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본 장 19장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 가지 말은 본받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 때문에 붙이는 말이 있게 하니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 것이며 자기를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라.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无有. 此三言也, 以爲文未足. 故令之有所屬, 見素抱樸, 少私而寡欲.1)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无有 이 문장은 "성스러움을 끊는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는 과격한 발언 때문에 전통 사회의 지식인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앞글(18)에도 "대도가 사라지자 인의가 생겼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만큼 과격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노자』를 반유가(반묵가) 사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당연히 유교를 옹호하는 지식인의 반발도 거셌다. 유교와 관련없이 글 자체의 내용만 보더라도 이 문장에는 문제가 있다. 『노자』는 수십 번 성인을 이야기했지만 한번도 비판한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는 "성스러움〔聖〕을 끊는다"고 하였고, 바로 앞글에서 "육친이 불화하면서 효도와 자애로움이 생겼다"고 하여 효도·자애로움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래저래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초간문이 발견되고 난 후에는 또 다른 논의가 나오게 되었다. 초간문은 백서 갑·을본 및 통행본과 많이 다르고, 그 다른 부분이 기존의 논란을 많이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초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지혜를 끊고 분변함〔辯〕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거짓을 끊고 사악함을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2) 보다시피 초간문에는 문제가 되는 "성스러움을 끊는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는 구절이 없다. 초간문 정도라면 공자라고 해서 못할 이야기가 아니다. 요컨대 초간문에 기초한다면 이 문장에서 반유가(반묵가)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옛주 중에는 이 문장의 참뜻이 공자의 생각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극구 발명하려는 경우가 많았는데(육희성·소철 등) 그들이 초간문을 보았다면 그야말로 반색했을 것이다. 내용을 볼 때도 초간문은 상당히 매끄럽다. 구태여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바로 앞글에서 부정적으로 기술되었던 효도·자애로움이 이 글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3) 적어도 인·의를 버리는 것과 "다시 효도하고 자애하는 것(효도·자애로움을 회복하는 것)"4)의 연관 관계를 곡절스럽게 서술하지는 않아도 된다. 초간문을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거듭 강조하거니와 초간문은 아직 『노자』가 아니다. 초간문을 놓고 원래 『노자』가 어떠했다고 논의하는 것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노자』는 초간문 같은 원시 자료를 종합해서 편집된 책이고, 편집이 끝난 때부터 『노자』이기 때문이다. 초간문을 참고해서 『노자』의 모호한 문장을 옳게 이해하려는 것은 바람직하고도 당연한 시도이지만 그것으로 『노자』를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성스러움을 끊는다"든지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는 구절이 없는 원시 자료에 기초하면서도 정작 『노자』를 만들 때 누군가가 그런 구절을 넣었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노자』의 의도다. 초간문으로 『노자』를 변형시키면 이런 『노자』의 의도가 사라진다. 초간문은 언제나 참고할 따름이다. 현재까지 『노자』의 본래 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텍스트로 삼아야 할 가장 훌륭한 자료는 백서다. 백서가 바로 『노자』다. 따라서 초간문을 보면서 원래 "성스러움을 끊는다"든지 하는 구절이 없던 문장을 『노자』의 편집자가 이용하면서 지금처럼 만들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렇기 때문에 원래 『노자』에는 유가(묵가)의 윤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뜻이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원시 자료를 변형시키면서까지 『노자』가 성·인·의를 비판한 것은 유가·묵가를 겨냥한 것이다. 유가·묵가와 자신을 분명히 구별한다는 것이 이런 변형을 감행한 『노자』의 의도다. 앞글(18)의 해설에서 나는 이런 의도가 후발 주자로서 『노자』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현학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수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자』·『장자』도 그렇지만 『한비자』도 마찬가지다. 고요히 편안하게 거하는 것을 생각이 있다고 하고, 남을 해치고 이익을 좇는 것을 기민하다고 하고, 속이고 조급히 굴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하고, 먼저 남을 위하고 나중에 스스로를 위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같다고 호언하고 천하를 널리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성스럽다고 하고, 대사를 이야기하지만 실제와는 맞지 않아 쓸 수가 없고 행동은 세속과 다른 것을 대인(大人)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아랫사람에게 윗사람을 어지럽히도록 하여 나라를 다스리려는 것이다(「궤사」).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없애는 데 있으니 지혜와 기교가 없어지지 않으면 상도(常道)를 만들기 어렵다(「양권」). 이것은 사실 『노자』·『장자』·『한비자』의 일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직하학이 성립하고 4공자(신릉군·춘신군·평원군·맹상군)가 문객을 불러모으면서 이질적 집단 사이에서 사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 이래 나타나기 시작한 군소 학파의 주장에는 항상 이런 도전이 있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조류였다. 조금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노자』 역시 그런 조류에 동참했을 뿐이다. 게다가 가령 『노자』가 일찌감치 변법 노선을 채택해 관습적 예교를 개혁하고 전국시대의 패자로 부상하고 있었던 진나라에서 편집된 책이라면 유·묵에 대한 도전은 자유롭고도 활발했을 것이다. 가령 『노자』가 육예의 경전학(고)과 대비되는 제자학(금)의 상징으로 등장했다면 원시 자료를 가공하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사상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전통에 빚지고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본문에는 "지혜를 버린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잠깐 『노자』가 정말로 앎이나 지혜를 혐오했는가 생각해보자. 이 질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본문 외에도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들은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48)",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56)"는 말 등에 있다. 그렇지만 이미 해설했듯이 이것들이 반드시 앎과 지혜를 부정하는 말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해당 해설을 참고해보라(48장과 56장 해설 참조). 반면 『노자』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근거도 있다. 가령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다(33)",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47)"는 말 등이 그것이다. 이 구절에서 『노자』는 명석한 통찰력을 추구한다. 이 모순된 대답을 조화시키는 길은 『노자』가 참다운 앎과 진정한 지혜를 추구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노자』가 사이비 지식과 거짓된 지혜를 혐오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만큼 궁극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자』는 앎과 지혜를 무조건 혐오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앎과 지혜를 공격했을 뿐이다. '성스러움을 끊는다'라는 말은 『장자』 「거협」과 「재유」에도 그대로 나온다. 초간문에는 이런 구절이 없으므로 「거협」, 「재유」의 해당 글은 초간문 이후의 글임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말은 본받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此三言也, 以爲文未足 통행본에는 대개 '이 세 가지 것〔此三者〕'으로 되어 있지만 백서와 초간문은 모두 '이 세 가지 말'이다. 통행본에 따른다면 '세 가지'는 대체로 성스러움·지혜, 인·의, 기교·이익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백서처럼 되어 있을 때는 앞에 나온 세 가지 말, 곧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린다"는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두 번째 구절은 '문(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진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왕필·하상공 등: 이 세 가지 것은 글로는 뜻을 드러내기가(백성을 가르치기가) 충분하지 않다. 성현영: 이 세 가지 것은 법문으로 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여혜경·임희일 등: 이 세 가지 것은 문식에 불과하여 (천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초간문에서 이 글자()는 '문(文)'이 아니라 '변(辨)' 또는 '사(使)' 또는 '변(卞)'으로 읽는다. 정리조는 '변(辨)'으로 보았지만 '사'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고(황석전), '변(卞)'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위계붕). 정리조처럼 볼 경우에는 "이 세 가지 말은 분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해석된다. 곧 세 가지 말은 그 뜻이 미묘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일 경우에는 "이 세 가지 말은 백성들이 실천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위계붕은 "이 세 가지 말은 본받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사실 표현만 달랐지 뜻은 비슷하다. 성현영의 설명을 빌자면 이 글은 돈교(頓敎) 대승의 가르침이고, 상사(上士)가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치가 심원해서 하근기의 일반 사람을 가르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기존 해설 중에서는 성현영이 초간문의 뜻에 가장 근접한다. 위계붕은 백서의 '문(文)'도 역시 본받는다〔法度〕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일단 그에 따라 본문을 옮긴다. 그 때문에 붙이는 말이 있게 하니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을 것이며, 자기를 적게 하고 욕심을 줄여라 故令之有所屬, 見素抱樸, 少私而寡欲 '촉(屬)'은 붙인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바탕이 '소(素)'이고, 다듬지 않은 나무, 곧 통나무가 '박(樸)'이다. 왕진에 따르면 앞의 세 가지 말에는 '정언약반'의 의미가 있어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노자가 따로 말을 붙여서 행동의 지침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붙이는 말이 있게 한다." 성현영식으로 하면 상근기를 향한 가르침이므로 일반 수행자를 위해 따로 말을 붙였다는 것이다. "흰 바탕을 드러내고……" 이하의 글이 그 현실적 지침이다. 앞에서처럼 '끊고' '버리라'고 하지 않고 단지 '적게 하고' '줄여라'고 한 것은 자기나 욕심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는 현실 인식에 바탕한 발언이다(왕진). 『노자』의 과욕론은 이미 설명했다(다음 참조). 여기에서는 『장자』에 나오는 다음의 고사만 소개한다. 남월(南越)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건덕(建德)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 백성은 우매하고 질박하며, 자기 고집이 적고 욕심이 적어서〔少私而寡欲〕 일을 할 줄만 알지 쌓아두는 것은 모르고, 남에게 무엇을 주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의가 나아가는 곳도 모르고, 예가 가는 곳도 몰라서 미친 듯이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대도〔大方〕를 행하고 있으니 살아서는 즐겁고 죽어서는 묻힐 뿐입니다(「산목」). 지금 『노자』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이런 나라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없애는데 있으니 지혜와 기교가 없어지지 않으면 상도(常道)를 만들기 어렵다 ―『한비자』 「양권」 각주 1) * 갑·을본은 서로 일치한다. * 갑·을본으로 서로를 보완하여 완전한 문장을 얻을 수 있다. * 11구의 사(私)는 갑·을본 모두 지워져 있으므로 초간문으로 보완한다. * 이 글은 통행본과는 거의 같지만 초간문과는 완전히 다르다. * 배(倍)는 부(負: 이하 갑본), 효자(孝慈)는 축자(畜玆)·효자(孝玆: 을본)의 본 글자이므로 모두 이렇게 고친다. 2) "絶智弃辯, 民利百倍, 絶巧弃利, 盜賊亡有, 絶僞弃詐, 民復孝慈."『곽점초묘죽간』에 의거하여 통용되는 글자로 바꾼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고증에 논란이 있다. 특히 '사(詐)'는 곽점 초간문 독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구석규가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려(慮)'로 바꾸었다. 그러면 해석도 "……거짓을 끊고 생각을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할 것이다"로 바뀌게 된다. 곽기 참조. 3) 초간문의 '효자(孝慈)'는 원래 '계자(季子)'이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 '적자(赤子)'와 같은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효·자에 대한 모순적 서술도 『노자』에서 사라진다. 목적이 앞선 주장이기는 하지만 참고할 수는 있겠다. 곽기 참조. 4) 본문의 '부(復)'는 '복(復)'으로 읽을 수도 있다(범응원). 의미는 같다. |