚫거나 부러뜨리기 힘들다는 것은 상식이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갑옷과 방패를 무우 자르듯 자르는 신기한 명검이나 보검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강도의 칼이 있어도 그렇게 자를 수 있는 팔 힘을 가진 사람이 없다. 삼국지의 관운장이 휘두른 언월도(초승달칼)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두 동강이 난다는 말은 아주 심한 거짓말이다. 키가 2m가 되면 자기 몸 다루기도 힘들다. 키가 190cm정도 되는 사람이라도 이런 힘은 불가능하다.

 

영화에 보면 서양 갑옷을 상대로 철퇴, 망치, 도끼, 쇠몽둥이 같은 것을 휘두른다. 삼국지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영화다. 찰갑이나 미늘갑을 입고 싸우던 고구려 벽화에도 도끼를 든 병사들이 있다. 이 말은 이런 갑옷들은 칼이나 창, 화살로는 뚫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달려 오는 기사를 활로 쏘아 맞추기도 힘들고, 맞아도 미끄러지거나 튕겨 낼 확률이 높다. 총탄과 철모의 관계와 비슷하다. 빗맞으면 뚫리지 않는다. 고로 접근한 기사를 잡는 방법은 돌격을 멈추게 한 후에 일단 미늘이 달린 창으로 기사를 잡아 당겨 땅에 떨어뜨린 후에 여러 보병이 달려가서 움직이지 못 하게 한 후에 도끼 병사가 때려 잡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본 적군들은 전투를 포기할 것이다. 당시에는 기사의 돌격이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이고 그 군대의 최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계도 상대적이다. 갑옷의 두께가 증가하면 그것을 뚫는 무기의 강도와 힘도 증가해야 한다. 전차와 전차를 뚫는 포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도끼로 뚫을 수 없을 때는 두꺼운 못이 달린 뭉둥이로 친다. 그러면 모든 힘이 송곳의 한 곳에 집중되면서 갑옷을 뚫게 된다. 갑옷을 뚫는 것은 송곳이다. 칼이나 도끼가 아니다. 석궁은 강력한 힘으로 송곳을 쏘는 무기라고 보면 된다. 물론 50m 미만의 근거리에서 적중률이 높다. 상당히 용감한 석궁병이 아니고선 기사에게 활을 날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의 속도는 사람의 2배 이상이다.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의 관계를 모순(창과 방패)이라고 부른다. 둘은 양립할 수 없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이긴다. 그래서 갑옷과 방패의 방어력과 갑옷을 뚫는 공격력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 갑옷이나 방패가 강하면 화살이 소용 없기 때문에 백병전을 해야 한다. 백병전에 강했던 것이 로마나 그리스이다. 이들은 활이나 기병보다는 보병에 전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갑옷에 집착했던 것이다. 당시 말은 안장과 등자가 없기 때문에 기마민족이 아니면 타기 어려웠다. 로마와 그리스는 농경 해양 문명이라 말을 키우는 문화가 아니다. 갑옷이나 방패가 약하다면 당연히 원거리 무기인 화살이 유용하다. 로마군을 전멸시킨 파르티아 기사법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전술이다. 활을 쏘고 발이 빠른 말을 이용해서 도망가면 로마군의 백병전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무수한 활을 쏘아서 로마군을 걸레로 만들었다. 이런 사건은 카이사르 시대 근처에 일어난 일이다. 기원 전후 쯤으로 우리나라 삼국이 건국 되던 시점이다. 이 전술은 기마민족의 전술로 계승 되었고, 고구려 벽화에도 나온다. 또한 후대에 나타난 총기병들의 전술도 이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모든 전차와 전투기는 이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 파르티아, 스키타이, 흉노는 모두 중앙 아시아 기마민족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고구려에 이 기술을 전달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보고 흉내를 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알렉산더 대왕이 살던 그리스 시대는 긴 창을 가진 병사들의 방진(사각형진)으로 상대를 밀어 붙이는 전술을 사용했다. 여기서 긴 창이란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보통 2m의 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손으로 사용해야 하는 3m~6m 정도의 긴 창을 말한다. 사람 키의 2배~3배 정도 되는 창이다. 이런 창으로 고슴도치 모양을 만들면 기병들도 접근할 수 없다. 당시는 전차와 기병을 혼용하던 때이다. 춘추전국 시대 말기 진시황제가 나타나던 때이다. 기병들은 안장도 없고 등자도 없이 말을 탔다. 고로 말 타는 기술이 아주 좋아야 기병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기병들은 안장과 등자가 없기 때문에 긴 창을 들 수 없었다. 보병이 긴 창을 사용하기 위해선 작은 방패를 들어야 하는 약점도 있다. 화살에 대해선 약점으로 작용한다. 이런 식의 백병전을 하던 때는 활이 약하고 방패가 강하던 시대로 백병전이 주요 전술이던 시대이다. 알렉산더는 이런 전술로 인도의 히말라야 근처까지 진군했다. 이 전술은 후대 유럽과 동양에서 부활한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이 사용하던 창이나, 이를 상대하던 명나라의 장창들이 그 예이다. 유럽의 기사 돌격을 막기 위한 보병들의 방진도 이것의 부활이다. 유럽의 스파이크 장창 부대가 이런 것이다. 창으로 돌격을 막고 화승총이나 석궁으로 저격하는 것이다. 화약 무기와 편전에 집착하던 조선의 입장에선 백병전이 어리석은 짓으로 보였을 것이니 백병전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총이나 활을 쏠 타임이 지난 후에 서로 엉키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강한 그리스가 만든 세계가 헬레니즘 시대인데, 이것을 정복한 것이 로마이다. 로마는 어떻게 이렇게 긴 창의 방진을 뚫을 수 있었을까? 로마나 그리스나 갑옷과 방패의 무장은 비슷하다. 짧은 단도도 서로 비슷하다. 그리스는 긴 창의 방진을 이루고 로마는 3열 횡대의 투창을 가진 부대이다. 이 때는 청동기 시대 말기로 강철이 나오기 전이라 칼이 두껍고 짧다. 잘 부러지기 때문이다. 고로 긴 칼보다는 긴 창을 만드는 것이 더 합리적인 기술일 것이다. 이 시대도 기원 전으로 한 나라가 시작 되던 그런 시대이다. 둘 다 백병전이 주요 전술이다. 당연히 그리스가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장창이 가진 불리한 점은 가까운 적을 찌를 수 없다는 것이고, 숲이나 좁은 지역에선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1대1의 대결에선 불리하다. 고슴도치 방진을 이루어야 유리하다. 고로 대열이 깨지거나, 좁은 곳에서 싸우거나, 이미 적이 창의 장벽을 뚫고 코 앞에 접근했다면 무용지물인 전술이다. 초반에 벌판에선 로마군단이 깨진다. 숲이나 언덕으로 도망을 갔을 때 이를 쫓던 그리스 군의 대열이 깨졌고 이런 지형에서 1대1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로마가 이길 수 있다. 그 전투 결과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구체적인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로마의 짧은 칼이 그리스의 긴 창을 이겼다. 로마의 전술은 접근했을 때 일단 투창을 던진다. 그리고 단검을 뽑아들고 백병전을 하는 것으로 이미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전법과 비슷하다. 양측의 무기 우열이 뚜렷하지 않아서 이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가위바위보와 비슷한 것이 전투이다. 백병전에 대비한 갑옷과 방패, 기동성을 살린 말, 적의 접근을 막는 긴 창, 원거리 공격을 하는 활, 이렇게 4가지의 무기 조합에 의해서 가위바위보게임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 아마 석기 시대엔 갑옷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활을 잘 쏘는 민족이 지배자였을 것이다. 방패가 활을 무용지물로 만든 후에는 방패와 창을 든 민족이 지배자였을 것이다. 이런 백병전을 하는 병사들에게 두려운 것은 기사의 돌격일 것이다. 기사의 돌격이 있기 전에 전차나 궁기병들이 먼저 나타났다. 등자와 안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등자와 안장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의 돌격이 왠지 무섭다. 사실은 말이 더 겁 많은 동물인데? 이를 막기 위해서 긴 창의 방진을 이룬다. 사실은 더 짧은 창으로도 말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겁만 주면 되기 때문에 갑자기 큰 소리만 내도 된다. 아니면 뱀 같은 물체를 말 얼굴에 던지는 방법도 있다. 이 긴 창의 방진은 짧은 단검의 백병전에 의해 당한다. 또한 기사의 돌격을 막은 긴 창의 방진을 활과 총을 쏘는 궁기병들이나 총기병들이 잡는다. 활과 총을 쏘는 궁기병들과 총기병들은 방패와 석궁, 장총을 든 보병들이 잡는다. 석궁, 장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은 돌격 기병과 백병전 보병에 약하다. 이런 이유로 조총을 사용할 때는 기병의 돌격을 막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여유가 없을 때는 앞에 장창 보병의 대열을 만든다. 적의 화살 공격이 있거나 근접 백병전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방패와 칼 또는 도끼를 든 부대도 함께 배치한다. 이런 식이다 보니 결국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것처럼 보병과 기병의 복합 부대를 이룬다. 이런 복합부대의 역사도 오래 되었다. 이미 기원전 중동지역에서 보인다.

 

비슷한 이야기로 현대 전차와 전차를 잡는 무기의 경쟁도 있었다. 전차의 장갑이 두꺼워지면 전차 엔진의 힘도 좋아야 기동성을 유지한다. 연료 소비량이 많아진다. 비슷하게 두꺼운 마갑과 갑옷을 입은 기병은 빨리 뛰지도 못 하고 오래 뛰지도 못 한다. 경마 기록을 보면 말이 전력 질주를 얼마 동안 할 수 있는지 나온다. 몽고 말은 10km 정도를 전력 질주한다. 100m 전력 질주를 100회 정도 할 수 있다. 그 도중에 죽는 말도 많다. 참고로 몽고 말은 야생 말과 다름 없다. 야생 말이 이 정도이니 집이나 군대에서 키우던 말은 더 약할 것이다. 계속 전차의 장갑이 너무 두꺼워지니 장갑을 뚫을 방법도 함께 연구하여 여러 포탄이 등장하며 포도 함께 커진다. 초기의 전차는 총탄을 막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장갑이 얇았다. 더 강한 포가 등장하자 더 두꺼운 장갑이 등장했고, 연료 소비는 많아졌다. 이는 석궁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적중률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병 1기를 여러 궁사가 저격 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볼 때 기사들의 싸움에선 바로 갑옷이 뚫려서 죽는 것보다는 타격에 정신을 잃은 후에 나중에 죽임을 당하는 경구가 더 많았을 것이다. 현대는 전투 헬리콥터가 미사일로 저격하여 전차를 잡거나 저고도 저속도 전투기가 텅스텐 총탄으로 전차를 잡는다. 전차가 전차를 상대할 때도 텅스텐 화살과 같은 포탄을 고속으로 날린다. 이는 총기병이나 궁기병의 전술과 비슷하다. 텅스텐 총탄은 탄소강 화살촉과 비슷한 개념이다. 갑옷보다는 강한 철이어야 한다. 기동성과 원거리 공격력의 결합이다. 전차는 장갑이 두꺼우면 상대적으로 느리고, 시야가 좁으며, 대공기능이 없다. 거기에 비해서 전투기나 헬리콥터는 매우 빠른 편이다. 보병과 기병의 차이에 해당된다. 고대 강한 활을 만드는 방법과 기마 전술은 군사 기밀이었다. 말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말의 속성을 알면 말의 돌격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당했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때는 사람 목숨이 오가는 군사기밀이었다. 활과 달리 석궁은 두 손으로 당길 수 있어서 힘이 2배나 강하고 조준할 때 힘을 쓸 필요가 없어서 강하고 정확하게 쏠 수 있었다. 뚫느냐 뚫리느냐의 싸움은 이 시대의 남녀관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영원한 경쟁 관계이다.

 

서양의 기사 갑옷을 보면 동양과 달리 팔, 다리, 얼굴도 덮었고, 목 부분을 몸통과 고정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백병전에 적합한 모양이다. 머리를 맞을 때 목이 꺾이는 것을 막아주고, 목을 칼로 쳐서 부러뜨리거나 자르는 일을 막아 준다. 이들은 활을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키지 않았다. 활을 포기하는 대신 백병전에 투자를 한 것이고 갑옷의 두께를 증가시켜서 적의 활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간 것 같다. 영국의 경우 주목이라는 자연산 스프링이 있어서 장궁을 만들었고, 유럽에선 강철을 이용한 석궁을 만들었다. 그 이전에 합성궁은 유럽에서 만들지 못 했던 것 같다. 합성궁은 만드는 법을 모르면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 갑옷을 보면 마치 현대 군인들처럼 방탄 조끼 같은 흉갑과 철모 같은 투구만 착용한다. 마치 백병전보다는 활을 쏘며 전쟁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동양은 기동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서양의 기사들 갑옷은 도망가지 않는 상황에서 1대1로 전투할 때 적합한 갑옷이다. 도망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갑옷에 의존해야 하고 그래서 갑옷에 그렇게 투자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전투 철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만 해도 대열을 짜고 벌판에서 전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유럽 기사들 같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유럽 기사 갑옷은 1대1의 싸움에 적합하다. 동양에선 매복 기습이 흔하고 기병 전술이 흔했기 때문에 동작이 편해야 하고 기동성이 좋아야 했다.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서 흉노와 같은 혈통의 말을 준비하고 갑옷을 버리고 기동성을 추구한 일이 있다. 도망가는 흉노의 병사들을 쫓기 위해선 갑옷을 가볍게 해야 했다. 경기병을 상대로 중무장한 돌격 기병의 전술이 먹힐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전통 때문인지 갑옷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하튼 유럽이나 동양 모두 일반 병사들은 가벼운 흉갑에 투구에 방패 정도만 들었을 뿐이다. 전신 갑옷은 장군, 기사(기병), 군관들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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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09 21:56

    첫댓글 흠냐... 두번쨰 갑옷 종류사진에서 왜 하필 예전걸 쓰셨나 싶네요. 2010년에 만든 것이 고증에 더 맞는 것인데 ㅜㅜ

  • 작성자 13.01.10 00:01

    요즘은 갑옷 제작 안하시나요? 방어력 갖춘 가죽찰갑을 보고 싶습니다...

  • 13.01.10 00:07

    뼈찰갑을 제작하고 싶으나 이런저런 일이 많네요. ^^;;;;

  • 13.01.10 03:21

    자료를 굉장히 많이 수집하셨고 지식도 많으신데 해석 면에서 얼핏얼핏 이상한 곳이 보이네요.ㅎㅎ;갑옷의 유사성은 굳이 히타이트로부터의 전파를 생각하시는 것은 좀 오류인것 같고 여러 곳에서 동시기에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염두해보시는게 괜찮을 것 같습니다.

  • 13.01.10 03:25

    갑옷 위에 걸쳐입는 겉옷같은 경우 아무래도 의례용이 아닐까 합니다. 일본에도 진바오리가 있고 카르헤 전투에서 보이는 파르티아 궁기병들의 쇼맨쉽도 그렇고, 투르크 계통 유목민이나 중국인들도 갑주 위에 겉옷을 걸친걸 보면 유럽이 좀 특이한 걸지도요.

  • 13.01.11 05:25

    이거 역덕들이나 무기와 방어구역사에 깡통인 사람들한텐 매우 좋겠는걸요? 근데 저거 다 맞는 말들인가요? 신빙성이 있음?
    근데 끝부분에 뜬금없는 색드립이..ㅋㅋㅋㅋㅋㅋㅋㅋ

  • 13.01.11 05:26

    아 스크랩 하믄 안되나염? ㅠㅡ

  • 13.01.30 02:04

    판갑- 플레이트 아머의 방어력에 대해서 좀 더 조사를 해보시는 것이 ^^ 갑옷의 완성형이라고 괜히 불리는게 아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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