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간 세관에서 근무하다 현재 관세사로 활동 중인 박모(58)씨는
요즘 쪽빛 물결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해변가의 그림 같은 집에서
골프와 수영,승마를 즐기며 보내는 '휴가 같은 황혼'의 단꿈에 젖어 있다.
박씨는 올 하반기에 한국생활을 접고
아내와 함께 필리핀 마닐라로 은퇴이민을 떠날 계획이다.
박씨가 생각하는 생활비는 월 170만~200만원.
이 돈은 매달 한국에서 송금되는 150만원의 연금과 부산에 있는
아파트에서 나오는 월세로 충당할 계획.
그는 전망 좋은 해안가 빌라를 임차한 뒤 가사 도우미와 운전사도 고용할 예정이다.
" 휴가를 받아 다녀온 필리핀 여행의 추억을 잊지 못해
아주 긴 휴가를 떠난다는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
최근 들어 풍요롭고 느긋한 황혼생활을 꿈꾸며
은퇴이민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자녀교육과 복지 혜택을 위해 한국보다 생활수준이 높고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선진국으로 향하는 '상향 이민'이 예전
추세였던 데 비해 적은 돈으로도 풍요로운 노년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동남아 등지로 떠나는 '황혼 엑소더스'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28일 부산 벡스코 컨벤션홀에서 열린 '해외유학·이민 박람회'에서는
바늘구멍 같은 국내 취업망을 뚫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떠나려는 젊은이들의
인파 속에 중년 부부들의 모습도 여럿 눈에 띄었다.
한 이민 업체 부스에서 만난 강모(48)씨는 사업과 노후 대비를
함께 고려한 절충형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소기업 기술직으로 근무하다 20년만에 퇴사한 강씨가 가진 돈은
예금과 전세금을 합쳐 1억원 가량. 고등학생 자녀들의 향후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할 나이다.
한국에서 별다른 직업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강씨가 선택한 곳은
남미의 에콰도르. 이 돈이면 현지에서 집을 구하고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도 자신의 사업체를 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영국식 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저렴한 사립학교가 많아 자녀교육에도
장점이 많다는 사실 또한 그가 이민을 결심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불었던 은퇴이민 바람이 한국에서 시작되면서
최근 부산지역에서도 박씨와 강씨처럼 은퇴이민을 문의해 오는 중년층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사전답사나 전문가 상담 등을 통해 현지의 언어와 문화 등에 대한
이해 없이 '장밋빛 환상'만으로 이민을 떠날 경우 현지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
고려이주개발공사 김진한 부산지사장은 "은퇴이민을 가려면 평생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탈 수 있는 안정된 소득원이 있어야 하고 이민 대상국가의 문화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함께 현지생활에 적응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부산일보 박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