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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사명대사는 종교와 엄한 계율을 뛰어 넘어서 국가의 위난을 구하고자 가사를 떨치고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서 삼도의 승병들에게 위난을 구할 것을 선도하고 왜군과 육지에서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그는 패배만 거듭하였던 조선 정규군과는 달리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승병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혼신을 다하여 국가를 구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던 것이다. |
▣사명대사(유정)▣
사명대사는 1544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부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 속성(俗姓)은 임(任)씨, 속명(俗名)은 응규(應圭)이다.
법명(法名)은 유정(惟政), 자(字)는 이환(離幻), 호(號)는 사명(四溟) 송운(松雲), 탑호(塔號)는 종봉(鐘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 유학을 배웠다. 7세에 사략(史略)을 배우고, 12세 맹자(孟子)를 배웠다.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고 1556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첫길을 걸었으니 당시 13세 때였다.
1561년 문정왕후의 배려로 시작된 불교의 선과(禪科: 지금의 국가시험)에 장원급제 했다.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사명대사(유정)와 스승 서산대사(휴정)와의 일화▣
14살에 어머니를 잃고, 연이어서 16살에 아버지를 잃고는 시묘(侍墓)살이를 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묘 앞에서 슬피 우는데, 지나던 스님이 와서는 “어린것이 효도가 지극 하구나” 라면서 목탁을 두드리고 극락장생을 빌어 준다.
“뉘신지요?! 물으니 말씀은 없으시고 목에 건 108염주 중 제일 큰 것 한 개와, 반야심경 금강경 한권씩을 주고는 휙 사라진다.시묘 살 이를 끝낸 응규는 할아버지가 아셨던 스님을 찾아가서 유정[惟政]이란 이름으로 중이 된다.
그로부터 20여년, 유정선사란 큰 스님으로 커서 묘향산에 큰 스님을 찾아 간다.묘향산 비로봉 엔 세 개의 암자가 있는데 맨 위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상암자에 계신다고 했다.
스님은 벽면대좌 하고 앉아서 돌아 다 보지도 않고는,
“응규 네가 왔구나, 유정선사가 되었지?!
그래 공부를 하러 왔구나” 하는 것이다.
유정선사는 깜작 놀란다.
시묘 살이 할 때 염주 한 알과 반야심경 금강경을 주고 간 그 스님이 서산대사란 말인가?!이름도 안 가리켜 드렸는데 아시고 유정이란 법명도 알고 게시다니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었다.
스님이 돌아앉자 유정선사는 세 번 절 올린다,
“네가 올 줄 알았느니라.”
염주 한 알은 잘 지니고 있으렸다‘ 우렁찬 목소리다.
여기서 유정선사는 사명[四溟]으로 법명이 바뀐다, 사명보다 24세가 높으셨다.
“갈 데가 있으니까 따라와라“ 하고 앞장을 선다.
사명과 다른 스님 둘이 서산대사를 따라서 어느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서산대가가 이제까지 다물었던 입을 연다.
“지리산은 웅장 하면서도 기묘함이 없고
금강산은 기묘 하면서도 웅장함이 없다.
구월산은 웅장 하지도 않고 기묘 하지도 않으며
묘향산은 기묘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느니라,
사람도 그러 한 것이다.”
그러고는 "여기가 단발령이로다.
7대 세조대왕이 와서 보고는 나도 머리 깎고 중이 되였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신하들이 ”만인의 어버이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사옵니까 거두어 주소서“ 하면서도 임금에 지엄하신 말씀이라 상투를 풀고 머리 몇 가닦을 잘났다 해서 단발령이 되었다 하느니라.
자 어서 가자.
그런데 그는 축지법을 쓰고 있는지 따라 갈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쫓아가면서 묻는다.
”대사님?! 대사님?! 아 어디로 그렇게 가시기 만 합니까?! 말씀 좀 하이소“
그러나 대사는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계신다.
- 사명대사 이종익 저 상권에 나오는 이야기
▣우리나라 천주교의 십자가를 가져오신 분은 바로 사명대사이다▣
이 땅에 최초로 천주교의 십자가를 들여온 사람은 신부도 아니요, 천주교 신자도 아닌 임진난(壬辰亂) 구국의 승장(僧將)인 사명대사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통치자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철병(撤兵)하였다. 그러나 피해국인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다시는 침략해오지 않는 강화조약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사신역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 왕과 조정대신들은 숙의 끝에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첫째, 일본국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승려인 사명대사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
둘째, 죽임을 당해도 배불숭유(排佛崇儒)의 나라에서 중하나 죽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사명대사는 왕과 조정대신의 속내를 환히 알면서도 일본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의 고위관리는 물론, 고승들과 문인들이 대거 환영인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명대사를 향해 “설보화상(說寶和尙)”을 연호했다. 설보화상이란 설보(說寶; 보배를 말하는), 화상(和尙: 스님)이라는 뜻이다.
사명대사가 무슨 보배를 말하여 일본 전국에 화제가 되었을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지휘하는 군(軍)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휘하는 군(軍)의 양군이 선봉부대로 침략해 왔다.
어느 날 사명대사가 조정의 내밀(內密)한 명을 받고 울산에 주둔한 가등청정을 만났다. 가등청정은 사명대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차에 사명대사를 만나게 되어 시험해보고 싶었다. 일본군들에게 창칼을 뽑아 좌우로 도열하게 하고, 그 중간으로 사명대사를 걸어오게 했다.
일본군들은 창칼을 뽑아들고, 죽일 듯이 사명대사를 무섭게 노려보게 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하로부터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보고를 접한 청정은 내심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며 경탄했다고 한다. 가등청정은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거친 음성으로 사명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선의 보배는 무엇이오?” 사명대사는 곧바로 답했다.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지요”
가등청정은 화를 내며, “내목이 왜 조선의 보배라는 말이오?” 사명대사는 큰소리로 답했다.
“장군의 목에 큰 상금이 걸려 온 조선 백성이 장군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어찌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가 아니겠소?”
일순간 가등청정은 화가 나 칼을 잡았으나, 금방 미소를 보이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면서, “내 목이 조선의 보배인줄 모르고, 대사에게 조선의 보배를 물었구려. 내가 어리석었소.”
가등청정은 군막(軍幕)이 떠나가라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사명대사도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의 내용을 들은 일본군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내용, 설보(說寶)의 이야기는 조선에 출병한 전 일본군의 웃음을 자아냈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히데요시도 배를 잡고 웃으면서 “청정이 졌다! 그 기백이 충천한 설보화상이 보고 싶구나.”
도꾸가와도 웃음을 터뜨렸다. 전 일본이 웃었다. 그 설보화상이 일본국에 도착했다니 조야(朝野)의 인사들이 앞 다투어 사명대사의 사인이 있는 시 한편을 받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일본 불교계의 고승들은 사명대사를 특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사명대사는 법문을 통해 조일(朝日)은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일본 불교계가 앞장 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도꾸가와의 장남은 사명대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성대하게 마련했다.
이로써 사명대사는 첫째 불침략(不侵略)의 강화조약을 맺고, 둘째, 일본군에게 약탈당한 조선의 보물과, 포로로 잡혀간 동포 3500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선조(宣祖)에게 복명하였으니 우리 역사에 사명대사 만한 외교성과를 얻은 분이 또 있을까?
사명대사가 도쿠가와를 만나러 왕궁에 갔을 때, 서양의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났다.
사명대사와 신부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사명대사는 자신의 목에 건 108염주를 신부에게 신표(信標)로 주었고, 신부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은제(銀製) 십자가를 신표로 건네주었다. 사명대사는 신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국길에 십자가를 소중히 가져왔다.
사명대사는 귀국했을 때 스승인 서산대사에게 천주교에 대해 보고 드리면서 은제 십자가를 서산대사에게 증정했다. 서산대사는 은제 십자가를 소중히 보관하다가 입적의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지품 일체를 지금의 해남군 대흥사로 보관할 것을 유촉했다.
왕은 대흥사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어필을 내려 서산, 사명, 뇌묵 등 임난의 구국 영웅들을 제향케 하고, 유물을 보존케 했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십자가도 이때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되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십자가는 은제 십자가는 대략 20cm 정도 된다. 그 때의 십자가는 지금은 도난당한 상태이다. 십자가는 어디로 갔을까? 이 땅에 사명대사의 손으로 들어왔고, 서산대사의 손에 소중히 간직되었던 십자가는 한국 천주교에 전해졌어야 했다. 그 십자가는 불교와 천주교와의 우의(友誼)의 표상이요, 천주교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사명대사는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였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적으로 해석하여 왕인 선조(宣祖)에 충성한 못된 호국불교를 했다고 세미나를 열어 사명대사에게 비난을 퍼붓는 세상이다. 과연 종북좌파 사상은 구국의 사명대사도 존재가치가 없는 것인가? 사명대사는 한국사회에 잊혀지고 있다. 비난받아야 할 역사속의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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